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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내전 (1341년-13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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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내전 (1341년-1347년)은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의 죽음 이후 발생한 비잔틴 제국의 내전이다. 칸타쿠제노스는 섭정직을 주장하며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총대주교, 황태후,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코스를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과 대립했다. 칸타쿠제노스는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섰으나, 세르비아의 개입과 사회적 분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347년 칸타쿠제노스가 승리하여 공동 황제로 즉위했지만, 제국은 심각한 영토 손실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내전은 비잔틴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제국의 존속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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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볼 조약은 1108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와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1세가 안티오키아 지배권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체결한 조약으로, 보에몽이 황제의 봉신이 되어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안티오키아를 제국의 봉토로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분쟁의 불씨로 남았다.
동로마 내전 (1341년-1347년)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동로마 내전 (1341년-1347년)
부분동로마 내전
동로마-세르비아 전쟁
동로마-튀르크 전쟁
날짜1341년 9월 – 1347년 2월 8일
장소테살리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영토 변화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를 획득하고 곧이어 에피루스와 테살리아를 얻어 세르비아 제국을 수립함.
불가리아가 북부 트라키아를 획득함.
결과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섭정들을 물리침
수석 황제로 인정받음
교전 세력
교전국 1동로마 제국
섭정
안나 디 사보이아


동맹

세르비아 (1343년–1347년)
불가리아
교전국 2동로마 제국
동맹
세르비아 (1342년–1343년)
(1342/3년–1345년)
오스만 베이국 (1345년–1347년)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 지휘관(처형)
스테판 두샨

이반 알렉산더르
(전사, 1344년–1345년)
교전국 2 지휘관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마누엘 칸타쿠제노스

스테판 두샨
(암살)

오르한
규모
교전국 1 규모알려진 바 없음
교전국 2 규모알려진 바 없음
사상자 및 손실
교전국 1 사상자알려진 바 없음
교전국 2 사상자알려진 바 없음

2. 역사적 배경

1341년, 비잔틴 제국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되찾고 제국을 부활시켰지만, 그의 정책은 국가 자원을 고갈시켰고,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치하에서 제국의 힘은 약해졌다.[1]

안드로니코스 2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소아시아에 남아 있던 비잔틴 영토는 투르크족, 특히 새롭게 등장한 오스만 제국에게 서서히 넘어갔다. 이는 비잔틴의 유럽 영토로 난민의 물결을 일으켰고, 동시에 카탈루냐 용병대는 제국의 영토에서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제국의 적들에게 바치는 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이 급격히 인상되었다. 이러한 실패와 개인적인 야망이 결합되어 황제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젊은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와 시르기아네스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젊은 귀족 집단의 지원을 받은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0년대 일련의 갈등 이후 할아버지를 폐위시켰다.[2] 이 전쟁은 제국의 이웃들, 즉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투르크족, 제노바인베네치아인이 비잔틴 내부의 싸움을 이용하여 영토를 얻거나 제국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했기 때문에 제국의 미래에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63]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모레아에 있는 비잔틴 영토의 전 총독의 아들인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는 어머니를 통해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친척 관계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테살리아에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았고,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가장 신뢰받는 고문이 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 기간(1328-1341) 동안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는 그의 수석 장관으로 활동했으며, 메가스 도메스티코스(μέγας δομέστικος|메가스 도메스티코스grc, 비잔틴 군대의 사령관) 직을 맡았다.[64]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웠으며, 1330년에는 후계자가 없던 안드로니코스 3세(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는 1332년에 태어남)가 병에 걸리자 그가 죽은 후 칸타쿠제노스를 황제 또는 섭정으로 선포하라고 고집했다.[64] 1341년 봄, 칸타쿠제노스의 장남인 마테오스 칸타쿠제노스가 황제의 사촌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69]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와는 달리,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친히 군사 작전을 이끌었던 정력적인 통치자였다.[63] 1329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원정은 펠레카노스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로 이어졌고, 그 후 비잔틴의 비티니아 지역은 급격히 붕괴되었다.[6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칸 반도로의 후속 출격은 안드로니코스의 흔들리는 왕국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테살리아와 에피루스 전제공국은 각각 1328년과 1337년에 거의 유혈 사태 없이 제국의 통치로 복원되었다.[66] 안드로니코스 3세는 또한 소규모 함대를 재건하여 1329년 제노바의 자카리아 가문으로부터 부유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키오스 섬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본토의 포케아의 제노바 총독인 안드레올로 카타네오의 충성을 요구할 수 있었다.[67] 그러나 1335년, 안드레올로의 아들인 도메니코 카타네오는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레스보스 섬을 점령했다. 황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었고, 사루한과 아이딘의 투르크족 아미르의 지원을 요청했다. 사루한은 군대와 물자를 보냈지만, 아이딘의 통치자인 우무르 베그는 직접 황제를 만나러 왔다. 칸타쿠제노스와 우무르 베그는 이 만남을 통해 오래 지속되는 친밀한 우정과 동맹을 맺었다.[69]

1331-1334년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황제에게 덜 성공적이었는데, 몇몇 마케도니아 마을이 시르기아네스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세르비아인에게 점령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득은 시르기아네스의 암살과 헝가리의 침략 위협으로 인해 세르비아 통치자인 스테판 두샨이 협상을 통한 해결을 모색하면서만 억제되었다.[68] 안드로니코스 3세와 두샨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은 비잔틴-세르비아 관계의 미래에 중요했다. 처음으로 비잔틴은 안드로니코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세르비아가 제국의 희생으로 발칸 중부에서 얻은 광범위한 이득을 인정했다. 이 조약 이후 두샨은 자신의 거처를 옮겼고, 그의 왕국의 중심을 남쪽의 프릴레프로 옮겼다.[69]

소아시아의 상실은 돌이킬 수 없었지만, 에피루스와 테살리아에서의 성공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남부 발칸에서 제국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안드로니코스 3세와 칸타쿠제노스는 남부 그리스의 라틴 공국을 회복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전을 계획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역사학자 도널드 니콜은 "그리스 반도 전체가 비잔틴 정부 하에 통일될 수 있다면, 제국은 다시 한번 세르비아, 이탈리아인 및 다른 적들에게 맞설 수 있는 균질한 구조가 될 것이다. 작지만 케이프 마타판에서 테살로니카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뻗어 있는 작고 관리 가능한 경제적 및 행정적 단위가 될 것"이라고 쓰고 있다.[69]

