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1세 아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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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1세 아센은 1246년부터 1256년까지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였다. 이반 아센 2세의 아들이자 칼리만 1세의 이복 동생으로, 칼리만 1세의 죽음으로 즉위했으나 어린 나이로 인해 주변국들의 침략을 받았다.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 헝가리에게 영토를 빼앗겼고, 니케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영토를 상실했다. 1256년, 정적들에게 암살당하며 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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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아센 2세는 1218년부터 1241년까지 불가리아 제2제국을 통치하며 영토 확장, 불가리아 정교회 독립, 그리고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 승리를 통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어 발칸 반도에서 불가리아의 지배적인 위치를 확립한 차르이다. - 아센 왕조 - 보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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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미하일 아센 1세는 이반 아센 2세와 이레네 콤네네 두카이나의 아들이었다. 그는 1239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1241년 상반기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복 형제 칼리만 아센 1세가 즉위했다. 칼리만 아센 1세는 1246년 8월 또는 9월에 독살로 추정되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미하일 아센 1세는 그의 이복 형 칼리만 아센 1세를 승계하였을 때 아직 어린 아이였다.[10]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섭정으로 통치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10] 불가리아에 두번째 미성년 차르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의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 헝가리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많은 지역을 빼앗았다.[10] 니케아 제국에게는 트라키아를, 에페이로스 공국에게는 마케도니아를, 헝가리에게는 베오그라드와 바나트 지역을 상실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1247년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에 대항하여 니케아 제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10]
1253년 불가리아는 두브로브니크와 군사·상업 협정을 체결하고, 스테판 우로시 1세가 통치하는 세르비아 왕국을 공격했다.[9]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깊숙이 진격했지만, 세르비아 정복에는 실패했다.
1254년 니케아 황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가 사망하자,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와 로도피 산맥 지방 등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위해 니케아에 전쟁을 걸었다.[9] 미하일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로 진격하여 현지 주민들의 협력을 얻어 로도피 산맥 지방의 요새를 회복했다. 그러나 니케아의 새 황제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는 불가리아군을 기습했고, 미하일은 숲을 통과하여 도망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1255년 미하일은 쿠만족과 함께 니케아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여 처음에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1256년 양국은 평화를 맺었다.[9]
몇몇 빈약한 자료들은 미하일 아센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부분이 궁중 내의 강력한 인물의 영향 하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10] 가장 첫째로는 모후인 이레네가 있다.[10] 1253년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조약에서는 미하일 아센 1세의 누이 안나의 남편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터르도 보여진다.[10] 치세 말기에는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의 총독을 지낸 러시아 귀족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의향이 반영되었다.[10] 1255년 불가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평화가 성립되었을 때 미하일은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딸과 결혼했고, 1256년 불가리아와 니케아의 평화 조약에서는 로스티슬라프가 두 나라의 중재자로서 서명했다.[10]
니케아와의 평화 조약에서 미하일과 그의 장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가 양보한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미하일의 조카 칼리만 아센 2세를 옹립했다. 1256년 가을, 미하일은 타르노보 근교에서 사냥하던 중 정적들에게 살해당했다.[9]
2. 1. 초기 생애
미하일 아센 1세는 이반 아센 2세와 이레네 콤네네 두카이나의 아들이었다. 그는 1239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1241년 상반기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의 뒤를 미하일의 이복 형제 칼리만 아센 1세가 이었다. 칼리만 아센 1세는 1246년 8월 또는 9월에 예상치 못하게 사망했다.
