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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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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안니스 6세는 14세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칸타쿠지노스 가문 출신으로,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내전에 기여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 사후,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권력 다툼 끝에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내전과 흑사병, 제노바와의 갈등 등 어려움 속에서 통치했으며, 말년에는 수도원에서 역사서를 저술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였으나, 지나친 친족 등용과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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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요안니스 6세가 공의회를 주재하는 모습, 기원후 1370년경–1375년경
전체 이름요안니스 앙겔로스 팔레올로고스 칸타쿠제노스 (Ἰωάννης Ἄγγελος [Κομνηνός] Παλαιολόγος Καντακουζηνός)
통치
작위동로마 황제
재위 기간1347년 2월 8일 – 1354년 12월 10일
대관식1347년 5월 21일
이전 통치자요안니스 5세 (단독 통치)
다음 통치자요안니스 5세 (마태오스와 공동 통치)
섭정요안니스 5세,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
섭정 유형공동 군주
가족
배우자이리니 아사니나
자녀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
마누일 칸타쿠제노스
테오도라 칸타쿠제니
엘레니 칸타쿠제니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제노스
마리아 칸타쿠제니
가문칸타쿠제노스 가문
아버지미하일 칸타쿠제노스
어머니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앙겔리나
생애
출생129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로마 제국
사망1383년 6월 15일 (90/91세), 모레아 전제공국
매장지미스트라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그리스
종교
종교동방 정교회
기타
황제 칭호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군주

2. 칸타쿠지노스 가문

요안니스 6세는 아내 이레네 아사니나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레네 아사니나는 안드로니코스 아센(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3세와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딸인 불가리아 황후 이레네 팔레올로기나의 아들)의 딸이다.


  •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 ( – 1383): 1353–1357년 공동 황제였으며, 이후 모레아의 데스포테스였다.
  • 마누엘 칸타쿠제노스 ( – 1380): 모레아의 데스포테스였다.
  • 테오도라 칸타쿠제네 ( – ):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르한과 결혼하였다.
  • 헬레나 칸타쿠제네 (1333 – 1396):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와 결혼하였다.
  •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제노스 ( – ): 흑사병 유행으로 사망하였다.
  • 마리아 칸타쿠제네 (1379년 이후 사망): 에피루스의 니케포로스 2세 오르시니와 결혼하였다.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11세기 말에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제국의 명문으로,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 시대에는 황제의 친척에도 이름을 올렸고, 그 외 제국의 명문과도 혼인 관계를 맺었다. 훗날 황제가 되는 요안니스 6세의 혈통적 출신에 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지만, 조부로 여겨지는 미카엘 칸타쿠지노스가 동로마령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아카이아 공국 전역에 종사했으며, 아버지(요안니스는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자서전에 기록하지 않았다) 역시 펠로폰네소스의 행정관을 역임했다. 또한 어머니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제네(1342년 사망)는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의 누이 마리아-말사 팔레올로기나(1215년 - 1267년)의 손녀이다. 아버지는 1294년경, 요안니스의 탄생 전에 사망했다. 요안니스는 청년기에 에이레네 아사니나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의 조부는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 이반 아센 3세이며, 그의 아내는 미카엘 8세의 딸 에이레네였다.

3. 생애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는 모레아 총독 미하일 칸타쿠지노스의 아들로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태어났다.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친구로서,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6년 동안 그를 도와 내전에서 승리했다. 1328년 안드로니코스 3세 즉위 후 내무대신이 되었고, 최고 행정권을 위임받아 대내외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레스보스 섬과 아이톨리아 공국을 제국에 다시 충성하게 했다.

1341년 6월 안드로니코스 3세가 후계자 지정 없이 사망하자, 요안니스 5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칸타쿠지노스는 황제가 되려는 야망이 없었으며, 안드로니코스 3세의 공동 황제 제안도 여러 번 거절했다. 황제 사후 요안니스 5세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제국 관리를 감독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5세의 어머니 안나는 그를 반역자로 의심했다. 전 황제와의 우정과 권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질투를 유발했다. 1341년 9월, 그들은 칸타쿠지노스가 수도를 떠나 군대를 준비하던 중 섭정단을 전복시켰다.