2. 1.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위기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되찾고 비잔틴 제국을 부활시켰지만, 그의 정책은 국가 자원을 고갈시켰고,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치하에서 제국의 힘은 약해졌다.[1] 안드로니코스 2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소아시아의 비잔틴 영토는 투르크족, 특히 오스만 제국에게 점차 잠식당했다. 이는 비잔틴의 유럽 영토로 난민을 유입시켰고, 카탈루냐 용병대는 제국 영토를 약탈했다. 제국의 적들에게 바치는 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 또한 크게 인상되었다. 이러한 실패와 개인적인 야망은 황제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와 시르기아네스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젊은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0년대 일련의 갈등 끝에 할아버지를 폐위시켰다.[2] 이 전쟁은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투르크족,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이 비잔틴 내부 분쟁을 이용하여 영토를 얻거나 제국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했기 때문에 제국의 미래에 불길한 징조였다.[63]

모레아에 있는 비잔틴 영토의 전 총독의 아들인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는 어머니를 통해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친척 관계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테살리아에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았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가장 신뢰받는 고문이 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 기간(1328-1341) 동안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는 그의 수석 장관이자, 메가스 도메스티코스(), 즉 비잔틴 군대의 사령관 직을 맡았다. 1330년, 후계자가 없던 안드로니코스 3세(요안니스 5세는 1332년에 태어남)가 병에 걸리자, 그는 칸타쿠제노스를 황제 또는 섭정으로 선포하라고 고집했다. 1341년 봄, 칸타쿠제노스의 장남인 마테오스 칸타쿠제노스가 황제의 사촌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와는 달리, 안드로니코스 3세는 직접 군사 작전을 이끌었던 정력적인 통치자였다. 1329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원정은 펠레카노스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로 이어졌고, 그 후 비잔틴의 비티니아 지역은 급격히 붕괴되었다.[3] 그러나 발칸 반도로의 후속 출격은 안드로니코스의 흔들리는 왕국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테살리아와 에피루스 전제공국은 각각 1328년과 1337년에 거의 유혈 사태 없이 제국의 통치로 복원되었다.[4] 안드로니코스 3세는 또한 소규모 함대를 재건하여 1329년 제노바의 자카리아 가문으로부터 키오스 섬을 회복하고, 포케아의 제노바 총독 안드레올로 카타네오의 충성을 받아냈다. 1335년, 안드레올로의 아들 도메니코 카타네오는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레스보스 섬을 점령했다. 황제는 함대를 이끌고 섬을 회복했고, 사루한과 아이딘의 투르크족 아미르의 지원을 요청했다. 칸타쿠제노스와 우무르 베그는 이 만남을 통해 오랜 우정과 동맹을 맺었다.

1331-1334년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황제에게 덜 성공적이었는데, 스테판 두샨이 이끄는 세르비아인이 마케도니아의 몇몇 마을을 점령했기 때문이다.[5] 안드로니코스 3세와 두샨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은 비잔틴-세르비아 관계의 미래에 중요했다. 비잔틴은 안드로니코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세르비아가 제국의 희생으로 발칸 중부에서 얻은 광범위한 이득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소아시아의 상실은 돌이킬 수 없었지만, 에피루스와 테살리아에서의 성공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남부 발칸에서 제국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안드로니코스 3세와 칸타쿠제노스는 남부 그리스의 라틴 공국을 회복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전을 계획했다. 역사학자 도널드 니콜은 "그리스 반도 전체가 비잔틴 정부 하에 통일될 수 있다면, 제국은 다시 한번 세르비아, 이탈리아인 및 다른 적들에게 맞설 수 있는 균질한 구조가 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2. 2.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와 칸타쿠제노스의 부상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는 모레아에 있는 비잔틴 영토의 전 총독의 아들로, 어머니를 통해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친척 관계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테살리아에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았고,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가장 신뢰받는 고문이 되었다.[64]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 기간(1328-1341) 동안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는 그의 수석 장관으로 활동했으며,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비잔틴 군대의 총사령관) 직을 맡았다.[64]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웠으며, 1330년에는 후계자가 없던 안드로니코스 3세(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는 1332년에 태어남)가 병에 걸리자 그가 죽은 후 칸타쿠제노스를 황제 또는 섭정으로 선포하라고 고집했다.[64] 1341년 봄, 칸타쿠제노스의 장남인 마테오스 칸타쿠제노스가 황제의 사촌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69]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와는 달리,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친히 군사 작전을 이끌었던 정력적인 통치자였다.[63] 1329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원정은 펠레카노스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로 이어졌고, 그 후 비잔틴의 비티니아 지역은 급격히 붕괴되었다.[6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칸 반도로의 후속 출격은 안드로니코스의 흔들리는 왕국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테살리아와 에피루스 전제공국은 각각 1328년과 1337년에 거의 유혈 사태 없이 제국의 통치로 복원되었다.[66] 안드로니코스 3세는 또한 적은 규모의 함대를 재건하여 1329년 제노바의 자카리아 가문으로부터 부유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키오스 섬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본토의 포케아의 제노바 총독인 안드레올로 카타네오의 충성을 요구할 수 있었다.[67] 그러나 1335년, 안드레올로의 아들인 도메니코 카타네오는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레스보스 섬을 점령했다. 황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었고, 사루한과 아이딘의 투르크족 아미르의 지원을 요청했다. 사루한은 군대와 물자를 보냈지만, 아이딘의 통치자인 우무르 베그는 직접 황제를 만나러 왔다. 칸타쿠제노스와 우무르는 이 만남을 통해 오래 지속되는 친밀한 우정과 동맹을 맺었다.[69]

1331-1334년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황제에게 덜 성공적이었는데, 몇몇 마케도니아 마을이 반역자 시르기아네스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세르비아인에게 점령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득은 시르기아네스의 암살과 헝가리의 침략 위협으로 인해 세르비아 통치자인 스테판 두샨이 협상을 통한 해결을 모색하면서만 억제되었다.[68] 안드로니코스 3세와 두샨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은 비잔틴-세르비아 관계의 미래에 중요했다. 처음으로 비잔틴은 안드로니코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세르비아가 제국의 희생으로 발칸 중부에서 얻은 광범위한 이득을 인정했다. 이 조약 이후 두샨은 또한 자신의 거처를 옮겼고, 그의 왕국의 중심을 남쪽의 프릴레프로 옮겼다.[69]

