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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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안니스 5세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들이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는 긴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내전과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대로 제국의 쇠퇴를 겪었다. 섭정 정부와의 갈등, 세르비아와의 전쟁, 그리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와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으며, 가족 문제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1391년에 사망했다. 그의 치세는 제국의 축소와 쇠퇴를 가져왔고,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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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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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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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
로마자 표기 | Ioannes V Palaiologos |
그리스어 | Ἰωάννης Παλαιολόγος |
통치 | |
칭호 |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 군주 |
제1차 재위 기간 | 1341년 11월 19일 – 1376년 8월 12일 |
제1차 재위 종류 | 1차 통치 |
선임자 |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
계승자 |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 |
제2차 재위 기간 | 1379년 7월 1일 – 1390년 4월 14일 |
제2차 재위 종류 | 2차 통치 |
계승자2 |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
제3차 재위 기간 | 1390년 9월 17일 – 1391년 2월 16일 |
제3차 재위 종류 | 3차 통치 |
계승자3 |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
공동 통치자 |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332년 6월 18일 |
출생지 | 디디모티호, 동로마 제국 |
사망일 | 1391년 2월 16일 (58세)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매장지 | 알 수 없음 |
종교 | 동방 정교회에서 동방 가톨릭교회로 개종 |
가족 | |
배우자 | 헬레나 칸타쿠제네 |
자녀 |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이름 미상 딸 4명 잠피아 팔레올로기나 (병약) |
가문 | 팔레올로고스 왕조 |
아버지 |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
어머니 | 사보이아의 안나 |
2. 생애
요안니스 5세는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와 그의 아내 안나의 아들이었다. 그의 긴 통치는 수많은 내전과 오스만 투르크 세력의 확대로 점철되었다.[1]
1341년 부친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지만, 이로 인해 황태후 안나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14세 카레카스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이들은 부친의 측근이었던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와 대립하며 5년 이상 지속된 내전을 겪었다. 결국 1347년 칸타쿠제노스가 승리하여 요안니스 5세와 자신의 딸 헬레네를 결혼시키고 공동 황제가 되었다.
1352년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과 동맹을 맺고 요안네스 6세에게 대항했지만, 오스만 군주 오르한의 지원을 받은 요안네스 6세에게 패배했다. 이후 레스보스 섬의 제노바인 영주 가틸루시오 가문의 도움으로 1354년 복귀하여 요안네스 6세를 퇴위시켰다.
그러나 1341년 내전 이후 제국은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과 테살리아 등 발칸 반도 서부 주요 영토를 세르비아에게 상실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에 진출하여 1360년대에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비롯한 수도 주변 지역을 장악했다. 요안니스 5세는 서유럽과의 동맹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1370년 베네치아에서 부채 문제로 구속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373년 장남 안드로니코스 4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376년 안드로니코스 4세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요안니스 5세를 폐위시켰지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1세의 도움으로 1381년 복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1385년 안드로니코스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요한네스 7세가 1390년 쿠데타를 일으켜 요안니스 5세를 다시 폐위시켰다. 하지만 차남 마누엘 2세와 오스만 제국의 도움으로 복위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바야지드 1세는 필라델피아 할양, 콘스탄티노폴리스 내 카디 설치, 성벽 요새 철거 등 가혹한 요구를 했고, 요안니스 5세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심려가 겹친 그는 1391년 사망했다.
2. 1. 초기 통치와 첫 번째 내전 (1341년-1347년)
요안니스 5세는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는 즉시 내전으로 시작되었는데,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칭 섭정인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와 어머니 안나,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메가스 두크스''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로 구성된 자칭 섭정 위원회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 내전 중인 1343년, 안나는 비잔틴 제국 왕관 보석을 30000두카토 (이탈리아 동전)에 저당 잡혔다. 1346년부터 1349년까지 흑사병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쓸었다.1341년,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9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정의 실권은 황태후 안나 (사보이아 백작 가문 출신)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14세 카레카스가 장악하여 섭정 정부를 수립했다. 섭정 정부는 부친의 측근이었던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와 대립하여 5년 이상이나 되는 혼란스러운 내전으로 돌입했다.[1] 내전은 1347년 칸타쿠제노스의 승리로 끝나, 그는 딸 헬레네를 요한네스 5세와 결혼시켜 장인이 된 후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를 칭하고 실권을 장악했다.[1]
2. 2. 두 번째 내전 (1352년-1357년)과 복위
1347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승리하면서, 그의 아들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가 1352년 요안니스 5세에게 공격받아 두 번째 내전이 발발했다.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두샨은 4,000명의 세르비아 기병을 보냈다.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 1352년 10월에 10,000명의 오스만 튀르크군이 데메티카(Didymoteicho)에 나타나 요안니스 5세의 세르비아 동맹군과 야전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유럽 최초의 영토를 침페와 갈리폴리에서 획득했다. 13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한 요안니스 5세는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를 폐위시키고 삭발시켰다. 1357년 마태오스 또한 세르비아인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요안니스 5세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뒤 폐위되었다.요안네스 5세는 1352년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과 동맹을 맺고 요안네스 6세에게 선전포고를 했지만, 요안네스 6세를 지원한 오스만 군주 오르한에게 패배하여 일시적으로 망명했다. 이후 레스보스 섬의 제노바인 영주 가틸루시오 가문의 지원으로 귀국, 1354년 말 요안네스 6세를 퇴위시키고 지배권을 회복했다.