칸타쿠지노스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고, 군대는 해산 명령을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친척들은 망명하거나 투옥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어머니 테오도라는 가택 연금 중 학대로 사망했다. 군대는 섭정단의 명령을 무시하고 디디모테이코스에서 요안니스 6세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하위 통치자로 칭하며 이를 수용했고, 이는 요안니스 14세의 파문으로 이어졌다.

이어진 내전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요안니스 6세는 테살로니카로 진군했으나, 아포카우코스가 함대를 파견하여 저지하자 세르비아로 도망쳤다. 스테판 두샨의 지원을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고, 아이딘의 우무르의 개입으로 포위망을 풀었다. 이듬해 다시 테살로니카를 시도했으나, 세르비아인들이 섭정을 지지하여 고립되었다. 우무르가 다시 구출했고, 연합군은 디디모테이코스로 돌아왔다. 전쟁은 4년 더 지속되었다.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어를 배우고 오스만오르한과 우정을 쌓았다. 오스만과 협상하여 딸 테오도라와 결혼하게 하고, 지원을 받아 1347년 2월 8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는 10년 동안 선임 황제로 통치하고, 이후 요안니스 5세가 동등한 권력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5월 21일 공식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요안니스 6세의 이중 초상

3. 1. 초기 생애

요안니스 6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모레아 전제공국의 총독인 미하일 칸타쿠지노스와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안젤리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널드 니콜은 그가 아버지의 사망 이후에 태어나 외동으로 자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3] 어머니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앙겔리나를 통해 당시 통치 가문인 팔레올로고스와 친척 관계였다.[3] 또한 아내 이리니 아사니나를 통해 황실과도 인척 관계였는데, 그녀는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사촌이었다.[3]

그는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안드로니코스 3세가 할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에 대항한 투쟁에서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1328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즉위하자, 그는 최고 행정 업무를 맡았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대공으로 활동했다. 그는 레스보스 섬과 아이톨리아 공국이 제국에 다시 충성하게 하기도 하였으며, 절제와 금욕을 미덕으로 삼았다.

3. 2. 제국의 중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에 의해 여러 차례 공동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본인의 야망이 없었기에 이를 거부하였다. 요안니스 6세가 직접 쓴 역사서에 따르면, 황제가 사망한 후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제국을 관리하는 역할에 만족하며 다시 한번 황제 즉위를 거부했다. 요안니스 5세와 그의 어머니 안나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안나는 그를 반역자로 의심하였다. 전 황제와의 우정과 그의 권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은 1341년 9월, 칸타쿠지노스가 수도를 떠나 펠로폰네소스에 남아있는 십자군 공국에 대항할 군대를 준비하던 중 섭정단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칸타쿠지노스는 찬탈자들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고, 그의 군대는 해산 명령을 받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그의 친척들은 망명하거나 투옥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가택 연금 중 학대로 사망했다. 그의 군대는 섭정단의 명령을 무시하고 트라키아의 디디모테이코스에서 요안니스 6세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하위 통치자로 칭하며 이를 수용했고, 이 선포는 그의 적인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의 파문으로 이어졌다.

이어진 내전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양측은 외국 동맹국과 용병을 끌어들였고, 제국은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요안니스 6세는 먼저 테살로니카로 진군했다. 그곳의 통치자들이 테살로니케를 넘겨주려 하자,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는 이를 예상하고 함대를 파견하여 도시를 강화했다. 이에 요안니스는 세르비아로 도망쳐 스테판 두샨의 보호와 군사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 효과가 없었고, 요안니스 6세의 오랜 친구인 아이딘의 우무르의 개입만이 디디모테이코스에 있는 그의 본거지에 대한 섭정군의 포위망을 무너뜨렸다.

이듬해 테살로니카에 대한 또 다른 시도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섭정을 지원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그는 다시 한번 고립되었다. 그러나 아이딘의 우무르가 다시 그를 구하러 왔고, 그들의 연합군은 마케도니아에서 탈출하여 디디모테이코스로 돌아왔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몰아낼 수 없었기에 전쟁은 4년 더 지속되었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어를 직접 배우고 오스만오르한 가지와 우정을 쌓았다. 그는 오스만과 협상하여 오르한이 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하게 하였고,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1347년 2월 8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는 후자가 10년 동안 선임 황제로 통치하고, 그 후 요안니스 5세가 칸타쿠지노스와 동등한 권력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요안니스 6세의 공식 대관식은 5월 21일에 거행되었다.

