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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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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니콜라오 1세는 858년부터 867년까지 재위한 인물로, 로마 출신이다. 그는 교황으로서 교회의 로마 수위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라벤나와 랭스 대주교를 파면하고, 로타르 2세의 이혼 문제와 동방 교회와의 갈등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혼인법 수호, 교회 선교 활동 장려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동방 교회와의 관계에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려 노력했다. 사후 시성되었으며, 수탉 조형물 설치를 지시하는 등 교회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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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황 니콜라오 1세
교황 니콜라오 1세
직책로마 교황
교회가톨릭교회
재임 시작858년 4월 24일
재임 종료867년 11월 13일
이전 교황베네딕토 3세
다음 교황하드리아노 2세
출생일800년경
출생지교황령 로마
사망일867년 11월 13일 (약 67세)
사망지교황령 로마
기타 이름니콜라오
공경가톨릭교회
축일11월 13일 (1883년부터)
개인 정보
본명(정보 없음)
출생지로마, 교황령
아버지시의 유력한 행정관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Nicolaus I

2. 생애 초기

로마 공무원이자 로마 명문가 출신인 테오도로의 아들로 태어난 니콜라오는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경건하고 박애적이었으며, 모든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였고, 지식이 풍부하였으며, 웅변 실력이 뛰어났다.[16] [4]

젊은 시절부터 교회를 위해 일했던 그는 교황 세르지오 2세에 의해 차부제로 서품받았으며, 교황 레오 4세에 의해 부제로 서품받았다.[16] [4]

3. 교황

니콜라오 1세이슬람교도와 노르웨이인의 잦은 습격으로 영적,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서유럽에서 로마 수위권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기독교의 도덕적 가르침과 하느님의 법을 수호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굳게 믿었다.[16] 루트비히 2세 황제 및 비잔틴 군대와 협력하여 이탈리아 남부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일시적으로 막고, 오스티아 요새를 강화했다.[6][7]

로마 출신으로 아버지는 유력한 행정관이었다. 858년 4월 24일 교황 베네딕토 3세의 사망 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즉위 후 라벤나랭스 대주교를 파면하고, 로타르 2세의 이혼에 반대했으며, 포티오스 1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취임에 반대하여 동로마 제국과 대립했다.

867년 11월 13일, 9년 6개월 19일의 재위 기간 후 사망했다.

3. 1. 주교들과의 관계

라벤나의 대주교 요한은 교구민들에게 폭정을 휘두르고, 부주교들을 거칠게 대했으며, 돈을 요구하고, 사제들을 불법으로 감금하였다. 또한 교황이 보낸 사절들을 혹사하고 문서를 위조하기까지 하였다. 니콜라오 1세는 요한에게 여러 차례 경고했으나 회개하지 않자, 로마의 교회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세 번이나 내렸지만 이마저 무시하여 결국 파문하였다.[16] 요한은 파비아에 있던 루트비히 황제를 찾아갔고, 황제의 사절 두 명과 함께 860년 가을 니콜라오 1세가 소집한 로마 시노드에 출두했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를 피해 도망쳤다.[5]

니콜라오 1세는 직접 라벤나로 가서 모든 사건을 재조사하고 공정하게 판결을 내렸다. 요한은 다시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교황에게 순명하고 861년 11월에 소집되는 로마 시노드에 참석하라고 조언하였다. 요한은 황제의 조언대로 하여 파문이 풀렸지만, 나중에 파문 상태인 트리어와 쾰른의 대주교들과 협정을 맺기 위한 논의를 하여 다시 파문당하고 교황에게 굴욕을 당했다.