소아시아의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에피루스와 테살리아에서의 성공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남부 발칸에서 제국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안드로니코스 3세와 칸타쿠제노스는 남부 그리스의 라틴 공국을 회복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전을 계획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역사학자 도널드 니콜은 "그리스 반도 전체가 비잔틴 정부 하에 통일될 수 있다면, 제국은 다시 한번 세르비아, 이탈리아인 및 다른 적들에게 맞설 수 있는 균질한 구조가 될 것이다. 작지만 케이프 마타판에서 테살로니카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뻗어 있는 작고 관리 가능한 경제적 및 행정적 단위가 될 것"이라고 쓰고 있다.[69]

3. 내전의 발발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칸타쿠제노스는 섭정 지위를 주장하며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황태후 안나, 해군 사령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를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칸타쿠제노스를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하려 했다.[71]

칸타쿠제노스는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를 떠났고, 그 사이 아포카우코스는 쿠데타를 시도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총대주교는 칸타쿠제노스를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고 그의 지지자들을 탄압했다. 결국 칸타쿠제노스는 1341년 10월 26일 황제를 선포하며 맞섰지만, 이는 비잔티움 제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내전의 시작이었다.[77]

이 분열은 단순한 권력 투쟁을 넘어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부유한 토지 소유 귀족(디나토이)은 칸타쿠제노스를, 가난한 대중은 섭정 정부를 지지했다. 도시는 상업을 중시하는 중산층이, 농촌은 보수적인 귀족이 지배하는 등 계층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다.[81] 정교회 신비주의 논쟁과 맞물려 더욱 복잡해졌다.[82]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시작으로 여러 도시에서 섭정 지지 봉기가 일어났고, 칸타쿠제노스군은 분열되었다. 데모티카만이 칸타쿠제노스의 거점으로 남았다.[86]

3. 1. 안드로니코스 3세의 죽음과 권력 공백

1340년 시점의 비잔티움 제국(적색)과 그 주변 국가들의 세력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짧은 기간 병을 앓은 뒤, 1341년 6월 14일에서 15일로 넘어가는 밤에, 아마도 만성 말라리아로 인해 4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9세의 아들 요안니스(이후 요안니스 5세로 표기)가 명백한 후계자였지만, 요안니스 5세는 아직 공동 황제로 공식 선언되지 않았거나 즉위하지 않았었다. 이로 인해 법적인 공백이 생겼고, 누가 제국의 정치를 주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관습에 따라 자동으로 황태후가 섭정 정부를 이끌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타쿠제노스는 모든 공식적인 임명을 받지 못한 채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들들과 황태후 안나 디 사보이아를 궁궐의 무장 근위병 감시 하에 두고, 제국 원로원 회의에서 사망한 황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섭정이 되어 국가를 통치할 것을 주장했다. 더욱이 요안니스 5세와 자신의 딸 헬레나 칸타쿠제네를 즉시 결혼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결혼 요구에 대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는 이의를 제기하며, 황제(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할 경우 자신(칼레카스)에게 황실 보호를 위임한다는 1334년에 작성된 안드로니코스 3세의 문서를 제시했다. 결국, 6월 20일에 일어난 수도의 군대의 시위 행동 끝에 처음으로 칸타쿠제노스는 섭정 승인을 확보하고 정부를 장악하는 동시에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로서 군의 통제권도 유지했다.[70]

그러나 제국 통치에 대한 발언권을 유지하려는 강경한 총대주교, 칸타쿠제노스가 자신의 아들을 제거할까 두려워하는 황태후, 그리고 야심찬 메가스 두크스(해군 사령관)이자 관료 기구의 정점에 있는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세 사람을 중심으로 칸타쿠제노스의 반대 세력이 모이기 시작했다.[71] 이 세 사람 중, 아포카우코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후원을 받아 고위 관직에 오른 "신흥 인물"이었으며, 1341년까지는 아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세습 귀족들로부터 불신을 받았다. 칸타쿠제노스가 저술한 회고록과 당시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가 저술한 역사서는 이 시대의 유일하게 전해지는 이야기 형식의 기록이지만, 이 기록들은 귀족 측의 시각에 편향되어 있으며, 아포카우코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칸타쿠제노스에 따르면, 아포카우코스가 총대주교 진영에 고착한 것은 개인적인 야심 때문이었다. 아포카우코스는 칸타쿠제노스에게 황위를 선언하도록 설득하여 더 높은 지위로 나아가려 했지만, 칸타쿠제노스가 이를 거절했기에 은밀하게 충성의 대상을 총대주교로 바꿨다.[72]

3. 2. 칸타쿠제노스의 섭정 주장과 반대 세력의 등장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하면서 9살의 아들 요안니스 5세가 황위를 계승했으나, 공식적인 즉위식을 치르지 않아 법적 공백이 발생했다. 비잔틴 관습에 따라 황태후 안나가 섭정을 맡아야 했지만, 칸타쿠제노스는 사망한 황제와의 친분을 내세워 스스로 섭정을 주장했다. 그는 요안니스 5세와 자신의 딸 헬레나의 결혼을 요구했으나,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자신에게 황실 보호를 위임했다는 문서를 제시하며 반대했다. 결국 수도 군대의 시위로 칸타쿠제노스는 섭정 지위를 인정받고 정부와 군 통제권을 장악했다.[6]

그러나 칸타쿠제노스에 대한 반대 세력이 총대주교, 황태후, 해군 사령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7] 아포카우코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후원으로 출세한 인물로, 세습 귀족들의 불신을 받았다. 칸타쿠제노스의 회고록과 그레고라스의 역사서는 귀족 편향적인 시각으로 아포카우코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칸타쿠제노스에 따르면, 아포카우코스는 개인적 야망 때문에 총대주교 편에 섰으며, 칸타쿠제노스에게 황제 즉위를 권유했으나 거절당하자 비밀리에 충성 대상을 바꿨다고 한다.