2. 3. 거듭되는 시련과 오스만 제국의 압박
1366년, 요안니스 5세는 헝가리 왕국의 국왕 헝가리의 러요시 1세를 만나기 위해 왕립 도시 부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요안니스는 러요시가 말에서 내려 걸어왔지만 자신은 말에 탄 채로 있어 국왕을 불쾌하게 했다. 헝가리 국왕은 요안니스가 가톨릭교회에 가입하거나, 적어도 교황의 수위권을 총대주교가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지원을 제안했다. 황제는 빈손으로 부다 궁정을 떠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도움을 구하기 위해 유럽 여행을 계속했다.[4]요한네스 6세와 동맹을 맺었던 오스만 제국은 요안니스를 계속 압박했다. 오스만 술탄의 아들 수레이만 파샤는 유럽에서 군대를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와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하고 황제로부터 공물을 징수할 수 있었다. 요안니스 5세는 1367년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교회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총대주교를 교황의 수위권에 굴복시키는 것을 제안하면서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1369년 10월, 나폴리를 거쳐 로마로 여행한 요안니스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을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인정했다.[5] 그는 비잔틴 교회의 성직자들과 동행하지 않았고, 이 움직임은 분열을 종식시키지 못했다.[6] 그는 663년 황제 콘스탄스 2세의 방문 이후 마지막으로 로마를 방문한 비잔틴 황제가 되었다.
전쟁으로 궁핍해진 그는 1369년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채무자로 구금되었고, 나중에 불가리아 영토를 통과하는 길에 체포되었다. 1371년, 그는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무라드는 나중에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가 1376년에 그를 폐위시켰을 때 그를 도왔다.
1360년대 몇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비롯한 수도의 주변 지역을 모두 지배하에 두었다. 복위에 성공했지만, 요안네스 5세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고 해결할 능력도, 방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문제 해결을 서유럽 세력과의 동맹에 구하고 적극적으로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성과는 전혀 얻지 못한 채, 1370년에는 동맹 교섭을 위해 직접 간 베네치아에서 부채 상환 문제로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1373년에 일으킨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1376년의 쿠데타는 성공하여 요한네스는 차남 마누엘 2세와 함께 폐위 및 투옥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복위를 도운 것은 숙적인 오스만 제국이었다. 술탄 무라트 1세는 그의 복위를 돕는 대신 속국이 될 것을 요구했다. 복위한 요한네스 5세는 1381년에 어쩔 수 없이 무라트 1세에게 신종했고,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2. 4. 아들과 손자와의 갈등, 그리고 죽음
1373년 요안니스 5세의 장남 안드로니코스 4세가 일으킨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1376년의 쿠데타는 성공하여 요안니스 5세는 차남 마누엘 2세와 함께 폐위 및 투옥되었다.[7]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복위를 도운 것은 숙적인 오스만 제국이었다.[7] 술탄 무라트 1세는 그의 복위를 돕는 대신 속국이 될 것을 요구했고, 1381년 복위한 요안니스 5세는 어쩔 수 없이 무라트 1세에게 신종하여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7] 게다가 안드로니코스 4세는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인 보호 아래 수도 근교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고, 1385년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아들 (요안니스 5세의 손자) 요한네스 7세가 찬탈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7]1390년, 요한네스 7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조부 요안니스 5세를 폐위시켰지만, 마누엘 2세의 구원과 오스만 제국의 지원으로 반격에 성공하여 복위했다.[7] 이후 마누엘 2세와의 공동 통치 체제가 시작되었다.[7] 그러나 오스만 제국 측은 이번에도 "구원의 대가"를 요구했다.[7] 바야지드 1세의 요구는 소아시아 도시 필라델피아의 할양,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카디 설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부속 요새 철거 등 다방면에 걸친 가혹한 것이었다.[7] 요안니스 5세는 속수무책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심려가 겹쳐 다음 해 1391년에 붕어했다.[7]