미하일 아센 1세는 그의 이복 형 칼리만 아센 1세를 승계하였을 때 아직 어린 아이였다.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섭정으로 통치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불가리아에 두번째 미성년 차르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의 니케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 헝가리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많은 지역을 빼앗았다. 니케아 제국에게는 트라키아를, 에페이로스 공국에게는 마케도니아를, 헝가리에게는 베오그라드와 바나트 지역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47년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에 대항하여 니케아 제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2. 2. 즉위와 섭정
미하일 아센 1세는 그의 이복 형 칼리만 아센 1세를 승계하였을 때 아직 어린 아이였다.[10]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섭정으로 통치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10] 불가리아에 두번째 미성년 차르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의 니케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 헝가리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많은 지역을 빼앗았다.[10] 니케아 제국에게는 트라키아를, 에페이로스 공국에게는 마케도니아를, 헝가리에게는 베오그라드와 바나트 지역을 상실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1247년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에 대항하여 니케아 제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10]몇몇 빈약한 자료들은 미하일 아센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부분이 궁중 내의 강력한 인물의 영향 하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10] 가장 첫째로는 모후인 이레네가 있다.[10] 1253년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조약에서는 미하일 아센 1세의 누이 안나의 남편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터르도 보여진다.[10] 치세 말기에는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의 총독을 지낸 러시아 귀족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의향이 반영되었다.[10] 1255년 불가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평화가 성립되었을 때 미하일은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딸(이름은 안나 또는 엘제베트라고 한다)과 결혼했고, 1256년 불가리아와 니케아의 평화 조약에서는 로스티슬라프가 두 나라의 중재자로서 서명했다.[10]
2. 3. 주변국의 침략과 영토 상실
미하일 아센 1세는 이복 형 칼리만 아센 1세가 사망한 후 불가리아 황위를 계승하였으나, 즉위 당시 미하일 아센 1세는 어린 아이였다.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섭정을 맡았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거의 없다. 불가리아에 어린 군주가 즉위했다는 소식은 주변국들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니케아 제국의 요한 3세 두카스 바타체스는 칼리만 1세 사후 곧바로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세레스를 점령하고, 현지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멜니크를 점령했다. 곧 바르다르 강 계곡을 침공하여 이 지역의 모든 요새를 점령했다. 에페이로스 공국의 통치자 미하일 2세 콤네노스 두카스 또한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서부 마케도니아를 점령했다. 결국 불가리아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헝가리는 베오그라드와 바나트 지역을 병합했다.
이러한 영토 상실에도 불구하고, 1247년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에 대항하여 니케아 제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불가리아는 1246년 말 또는 1247년 초에 체결된 평화 조약에서 바타체스의 정복을 인정했고,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에 대항하여 바타체스를 지원하도록 규정했다.
1254년 요한네스 3세의 죽음은 불가리아에게 니케아 제국에게 상실한 지역을 회복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미하일 아센 1세는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를 지나 로도피 산맥의 요새들의 동정적인 거주민들에게 항복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니케아의 새 황제 테오도로스 2세의 급속한 진격은 불가리아군을 당황시켰고, 미하일 아센 1세는 숲을 통과하여 도망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1255년 미하일 아센 1세는 쿠만족 군대를 이끌고 와 몇몇 성공을 거두었다. 1256년 결국 평화 조약이 맺어져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리기로 결정되었다.
미하일 아센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부분이 궁중 내의 강력한 인물의 영향 하에 있었다. 1253년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조약에서는 미하일 아센 1세의 누이 안나의 남편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터르도 보여진다. 그의 매형인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테르가 미성년 차르를 위해 섭정을 맡았다는 학설도 있다. 러시아의 체르니고프 가문 출신의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는 헝가리의 벨러 4세의 딸 안나와 결혼하여 베오그라드에 정착하였다. 미하일 아센 1세는 로스티슬라프의 딸과 결혼하였고, 로스티슬라프는 1256년 니케아와의 화약에 중재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미하일 아센 1세와 그의 장인의 양보에 대해 반발하였던 귀족 그룹들은 그의 사촌인 칼리만 아센 2세를 중심으로 모였다. 1256년 가을, 터르노보 근교의 사냥 도중 칼리만 아센은 미하일 아센 1세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2. 4. 니케아 제국과의 전쟁
미하일 아센 1세는 그의 이복 형 칼리만 아센 1세가 독살된 후 불가리아 황위에 즉위했지만, 즉위 당시 어렸다.[9] 어린 군주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 헝가리 왕국은 불가리아를 침략하여 광범위한 영토를 병합했다.[9] 전쟁 결과, 니케아는 세레스, 테살로니키, 아드리아노플(현재의 에디르네)와 로도피 산맥 지방이 포함된 트라키아 지방[8], 에페이로스는 마케도니아 대부분, 헝가리는 베오그라드를 병합했다. 이러한 영토 상실에도 불구하고, 1247년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과 싸우는 니케아를 지원하기도 했다.