도널드 니콜에 따르면, 칸타쿠제노스가 수도에 머물렀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드로니코스 3세 사후 제국을 위협하는 외적(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에 대처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떠나야 했다. 칸타쿠제노스는 원정에서 성공을 거두고, 아카이아 공국으로부터 영토 양도 제안까지 받았으나, 수도에서 아포카우코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요안니스 5세를 납치하려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포카우코스는 실패 후 요새로 도망쳤으나 포위되었고, 칸타쿠제노스는 수도로 돌아와 황태후와 협의 후 아포카우코스를 사면하고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는 칸타쿠제노스의 큰 실수였다. 그가 없는 동안 아포카우코스는 반대파 귀족들을 규합했고, 총대주교는 칸타쿠제노스를 해임하고 공공의 적으로 선포했다. 칼레카스는 스스로 섭정을 선언하고 아포카우코스를 수도장관으로 임명했으며, 칸타쿠제노스 지지자들은 투옥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다. 칸타쿠제노스의 어머니는 가택 연금 중 사망했다.

칸타쿠제노스 반대파 지도자 중 한 명인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한 지지자들이 데모티카에 도착하자, 칸타쿠제노스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했다. 결국 1341년 10월 26일, 칸타쿠제노스는 군대와 귀족 지지자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하위 동료임을 주장했지만, 이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칸타쿠제노스는 협상을 희망했으나 사절단은 투옥되었고, 총대주교는 그를 파문했다. 섭정은 1341년 11월 19일 요안니스 5세의 정식 대관식으로 대응했다.

칸타쿠제노스의 황제 선포는 비잔티움 사회에 분열을 일으켰다. 부유한 토지 소유 귀족(디나토이)은 칸타쿠제노스를 지지했고, 가난한 대중은 황태후와 총대주교를 지지했다. 아포카우코스는 귀족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을 부추겼다. 도시와 농촌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도시 중산층은 상업 경제와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과의 관계를 중시한 반면, 농촌 귀족은 보수적이고 정교회 신비주의를 옹호했다.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시작으로 여러 도시에서 섭정을 지지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칸타쿠제노스 군대의 많은 병사들이 그를 버리고 수도로 돌아갔다.

3. 3. 사회적 갈등의 심화

칸타쿠제노스의 황제 선포에 대한 반발은 비잔티움 사회에 분열을 초래했다. 농촌 지역을 지배했던 부유하고 강력한 토지 소유 귀족(디나토이)[12]들은 재빨리 그를 지지했다. 반면, 극심한 가난과 과도한 세금에 시달렸던 일반 대중은 황태후와 총대주교를 지지했다.[13] 아포카우코스는 칸타쿠제노스와 그 지지자들의 집과 토지에서 몰수한 막대한 부를 널리 알림으로써 이러한 분열을 이용하여 귀족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을 부추기는 데 특히 민첩했다.[13] 도널드 니콜에 따르면, "백만장자이자 토지 소유 귀족으로서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사람들이 일어섰다. '칸타쿠제니즘'은 그들의 전쟁의 함성이자 불만의 슬로건이 되었다."[13]

이로 인해 내전의 전선은 도시와 농촌 세력 사이에 그어졌다. 중산층 문관과 상인 계급("시장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도시는 더 상업적인 경제와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선호했다. 반면, 시골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지위에 걸맞지 않다고 여겨 상업적 및 기업가적 활동을 기피했던 보수적인 토지 귀족의 통제하에 있었다. 하위 사회 계층은 각각 지배적인 세력, 즉 도시의 중산층과 시골의 토지 소유 재벌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13]

이러한 성격의 양극화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토지 소유 귀족과 도시 기반 중산 계급 간의 정치, 경제 및 사회 분야에서의 경쟁은 11세기부터 확인되었지만, 1341년에 발생한 갈등의 규모는 전례가 없었다. 이러한 계급 갈등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분리된 트라페준타 제국에서도 반영되었는데, 여기에서 친제국적이고 친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 세력은 1340년과 1349년 사이에 지방 토지 소유 귀족과 대립했다.[14] 귀족의 더 보수적이고 반서구적인 경향과 완고한 동방 정교회 및 반가톨릭 교회 수도원과의 연관성은 또한 그들이 신비주의 헤시카즘 운동에 대한 애착이 증가한 것을 설명하며, 그 견해는 주로 도시에서 반대되었다.[14] 몇 가지 중요한 예외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열어두지만, 현대 대중의 마음(그리고 전통적인 역사학)에서 '팔라미즘'과 '칸타쿠제니즘'의 지지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일시되었다.[15] 칸타쿠제노스의 궁극적인 승리는 135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확인된 헤시카즘의 승리를 의미했다. 헤시카즘은 결국 정교회 전통의 특징이 되었지만, 가톨릭은 이단을 거부했다.[15]

이러한 사회적 분열의 첫 번째 징후는 10월 27일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나타났는데, 거기서 군중이 도시의 귀족들을 몰아내고 섭정을 위해 도시를 확보했다. 이러한 사건은 그 후 몇 주 동안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여러 도시에서 반복되었으며, 사람들은 섭정을 지지하고 멸시받는 '칸타쿠제니즘' 세력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16] 이러한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많은 칸타쿠제노스의 군인들이 그를 버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16] 데모티카에서만 대중 봉기가 진압되었고, 그 도시는 전쟁 기간 동안 트라키아에서 칸타쿠제노스의 주요 거점으로 남았다.[16]

4. 내전의 전개 (1342년-1347년)

Ἰωάννης ΣΤʹ Καντακουζηνόςgrc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시노드를 주재할 무렵, 그의 입지는 동맹자인 우무르 베이의 군사 지원으로 강화되었다. 1342년 말 또는 1343년 초, 우무르는 300척의 함대와 함께 에브로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섭정 정부군과 불가리아인으로부터 데모티카를 해방했다. 이후 터키인들은 겨울이 오자 소아시아로 철수했다.[100]

스테판 두샨은 칸타쿠제노스가 독립적인 기반을 확보하자 불쾌감을 느꼈다. 1343년 4월, 칸타쿠제노스가 베로이아를 설득하여 두샨 대신 자신에게 항복하게 하자 둘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세르비아 등 다른 요새들도 칸타쿠제노스에게 항복했다. 칸타쿠제노스는 세르비아로부터 자립을 강화하고 두샨의 확장 계획을 저지했다. 두샨은 1343년 여름 섭정 정부와 동맹을 맺었다.[101]

