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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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르다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고위 관료로, 황제 미카일 3세 치세 동안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테오도라 황후의 형제였으며, 초기에는 테오크티스토스와 대립했으나, 이후 미카일 3세의 섭정으로서 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바르다스는 마그나우라 학원을 설립하고, 학자들을 지원하는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랍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불가리아의 기독교화를 지원하는 등 군사적, 외교적 업적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조카인 미카일 3세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고, 결국 바실리우스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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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다스 | |
|---|---|
| 기본 정보 | |
![]() | |
| 출생 | 800년대 |
| 사망 | 866년 4월 21일 |
| 직업 | 귀족 |
| 배우자 | 테클라 이름 미상 여성 (미카엘 3세의 사촌) |
| 자녀 | 안토니아 바르다이나 이레네 미상 (아들) |
| 경력 | |
| 통치 기간 (섭정) | 842년 – 867년 (855년 이후 사실상) |
| 가문 | |
| 가문 | 아모리아 왕조 |
| 로마자 표기 | |
| 그리스어 | Bardas |
| 로마자 표기 | Bardas |
2. 생애
바르다스는 드룽가리오스 마리노스와 테오크티스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테오필로스 황제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와 페트로나스의 형제였다.[1] 테오파네스 콘티누아투스에 따르면 마리아, 소피아, 이레네 등 세 명의 자매가 더 있었다.[1] 그의 가족은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파플라고니아에 정착했다.[2] 키릴 투마노프와 니콜라스 아돈츠를 포함한 일부 현대 족보학자들은 바르다스의 가문과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인 마미코니안과의 연관성을 제기했으나, 옥스퍼드 비잔티움 사전의 니나 가르소이안에 따르면 "매력적이지만, 이 가설은 증거 부족으로 증명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837년, 테오필로스는 그를 파트리키오스 지위로 승진시키고 장군 테오포보스와 함께 아바스기아인에 대항하는 원정에 보냈으나 비잔틴 군은 패배했다.[1][2] 테오필로스가 죽자 그의 아들 미카일 3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미카일 3세는 겨우 두 살이었으므로 테오도라가 수장으로 있는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바르다스와 그의 형제 페트로나스, 그리고 그들의 친척 세르지오스 니케티아테스도 위원회 구성원이었지만, 테오도라의 최고 고문으로 빠르게 자리 잡은 사람은 로고테테스 테오크티스토스였다. 바르다스는 섭정 초기 시절 테오도라가 성상 파괴주의를 완전히 포기하도록 권장하고, 친성상 파괴주의 총대주교 요한 문법가의 축출과 843년 성상 숭배의 복원으로 이어진 조사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역할을 수행했다.[1]
그러나 바르다스는 곧 테오크티스토스에 의해 밀려났다. 시메온 로고테테스에 따르면, 테오크티스토스는 844년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에 대한 비잔틴의 패배를 초래한 탈주에 대해 바르다스를 비난했지만, 로고테테스 자신이 비잔틴 군대를 이끌었다.[1] 이러한 비난의 결과로 바르다스는 정해지지 않은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되었다.[1] 바르다스의 추방과 세르지오스의 죽음 이후 테오크티스토스는 10년 동안 테오도라와 함께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855년, 미카일 3세는 15세가 되어 성년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와 테오크티스토스는 신부 선발을 주선하여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를 신부로 선택했지만, 미카일 3세는 자신의 정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총애했다. 바르다스는 미카일 3세의 분노를 이용하여 섭정에 대항하도록 설득했다. 미카일 3세의 지원을 받아 바르다스는 수도로 돌아갈 수 있었고, 855년 11월 20일 테오크티스토스는 살해되었다.[1]
