마키노 노부시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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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키노 노부시게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이다. 마키노 야스나리의 아들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협력하여 후다이 다이묘로 성장했다. 1599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으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며 오반가시라, 고쇼조의 반토, 오쇼인 반토 등을 역임했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간에이 연간에 영지를 넓혀 1644년 시모사 세키야도 1만 7000석 영주가 되었으며, 1647년 은거 후 165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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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마키노 한에몬 야스나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59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독을 상속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며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오반가시라, 고쇼조 반토 등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영지를 가증받아 간에이 10년(1633년)에는 1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쇼호 원년(1644년)에는 시모사 세키야도 1만 7000석으로 이봉되었다. 쇼호 4년(1647년) 차남 마키노 치카나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케이안 3년(1650년) 73세로 사망했다. 묘지는 사이타마현 고노스시 혼초의 쇼간지에 있다.
2. 1. 가계와 출신
마키노 한에몬 야스나리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오가사와라 야스쓰구의 딸이다. 우시쿠보성 성주였던 미카와 마키노 씨의 기병 마키노 산시로노카미의 직계 후손에 해당한다.아버지 마키노 야스나리는 본가인 우시쿠보 마키노 씨가 스루가국과 토토미국의 센고쿠 다이묘였던 이마가와 씨를 버리고 오카자키성 성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속하는 것을 주저하던 시기에, 가장 먼저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시도한 인물로 여겨진다. 본래 구니진 영주 마키노 씨의 서류(분가) 중 하나에 불과했던 마키노 산시로노카미 사다나리(조부)・야스나리(부)・노부시게(본인) 3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에야스의 깊은 신임을 얻었고, 결국 후다이 다이묘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버지 야스나리는 제2차 우에다 전투에 참전하고 후에 오고성 성주가 된 마키노 우마노스케 야스나리와는 동명이인이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노부시게의 가계를 '마키노 산시로노카미 일족'이라고 구분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1599년 아버지 야스나리가 사망하면서 노부시게가 가독을 상속하기 전까지, 이 가문의 영지는 무사시국 아다치군 이시도(현재 사이타마현 아게오시 북서부에서 고노스시 남서부에 걸친 지역)였다. 영지 내의 가와다야(현재 오케가와시 가와다야)에는 진야가 설치되어 있었다.
정실은 도리이 다다마사의 양녀(토키 사다마사의 딸)이며, 계실은 이코마 미쓰마사의 딸이다. 자녀는 다음과 같다.
관위는 부젠노카미(豊前守)이다.
2. 2. 초기 활동과 이에야스와의 관계
마키노 한에몬 야스나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본래 우시쿠보성 성주 마키노 씨의 가신이었으나, 아버지 야스나리 대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 주군이던 우시쿠보 마키노 씨가 스루가국과 토토미국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씨를 떠나 오카자키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귀순하는 것을 망설일 때, 야스나리는 가장 먼저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내부에서 귀순을 추진한 것으로 여겨진다.본래 구니진 영주 마키노 씨의 여러 분가 중 하나에 불과했던 마키노 산시로노카미 사다나리-야스나리-노부시게 3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에야스의 깊은 신임을 얻게 되었고, 이는 훗날 후다이 다이묘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노부시게의 아버지 야스나리(마키노 한에몬 야스나리)는 제2차 우에다 전투에 참전하고 후에 오고성 성주가 된 마키노 우마노스케 야스나리와는 다른 인물이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노부시게의 가계는 보통 '마키노 산시로노카미 일족'으로 지칭된다.
게이초 4년(1599년), 아버지 야스나리가 사망하자 노부시게가 가문을 계승했다. 당시 그의 영지는 무사시국 아다치군 이시도(현재 사이타마현 아게오시 북서부에서 고노스시 남서부에 걸친 지역)였으며, 영지 내 가와다야(현재 오케가와시 가와다야)에 진야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게이초 5년(1600년)에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본진에 소속되어 참전했다. 전투 이후에는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며 경력을 쌓았다. 게이초 11년(1606년)에는 오반가시라(大番頭)에 임명되었고, 게이초 15년(1610년)에는 고쇼조(御小姓組)의 반토(番頭, 지휘관)가 되었다. 이어 게이초 19년(1614년)에는 오쇼인(御書院) 반토로 승진했다.