칸타쿠제노스는 테살로니키 외곽에 진을 쳤지만, 아포카우코스가 함대를 이끌고 도착하면서 마케도니아에 갇혔다. 우무르가 다시 칸타쿠제노스를 도왔지만, 테살로니키는 포위에 견뎠다.[102] 칸타쿠제노스는 1343년 말 마누엘을 베로이아와 서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남겨두고 데모티카로 진군하여 아내와 재회했다. 도중에 트라키아 요새들을 점령했지만, 페리테오리온 포위는 실패했다. 코모티니와 로도피 요새들을 공략했다.[103]

이후 트라키아 도시와 요새들은 칸타쿠제노스파가 되었지만, 터키군 약탈로 큰 희생을 치렀다.[104] 1344년 말, 요안니스 바타체스, 예루살렘 총대주교 라자로스, 마누엘 아포카우코스 등이 칸타쿠제노스 측으로 이반했다. 칸타쿠제노스는 1345년 1월 아드리아노폴을 점령했고, 같은 해 여름 트라키아 전역을 장악했다.

두샨은 마케도니아와 에피루스 전역을 점령했다. 1345년 말, 세레스, 테살로니키, 베로이아만이 세르비아 지배 밖에 있었다.[105] 섭정 정부는 어려움에 빠졌다. 국고는 고갈되었고, 안나는 1343년 8월 제관 보석을 베네치아에 30000두카토로 전당 잡아야 했다. 트라키아 약탈로 콘스탄티노플은 식량 부족을 겪었다. 안나는 로마 교황에게 지원을 호소하며 복종을 약속하고, 팔라마스 지지자들을 박해했다.[106]

안나 디 사보이아


섭정 정부는 1344년 불가리아와 동맹했지만, 필리포폴리스 등 9개 마을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반 알렉산다르는 칸타쿠제노스 군대에 직접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107] 모음칠은 섭정 정부 측으로 전향했다.[108] 1344년 초, 우무르는 라틴인들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떠났고, 터키군은 스테파니아나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에게 승리했다.[109] 칸타쿠제노스는 우무르의 지원으로 두샨과 아포카우코스의 공격을 막았다.[110]

칸타쿠제노스와 우무르는 불가리아를 습격한 후 몸칠을 공격했다. 몸칠은 무주지에서 준독립적 군주로 자리 잡았다. 1345년 7월 7일, 페리테오리온 전투에서 몸칠 군대는 괴멸되었고, 몸칠은 전사했다.[108] 두샨세레스를 포위했고, 칸타쿠제노스는 철수를 요구했지만, 아포카우코스 살해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111]

4. 1. 칸타쿠제노스의 고립과 세르비아의 개입 (1342년)

1342년 겨울, 폭설로 군사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칸타쿠제노스는 아토스 산의 수도승 사절단을 포함한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지만, 총대주교에게 거절당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거의 모든 지방과 총독들은 섭정 정부를 지지했다. 칸타쿠제노스의 오랜 친구이자 제국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의 총독이었던 테오도르 시나데노스만이 그를 지지했다. 시나데노스는 테살로니키 시민들에게 칸타쿠제노스에 대한 충성을 숨기고, 지역 귀족들과 협력하여 도시를 넘겨주려 했다. 또한, 스트루미차와 스트리몬 강 유역을 사실상 독립적으로 통치하던 세르비아의 유력자 흐렐랴도 칸타쿠제노스 지지로 기울었다.

날씨가 풀리자 1342년 3월 2일, 칸타쿠제노스는 아내 이레네 아사니나, 처남 마누엘 아센, 딸들을 데모티카에 남겨두고 군대와 함께 테살로니키를 향해 서쪽으로 진군했다.[17] 도중에 페리테오리온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하고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멜니크 요새를 점령하고 흐렐랴와 동맹을 맺었다. 두 군대는 테살로니키로 진군했지만, 늦게 도착하여 도시를 장악하지 못했다. 칸타쿠제노스는 테살로니키에 접근하자 열성당 봉기에서 도망친 시나데노스와 귀족들을 만났다.[18] 곧 아포카우코스가 이끄는 70척의 함대가 테살로니키에 도착하여 도시를 강화했다. 테살로니키에 가족이 남아있던 시나데노스는 섭정 정부에 투항했다. 요한이 테살로니카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열성당에 있었다.[19]

Upper torso and head of a middle-aged bearded man. He wears a domed golden crown, gold-decorated dress and carries a sceptre in the form of a patriarchal cross.
세르비아 차르 스테판 두샨, 비잔틴 내전을 이용하여 그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의 통치는 중세 세르비아 국가의 절정을 나타낸다.


같은 시기, 섭정 정부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여 민중 반란으로 확보된 도시들을 공식적으로 점령했다. 테살로니키가 막히고, 트라키아 보급선이 끊기고, 탈영으로 군대가 2,000명으로 줄고, 그 중 절반이 흐렐랴 소속이었기 때문에, 칸타쿠제노스는 세르비아로 북쪽으로 후퇴하여 스테판 두샨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얼마 후, 흐렐랴는 칸타쿠제노스를 버리고 섭정에 합류하여 멜니크를 얻으려 했다.[20] 1342년 7월, 칸타쿠제노스는 프리슈티나 근처에서 두샨을 만났다. 세르비아 통치자는 처음에는 동맹을 꺼렸지만, 요반 올리버 등 귀족들의 압력으로 남쪽으로 확장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칸타쿠제노스는 세르비아가 점령한 모든 도시를 갖도록 동의했다.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에 따르면, 세르비아는 테살로니카와 주변 지역을 제외하고 크리스토폴리스 서쪽의 모든 마케도니아를 요구했다. 칸타쿠제노스가 확보한 유일한 양보는 그가 직접 항복한 도시들에 대한 예외였다. 이 조약을 위해 칸타쿠제노스의 막내 아들 마누엘 칸타쿠제노스는 요반 올리버의 딸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두샨이 동맹을 파기하여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1] 흐렐랴 또한 칸타쿠제노스 수비대가 멜니크를 항복하는 대가로 조약에 동의했다. 그 해 말 흐렐랴가 죽은 후, 멜니크는 두샨에게 점령되었다.[22]

