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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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희궁은 조선 후기 왕의 이궁으로 사용되었던 궁궐로, 현재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해군 때 건설되어 인조부터 철종까지 약 10명의 왕이 머물렀으며, 서궐로 불리기도 했다. 19세기 화재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 또는 이전되었고, 현재는 옛 궁궐의 일부만 복원되어 서울역사박물관 등이 위치해 있다. 주요 건물로는 정문인 흥화문, 정전인 숭정전 등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숭정전이 동국대학교의 정각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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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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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경희궁 |
로마자 표기 | Gyeonghuigung |
한글 표기 | 경희궁 |
한자 표기 | 慶熙宮 |
별칭 | 서궐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
건축 양식 | 한국 |
개장 | 17세기 (일부 재건 1990년대) |
현재 입주 기관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
역사 | |
건립 시기 | 1616년 |
사적 지정 | 1980년 9월 16일 |
사적 번호 | 271 |
문화재 정보 | |
면적 | 101,174m² |
소유 | 종로구청, 서울역사박물관 |
문화재청 번호 | 13,02710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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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광해군 재위 시기인 17세기에 경희궁 건설이 시작되었다. 조선 후기에 경희궁은 왕의 이궁(왕이 비상시 거처하는 궁궐)으로 사용되었으며, 서울 서쪽에 위치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다.
인조부터 철종까지 약 10명의 조선 왕이 경희궁에 머물렀다. 주변 산세를 이용하여 지어진 이 궁궐은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한때는 규모가 상당히 커서 덕수궁과 아치형 다리로 연결될 정도였다. 왕의 정무를 보던 건물로는 성정전과 자정전이 있었고, 침전으로는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었다.
19세기 순조와 고종 재위 시기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화재로 경희궁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2]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에 의해 남아있던 궁궐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다. 성정전과 흥화문은 해체되어 서울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1990년대에 들어 한국 정부의 “조선의 5대 궁궐” 재건 사업으로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도시 성장과 수십 년간의 방치로 인해 옛 궁궐의 약 33%만 복원할 수 있었다.[3]
2. 1. 창건 및 조선 시대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다.[7] 경덕궁 터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했고,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 1617년(광해군 6년)~1623년(광해군 15) 사이에 경덕궁을 세웠다.[7]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경덕궁은 한동안 쓰이지 못했다. 인조 즉위 후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기 위해 인경궁을 헐었지만,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숭정문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순조가 승하하였다.[7]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궐(西闕)로 불렸고, 이 밖에도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 불렸다. 인조는 재위 후 약 9년 동안 경덕궁에 머물렀다. 효종과 현종은 잠시 머무르는 용도로만 사용했고, 숙종은 남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다루며 경덕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후 1760년 영조는 원종의 시호와 같은 소리가 난다는 이유로 궁명을 '''경희궁'''으로 바꾸고 19년 동안 머물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죽을 때까지 거의 이 곳에서 지냈다. 정조는 숭정전에서 즉위하였지만 자객의 위협을 받고 궁을 옮겼다. 순조 29년(1829년) 10월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고, 이후 철종이 약 7개월간 머물렀다.[7][8] 1844년 헌종의 가례 이후 더 이상 활용되지 않았다.[8]
인조부터 철종까지 약 10명의 조선 왕이 경희궁에 머물렀다. 주변 산세를 이용하여 지어진 이 궁궐은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한때는 규모가 상당히 커서 덕수궁과 아치형 다리로 연결될 정도였다. 왕의 정무를 보던 건물로는 성정전과 자정전이 있었고, 침전으로는 영복전과 회상전이 있었다.