요안니스 6세의 생애와 경력은 주로 그의 저작인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처음 등장한 것은 1320년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당시 공동 황제)가 일으킨 스캔들과 제위 계승 문제였다. 당시 메가스 파피아스(고문관 중 하나)였던 칸타쿠제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 슐기안네스 팔레올로고스 필란트로페노스(미카엘 8세의 누이 에이레네의 손자, 아버지는 기독교로 개종한 쿠만족)와 함께 이 진영에 합류했다. 칸타쿠제노스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에게 정치 혁신과 감세 등을 선전하여 지지를 얻고, 수도 인근 트라키아 지방의 행정관직을 매수하여 세력지를 확보했다.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는 이때 칸타쿠제노스에 의해 발탁되어 그의 부하로 오랫동안 따랐다.

1321년부터 내란이 시작되었고, 안드로니코스 3세가 우위를 점하면서 칸타쿠제노스와 슐기안네스가 대립했다. 결국 슐기안네스는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진영으로 돌아섰다. 이 싸움은 1328년 안드로니코스 3세의 승리로 끝났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퇴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갔다.

칸타쿠제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에 의해 제국군 총사령관(메가스 도메스티코스)으로 승진하여 그의 통치를 지지했다. 소아시아 영토 확보 원정은 실패했지만, 유럽 쪽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1335년에 시작되어 1340년에 완료된 에피루스 전제공국 병합은 그의 수완 덕분이었다.

3. 3. 내전 (1341년 ~ 1347년)

1341~1347년 내전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안드로니코스 3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등극하는 것을 여러 번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요안니스 6세가 쓴 역사서에 따르면, 황제가 죽은 후,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의 주장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소년이 성년이 될 때까지 제국의 관리를 감독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다시 한번 왕위에 오르기를 거부했다. 그가 충성심을 유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 5세와 그의 어머니 안나에게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반역자로 의심하게 되었다. 전 황제와의 우정과 그의 권력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1341년 9월, 칸타쿠지노스가 수도 밖으로 나가 펠로폰네소스의 일부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십자군 공국들에 대해 군대를 준비하던 중에, 그들은 섭정단을 전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칸타쿠지노스는 찬탈자들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고 그의 군대는 해산 명령을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그의 친척들은 망명하거나 투옥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가택 연금 중에 겪은 학대 때문에 사망했다. 그의 군대는 새로운 섭정들의 명령을 무시하고 트라케의 디디모테이코스에서 요안니스 6세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하위 통치자로 계속 칭하면서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 선포는 그의 적인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의 파문으로 이어졌다.

이어진 내전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양측은 모든 종류의 외국 동맹국들과 용병들을 불렀고, 제국을 거의 망쳤다. 요안니스 6세는 먼저 테살로니카로 진군하였으나, 그곳의 통치자들이 그에게 테살로니케를 넘겨주려고 하자,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는 이를 예상하고 도시를 강화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여 요안니스는 세르비아로 도망쳐야 했다. 스테판 두샨은 그를 보호하고 군사 지원을 해주었으나, 대부분 효과가 없었고, 요안니스 6세의 오랜 친구이자 아이딘의 우무르의 개입만이 디디모테이코스에 있는 그의 본거지에 대한 섭정군의 포위망을 무너뜨렸다.

이듬해 테살로니카에 대한 또 다른 시도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새로운 섭정을 지원하는 편으로 바꾸었고, 그는 다시 한 번 더 고립되었다. 그러나 다시 아이딘의 우무르가 그를 구하러 왔고, 그들의 연합군은 마케도니아에서 탈출하여 디디모테이코스로 돌아왔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몰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은 4년 더 질질 길게 끌었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직접 튀르크어를 배우고 오스만오르한과 우정을 쌓았다. 그는 오스만과 협상을 해서 오르한이 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하였으며,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1347년 2월 8일 요안니스 6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는 후자가 10년 동안 선임 황제로 통치하고, 그 후 10년 후 요안니스 5세가 연공에 올라 칸타쿠지노스와 동등한 권력을 공유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요안니스 6세의 공식 대관식은 5월 21일에 거행되었다.

