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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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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6세의 장남으로, 동로마 내전 중 아버지 요안니스 6세를 지지하여 트라키아를 영지로 받았고, 1353년에는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모레아로 보내져 통치했으며, 1383년 사망했다. 그는 문화인이었으며 신학 관련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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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
기본 정보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 황제의 동전
칭호동로마 황제
즉위1353년 4월
퇴위1357년 12월
선임 황제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후임 황제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모레아스 전제공reign1: 1380년 - 1381년
선임 모레아스 전제공마누일 칸타쿠제노스
후임 모레아스 전제공디미트리오스 1세 칸타쿠제노스
배우자이리니 팔레올로기나
자녀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
디미트리오스 1세 칸타쿠제노스
테오도라 칸타쿠제네
엘레나 칸타쿠제네
마리아 칸타쿠제네
테오도로스 칸타쿠제노스 (?)
가문칸타쿠제노스 가문
아버지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어머니이리니 아사니나
출생일1325년경
사망일1383년 6월
이름
그리스어Ματθαίος Ασάνης Καντακουζηνός
로마자 표기Matthaios Asanes Kantakouzenos

2. 생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이리니 아사니나의 장남인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는 1341년 내전에서 아버지를 지원한 대가로 1347년 트라키아 일부를 영지로 받았다. 1353년 요안니스 5세와 다시 내전이 발발하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1]

그라티네를 중심으로 한 트라키아 영지에서 세르비아 제국에 대한 여러 전쟁을 주도했지만, 1350년 오스만 제국 지원군들의 탈주로 공격이 좌절되었다. 1356년 말이나 1357년 초, 드라마의 보이흐나가 이끄는 세르비아 군대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2] 요안니스 5세는 보이흐나에게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여 마테오스를 넘겨받았고, 테네도스와 레스보스에 감금했다.[2]

1357년 12월, 마테오스는 강제로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퇴위했으며, 1361년 모레아로 보내져 형제 마누일 칸타쿠지노스와 합류했다.[3] 1380년 마누일이 사망하자 마테오스가 모레아를 통치했고, 1381년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되어 1382년 도착할 때까지 통치했다. 칸타쿠지노스가에서 팔라이올로고스가로 권력이 넘어가기 전, 마테오스는 아들 디미트리오스 1세 칸타쿠지노스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1]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문화인으로, 신학 관련 저작을 남겼으며, 그에게 보내졌다고 여겨지는 몇몇 문화인의 서신도 현존한다.[3]

2. 1. 초기 생애와 가족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이리니 아사니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1341년 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 디미트리오스 전제공의 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했다.[3]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의 가족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동로마 제국의 황제
어머니이리니 아사니나
배우자이리니 팔레올로기나디미트리오스 전제공의 딸
형제마누일모레아 전제공


2. 2. 동로마 내전과 공동 황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이리니 아사니나의 장남인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와의 내전에서 아버지를 지원한 대가로 1347년 트라키아 일부를 영지로 받았다. 1353년 요안니스 5세와 다시 내전이 발발하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1]

그라티네를 중심으로 한 트라키아 영지에서 마테오스는 세르비아 제국에 대한 여러 전쟁을 주도했다. 1350년에 준비한 공격은 오스만 제국 지원군들의 탈주로 좌절되었다. 5000명의 튀르크인들과 함께 세르비아 - 동로마 국경을 따라 옛 영토를 재건하려 했지만 세레스 점령에 실패했고, 1356년 말이나 1357년 초 드라마의 주인 보이흐나가 이끄는 세르비아 군대에게 패배했다.[2] 세르비아인들은 마테오스를 몸값을 받고 석방하려 했지만,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요안니스 5세는 보이흐나에게 마테오스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더 많은 금액을 제안했다.[2]

테네도스에 마테오스를 투옥한 후, 프란체스코 1세 가틸루시오의 감시 아래 레스보스에 가둔 요안니스 5세는 그를 강제로 황제 칭호를 포기하게 하고 1361년 모레아로 보내져, 그곳에서 통치하고 있던 그의 형제 마누일 칸타쿠지노스와 합류하게 했다. [2]

