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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 1세 드 불로뉴 여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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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틸드 1세 드 불로뉴 여백작은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의 딸로, 1125년 모르탱 백작 스테판과 결혼하여 불로뉴 백작위를 상속받았다. 남편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면서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고, 잉글랜드 내전 동안 남편을 강력하게 지원했다. 성전 기사단을 후원하고, 1147년 성 캐서린 왕립 재단을 설립했으며, 1152년 사망하여 페버샴 수도원에 묻혔다. 슬하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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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드 1세 드 불로뉴 여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틸다
마틸다
이름마틸다
재위1135년 ~ 1152년
출생일1105년경
출생지프랑스, 불로뉴
사망일1152년 5월 3일
사망지잉글랜드, 에식스, 헤딩엄 성
매장지잉글랜드, 켄트 주, 페버샴 수도원
작위
잉글랜드 왕비1135년 12월 22일 ~ 1152년 5월 3일
대관식1136년 3월 22일
불로뉴 여백작1125년 ~ 1152년 5월 3일
가문
가문플랑드르 가문
아버지외스타슈 3세 드 불로뉴 백작
어머니메리 오브 스코틀랜드
배우자스티븐
결혼1125년
자녀
자녀 목록외스타슈 4세 드 불로뉴 백작
마리 1세 드 불로뉴 여백작
윌리엄 1세 드 불로뉴 백작
기타
참전무정부 시대
주요 참전윈체스터 전투

2. 배경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의 딸인 마틸다는 1125년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주선으로 블로와 백작 에티엔 2세의 아들인 에티엔(스티븐)과 결혼했다. 아버지 외스타슈 3세가 사망하자 마틸드는 남편 스티븐과 함께 불로뉴 백작이 되었다.

1135년 헨리 1세가 사망하자, 마틸드의 남편 스티븐은 모드 황후를 제치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12월 26일, 스티븐과 마틸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각각 잉글랜드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스티븐 왕은 용감한 전사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다소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마틸드는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뛰어난 용기와 결단력으로 남편을 보좌했다.[10]

스티븐 왕의 치세는 모드 황후와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한 내전, 이른바 무정부 시대로 점철되었다. 이 시기 마틸드는 남편 스티븐을 강력하게 지원했다. 특히 1141년 2월, 제1차 링컨 전투에서 스티븐이 모드 황후의 이복 오빠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마틸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탈환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글로스터 백작을 포로로 잡아 남편 스티븐과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11]

마틸드는 내전이 끝나기 전인 1152년에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스티븐 왕에게 큰 슬픔을 안겼으며, 이는 이후 스티븐이 모드 황후의 아들 앙리(훗날 헨리 2세)와 화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1153년 장남 외스타슈마저 사망하자 스티븐과 앙리의 화해는 더욱 가속화되었고, 같은 해 11월 워링퍼드 협정(윈체스터 협정)을 통해 앙리가 스티븐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하자 앙리가 헨리 2세로 즉위했다. 마틸드의 유해는 켄트의 페버샴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이후 남편 스티븐과 장남 외스타슈도 같은 곳에 묻혔다.[12]

2. 1. 가문 및 혈통

마틸다는 프랑스 불로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 드 불로뉴였으며, 부계 숙부로는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였던 고드프로아 드 부용과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가 있었다.

어머니 메리는 스코틀랜드 왕 말콤 3세와 왕비 성 마가렛의 딸이었다. 외할머니인 성 마가렛을 통해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왕의 후손이었다.[8][9] 또한, 어머니 메리는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왕비 마틸다 오브 스코틀랜드와 자매였기에, 마틸드는 모드 황후와는 외사촌 관계였다.[8][9] (마틸드의 남편 스티븐은 모드 황후와 부계 사촌 관계였다.)

3. 불로뉴 여백작

1125년,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주선으로, 잉글랜드에 큰 영지를 소유한 모르탱 백작 블루아의 스테판과 결혼했다. 같은 해 아버지 외스타슈 3세가 퇴위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후 사망하자[8][9], 마틸다는 불로뉴 백작령과 잉글랜드 내 영지를 상속받았다. 이로써 마틸다와 그녀의 남편 스테판은 불로뉴 백작령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 치세 동안, 마틸다와 스테판 부부는 두 자녀를 두었다. 헨리 1세는 그들에게 런던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1] 아들은 마틸다의 삼촌인 예루살렘의 발두앵 1세의 이름을 따서 발두앵이라고 지었고[1], 딸의 이름은 마틸다였다. 그러나 아들 발두앵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으며, 딸 마틸다 역시 어린 시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녀는 우스터 백작인 왈레랑 드 뫼랑과 약혼할 정도로 오래 살았다.[1]