니콜라오 1세는 랭스의 힝크마르 대주교와도 교황의 특권 문제로 대립하였다. 수아송의 로타드 주교는 861년에 소집된 수아송 시노드에서 자신을 주교직에서 파면하기로 결의하자 교황에게 항소하였다. 힝크마르는 교황에 대한 항소를 반대했지만, 결국 중요한 법적 소송을 받아들여 독립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교황의 특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부르주 교구의 성직자 불파드의 성직 승품 문제를 둘러싸고 교황과 힝크마르 간의 분쟁이 다시 일어났지만, 힝크마르는 교황의 뜻에 순명하였다. 그리고 프랑크 시노드는 교황의 뜻에 따른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서방 교회에 대하여 강력한 교황권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3. 2. 혼인법 수호

니콜라오 1세는 기독교의 규율, 특히 혼인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보소 백작의 아내 잉기트루드가 애인 때문에 남편을 떠나자, 해당 지역 주교들에게 그녀를 파문하라고 명령했다. 잉기트루드는 860년 밀라노 시노드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파문당했다.[1]

로타르 2세의 인장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는 아내 토이데베르가에게서 자녀를 얻지 못하자, 불데트라다와 혼인하기 위해 아내를 버렸다. 862년 4월 28일 아헨 시노드에서 로타링기아 주교들은 이 혼인을 승인했다. 863년 6월 메츠 시노드에서 교황 사절들은 왕에게 뇌물을 받고 아헨의 결정에 동의했으며, 로타르 2세의 삼촌 대머리왕 카를 2세에게 피신하여 교황에게 호소한 토이데베르가를 비난했다. 니콜라오 1세는 이 문제를 직접 심사하기로 하고, 불데트라다의 친척으로 알려진 쾰른귄터 대주교와 트리어의 티에트가우드 대주교를 로마로 소환하여 863년 10월 라테라노 시노드에서 파면했다.[1]

루트비히 2세 황제는 파면된 주교들을 지지했고, 로타르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포위했다. 니콜라오 1세는 이틀 동안 성 베드로 대성전에 피신했다. 이후 엔겔베르가가 화해를 주선하여 황제는 로마에서 철수했고, 니콜라오 1세는 이전 트리어와 쾰른의 대주교들에게 복귀를 명령했다. 니콜라오 1세는 로타르 2세와 그의 아내 사이의 화해를 위해 계속 노력했다.[1]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카를 2세의 딸 플랑드르의 유디트가 아버지의 동의 없이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1세와 결혼한 사건에도 개입했다. 프랑크 주교들은 유디트를 파문했고, 랭스의 힝크마르는 그녀를 반대했지만, 니콜라오 1세는 혼인의 자유를 위해 관용을 촉구했다.[1]

3. 3. 동방 교회와의 관계

동방 교회에서는 교회법상 교황에게 ‘동등함 가운데 첫 번째’라는 명예상의 자리를 부여했지만, 니콜라오 1세는 동서방 교회를 아우르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최고 사목권자로서의 지위를 주장하며 교황권을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857년 이그나티오스가 강요에 의해 파직당하고, 포티오스가 교회법 규정에 어긋나게 총대주교 자리에 오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니콜라오 1세는 862년 5월 8일 동방 교회의 다른 총대주교들에게 포티오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할 것을 요청했으며, 863년 4월에 열린 로마 시노드에서 포티오스를 파문하였다.[4]

13세기 포티오스 1세 심문 묘사


동로마 제국의 미카엘 3세 황제에 따라, 포티오스는 85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동방 교회는 879년 말엽에 교회회의를 통해 포티오스의 선출이 교회법에 따라 합법적이었다고 확인하였다. 따라서 이그나티오스가 총대주교로 선출된 것은 교회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은 반면에 포티오스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출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필리오케 문제와 같은 교리적 문제뿐만 아니라 로마 주교좌의 관할 구역인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무단으로 점령한 관할권 분쟁 등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 갔다. 더불어 동방 교회는 교황의 수위권 교리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니콜라오 1세의 행동에 대해 분개하였다. 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에서는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한다는 선언과 더불어 당시 아직 이방 종교 국가였던 불가리아를 개종시켜 서방 교회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필리오케 문구를 삽입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 공작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863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보낸 서방 교회의 성직자들이 불가리아 선교를 시작했다. 그해 후반에 동로마 제국은 기근과 자연재해로 인한 어려움을 충당하기 위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보리스 1세는 순순히 투항할 것을 강요받았다. 당시 불가르족 대다수가 여전히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심했기 때문에 보리스 1세는 비밀리에 비잔티움 전례에 따라 세례를 받았다. 동로마 황제는 그의 대부가 되었으며, 트라키아 영토에 대한 소유권도 인정해 주었다.