1341년 초, 마테오스는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 디미트리오스 전제공의 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했다. 같은 해 후반, 내란이 발생하자 황제 선언을 한 아버지 요안니스 6세의 군단에 동생 마누일과 함께 동행했다. 마케도니아 지방 서부에 파견된 동생과 달리, 그는 트라키아 지방에서의 작전에 종사, 1343년에 쿰치니(현 코모티니)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3]

1347년에 아버지 요안니스가 내란에서 승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통 황제가 되었다. 같은 해, 아드리아노플과 주변 지역의 행정권을 위임받았다. 1350년에 테살로니키에 파견된 의형제이자 장래의 경쟁 상대가 될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요안니스 5세)와 함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은 요안니스 6세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3]

아드리아노플에서 불안정한 지위에 머물던 마테오스와, 정통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황제이면서 멀리 떨어진 테살로니키에 머물러 있던 요안니스 5세는 각각 불만을 품게 되었고, 1352년에는 마침내 후자인 요안니스 6세에 대한 반역 형태로 내란이 재개되었다. 마테오스는 아버지를 지원하는 측에 섰고, 양측은 트라키아 지방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싸웠다.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군주 오르한 (마테오스에게는 요안니스 5세와 마찬가지로 의형제의 관계였다)의 지원을 받은 칸타쿠지노스파의 승리로 끝나, 요안니스 5세는 일시적으로 국외 망명을 해야 했다.[3]

강력한 경쟁 상대였던 팔레올로고스 가문을 제거한 요안니스 6세에 의해, 마테오스는 정식으로 공동 황제·후계자로 옹립되었다. 그는 1353년 4월, 총대주교 필로테오스 1세 코키노스에 의해 대관을 받았다.[3]

그러나, 과도하게 튀르크인의 힘에 의존한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승리는 국민에게 불안을 주었고, 또한 수도 시민은 정통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배척에 분개했기 때문에,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지배는 흔들렸고, 요안니스 5세는 13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같은 해 12월 9일에는 요안니스 6세를 폐위시키는 데 성공했다.[3]

하지만 마테오스는 여전히 아드리아노플에서 세력을 유지하며, 다음 해 1355년에 다시 트라키아에서 싸웠다. 이 싸움은 결판이 나지 않았지만, 마테오스 진영에서는 이탈자가 잇따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테오스는 인접한 동 마케도니아의 세르비아인 영주와 소규모 전투를 벌이다가 필리피시 근교에서 포로가 되었다(1356년). 요안니스 5세는 몸값을 지불하여 그의 신병을 받아, 정중하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왔다. 1357년 12월, 그는 퇴위 선언을 하고 황제의 지위와 의상을 정식으로 포기하고, 다시 "황제 다음의 지위"로 돌아갔다. 또한 이때,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의 장남 요안니스에게 전제공의, 차남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에게 존엄공의 칭호를 수여했다. 칸타쿠지노스 가문에 의한 황제권 획득 시도는 마테오스의 퇴위로 종료되었다. 하지만 마테오스는 일반적으로 퇴위 후에도 "황제"로 계속 불리고 있었다는 것이 동시대 서신에서 밝혀졌다.[3]

2. 3. 세르비아와의 전쟁과 패배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이리니 아사니나의 장남인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와의 싸움에서 아버지를 지원한 대가로 1347년 요안니스 6세에게 트라키아의 일부를 영지로 받았다. 1353년 요안니스 5세와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라티네를 중심으로 한 트라키아 영토에서 마테오스는 세르비아 제국에 대한 여러 전쟁을 주도했다. 그가 1350년에 준비한 공격은 오스만 제국 지원군들의 탈주로 좌절되었다. 5000명의 튀르크인들과 함께 그는 세르비아 - 동로마 국경을 따라 그의 옛 영토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시도했지만 세레스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고, 곧 1356년 말이나 1357년 초에 인근의 주요 요새인 드라마의 주인 보이흐나가 이끄는 세르비아 군대에게 패배했다.[2] 세르비아인들은 마테오스를 몸값을 받고 석방할 의도로 붙잡았지만,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빠르게 움직였다. 요안니스 5세는 보이흐나에게 마테오스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제안했다.[2]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를 테네도스에 투옥한 후, 프란체스코 1세 가틸루시오의 감시 아래 레스보스에 가두었다. 이후 요안니스 5세는 그를 강제로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도록 한 후, 1361년 모레아로 보내져 그곳에서 통치하고 있던 그의 형제 마누일 칸타쿠지노스와 합류하였다.[2]