1253년 불가리아는 두브로브니크와 군사·상업 협정을 체결하고, 스테판 우로시 1세가 통치하는 세르비아 왕국을 공격했다.[9]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 깊숙이 진격했지만, 세르비아 정복에는 실패했다.
1254년 니케아 황제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가 사망하자,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와 로도피 산맥 지방 등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위해 니케아에 전쟁을 걸었다.[9] 미하일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로 진격하여 현지 주민들의 협력을 얻어 로도피 산맥 지방의 요새를 회복했다. 그러나 니케아의 새 황제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는 불가리아군을 기습했고, 미하일은 숲을 통과하여 도망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1255년 미하일은 쿠만족과 함께 니케아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여 처음에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1256년 양국은 평화를 맺었다.[9]
니케아와의 평화 조약에서 미하일과 그의 장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가 양보한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미하일의 조카 칼리만 2세를 옹립했다. 1256년 가을, 미하일은 타르노보 근교에서 사냥하던 중 정적들에게 살해당했다.[9]
2. 5. 헝가리와의 관계
미하일 아센 1세는 이복 형 칼리만 아센 1세를 승계하였을 때 아직 어린 아이였기에, 불가리아에 두번째 미성년 차르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헝가리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베오그라드와 바나트 지역을 빼앗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47년 불가리아는 라틴 제국에 대항하여 니케아 제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헝가리의 벨러 4세는 1247년 6월 2일 세베린 반국을 구호기사단에 양도했는데, 양도 헌장에는 구호기사단이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할 국가 중 하나로 불가리아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벨라가 불가리아를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헝가리와 불가리아의 긴장된 관계에도 불구하고, 1247년 8월 불가리아군은 바타체스가 라틴 제국의 트라키아 영토를 침략하는 것을 지원했다.
1253년부터 1255년 사이에 몽골 제국을 방문한 루브룩의 윌리엄은 미하일의 영토("블라키아아센 영토와 리틀 불가리아")[1]를 몽골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 중 하나로 꼽았다. 미하일은 1254년 세르비아 국왕인 스테판 우로시 1세에 대항하여 라구사 공화국(현재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과 동맹을 맺었다. 이 조약은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테르가 미하일과는 거의 독립적으로 불가리아에서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음을 보여준다. 훔의 라도슬라프가 이 연합에 합류한 후, 미하일은 세르비아를 공격하여 비옐로 폴레까지 진격했다. 한 학설에 따르면, 헝가리의 불가리아 공격으로 인해 미하일은 세르비아에서 급히 철수해야 했다.
1254년 요한네스 3세의 죽음은 불가리아로 하여금 니케아 제국에게 상실한 지역을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 이 시기 미하일 아센 1세는 군사 행동에 참가하여,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어 트라키아를 지나 로도피 산맥의 요새들의 동정적인 거주민들에게 항복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니케아의 새 황제 테오도로스 2세의 급속한 진격은 불가리아군을 당황시켰고, 미하일 아센 1세는 돌발적인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255년 미하일 아센 1세는 쿠만족 군대를 이끌고 와 몇몇 성공을 거두었다. 1256년 결국 평화 조약이 맺어져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리기로 결정되었다.
헝가리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미하일은 벨라 4세의 딸인 안나와 그의 남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딸인 마초의 안나와 결혼했다. 카스토리아의 성 미하일 교회에 있는 아이콘에 묘사된 한 남자와 여자는 잘못 미하일과 그의 아내(또는 어머니)와 연관되었다.