4. 잉글랜드 왕비

1135년 잉글랜드의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스테판불로뉴가 가장 가까운 항구를 통제하는 이점을 활용하여 재빨리 잉글랜드로 건너가 경쟁자인 마틸다 여황제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마틸드는 아들 윌리엄을 낳은 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향했다. 윌리엄은 훗날 불로뉴 백작이 된다. 마틸드는 1136년 3월 22일 부활절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여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1]

남편 스테판은 용감한 전사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다소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 반면, 마틸드는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조용하고 매력적인 모습 이면에 기사 못지않은 용기와 결단력을 갖추고 남편을 적극적으로 도왔다.[10] 이후 무정부 시대로 불리는 내전 기간 동안 마틸다는 남편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 (자세한 내용은 #혼란기(무정부 시대)에서의 역할 참조)

마틸다는 1152년 5월 잉글랜드 에식스의 헤딩엄 성에서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그녀와 남편 스테판이 함께 설립한 페버샴 수도원에 묻혔다.[1] 마틸드의 죽음은 스테판에게 큰 슬픔을 안겼고, 이후 모드의 아들인 앙리(훗날 헨리 2세)와의 화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마틸드의 유해는 켄트의 페버샴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남편 스테판과 장남 외스타슈 역시 같은 곳에 묻혔다.[12]

4. 1. 혼란기(무정부 시대)에서의 역할

마틸다는 성전 기사단의 후원자였다. 그녀는 1137년 에식스에 크레싱 사원을, 1139년 옥스퍼드에 템플 코울리를 설립했다.[2] 선임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마틸다와 마찬가지로 알드게이트 성 삼위일체 수도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수도원장을 자신의 고해 신부로 삼고 두 자녀를 그곳에 묻었다.[3]

혼란기로 알려진 내전 기간 동안 마틸다는 남편 스테판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임을 입증했다.[4][10] 1138년 잉글랜드가 침략당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지인 불로뉴와 동맹국 플랑드르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도버 성을 성공적으로 포위했다. 이후 북쪽으로 이동하여 더럼에서 1139년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와 조약을 체결했다.[5]

1141년 2월, 링컨 전투에서 남편 스테판이 마틸다 황후 측에 포로로 잡히자, 마틸다는 왕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이프르의 윌리엄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일으켰다. 마틸다 황후가 런던에서 대관식을 준비하자, 불로뉴의 마틸다는 스테판의 동생인 블로이스의 헨리 주교와 협력하여 황후 세력을 도시에서 몰아냈다. 이후 마틸다 황후가 윈체스터에서 헨리 주교를 포위하자, 불로뉴의 마틸다는 자신의 군대에 포위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어진 윈체스터 전투에서 마틸다 황후의 이복동생이자 주요 지휘관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 1세를 사로잡았다. 두 마틸다는 결국 포로 교환에 합의했고, 이 교환을 통해 스테판은 풀려나 다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6][11]

1147년, 마틸다는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자선 단체인 성 캐서린 왕립 재단을 설립했다.[7]

5. 죽음

1152년, 마틸드는 내전의 종결을 지켜보지 못한 채 남편 스티븐보다 먼저 사망했다.[11] 스티븐 왕은 아내의 죽음에 깊이 슬퍼했으며, 모드의 아들인 앙리와의 화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듬해인 1153년 8월 장남 외스타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화해 논의는 더욱 진전되었다. 결국 1153년 11월, 스티븐과 앙리는 워링퍼드 협정(윈체스터 협정이라고도 함)을 맺어 화해했다. 1154년 스티븐이 사망하자 협정에 따라 앙리가 헨리 2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마틸드의 유해는 켄트의 페버샴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이후 남편 스티븐과 장남 외스타슈 역시 같은 수도원에 묻혔다.[12]

6. 자녀

스테판과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다.


  • 보두앵 (1126년경 ~ 1135년 이전)
  • 외스타슈 4세 (1130년경 ~ 1153년): 불로뉴 백작. 프랑스의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마오 (불로뉴의 마틸다, 1133/4년 ~ 1135년 이전 추정): 우스터 백작 1대 왈레랑 드 보몽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마리 (1136년 ~ 1182년): 불로뉴 여백작. 알자스의 마태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기욤 1세 (1137년경 ~ 1159년): 불로뉴 백작, 모르탱 백작, 서리 백작. 이자벨 드 바렌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참조

[1] 서적 Lives of the Queens of England
[2] 서적 Queens Consort, England's Medieval Queens
[3] 문서
[4] 서적 Norman to Early Plantagenet Consorts: Power, Influence, and Dynasty https://books.google[...] Springer Nature 2023-05-16
[5] 서적 Queens Consort, England's Medieval Queens
[6] 문서
[7] 웹사이트 History page of the Foundation's official website https://www.rfsk.org[...]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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