1342년 늦여름, 칸타쿠제노스는 그리스-세르비아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여 데모티카의 아내에게 가려 했다.[23] 그의 진격은 세레스 앞에서 멈췄고, 도시가 항복을 거부하면서 포위 공격은 전염병으로 인해 군대 대부분이 사망하면서 포기해야 했고, 그는 500명도 안 되는 병력과 세르비아로 후퇴했다. 두샨은 보데나를 점령했다.[24] 세르비아 군대는 플로리나카스토리아를 점령하여 서부 마케도니아 지배를 확대했다. 세르비아는 알바니아 통제도 확대하여, 1343년 여름까지 앙주가 지배하는 두러스를 제외하고는, 이 지역 전체가 세르비아 지배하에 들어갔다.[25] 칸타쿠제노스 추종자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칸타쿠제노스가 수도승으로 은퇴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도시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부유한 사람들이 살해되고 집이 약탈당했다.[26]

늦가을, 안나 여제는 두샨에게 사절을 보내 칸타쿠제노스를 넘겨줄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세르비아 통치자는 동맹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 하여 거절했다.[27] 칸타쿠제노스의 운은 테살리아 귀족 대표단이 와서 그의 권위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면서 개선되기 시작했다. 칸타쿠제노스는 친척 요한 안젤로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안젤로스는 충성스럽고 효과적이었다. 그는 곧 1340년에 안드로니코스 3세의 이름으로 통치했던 에피로스를 칸타쿠제노스 진영으로 끌어들였고, 아테네의 카탈루냐인들을 희생하여 테살리아에서도 이득을 얻었다.[28] 칸타쿠제노스가 세르비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진출하려는 노력은 세레스 앞에서 실패했다. 한편 칸타쿠제노스의 아내 이레네는 데모티카 봉쇄를 해제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반 알렉산더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섭정의 군대와 충돌했지만, 도시를 돕는 데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시골을 약탈했다.

4. 2. 칸타쿠제노스의 반격과 오스만의 개입 (1343년-1345년)

시나데노스는 칸타쿠제노스를 지지하며, 현지 귀족들과 함께 테살로니키를 넘겨줄 계획을 세웠다. 스트루미차와 스트리몬 강 유역을 다스리던 세르비아 유력자 흐렐랴도 칸타쿠제노스 지지로 기울었다. 1342년 3월 2일, 칸타쿠제노스는 군대를 이끌고 테살로니키로 향했다.[17] 도중에 페리테오리온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하고, 멜니크 요새를 점령하여 흐렐랴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테살로니키에서는 열성당이 봉기하여 시나데노스 등이 도망쳤고,[18] 아포카우코스의 함대가 도착하여 도시를 강화했다. 시나데노스 일족은 섭정 정부 측으로 도망쳤고, 요한 아포카우코스가 테살로니키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열심당에게 있었다.[19]

섭정 정부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도시들을 접수했지만, 테살로니키 봉쇄와 보급선 단절, 탈영으로 칸타쿠제노스 군대는 2,000명으로 줄었다. 칸타쿠제노스는 세르비아로 철수하여 스테판 두샨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흐렐랴는 멜니크 지배권을 원하여 섭정 정부 편에 붙었다.[20] 1342년 7월, 칸타쿠제노스는 프리슈티나에서 스테판 두샨을 만났다. 두샨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귀족들의 압력으로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할 기회를 잡았다. 칸타쿠제노스는 세르비아가 획득한 마을을 보유하는 데 동의했고, 세르비아는 크리스토폴리스 서쪽 마케도니아 전역을 요구했다. 칸타쿠제노스에게 항복한 마을은 예외였다. 마누일과 요반 올리버의 딸의 결혼이 예정되었지만, 두샨의 동맹 파기로 무산되었다.[21] 흐렐랴 사후 멜니크는 두샨에게 점령되었다.[22]

1342년 여름 말, 칸타쿠제노스는 그리스-세르비아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여 데모티카로 가려 했다.[23] 세레스 포위는 역병으로 실패했고, 칸타쿠제노스는 500명과 세르비아로 철수했다. 두샨은 보데나를 공략했다.[24] 세르비아군은 플로리나카스토리아를 점령하여 서마케도니아를 지배했고, 알바니아로 세력을 확대하여 1343년 여름까지 앙주 가문의 두라키온을 제외한 알바니아 전역을 지배했다.[25] 칸타쿠제노스 지지자들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폭동이 발생했다.[26]

가을 말, 안나는 두샨에게 칸타쿠제노스 항복을 종용했지만, 두샨은 거절했다.[27] 테살리아 귀족들이 칸타쿠제노스에게 지배권을 제안했고, 칸타쿠제노스는 요한 안젤로스를 테살리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앙겔로스는 에피로스를 칸타쿠제노스 진영으로 끌어들였고, 테살리아에서 이익을 보았다.[28] 칸타쿠제노스의 마케도니아 침입은 세레스에서 실패했다.[99] 헬레네는 불가리아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반 알렉산다르는 소극적이었다.

시노드를 주재하는 황제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우무르 베이가 1342년 말 또는 1343년 초에 군대를 이끌고 데모티카를 구원했다. 칸타쿠제노스는 독립적인 기반을 확보하고 두샨에게 덜 의존하게 되었다. 1343년 4월, 칸타쿠제노스는 베로이아를 설득하여 두샨 대신 자신에게 항복하게 했고, 다른 요새들도 칸타쿠제노스에게 항복했다. 두샨은 섭정 정부와 1343년 여름에 동맹을 맺었다.[30]

칸타쿠제노스는 테살로니키 외곽에 진을 쳤지만, 아포카우코스의 함대가 도착하여 칸타쿠제노스는 마케도니아에 갇혔다. 우무르가 다시 칸타쿠제노스를 도왔지만, 강화된 테살로니키는 포위에 견뎠다.[31] 칸타쿠제노스는 1343년 말 마누엘을 베로이아와 서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남겨두고 데모티카로 진군하여 아내와 재회했다. 도중에 트라키아 요새들을 점령했지만, 페리테오리온 포위는 실패했다. 코모티니와 로도피 요새들을 공략했다.[32] 트라키아 도시와 요새들은 칸타쿠제노스파가 되었지만, 터키군 약탈로 큰 희생을 치렀다.[33] 1344년 말, 요안니스 바타체스, 예루살렘 총대주교 라자로스, 마누엘 아포카우코스 등이 칸타쿠제노스 측으로 이반했다. 칸타쿠제노스는 1345년 1월 아드리아노폴을 점령했고, 같은 해 여름 트라키아 전역을 장악했다.