몇 안 되는 사료는 미하일 1세의 치세 대부분이 궁정 내 유력자들의 영향 하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치세 초반에는 어머니 이르네, 두브로브니크와 동맹을 체결했을 때는 의형제인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타르가 국정의 중심이 되었다. 치세 말기에는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의 총독을 지낸 러시아 귀족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의향이 반영되었다. 1255년 불가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평화가 성립되었을 때 미하일은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의 딸(이름은 안나 또는 엘제베트라고 한다)과 결혼했고, 1256년 불가리아와 니케아의 평화 조약에서는 로스티슬라프가 두 나라의 중재자로서 서명했다[10]。미하일 사후, 왕비(로스티슬라프의 딸)는 제위를 계승한 칼리만 2세와 재혼했다.
2. 6. 세르비아와의 관계
1253년 루브룩의 윌리엄은 미하일의 영토("블라키아아센 영토와 리틀 불가리아")[1]를 몽골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 중 하나로 꼽았다. 미하일 1세는 1254년 세르비아 국왕인 스테판 우로시 1세에 대항하여 라구사 공화국(현재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과 동맹을 맺었다. 이 조약은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테르가 미하일과는 거의 독립적으로 불가리아에서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음을 보여준다. 훔의 라도슬라프가 이 연합에 합류한 후, 미하일은 세르비아를 공격하여 비옐로 폴레까지 진격했다. 한 학설에 따르면, 헝가리의 불가리아 공격으로 인해 미하일은 세르비아에서 급히 철수해야 했다.몇몇 빈약한 자료들은 미하일 아센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부분이 궁중 내의 강력한 인물의 영향 하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1253년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조약에서는 미하일 아센 1세의 누이 안나의 남편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터르도 보여진다.
2. 7. 암살
미하일 1세 아센은 그의 사촌인 칼리만 아센 2세를 중심으로 한 귀족 그룹의 모의에 의해 암살당했다.[9] 귀족들은 아마도 미하일 1세와 그의 장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가 니케아 제국과의 평화 조약에서 양보한 것에 대해 반발했던 것으로 보인다.[9] 1256년 가을, 미하일 1세는 터르노보 근교에서 사냥을 하던 도중 칼리만 아센 2세와 그의 동맹군에게 공격당했다.[9] 미하일 1세는 이 공격으로 인해 입은 상처로 1256년 말 또는 1257년 초에 사망했다.[9]게오르기 아크로폴리테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미하일 1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제 불가리아의 통치자 미하일은 ... [테오도르 2세 라스카리스]와 '로마인'에 대해 큰 증오심을 품은 자였는데, [미하일]이 이 도시 밖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때, 그의 사촌 칼리만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 그는 즉사했다."[4]
3. 가계
미하일 1세 아센은 이반 아센 2세와 이리니 콤니니 두키나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반 아센 1세와 엘레나-예브게니야 부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와 마리아 페트랄리파이나 부부의 딸이다. 이리니의 할아버지(외조부)는 요한 앙겔로스 두카스이며, 그의 할머니(외조모)는 조에 두키나이다. 요한의 아버지는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이며, 그의 어머니는 테오도라 콤니니이다.
4. 평가
참조
[1]
서적
The Mission of Friar William of Rubruck
[2]
서적
The History
[3]
서적
The Mission of Friar William of Rubruck
[4]
서적
The History
[5]
서적
The Voices of Medieval Bulgaria, Seventh-Fifteenth Century: The Records of a Bygone Culture
https://books.google[...]
BRILL
2008-08-31
[6]
서적
История на българите
https://books.google[...]
TRUD Publishers
[7]
서적
Srednovekovna Bŭlgarii︠a︡ v svetlinata na novi izvori
https://books.google[...]
Nar. prosveta
[8]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9]
서적
ブルガリア 1
ほるぷ出版
1985-08
[10]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 A Critical Survey from the Late Twelfth Century to the Ottoman Conq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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