2. 4. 투옥과 황제 칭호 포기

요안니스 6세와의 내전에서 패배한 후, 마테오스는 세르비아 군대에 포로로 잡혔다. 1356년 말이나 1357년 초, 드라마의 영주였던 보이보다 보이지나는 마테오스를 사로잡아 몸값을 요구했다. 그러나 마테오스의 영토를 차지하려던 요안니스 5세는 보이지나에게 더 큰 금액을 제시하며 마테오스를 넘겨받았다.[3]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를 테네도스에 투옥한 후, 프란체스코 1세 가틸루시오의 감시 하에 레스보스에 가두었다. 결국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를 강제로 황제 칭호를 포기하게 했으며, 1357년 12월 마테오스는 퇴위 선언을 하고 황제의 지위와 의상을 정식으로 포기했다. 다시 "황제 다음의 지위"로 돌아간 마테오스에게 요안니스 5세는 그의 장남 요안니스에게 전제공의, 차남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에게 존엄공의 칭호를 수여했다. 1361년,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를 모레아로 보내 그의 형제 마누일 칸타쿠지노스와 합류하게 했다.[3]

2. 5. 모레아 통치와 사망

요안니스 6세와 이리니 아사니나의 장남인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와의 내전에서 아버지를 지원한 대가로 1347년 트라키아 일부를 영지로 받았다. 1353년 요안니스 5세와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1]

그라티네를 중심으로 한 트라키아 영토에서 마테오스는 세르비아 제국에 대한 여러 전쟁을 주도했다. 1350년에 준비한 공격은 오스만 제국 지원군들의 탈주로 좌절되었다. 5000명의 튀르크인들과 함께 세르비아-동로마 국경을 따라 그의 옛 영토를 다시 재건하려 했지만 세레스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고, 1356년 말이나 1357년 초 드라마의 보이흐나에게 패배했다.[1] 세르비아인들은 마테오스를 몸값을 받고 석방할 의도로 붙잡았으나,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며 마테오스를 넘겨받았다.[1]

테네도스와 레스보스에 감금된 후, 요안니스 5세는 마테오스를 강제로 황제 칭호를 포기하게 하고 1361년 모레아로 보냈다.[1] 그곳에서 그는 형제 마누일 칸타쿠지노스와 합류하여 통치했다. 1380년 마누엘이 사망한 후, 마테오스는 1381년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가 임명되고 1382년 도착할 때까지 모레아를 통치했다. 칸타쿠지노스가에서 팔라이올로고스가로 권력이 넘어가기 전, 마테오스는 아들 디미트리오스 1세 칸타쿠지노스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1]

3. 가족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는 1341년 초 테살로니키에서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2]

3. 1. 자녀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는 1341년 초 테살로니키에서 결혼한 아내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4][2]

이름설명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데스포티스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세바스토크라토르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엘레니 아사니나 칸타쿠지니살로나 백작 루이스 파드리케와 결혼
마리아 칸타쿠지니요안니스 라스카리스 칼로페로스와 결혼
테오도로스 칸타쿠지노스주프랑스 베니스 대사[5][3] (아마도)


참조

[1] 서적 Erich Trapp Prosopographisches Lexikon Der PALAIOLOGENZEIT https://archive.org/[...]
[2] 서적 The Byzantine Family of Kantakouzenos (Cantacuzenus) ca. 1100-1460: a Genealogical and Prosopographical Study Dumbarton Oaks 1968
[3] 간행물 The Byzantine Family of Kantakouzenos: Some Addenda and Corrigenda, Dumbarton Oaks Papers, Vol. 27 1973
[4] 서적 The Byzantine Family of Kantakouzenos (Cantacuzenus) ca. 1100-1460: a Genealogical and Prosopographical Study Dumbarton Oaks 1968
[5] 간행물 The Byzantine Family of Kantakouzenos: Some Addenda and Corrigenda, Dumbarton Oaks Papers, Vol. 27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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