3. 4. 재위 기간 (1347년 ~ 1354년)

요안니스 6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미 분열되고 가난하며 약화된 제국은 사방에서 계속 공격을 받았다.[1]

1347년 봄, 흑사병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쓸어 많은 제국인들과 요안니스 6세의 막내아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제노바인은 조약의 조건을 무시하고 갈라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세는 비잔티움을 깎아내렸고, 보스포루스 해협 통제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87%가 제국 대신 그들에게 돌아갔다. 요안니스 6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세를 낮추고 제노바의 수입을 잠식하기 시작하기 전에 예상되는 전쟁에 대비하여 파괴된 비잔틴 해군을 재건하려 했다. 그는 9척의 꽤 큰 배와 약 100척의 작은 배를 건조할 만큼 충분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1349년 초까지 그의 함대를 침몰시키거나 점령할 수 있었다. 제노바는 갈라타의 주요 지역, 특히 부두와 창고가 불탄 후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그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동맹을 통해 해군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베네치아의 1350년 전쟁에 제노바에 맞서 참전했지만, 파가니노 도리아는 다음 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앞바다에서 벌어진 피로스의 승리를 통해 요안니스 6세(그리고 그가 투입한 12척의 배)를 전쟁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테살로니카의 열심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러나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요안니스 6세는 알렉시오스 메토키테스의 지지 선언을 기회로 삼고, 그의 아들 마타이오스를 제국 정규군과 오스만 보조군을 이끌고 테살로니카로 보냈다. 요안니스 6세는 요안니스 5세와 함께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배에 올라 1350년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와 테살로니카에 입성했다.

1351년, 칸타쿠제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5차 회의를 감독했는데, 여기서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신비주의적 헤시카즘 신학은 바를라암 칼라브리아와 다른 비잔티움 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방 정교회 신학으로 선언되었다.[2]

이 무렵, 스테판 두샨은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에피루스를 점령했다. 요안니스 6세는 투르크인들과 다시 동맹을 맺어 추가적인 침략에 맞서 도움을 구했다. 지진 이후, 그들은 1354년 그의 많은 빚을 부분적으로 갚기 위해 유럽 최초의 발판인 칼리폴리스 (갈리폴리)를 합병했다.[1]

그는 1353년에 그의 아들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를 또 다른 공동 황제로 만들었지만,[3] 요안니스 6세의 정부 부채를 갚기 위한 과세 확대를 시도하는 것은 오랫동안 불쾌감을 주었다. 그는 곧 요안니스 5세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1354년 12월 10일에 수도사가 되었다.[4][5][6]

15세기 코덱스 무티넨시스에 묘사된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3. 5. 퇴위와 말년

요안니스 6세는 수도원으로 은퇴했고, 그곳에서 수도사 요아사푸스 크리스토둘로스(Ιωασάφ Χριστόδουλοςel)로서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320년에서 1356년까지의 그의 책은 주관적인 생각도 들어 있으며 변명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것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동로마 제국 황제가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남긴 유일한 생존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7]

1367년 요아사푸스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총대주교 파울로스와 협상하기 위해 동방 정교회의 대표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교황과 동서 교회의 모든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들이 참석하는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이 계획을 거부하였고,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1383년 6월 15일에 수도사 요아사푸스는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들에 의해 라코니아의 미스트라스에 묻혔다.

4. 저작

요안니스 6세는 수도원으로 은퇴한 후, 수도사 요아사푸스 크리스토둘로스(Ιωασάφ Χριστόδουλοςel)라는 이름으로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320년에서 1356년까지의 역사를 다룬 그의 책은 주관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 내용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통치 기간에 대해 남긴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8]

칸타쿠제노스는 수도원으로 은퇴하여 요아사프 크리스토둘로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문학 활동에 전념했는데, 그의 글은 웅변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4권짜리 《역사》는 1320년부터 1356년까지의 기간을 다루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론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그는 개인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서술에 결함이 있는 등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니케포루스 그리고라스의 동시대 저술로 보완될 수 있다.[9]