같은 해 겨울부터 시작된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후시미성의 수비를 담당했으며, 다음 해인 1615년의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오사카성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이때 대포를 이용하여 오사카성의 야구라를 파괴하는 공적을 세워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정권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을 증명했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서의 활약
게이초 5년(1600년)에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본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전투 이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며 경력을 쌓았다. 게이초 11년(1606년)에는 오반가시라(大番頭)에 임명되었고, 게이초 15년(1610년)에는 고쇼조 반토(御書院番頭), 게이초 19년(1614년)에는 오쇼인 반토(大書院番頭)가 되었다.같은 해인 게이초 19년(1614년) 겨울부터 시작된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후시미성 수비를 담당했다. 이듬해 벌어진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오사카성 공격에 참가하여, 대포를 이용해 성의 야구라를 파괴하는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간에이 3년(1626년)에는 2,000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2. 4. 다이묘로서의 활동과 말년
게이초 5년(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본전에 참가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기며 게이초 11년(1606년)에는 오반가시라에, 게이초 15년(1610년)에는 고쇼조의 반토(番頭, 번의 우두머리)에 임명되었다. 게이초 19년(1614년)에는 오쇼인(御書院) 반토가 되었다.같은 해 겨울부터 시작된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후시미성 수비를 맡았고, 이듬해 여름의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는 오사카성 공격에 참가하여 대포로 성의 야구라를 파괴하는 공적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으로 간에이 3년(1626년)에는 2000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간에이 9년(1632년),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모반 혐의로 유배된 다카사키성으로 가서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간에이 10년(1633년)에는 4000석이 추가로 가증되어 총 1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쇼호 원년(1644년)에는 시모사 세키야도 1만 7000석으로 영지가 늘어나면서 이봉되었다.
쇼호 4년(1647년), 병을 이유로 차남 마키노 치카나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케이안 3년(1650년) 4월 11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호법명은 清耀院鉄心知剣|세이요인 텟신 치켄일본어이며, 묘지는 사이타마현 고노스시 혼초에 위치한 쇼간지이다.
3. 평가 및 관련 정보
마키노 노부시게의 가계 및 생애와 관련된 인물, 그리고 그의 영지 및 활동 지역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루고 있다.
3. 1. 관련 인물
아버지는 마키노 한에몬 야스나리이며, 노부시게는 그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오가사와라 야스쓰구의 딸이다. 노부시게의 가문은 우시쿠보성 성주였던 마키노 씨의 기병 마키노 산시로노카미의 직계 후손이다. 그의 조상인 마키노 산시로노카미 사다나리, 야스나리, 그리고 노부시게 본인까지 3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어 후다이 다이묘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미카와의 구니진 영주였던 우시쿠보 마키노 씨 본가가 이마가와 씨를 따를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를지 망설일 때, 마키노 야스나리(이시도 영주)가 가장 먼저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협력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정실은 도리이 다다마사의 양녀(토키 사다마사의 딸)이며, 이후 이코마 미쓰마사의 딸을 계실로 맞이했다.
노부시게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 또한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유죄 판결을 받고 다카사키성에 유폐되었을 때,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편, 노부시게의 아버지인 마키노 야스나리(이시도 영주)는 제2차 우에다 전투에 참전하고 이후 오고성 성주가 된 마키노 우마노스케 야스나리와는 동명이인이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때문에 노부시게의 가계는 '마키노 산시로노카미의 일족'이라고 별도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3. 2. 관련 지역
마키노 노부시게는 미카와 우시쿠보성 성주였던 마키노 씨 가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마키노 야스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카자키성 성주였을 때 초기부터 협력한 인물로 여겨진다. 노부시게의 초기 영지는 무사시국 아다치군 이시도(현재의 사이타마현 아게오시 북서부에서 고노스시 남서부에 걸친 지역)였으며, 영지 내 가와다야(현재의 오케가와시 가와다야)에 진야를 두었다.오사카 전투에서는 후시미성 수비(겨울의 진)와 오사카성 공격(여름의 진)에 참여했다. 간에이 9년(1632년)에는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유배된 다카사키성으로 가서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쇼호 원년(1644년)에는 시모사 세키야도로 영지가 늘어나 옮겨갔다. 그의 묘소는 사이타마현 고노스시 혼초에 위치한 쇼간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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