테오크티스토스가 죽자 섭정은 끝났다. 856년 초, 미카엘 3세는 황제로서 모든 권한을 자신이 갖는다고 선포했고, 857년에는 테오도라를 가스트리아 수도원으로 은퇴시켰다. 하지만 미카엘 3세는 자신의 쾌락과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바르다스는 제국의 ''사실상'' 섭정이 되었다.[1] 862년까지 바르다스는 최고위 국가직(''마기스트로스''와 ''카르툴라리오스 투 카니클레이우'')으로 승진했다. 테오도라가 배후에서 조종한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에는 ''쿠로팔라테스''로 승진했고, 마침내 성 수요일 (862년 4월 22일)에는 ''카이사르''로 승진했다.[1] 바르다스의 지배는 비잔틴 출처에서도 뒷받침된다. 알타바리는 아랍 사절단이 황제가 아닌 바르다스와 협상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바르 헤브라이우스는 아랍 대사와의 회담에서 미카엘 3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의 "사촌"(아마 바르다스일 것임)이 그를 대신하여 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1]
바르다스는 조카인 미카엘 3세를 설득하여 그의 옛 시종(''파라코이모메노스'')인 다미안을 해고하게 했지만, 미카엘 3세는 바르다스 자신의 측근 대신 그의 가장 좋아하는 동료이자 야심 찬 바실리우스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1] 866년 초, 미카엘 3세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가 훗날 레오 6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바르다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이전까지는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르다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이제 미카엘 3세에게는 직계 상속자가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 3세는 아내와 이혼하는 대신, 잉게리나를 바실리우스와 결혼시켰고, 바실리우스는 먼저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다.[1]
같은 해 봄, 바르다스는 사라센의 요새인 크레타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미카엘 3세, 바실리우스, 그리고 조정과 함께 바르다스는 군대가 집결하고 있던 밀레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866년 4월 21일, 그는 황제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는 핑계로 바실리우스에게 살해당했다.[1] 원정은 중단되었고, 미카엘 3세와 바실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미카엘 3세는 그의 친구를 양자로 삼아 공동 황제로 만들었다. 867년 9월, 바실리우스는 미카엘 3세 또한 암살하여 아모리아 왕조를 종식시키고 비잔틴 역사의 마케도니아 시대를 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바르다스는 드룽가리오스 마리노스와 테오크티스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테오필로스 황제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와 페트로나스의 형제였다.[1] 테오파네스 콘티누아투스에 따르면 마리아, 소피아, 이레네 등 세 명의 자매가 더 있었다.[1] 그의 가족은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파플라고니아에 정착했다.[2]키릴 투마노프와 니콜라스 아돈츠를 포함한 일부 현대 족보학자들은 바르다스의 가문과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인 마미코니안과의 연관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옥스퍼드 비잔티움 사전의 니나 가르소이안에 따르면, "매력적이지만, 이 가설은 증거 부족으로 증명될 수 없다."
837년, 테오필로스는 그를 파트리키오스의 지위로 승진시키고, 장군 테오포보스와 함께 아바스기아인에 대항하는 원정에 보냈으나 비잔틴은 패배했다.[1][2] 테오필로스가 죽자 그의 아들 미카일 3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겨우 두 살이었으므로 테오도라가 수장으로 있는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바르다스와 그의 형제 페트로나스, 그리고 그들의 친척 세르지오스 니케티아테스도 위원회 구성원이었지만, 테오도라의 최고 고문으로 빠르게 자리 잡은 사람은 로고테테스 테오크티스토스였다. 바르다스는 섭정 초기 시절에도 활발한 역할을 수행하여 테오도라가 성상 파괴주의를 완전히 포기하도록 권장하고, 친성상 파괴주의 총대주교 요한 문법가의 축출과 843년 성상 숭배의 복원으로 이어진 조사에 참여했다.[1]
그러나 바르다스는 곧 테오크티스토스에 의해 밀려났다. 시메온 로고테테스에 따르면, 테오크티스토스는 844년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에 대한 비잔틴의 패배를 초래한 탈주에 대해 바르다스를 비난했지만, 로고테테스 자신이 비잔틴 군대를 이끌었다.[1] 이러한 비난의 결과로 바르다스는 정해지지 않은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되었다.[1]
2. 2. 섭정 초기와 테오크티스토스와의 갈등