섭정 정부와 두샨의 동맹은 두샨에게만 이익이었고, 두샨은 마케도니아와 에피루스 전역을 점령했다. 1345년 말, 세레스, 테살로니키, 베로이아만이 세르비아 지배 밖에 있었다.[34] 섭정 정부는 어려움에 빠졌다. 국고는 고갈되었고, 안나는 1343년 8월 제관 보석을 베네치아에 전당 잡아야 했다. 트라키아 약탈로 콘스탄티노플은 식량 부족을 겪었다. 안나는 로마 교황에게 지원을 호소하며 복종을 약속하고, 팔라마스 지지자들을 박해했다.[35]

섭정 정부는 1344년 불가리아와 동맹했지만, 필리포폴리스 등 9개 마을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반 알렉산다르는 칸타쿠제노스 군대에 직접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36] 모음칠은 섭정 정부 측으로 전향했다.[37] 1344년 초, 우무르는 라틴인들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떠났고, 터키군은 스테파니아나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에게 승리했다.[38] 칸타쿠제노스는 우무르의 지원으로 두샨과 아포카우코스의 공격을 막았다.[39]

칸타쿠제노스와 우무르는 불가리아를 습격한 후 몸칠을 공격했다. 몸칠은 무주지에서 준독립적 군주로 자리 잡았다. 1345년 7월 7일, 페리테오리온 전투에서 몸칠 군대는 괴멸되었고, 몸칠은 전사했다.[37] 두샨은 세레스를 포위했고, 칸타쿠제노스는 철수를 요구했지만, 아포카우코스 살해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40]

4. 3. 내전의 종식과 칸타쿠제노스의 승리 (1345년-1347년)

1345년 초, 칸타쿠제노스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을 섭정에게 보내 화해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섭정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했는데, 수도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진 아포카우코스는 일련의 사형을 시작했고, 정치범 수용을 위한 새로운 감옥 건설을 명령했다. 1345년 6월 11일, 아포카우코스는 죄수들에게 린치를 당해 살해되었다.[41]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그의 치세는 1341년부터 1391년까지로, 비잔틴 제국이 반복되는 내전으로 최종 분열되는 시기였다.


칸타쿠제노스는 지지자들의 권유로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지만, 총대주교와 황후 안나는 빠르게 상황을 통제했다.[42] 동시에 칸타쿠제노스는 일련의 좌절을 겪었다. 테살로니카의 명목상 총독이었던 요안니스 아포카우코스가 칸타쿠제노스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도시를 항복할 계획을 밝혔지만, 열심당원들에 의해 좌절되어 살해되었다.[41] 요안니스 바타체스는 다시 편을 바꾸었다가 얼마 후 살해되었다.[42] 칸타쿠제노스는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었던 아이딘의 우무르의 지원을 잃었고, 오르한과 동맹을 맺었다.[42]

1345년 9월, 세레스가 두샨에게 함락되었다. 두샨은 1346년 4월 16일 스코페에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로 즉위하여 세르비아 제국을 건국했다.[43] 칸타쿠제노스는 1346년 5월 21일 아드리아노플에서 즉위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를 파문했다.[44] 칸타쿠제노스는 딸 테오도라 칸타쿠제네를 오스만 에미르와 결혼시키면서 오르한과의 관계를 굳건히 했다.[44]

황후 안나의 외세 지원 요청은 실패했고, 도브루자 전제공국의 지원군은 격파되었다. 사루한 에미레이트의 병력은 트라키아를 약탈한 후 칸타쿠제노스 군대에 합류했다.[45] 1346년 5월 19일에는 성 소피아 대성당의 일부가 붕괴되었다.[46]

1346년 여름, 칸타쿠제노스는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셀림브리아로 이동했다.[47] 그는 도시가 항복할 때까지 거의 1년을 기다렸다. 콘스탄티노플의 칸타쿠제노스 지지 세력이 증가했고,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황후는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와 사이가 벌어졌고, 그는 1347년 2월 2일 폐위되었다. 같은 날 밤, 칸타쿠제노스의 지지자들이 황금 문을 열었고, 칸타쿠제노스는 1,000명의 군대와 함께 도시에 들어갔다.[47]

저항 없이 그의 군대는 블라케르네 궁전을 포위했지만, 황후는 며칠 동안 항복을 거부했다. 칸타쿠제노스의 군인들이 궁전 단지를 공격했고, 요안니스 5세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합의를 받아들이도록 했다.[47]

5. 내전의 결과

1347년 2월 8일, 칸타쿠제노스가 10년간 선임 황제로 즉위하고, 이후 요안니스 5세와 공동 통치하는 협정이 체결되면서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칸타쿠제노스는 자신에게 맞섰던 모든 이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48] 이 협정의 일환으로 요안니스 5세는 칸타쿠제노스의 딸 헬레나와 결혼했으며, 5월에 칸타쿠제노스는 블라케르나이 성 마리아 교회에서 다시 대관식을 거행했다.[49] 도널드 니콜은 이 오랜 갈등이 "5년 전에 합의할 수 있었던 조건"으로, 제국에 큰 고통, 증오, 파괴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무의미했다고 평가했다.

칸타쿠제노스의 온건함과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는 보편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팔레올로고스 가문 지지자들은 여전히 그를 불신했고, 칸타쿠제노스 지지자들은 팔레올로고스 가문을 완전히 몰아내고 칸타쿠제노스 왕가를 세우기를 원했다. 칸타쿠제노스의 장남 마태오는 요안니스 5세에게 밀려난 것에 분개하여, 서부 트라키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반자치 분봉령을 받아야 했다. 이 영토는 스테판 두샨의 세르비아에 대한 변방 역할도 수행했다.[50] 비잔틴 영토 중 테살로니카의 젤로트는 세르비아에 포위된 고립된 월경지였으나, 1350년 칸타쿠제노스에게 정복될 때까지 새 협정을 거부하고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1347년 이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는 제국 재건을 시도했으나 제한적인 성공만 거두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두샨과 그의 장군 프렐류브가 1347-1348년에 칸타쿠제노스의 마케도니아 거점, 에페이로스, 테살리아를 점령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51] 갈라타의 제노바 상인에 대한 식량 및 해상 무역 의존성을 끊으려는 시도는 비잔틴-제노바 전쟁을 야기했고, 1352년 타협적인 평화로 종결되었다.[52] 1350년, 칸타쿠제노스는 두샨이 보스니아 전쟁에 집중하는 틈을 타 테살로니카를 탈환하고, 베로이아, 보데나 등 마케도니아 도시들을 되찾았지만, 세르비아는 곧바로 이를 다시 점령하여 테살로니카만이 비잔틴 수중에 남았다.[53]

