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임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임완은 고려 시대의 인물로, 본래 송나라 장주 출신이다. 1112년 장삿배를 따라 개경으로 들어와 11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에 이르렀다. 인종 때 서적소 고문과 국자사업 지제고를 역임했으며, 1135년 묘청이 백성을 미혹시키고 서경에 대화궁을 건립하려 하자 인종에게 묘청의 처형을 상소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52년 사망 - 콘라트 3세
    콘라트 3세는 1138년 로마 왕으로 선출된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첫 번째 독일 왕이었으며,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조카 프리드리히 3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 사망했다.
  • 1152년 사망 - 마틸드 1세 드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 1세 드 불로뉴 여백작은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의 딸로, 남편 스테판과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으며, 잉글랜드 내전에서 남편을 지원하고 성전 기사단을 후원하다가 1152년에 사망했다.
  • 1088년 출생 - 헝가리의 이리니
    헝가리의 이리니는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의 딸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 요한 2세 콤네노스와 결혼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1134년 사망 후 성녀로 추대되었다.
  • 1088년 출생 - 외위스테인 1세
    외위스테인 1세는 12세기 초 노르웨이의 공동 국왕으로, 형제들과 함께 국가를 통치하며 국내 문제에 집중하여 국가의 번영을 이끌고 다양한 건설 사업을 추진하여 '평화의 왕'으로 묘사된다.
  •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 - 나세
    나세는 원나라에서 귀화하여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 기여하고, 진포 해전에서 왜선을 격파하는 등 활약하다가 조선 시대에 왜적을 막다 사망한 무관이다.
  •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 - 김충선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으로 참전했으나 조선에 귀순하여 공을 세웠고,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에 명분이 없다고 여겨 귀순했으며, 이후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공을 세워 김해 김씨 성과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화포와 조총 제조 기술을 조선에 전수하는 데 기여하는 등 조선의 안보에 공헌하였다.
임완
기본 정보
한글임완
한자林完
일본어 가나りんかん
로마자 표기alphabet_type: 문화관광부 2000년식
alphabet: Im Wan

2. 생애

임완은 본래 송나라 장주 사람으로 1112년(예종 7년)에 장삿배를 따라 개경으로 들어왔다.[3][4] 1114년(예종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에 이르렀다.[5] 인종이 수창궁 옆에 서적소를 설치하자 김부철 등과 함께 고문이 되었고, 국자사업지제고에 임명되었다.[1][5] 1135년(인종 13년)에 국자사업 지제고로 있을 때, 왕에게 묘청이 상하를 현혹시키고 서경에 태화궁을 세우려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처형해야 한다고 극간하였다.[5] 묘청이 백성을 미혹시키고, 서경대화궁을 건립하기 위해 백성을 괴롭히자, 인종에게 묘청의 처형상소했다.[1]

2. 1. 초기 생애

임완은 본래 송나라 장주 사람으로 1112년(예종 7년)에 장삿배를 따라 개경으로 들어왔다.[3][4] 1114년(예종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에 이르렀다.[5] 이때에 인종이 서적소를 설치하자 김부철 등과 함께 고문이 되었다.[5] 1135년(인종 13년)에 국자사업지제고로 있을 때, 왕에게 묘청이 상하를 현혹시키고 서경에 대화궁을 세우려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5]

2. 2. 관직 생활

임완은 본래 송나라 장주 사람으로 1112년(예종 7년)에 장삿배를 따라 개경으로 들어왔다.[3][4] 1114년(예종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에 이르렀다.[5] 인종이 수창궁 옆에 서적소를 설치하자 김부철 등과 함께 고문이 되었다.[1][5] 국자사업지제고에 임명되었다.[1] 1135년(인종 13년)에 국자사업 지제고로 있을 때, 왕에게 묘청이 상하를 현혹시키고 서경에 태화궁을 세우려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처형해야 한다고 극간하였다.[5] 묘청이 백성을 미혹시키고, 서경대화궁을 건립하기 위해 백성을 괴롭히자, 인종에게 묘청의 처형상소했다.[1]

2. 3. 묘청의 난

임완은 본래 송나라 장주 사람으로 1112년(예종 7년)에 장삿배를 따라 개경으로 들어왔다.[3][4] 1114년(예종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원외랑에 이르렀다.[5] 인종이 서적소를 설치하자 김부철 등과 함께 고문이 되었다.[5]

1135년(인종 13년) 국자사업지제고로 있을 때, 왕에게 묘청이 상하를 현혹시키고 서경에 대화궁을 건립하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히니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5][1]

참조

[1] 뉴스 임완 林完,?~? https://www.doopedia[...] 두산세계대백과사전
[2] 문서 임광 묘지명
[3] 문서 임광 묘지명
[4] 문서
[5] 서적 고려사
[6]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