칸타쿠제노스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이었으며, "크리스토도울로스(Χριστόδουλος, 그리스도의 종)"라는 필명으로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역사』(전 4권, 1370년경 성립): 1320년 안드로니코스 3세의 반란부터 1357년 마타이오스 칸타쿠제노스의 퇴위까지를 서술하고, 이후 1364년까지의 개별적인 기록을 추가하였다. 그 자신이 주요 역할을 담당했던 동시대의 역사로서, 기술 자체는 정확하고 상세하지만, 공정성과 객관성 면에서는 매우 문제가 많은 저서이다. 그는 자신과 친구, 동지의 행동을 최대한 칭찬하는 한편, 그 적대자에 대해서는 비난, 중상, 조롱을 퍼붓고 있다.
  • 『프로호로스 키도니스 앞으로의 반론』(1368년 - 1369년 성립): 반 헤시카즘주의자에 대한 반박 서한.
  • 『무함마드의 제자들에 대한 변명』: 이슬람교 비판
  • 기타 헤시카즘을 다룬 기독교 신학 관련 저서


5. 가족

요안니스 6세는 아내 이레네 아사니나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레네 아사니나는 안드로니코스 아센(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3세와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딸인 불가리아 황후 이레네 팔레올로기나의 아들)의 딸이다.

요안니스 6세의 자녀
이름출생 - 사망배우자비고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 13831353년–1357년 공동 황제, 이후 모레아의 데스포테스
마누엘 칸타쿠제노스- 1380모레아의 데스포테스
테오도라 칸타쿠제네- 1381년 이후오르한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르한과 결혼.[1]
헬레나 칸타쿠제네1333 - 1396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제노스- 1347년흑사병 유행으로 사망
마리아 칸타쿠제네1379년 이후 사망에피루스의 니케포로스 2세 오르시니


6. 평가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진출 계기를 마련하여 제국 멸망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칸타쿠제노스이지만, 실제로는 더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었다. 제국은 이 시기, 남진을 꾀하는 세르비아,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잡으려는 베네치아, 제노바의 야심에 노출되어 있었다. 칸타쿠제노스는 이러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오스만 제국, 특히 오르한과의 개인적인 동맹에 의존하려 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조직된 군사력을 얻으려 한 것은 세르비아 왕 두샨이나 요안니스 5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칸타쿠제노스의 수완이 그들보다 뛰어났을 뿐이다. 물론, 그가 이 극히 개인적인 관계에 의존한 불안정한 동맹 관계에 계속 의존했기 때문에, 제국에 분명히 좋지 않은 영향을 남긴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칸타쿠제노스가 제국에 준 치명적인 영향은, 이미 제국에 내재되어 있던 사회 대립·종교 대립을 일시에 폭발시켜 버린 점일 것이다. 열심당의 반란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귀족층에 의존하여 거병한 것은, 오히려 그 외의 사람들을 정통주의와 반귀족, 그리고 반고요주의에 나서게 했다. 또한, 정권에 친족을 기용한 탓에 일문 지배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고, 특히 요안니스 5세를 폐하고 자신의 아들 마타이오스를 황위에 앉힌 것은 전횡의 극치로서 크게 그의 명성을 떨어뜨렸다. 안드로니코스 3세 시대에 정치 쇄신을 내걸고 등장한 젊은 귀족은, 나이를 먹어 어느새 가장 반동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칸타쿠제노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난 정치가·군인이었으며, 그 정책 자체는 대다수가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정치 생활은 대부분 반대파와의 당쟁에 시달렸고, 거의 모든 성과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났다. 그 가운데 지속적인 성과는, 친족에 의한 제국 영토의 행정권 분담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제도의 시행이다. 특히 차남 마누엘이 파견된 모레아 전제공령의 창설은 그 후 제국 존속의 기반을 제공했고, 그의 퇴위 후에도 이어지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여러 황제들에 의해 지속되어 갔다.

참조

[1] 논문 McLaughlin (2017) https://pure.royalho[...]
[2] 백과사전 John VI Cantacuzenus
[3] 서적 History of John VI Kantakouzenos, Book II.
[4] 간행물 Kantakauzenos, Ioannes VI. https://archive.org/[...]
[5] 서적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https://archive.org/[...]
[6] 논문 Nouvelle note sur la chronologie du règne de Jean Cantacuzène https://www.persee.f[...] 1976
[7] 서적 Byzantium: The Decline and Fall Alfred A. Knopf 1996
[8] 서적 Patrologia Graeca
[9] 서적 Patrologia Gra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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