동로마 황제가 불가리아에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도 자치 독립의 지위를 보장한 것에 대해 포티오스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866년 8월 보리스 1세는 교회의 가르침과 규율에 대한 106개의 질문을 묻기 위해 니콜라오 1세에게 특사를 보냈다. 니콜라오 1세는 이에 대한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제목은 《불가르족의 질문들에 대한 교황 니콜라오의 대답들》(Responsa Nicolai Pupae ad Consulta Bulgarorum)이다. 그는 답장과 더불어 선교를 위해 자신의 특사를 보냈는데, 훗날 교황으로 선출되는 포르모소 주교였다. 87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회의에서는 불가리아 교회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그리스인 사제들을 선교사로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스인 사제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불가리아인 사제들로 대체되었다.

4. 평가와 영향

니콜라오 1세는 교회의 선교 활동을 장려하였다. 그는 브레멘과 함부르크 주교구의 통합을 승인하였으며, 브레멘의 안스가리오 대주교와 그의 후임자들에게 덴마크, 스웨덴, 슬라브족에 대한 교황 특사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공식화하였다. 교회 안의 여러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공식적인 결정을 담은 문헌들을 발표했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직무를 태만히 하는 주교들에 대해서도 강하게 질책하며 적극적으로 처벌하였다.[17]

니콜라오 1세는 또한 로마의 여러 성당에 기부금을 보냈으며, 신자들의 종교적 생활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적 금욕주의 정신에 입각한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프룸의 레지노는 니콜라오가 로마 시민들과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17] 사후 후임자인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11월 13일로 지정되었다.[17]

니콜라오 1세는 모든 성당에 수탉 조형물을 설치할 것을 지시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수탉은 그리스도를 배신한 성 베드로를 기억하는 종교적 조형물로서, 오늘날에도 많은 성당이 수탉 조형물을 설치하고 있다.[11]

866년에 그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수요일과 금요일에 온혈 동물의 "살, 피, 또는 골수"[12]를 먹는 것을 삼가도록 명령하였다.[13] 이로 인해 현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사순절 기간 동안 금요일에 육식을 삼가는 전통이 생겼지만, 냉혈 동물의 고기(예: 생선)는 여전히 먹고 있다. 이 전통이 유럽의 어부들에게만 이익을 주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이론이 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14]

참조

[1] 서적 Annuario Pontificio Holy See
[2] 서적 The Age of Faith Simon and Schuster 1972
[3] 간행물 Martyrologium Romanum Vatican Press 2001
[4] 서적 A History of the Popes https://books.google[...] Sheed & Ward 2010
[5] 웹사이트 Pope St. Nicholas 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11
[6] 서적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Simon and Schuster 2014-06-30
[7] 서적 Southern Europe: International Dictionary of Historic Places Routledge 2013-11-05
[8] 웹사이트 ENGELBERGA (Enghelberga, Angelberga), imperatrice http://www.treccani.[...] 1993
[9] 서적 Crusade and Mission: European Approaches Toward the Muslim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07-14
[10] 간행물 "Papst Nikolaus I. und Pseudo-Isidor" in Historisches Jahrbuch 1904
[11] 웹사이트 How the Chicken Conquered the World https://www.smithson[...] Smithsonian Institution 2012-06-01
[12] 뉴스 Beyond the Trivia-Fish Fridays https://krcgtv.com/f[...] KRCG 2023-03-01
[13] 웹사이트 How Did the Roman Catholic Tradition of Eating Fish on Fridays Begin? https://kofc5357.org[...] 2023-03-01
[14] 뉴스 Lust, lies and empire: The fishy tale behind eating fish on Friday https://www.npr.org/[...] National Public Radio 2023-03-01
[15] 서적 The Age of Faith Simon and Schuster 1972
[16] 웹사이트 Pope St. Nicholas 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1911
[17] 기사 How the Chicken Conquered the World http://www.smithsoni[...] 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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