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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히로 (18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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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즈노 다다히로는 1856년에 태어나 1905년에 사망한 일본의 자작이자 귀족원 의원이다. 1866년 아버지 미즈노 타다키요의 은퇴로 야마가타 번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보신 전쟁 당시에는 메이지 신정부에 협력하려 했으나, 영지가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후 아사히야마 번 지사를 거쳐 게이오기주쿠에서 수학하고, 1884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04년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아들이 없어 동생 미즈노 타다요시가 뒤를 이었다.

2. 생애

미즈노 타다히로는 미즈노 타다키요의 장남으로, 1866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아 야마가타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보신 전쟁 중에는 복잡한 상황에 처했으며, 전쟁 후 1870년 오미 국의 아사히야마 번으로 이봉되었다. 폐번치현 이후에는 도쿄로 이주하여 게이오기주쿠에서 수학했다.

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고, 1904년에는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1905년 사망하였으며, 후사가 없어 동생 타다요시가 작위를 계승했다. 묘지는 도쿄도 세타가야구 기타카라스야마의 묘코지이다.[2]

2. 1. 가독 상속과 보신 전쟁

게이오 2년(1866년) 9월 29일, 아버지 미즈노 타다키요가 은거함에 따라 가독을 상속받아 야마가타 번주가 되었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해 윤4월 12일에 아버지 타다키요와 함께 교토로 상경하여 메이지 신정부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교토에 머무는 동안, 영지인 야마가타 번은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였다. 이에 타다히로는 같은 해 5월 22일, 신정부에 타다키요를 야마가타로 돌려보내 번을 설득하여 신정부 측에 서도록 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는 허가되지 않았다. 결국 같은 해 9월, 야마가타 번은 신정부 군에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2월 7일, 타다히로는 아버지 타다키요와 함께 메이지 신정부로부터 근신(가택 연금) 명령을 받았다. 또한, 신정부에 저항한 책임을 물어 가로였던 미즈노 모토노부가 처형되었다.

2. 2. 메이지 유신 이후

1868년, 아버지 미즈노 타다키요와 함께 교토로 가서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교토에 있는 동안 영지는 친 도쿠가와 세력인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야마가타로 돌아가 상황을 평화롭게 해결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야마가타 번은 곧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같은 해 12월 7일, 아버지와 함께 가택 연금에 처해졌고, 영지의 가로인 미즈노 모토노부는 신정부에 저항한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1869년 6월 26일,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1870년 7월, 오미 국의 아사히야마 번 지사로 임명되어 이봉(영지 이동)되었다. 아사히야마 번은 원래 야마가타 번의 월경지였던 10개 마을과 하타모토 소유지이거나 다른 번의 작은 월경지였던 93개 마을로 구성된 작은 번이었다. 같은 해 12월 26일, 번사들의 귀농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재산에서 매년 3000 를 지출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이는 몰락한 사무라이 계층의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한 긍정적인 조치였다.

1871년 폐번치현 이후 도쿄로 이주하여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884년 7월, 화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04년 7월 10일, 귀족원 자작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그러나 다음 해인 1905년에 사망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작위는 동생 타다요시에게 넘어갔다. 묘지는 도쿄도 세타가야구 기타카라스야마의 묘코지이다.[2]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미즈노 타다키요
어머니나카가와 씨측실
정실미즈노 에츠코미즈노 타다모토의 양녀, 미즈노 타다사다의 딸
계실다테 데루코다테 무네나리의 여섯째 딸
양자미즈노 타다요시친동생


4. 평가

미즈노 타다히로는 보신 전쟁메이지 유신이라는 일본 역사의 격동기에 야마가타 번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부친 미즈노 타다키요의 뒤를 이어 다이묘가 된 후,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며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교토에 머무는 동안 영지가 그의 의사와는 달리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타다히로는 영지로 돌아와 평화적인 해결을 시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야마가타 번은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는 결과를 맞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부친과 함께 가택 연금에 처해지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기도 했다.

폐번치현 이후 도쿄로 이주하여 게이오기주쿠에서 수학한 것은 그가 근대 교육을 수용하고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려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매년 자신의 재산 3000 를 들여 이전 사무라이 신분이었던 영지민들의 귀농을 지원한 것은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한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보신 전쟁 당시, 비록 본인의 직접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영지가 구체제 유지 세력인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한 점,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습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후 화족 자작 작위를 받고 귀족원 의원을 지내는 등 새로운 체제 내에서 활동했지만,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의 정치적 한계 또한 보여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1] 간행물 貴族院要覧(丙) 1946-12
[2] 서적 烏山寺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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