동부 트라키아의 마태오 칸타쿠제노스와 서부 트라키아의 요안니스 5세 간의 관계 악화는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졌다. 1352년, 요안니스 5세는 베네치아와 튀르크 군대의 지원을 받아 마태오를 공격했다.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는 10,000명의 오스만 군대를 파견하여 아들을 지원하고 트라키아 도시들을 탈환했지만, 이 과정에서 약탈이 자행되었다. 1352년 10월, 데모티카에서 오스만군은 요안니스 5세에게 제공된 4,000명의 세르비아군을 격파했다.[54] 이는 오스만군의 유럽 내 첫 승리였으며, 2년 후 갈리폴리 점령은 오스만 제국의 발칸 정복의 시작을 알리는 불길한 전조였다. 이는 한 세기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절정에 달했다. 요안니스 5세는 테네도스 섬으로 피신하여 1353년 3월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는 마태오를 공동 황제로 옹립했지만, 요안니스 5세는 제노바의 지원과 칸타쿠제노스의 인기 하락에 힘입어 1354년 11월 수도에 입성했다. 요안니스 6세는 퇴위하여 수도원에 은거했고, 마태오는 1357년까지 트라키아에서 저항하다 퇴위하여 요안니스 5세가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55]

1355년의 비잔틴 제국(분홍색)과 주변 지역. 내전과 주변국의 간섭으로 비잔틴 제국은 영토를 크게 잃었고, 세르비아(왼쪽 회색)는 크게 확장했다.

5. 1. 비잔틴 제국의 쇠퇴 가속화

내전은 비잔틴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안젤리키 라이우는 "두 번째 내전이 끝난 후 비잔티움은 이름뿐인 제국이었다"고 평가했으며,[56] 에바 데 브리스-반 데르 벨덴은 이를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멸망' 사이의 단절점"이라고 지적했다.[56]

비잔틴 제국의 분열과 외국 군대(특히 세르비아인과 투르크인)에 대한 의존은 이들의 팽창주의를 부추겼다. 특히 스테판 두샨은 내전을 이용하여 비잔티움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국가를 확장했다.[56] 장기화된 분쟁은 비잔틴 국가의 자원을 고갈시켰고, 앨리스-메리 탈보트의 표현대로 "도시에 무정부 상태를, 시골에 황폐함"을 초래했다.[56] 제국에 남아있는 가장 큰 영토인 트라키아는 파괴되어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불가리아와 크림 반도에서 수입하는 곡물에 의존하게 되었다.[56]

무역은 중단되었고, 재무부는 그레고라스의 말에 따르면 "에피쿠로스의 원자밖에 없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궁핍했다. 칸타쿠제노스는 자신의 개인 재산을 모두 소진했고, 안나 황후는 제국이 베네치아에 막대한 빚을 지게 했다. 전쟁은 또한 지방의 중앙 집권적인 제국 행정부의 붕괴로 이어져 트라키아 시골에 대한 통제가 지방 영주가 운영하는 장원제로 바뀌었다. 영주들은 상당한 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면제 또는 노골적인 회피를 통해 제국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을 피했다.[57] 1347년 흑사병 발생과 그 재발은 제국의 세금 및 징병 기반을 더욱 줄여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감소시켰다.[58]

1352년 내전이 재개되면서, 안드로니코스 3세 치하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회복의 기회는 사라졌다.[59] 이후 비잔티움은 더 강력한 이웃 국가의 위협 아래 놓여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할 수 없었고, 자원 부족과 내부 분쟁으로 고통받았다.[5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외부 상황과 능숙한 외교를 통해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한 세기 더 생존했다.[59] 비잔틴의 모레아 월경지만이 비교적 고립되어 내전의 피해를 면하면서 번영을 유지했다. 1349년 마누엘 칸타쿠제노스를 전제공으로 임명하면서 반독립적인 모레아 전제공국이 건설되었고, 이 곳은 1460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기 전 비잔틴 세계의 마지막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경험했다.[60]

5. 2. 사회적 분열의 심화와 헤시카즘 논쟁

1347년 2월 8일, 내전은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10년간 선임 황제로서 통치하고, 그 후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와 동등하게 통치한다는 협정으로 공식 종료되었다. 칸타쿠제노스는 자신에게 대항하여 싸운 모든 사람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48] 이 조약을 확정하기 위해 요안니스 5세는 칸타쿠제노스의 딸 헬레나와 결혼했고, 5월에 칸타쿠제노스는 블라케르나이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다시 대관식을 치렀다.[49] 도널드 니콜은 이 오랜 갈등이 무의미했으며, "5년 전에 합의할 수 있었고 제국에 많은 고통, 증오, 파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칸타쿠제노스의 온건함과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는 보편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지지자들은 여전히 그를 불신했고, 칸타쿠제노스의 추종자들은 팔레올로고스를 즉시 폐위하고 칸타쿠제노스 가문을 통치 왕조로 세우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다. 칸타쿠제노스의 장남인 마태오 역시 요안니스 5세에게 밀려난 것에 분개하여, 서부 트라키아의 상당 부분을 덮는 반자치 분봉령을 만들어 달래야 했는데, 이는 두샨의 세르비아에 대한 변방 역할도 했다.[50] 남은 비잔틴 영토 중에서는 테살로니카의 젤로트만이 세르비아인에게 둘러싸인 고립된 월경지였는데, 새로운 협정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1350년 칸타쿠제노스가 그들을 정복할 때까지 ''사실상'' 독립적인 상태로 존속했다.

5. 3. 모레아 전제공국의 성립

1349년 마누엘 칸타쿠제노스가 모레아의 전제공으로 임명되면서 반독립적인 모레아스 전제공국이 성립되었다.[134] 모레아는 비교적 고립되어 내전의 피해를 입지 않아 번영을 지속했고, 1460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할 때까지 비잔틴 세계에서 마지막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다.[1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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