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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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문사는 1932년 장충단 공원에 건립된 사찰로,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가 건립을 제창했으며, 이토의 호 '춘무'가 사찰명과 산호로 사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뜻에 따라 조동종 사찰로 건립되었으며, 관폐대사 조선신궁 설계에도 참여한 이토 주타가 설계를 맡았다. 건축 양식은 가마쿠라 시대의 선종양식을 본뜬 근대와 중세를 절충한 형태로, 정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을 이전해 사용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에 접수되었다가 동국대학교 학생 기숙사 부지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국빈관이 건립되면서 철거되어 현재는 신라 호텔이 들어서 있다. 이전된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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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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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文寺 정보 | |
![]() | |
명칭 | 박문사 |
위치 | 서울특별시중구 장충동2가 주변 |
산호 | 춘무산 (춘포산) |
종지 | 선종 |
종파 | 조동종 |
본존 | 석가여래 |
창건년 | 1932년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의 23주기 |
제창자 | 고다마 히데오 |
2. 역사
1932년 장충단 공원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가 건립을 주도했으며, 설계는 이토 주타가 맡았다.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2층 구조에 가마쿠라 시대의 선종양식을 본뜬 형태였으며, 정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을 이전해왔다.[1]
2. 1. 건립 배경
1932년 10월 26일 장충단 공원에 건립되었으며, 사찰명은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으며, 산호인 "춘무"도 이토의 호이다.[1]조선총독부의 고다마 히데오 정무총감이 제창하였다. 고다마는 통감부 시대에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의 비서관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정무총감에 취임하자 이토 히로부미 추도를 기원하는 사찰을 짓는 모금 운동을 일으켜 건립을 실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생전에 에이헤이지 64세 모리타 고유 선사에게 귀의했기 때문에 종파는 조동종으로 정해졌다. 초대 주지는 스즈키 텐잔 (에이헤이지 69세)이었다.[1]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공적을 현창하는 시설이라는 성격이 강했다.[1]
2. 2. 건립 과정
1932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장충단 공원에 건립되었다. 사찰명과 산호 '춘무'는 모두 이토에게서 따왔다.[1]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가 제창했다. 고다마는 통감부 시절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의 비서관을 지낸 적이 있었으며, 정무총감 취임 후 이토 히로부미 추도를 위한 사찰 건립 모금 운동을 일으켜 건립을 실현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생전에 에이헤이지 64세 모리타 고유 선사에게 귀의했기에 종파는 조동종으로 정해졌다. 에이헤이지에서 주지를 초빙했으며, 초대 주지는 스즈키 텐잔(에이헤이지 69세), 다음 대는 우에노 슌에이였다.
관폐대사 조선신궁 설계에도 참여한 이토 주타(도쿄 대학 교수)가 설계했다. 철근 콘크리트 2층 건물에 가마쿠라 시대 선종양식을 본뜬, 근대와 중세를 절충한 건축물이었다. 정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이 이전되었다.
이토의 업적을 기리는 거대한 석비도 설치되었는데, 일본 조동종의 조선 지부라기보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공적을 현창하는 시설이라는 성격이 강했다.[1]
2. 3. 종파 및 주지
박문사의 종파는 일본 조동종이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생전에 에이헤이지 64세 모리타 고유 선사에게 귀의했기 때문이다.[1] 초대 주지는 스즈키 텐잔(에이헤이지 69세)이었고, 다음 대 주지는 우에노 슌에이였다. 두 주지 모두 에이헤이지에서 초빙되었다.[1]2. 4. 안중근 의사와의 관계
1939년 10월 15일,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 절을 방문하여 이토에게 분향한 것으로 전해진다.[2] 안준생은 안중근의 추선 공양도 행했기 때문에, 이 절이 기독교도인 안중근의 보리사가 되기도 했다.[2] 1941년 3월에는 안중근의 딸(안준생의 누나) 안현생도 남편(황일청)과 함께 박문사를 참배했다.[3]2. 5. 해방 이후
1945년 광복 이후, 경성부가 관리하던 공유지 안에 있던 박문사는 다른 신사들과는 다르게 처리되었다. 근처에 있던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의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미군에 접수되어 학생들이 다른 숙소로 옮겨지기도 했다.[3] 이듬해 장충단 공원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우는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박문사를 공원에 포함시키려는 요구가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 혜화전문학교는 동국대학교로 승격되었고, 박문사는 다시 동국대학교의 학생 기숙사 부지가 되었다. 미군은 부지의 토지 소유권을 일본 사찰 처리 문제 위원회에 일임했지만,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국빈관을 건립할 때까지 귀속 문제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았다.[3] 국빈관은 이후 재건축되어 현재의 신라 호텔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한국에서 박문사에 대한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경희궁에서 이전된 정문인 흥화문과 고리는 현존하며,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3. 건축 및 유물
박문사는 1932년 장충단 공원에 건립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사찰 이름과 산호 "춘무"는 모두 이토 히로부미에게서 유래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가 건립을 주도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생전에 에이헤이지에 귀의했기 때문에 종파는 조동종으로 정해졌다.[1]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1939년에 이 절을 방문하여 이토에게 분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안중근의 딸 안현생도 1941년에 남편과 함께 박문사를 참배했다.[3]
해방 이후, 박문사는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의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다가 미군에 접수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 국빈관(현 신라 호텔)이 세워지면서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3]
3. 1. 건축 양식
박문사는 이토 주타(도쿄 대학 교수)의 설계로, 철근 콘크리트 2층 건물에 가마쿠라 시대의 선종양식을 본뜬, 근대와 중세를 절충한 건축물이었다.[1] 정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이 이전되었다.3. 2. 정문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1932년 장충단 공원에 건립된 박문사로 이전되었다. 현재 흥화문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흔적과 고리가 남아있다.3. 3. 석비
이토 히로부미의 훈공을 추도하는 거대한 석비도 설치되어 있었으며, 일본 조동종의 조선 지부적인 사찰이라기보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공적을 현창하는 시설이라는 성격이 강했다[1]。 석비는 이토 주타가 설계하였다.참조
[1]
문서
英語名は「Prince Ito Memorial Temple(伊藤公爵祈念寺院)」である。
[2]
뉴스
京城日報
京城日報
1939-10-16
[3]
논문
「博文寺の和解劇」と後日談 : 伊藤博文,安重根の息子たちの「和解劇」・覚え書き
https://doi.org/10.1[...]
京都大學人文科學研究所
2011-03-00
[4]
서적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알마
20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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