바르다스는 드룽가리오스 마리노스와 테오크티스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황제 테오필로스의 아내 테오도라 황후와 페트로나스의 형이었다.[1] 테오파네스 콘티누아투스에 따르면 마리아, 소피아, 이레네 등 세 명의 자매가 더 있었다.[1] 그의 가족은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파플라고니아에 정착했다.[2] 키릴 투마노프와 니콜라스 아돈츠를 포함한 일부 현대 족보학자들은 바르다스의 가문과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인 마미코니안과의 연관성을 제기했으나, 옥스퍼드 비잔티움 사전의 니나 가르소이안에 따르면 "매력적이지만, 이 가설은 증거 부족으로 증명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837년, 테오필로스는 그를 파트리키오스 지위로 승진시키고 장군 테오포보스와 함께 아바스기아인에 대항하는 원정에 보냈으나 비잔틴은 패배했다.[1][2] 테오필로스가 죽자 그의 아들 미카일 3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미카일 3세는 겨우 두 살이었으므로 테오도라가 수장으로 있는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바르다스와 그의 형제 페트로나스, 그리고 그들의 친척 세르지오스 니케티아테스도 위원회 구성원이었지만, 테오도라의 최고 고문으로 빠르게 자리 잡은 사람은 로고테테스 테오크티스토스였다. 바르다스는 섭정 초기 시절 테오도라가 성상 파괴주의를 완전히 포기하도록 권장하고, 친성상 파괴주의 총대주교 요한 문법가의 축출과 843년 성상 숭배의 복원으로 이어진 조사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역할을 수행했다.[1] 그러나 바르다스는 곧 테오크티스토스에 의해 밀려났다. 시메온 로고테테스에 따르면, 테오크티스토스는 844년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에 대한 비잔틴의 패배를 초래한 탈주에 대해 바르다스를 비난했지만, 로고테테스 자신이 비잔틴 군대를 이끌었다. 이러한 비난의 결과로 바르다스는 정해지지 않은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추방되었다.[1]
바르다스의 추방과 세르지오스의 죽음 이후 테오크티스토스는 10년 동안 테오도라와 함께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855년, 미카일 3세는 15세가 되어 명목상 성년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와 테오크티스토스는 신부 선발을 주선하여 그의 정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에 대한 미카일의 애정을 무시하고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를 신부로 선택했다. 바르다스는 그가 받은 고압적인 태도에 대한 미카일의 분노를 이용하여 섭정에 대항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미카일의 지원을 받아 바르다스는 수도로 돌아갈 수 있었고, 855년 11월 20일 테오크티스토스는 살해되었다.[1] 이는 아마도 황제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바르다스는 그의 라이벌을 제거하는 데 더 "우아한" 방법을 선호했다고 한다.[1]
2. 3. 권력 장악과 카이사르 임명
테오크티스토스가 죽자 섭정은 끝이 났다. 856년 초, 미카엘 3세는 황제로서 모든 권한을 자신이 갖는다고 선포했고, 857년에는 테오도라를 가스트리아 수도원으로 은퇴시켰다. 하지만 미카엘 3세는 자신의 쾌락과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바르다스는 제국의 ''사실상'' 섭정이 되었다.[1]862년까지 바르다스는 최고위 국가직(''마기스트로스''와 ''카르툴라리오스 투 카니클레이우'')으로 승진했다. 테오도라가 배후에서 조종한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에는 ''쿠로팔라테스''로 승진했고, 마침내 성 수요일 (862년 4월 22일)에는 ''카이사르''로 승진했다.[1]
바르다스의 지배는 비잔틴 출처에서도 뒷받침된다. 알타바리는 아랍 사절단이 황제가 아닌 바르다스와 협상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바르 헤브라이우스는 아랍 대사와의 회담에서 미카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의 "사촌"(아마 바르다스일 것임)이 그를 대신하여 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1]
바르다스는 조카인 미카엘 3세를 설득하여 그의 옛 시종(''파라코이모메노스'')인 다미안을 해고하게 했다. 그러나 미카엘은 바르다스 자신의 측근 대신 그의 가장 좋아하는 동료이자 야심 찬 마케도니아의 바실리우스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1] 866년 초, 미카엘이 에우도키아 잉게리나가 훗날 레오 6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바르다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이전까지는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르다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이제 미카엘에게는 직계 상속자가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아내와 이혼하는 대신, 잉게리나를 바실리우스와 결혼시켰고, 바실리우스는 먼저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다.[1]
같은 해 봄, 바르다스는 사라센의 요새인 크레타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미카엘, 바실리우스, 그리고 조정과 함께 바르다스는 군대가 집결하고 있던 밀레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866년 4월 21일, 그는 황제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는 핑계로 바실리우스에게 살해당했다.[1]