같은 해, 요한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금 문 강화를 명령했으며, 도시 안팎의 쇠퇴한 교회에서 가져온 대리석을 사용했다.[7] 이 공사가 완료되자, 바예지드 1세는 요한에게 이 새로운 구조물을 파괴하라고 요구하며, 전쟁과 그가 포로로 잡고 있던 아들 마누엘의 실명을 위협했다.[7] 요한 5세는 술탄의 명령을 수행했지만, 이 굴욕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1391년 2월 16일에 사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호데곤 수도원에 묻혔다.[7]
3. 평가
요안니스 5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높지 않다. 그의 통치 기간은 로마 제국의 쇠퇴와 영토 축소 시기와 겹쳤으며, 그는 상황을 주도하거나 효과적인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 또한, 불우한 환경 탓에 현실 문제에 무관심하고 무기력해졌다는 기록도 있으며,[1] 심지어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혹평하는 역사가도 있을 정도이다.[1]
제위 쟁탈전에서 그를 돕고 결국 제위를 계승한 차남 마누엘 2세와의 관계조차 원만하지 못했다.[1] 요안니스 5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안드로니코스 4세에게 양보해야 했고, 마누엘 2세에게는 냉담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1] 이는 안드로니코스 4세를 후계자로 삼고, 마누엘 2세의 황제 계승권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
1380년대에 마누엘 2세가 수도를 떠나 테살로니키로 망명한 몇 년 동안, 부자간의 신뢰 관계는 아버지의 고뇌와 아들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1] 마지막 순간에 두 사람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제국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연장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1]
4. 가족 관계
요안니스 5세는 1347년 5월 28일, 공동 황제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와 이리니 아사니나의 딸인 헬레나 칸타쿠제네와 결혼하여 적어도 11명의 자녀(5남 6녀)를 두었다.[8]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 | 1348년 4월 2일 – 1385년 6월 28일 | |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 1349년경 – 1362년 이후 | 오르한 1세와 테오도라 칸타쿠제네의 아들 할릴 베이와 결혼, 귄두즈 베이와 오메르 베이 두 아들을 둠 |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 1350년 6월 27일 – 1425년 7월 21일 | |
테오도르 1세 팔레올로고스, 모레아 영주 | 1355년경 – 1407년 6월 24일 | 1404년 그의 딸은 바예지드 1세의 아들 쉴레이만 첼레비와 결혼 |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 1376/1377년 사망 | 트라페준타 제국의 알렉시우스 3세로부터 왕위를 주장 |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 무라드 1세와 결혼 | |
(이름 미상) | 키프로스의 피터 2세와 약혼 | |
(이름 미상) | 1373년에 수도원에 들어감 | |
(이름 미상) | 무라드 1세의 아들인 바예지드 1세와 결혼 | |
(이름 미상) | 무라드 1세의 아들인 야쿠브 첼레비와 결혼 | |
잠피아 팔레올로기나 | 사생아, 관료 힐라리오 도리아와 결혼 |
참조
[1]
서적
Byzantine Constantinople: Monuments, Topography and Everyday Life
https://books.google[...]
Brill
[2]
웹사이트
Prosopographisches Lexikon der Palaiologenzeit, "Palaiologos Ioannes V. Komnenos"
https://archive.org/[...]
[3]
서적
Επίτομο Γεωγραφικό Λεξικό της Ελλάδος (Geographical Dictionary of Greece)
Ερμής
2001
[4]
서적
Lajos király krónikája, Névtelen szerző: Geszta Lajos királyról
Osisris Kiadó
2000
[5]
웹사이트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Chapter 66 (Visit of John Palaeologus to Urban V. at Rome, A.D. 1369, 13 October etc.)
https://www.ccel.org[...]
[6]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324–1453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52
[7]
간행물
The tombs of the Palaiologan emperors
2018
[8]
논문
John V's Daughters: A Palaiologan Puzzle
https://www.jstor.or[...]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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