2. 4. 통치와 업적
테오크티스토스의 죽음으로 섭정은 끝났고, 856년 초 미카엘 3세는 황제의 전권을 장악했으며, 857년에는 테오도라가 가스트리아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다.[1] 그러나 미카엘 3세는 자신의 쾌락과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의 관계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바르다스는 제국의 ''사실상'' 섭정이 되었다.[1] 858년경 그는 최고위 국가직(''마기스트로스''와 ''카르툴라리오스 투 카니클레이우'')으로 승진했고, 테오도라가 배후 조종한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에는 ''쿠로팔라테스''로 승진했으며, 마침내 성 수요일 (862년 4월 22일)에는 ''카이사르''로 승진했다.[1] 바르다스의 지배는 비잔틴 출처에서도 뒷받침된다. 알타바리는 아랍 사절단이 황제가 아닌 바르다스와 협상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바르 헤브라이우스는 아랍 대사와의 회담에서 미카엘 3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의 "사촌"(아마 바르다스일 것임)이 그를 대신하여 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1] 페트로나스 또한 이 시기에 알려지게 되어 트라케시안 테마의 ''스트라테고스''가 되었고 아랍을 상대로 일련의 성공적인 습격을 이끌었다.후대의 자료에서는 그를 허영심이 많고, 탐욕스럽고, 권력에 굶주린 인물로 묘사하며 그의 성격을 비판하지만, 행정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1] 바르다스는 마그나우라 학원을 설립하고, 레오 수학자와 같은 학자들을 지원했으며,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대 모라비아 선교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또한 동방에서 아랍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었고, 863년 라라카온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비잔틴 선교사들의 불가리아의 기독교화를 시행했다.[1][2]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파트리아''는 그를 건축 활동으로 칭찬하지만, 도시 외곽에 있는 성 데메트리오스 교회 외에는 그에게 귀속된 건물 대부분은 아마도 마케도니아의 바실리우스 1세의 작품일 것이다.[1]
858년, 바르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를 폐위시키고, 학식이 풍부하지만 평신도인 포티우스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후대의 연대기에서는 이그나티오스가 바르다스가 며느리와 근친상간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를 성찬례에서 제외했다고 기록하지만, 이그나티오스가 폐위된 진짜 이유는 아마도 바르다스의 요구에 따라 황후 테오도라의 삭발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1] 그러나 포티우스의 부당한 승진은 교황 니콜라우스 1세를 소외시켰고,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모라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선교 활동 및 관할권을 놓고 경쟁이 벌어지면서 교황과의 관계는 긴장된 상태를 유지했다.
그의 막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바르다스는 조카에 대한 통제력이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는 조카를 설득하여 그의 옛 시종(''파라코이모메노스'')인 다미안을 해고하게 했지만, 미카엘 3세는 바르다스 자신의 측근 대신 그의 가장 좋아하는 동료이자 냉혹하게 야심 찬 바실리우스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1] 바르다스의 입지는 866년 초에 더욱 약화되었는데, 미카엘 3세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가 훗날 레오 6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르다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이제 미카엘 3세에게는 직계 상속자가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 3세는 아내와 이혼하고 오랫동안 사귀어 온 정부와 결혼하는 대신, 잉게리나를 바실리우스와 결혼시켰고, 바실리우스는 먼저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다. 같은 해 봄, 바르다스는 사라센의 요새인 크레타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미카엘 3세, 바실리우스, 그리고 조정과 함께 바르다스는 군대가 집결하고 있던 밀레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866년 4월 21일, 그는 황제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는 핑계로 바실리우스에게 살해당했다.[1]
원정은 중단되었고, 미카엘 3세와 바실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미카엘 3세는 그의 친구를 양자로 삼아 공동 황제로 만들었다. 867년 9월, 바실리우스는 미카엘 3세 또한 암살하여 아모리아 왕조를 종식시키고 비잔틴 역사의 마케도니아 시대를 열었다.
2. 5. 포티우스 총대주교 임명과 논란
858년, 바르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를 폐위시키고, 학식이 풍부하지만 평신도인 포티우스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1] 후대의 연대기에서는 이그나티오스가 바르다스가 며느리와 근친상간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를 성찬례에서 제외했다고 기록하지만, 이그나티오스가 폐위된 진짜 이유는 아마도 바르다스의 요구에 따라 황후 테오도라의 삭발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1] 그러나 포티우스의 부당한 승진은 교황 니콜라오 1세를 소외시켰고,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모라비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선교 활동 및 관할권을 놓고 경쟁이 벌어지면서 교황과의 관계는 긴장된 상태를 유지했다.2. 6. 바실리우스 1세와의 갈등과 암살
테오크티스토스가 죽자 섭정은 끝났다. 856년 미카엘 3세는 황제의 전권을 장악했고, 857년에는 테오도라가 가스트리아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다.[1] 미카엘 3세는 쾌락과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와의 관계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바르다스는 제국의 ''사실상'' 섭정이 되었다.[1] 그는 약 858년까지 최고위 국가직(''마기스트로스''와 ''카르툴라리오스 투 카니클레이우'')으로 승진했고, 테오도라가 배후 조종한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에는 ''쿠로팔라테스''로 승진했으며, 마침내 성 수요일 (862년 4월 22일)에는 ''카이사르''로 승진했다.[1]바르다스의 지배는 비잔틴 출처에서도 뒷받침된다. 알타바리는 아랍 사절단이 황제가 아닌 바르다스와 협상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바르 헤브라이우스는 아랍 대사와의 회담에서 미카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의 "사촌"(아마 바르다스일 것임)이 그를 대신하여 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1]
바르다스는 조카인 미카엘 3세를 설득하여 그의 옛 시종(''파라코이모메노스'')인 다미안을 해고하게 했지만, 미카엘은 바르다스 자신의 측근 대신 그의 가장 좋아하는 동료이자 냉혹하게 야심 찬 마케도니아의 바실리우스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1] 866년 초, 미카엘이 에우도키아 잉게리나가 훗날 레오 6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바르다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이전까지는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르다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이제 미카엘에게는 직계 상속자가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아내와 이혼하는 대신, 잉게리나를 바실리우스와 결혼시켰고, 바실리우스는 먼저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다.[1]
같은 해 봄, 바르다스는 사라센의 요새인 크레타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미카엘, 바실리우스, 그리고 조정과 함께 바르다스는 군대가 집결하고 있던 밀레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866년 4월 21일, 그는 황제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는 핑계로 바실리우스에게 살해당했다.[1]
원정은 중단되었고, 미카엘과 바실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미카엘은 그의 친구를 양자로 삼아 공동 황제로 만들었다. 867년 9월, 바실리우스는 미카엘 3세 또한 암살하여 아모리아 왕조를 종식시키고 비잔틴 역사의 마케도니아 시대를 열었다.[1]
3. 가족 관계
바르다스는 두 번 결혼했다. 855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안티고노스와 딸 이레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 한 명과 심바티오스라는 로고테테와 결혼한 또 다른 딸(이레네와 동일인일 수도 있다)을 두었다.[1] 855년경 바르다스는 테오도시아와 두 번째로 결혼했지만, 862년에 이혼했다.[2]
바르다스의 아들들 중 안티고노스는 소년 시절에 학교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아버지의 살해 당시에도 그 직책을 유지했다. 다른 아들에 대해서는 858년에 바르다스가 테오도시아와 결혼하기 위해 버린 정부와 결혼했고, 제국 유럽 테마의 ''모노스트라테고스''(단독 장군)로 임명되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
바르다스의 두 번째 딸은 ''파트리키오스''이자 로고테테인 심바티오스와 결혼했다. 심바티오스는 바르다스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으며, 그 뒤를 이을 것을 희망했다. 바실리우스가 공동 황제가 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신체 훼손을 당하고 추방되었다.
참조
[1]
논문
Bardas (#791/corr.)
https://www.degruyte[...]
[2]
논문
Bard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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