2. 2. 일제강점기
1910년 11월 조선총독부는 조선총독부중학교(후에 경성중학교로 개칭)를 경희궁에 설치하면서 숭정전을 비롯한 일부 전각을 학교 부지로 사용했다.[13] 1920년대에는 남아있던 건물들이 매각되기 시작했다.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 조동종 조계사 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전되었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7] 회상전은 1911년부터 10여 년 동안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의 기숙사(교원 양성소)로 사용되다가, 1928년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찰에 매각되었으나 19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14]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전되었고, 관사대(觀射臺)는 사직단 뒤로 이전되어[7] 현재 황학정(黃鶴亭)으로 쓰이고 있다.[15]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되었다가 1945년 해방 이후 폐사되었고, 이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현재 위치(계양문: 남문)로 다시 옮겨졌다. 원래 흥화문이 있던 자리는 구세군회관 자리이다.[15]1922년 경희궁 동쪽 부지에 조선총독부 직원 관사가 들어섰다. 같은 해 6월, 경희궁 동쪽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21,500평을 부지로 할애했고, 1927년부터 1928년까지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경희궁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켰다.[12] 1932년 경희궁 북서쪽에 경성측후소가 건설되었고, 1940년대에는 대동아 전쟁 중 미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공호가 숭정전 동쪽 행랑에 건설되었다.[8]
2. 3. 광복 이후
경희궁터는 광복 후 서울중·고등학교로 쓰이다가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78년에 현대건설이 부지를 구매하여 사옥을 조성하려 하였으나, 공원 녹지를 조성해야 한다는 여론에 서울특별시가 재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다. 이후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서울시의회에서 경희궁 복원 비용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복원 공사는 중지되었다.[15] 서울시에서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세우면서 다시 훼손되었다. 창건 당시 경희궁 규모는 무덕문지(북문)의 유구가 발견된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을 모두 포함하며, 기상청 서울관측소 일부도 포함된다.[15][8] 또한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일대가 경희궁 추정 궁역으로, 동측 매각 부지는 광화문 풍림스페이스본아파트 104동 일부, 축구회관, 성곡미술관, 아산정책연구원, 경희팔레스빌리지, 범한서적,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한국관광연구원, 서울시교원단체연합회, 교보생명보험 직장보육시설, 체코대사관, 세종로복지센터, 메트로신문사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12]2013년 1월, 서울특별시청과 종로구청은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제출된 계획은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공동으로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경희궁 2차 복원을 진행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정문인 흥화문을 원래 위치로 복원하고, 방공호를 철거한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하며,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을 철거한 후 흥정당을 복원하고, 현재 성곡미술관 주변에 남아있는 궁장을 포함하여 경희궁 궁장을 일부 복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단계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 이전과 궁지 내 민간 건물 매입이 추진된다.[16]
2016년 11월에 서울시립미술관을 철거하였으며,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을 과거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던 위치에 새로 조성하고 기존 주차장 자리는 발굴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17]
3. 건축물
경희궁은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의 3대 궁궐로,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1617년(광해군 6년)~1623년(광해군 15) 사이에 지었다. 처음에는 경덕궁으로 불렸으나, 1760년 영조가 원종의 시호인 경덕(慶德)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희궁은 인조 반정 이후 인목대비가 이어하였고, 숙종이 태어났으며,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숙종, 순조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7]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궐(西闕)로 불렸고,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도 불렸다.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해 경희궁에는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5] 정문인 흥화문과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매우 독특하다.[19]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이 아닌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19]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19]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은 크게 훼손되었다. 1910년 11월에는 조선총독부중학교(후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을 포함한 일부 전각들이 학교 부지로 사용되었고, 1920년대에는 건물들이 매각되었다. 정전인 숭정전은 조동종의 조계사 본전으로 쓰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건되었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7] 회상전은 1928년에,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건되었으며,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쓰였다가 1988년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15]
현재 경희궁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3. 1. 정문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으로, 다른 궁궐과 달리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어 독특한 배치를 보인다.[19] 정문에서 내전으로 가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나 북쪽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19]경희궁에는 흥화문 외에도 흥원문, 개양문, 숭의문, 무덕문 등 여러 문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19]
3. 1. 1. 흥화문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19]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19] 일제강점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인 박문사(현재의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이전하여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18] 원래는 경희궁터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었는데, 현재 위치에는 남향하여 세워졌다.[19]흥화문(興化門중국어)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4] 1616년에 건립되었으나, 궁궐이 파괴된 후 박문사(박문사한국어)의 입구로 잠시 옮겨졌고, 나중에는 장충동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복원되었다.[4]
3. 1. 2. 금천교
금천교(禁川橋)는 흥화문 안쪽에 있는 무지개다리로, 1619년(광해군 11년)에 건설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매몰되었다가 2001년에 발굴, 복원되었다.3. 2. 정전 영역
경희궁은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이 아닌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등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이 다른 궁궐과 매우 독특하다.[19]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19]경희궁의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해 알 수 있다.[15] 숭정전, 융복전, 회상전, 집경당, 흥정당, 정시각, 사현각, 흥화문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파괴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3. 2. 1. 숭정문
숭정문은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왕이 승하했을 때 정전이 아닌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그러했다.3. 2. 2. 숭정전
숭정전(崇政殿)은 광해군 8년(1616년)에 건립된 경희궁의 정전이다. 숭정전 일곽은 남향한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하여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섰다.[19]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었다.[19] 동ㆍ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되었다.[19]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건되어 본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현 위치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2층 월대 중 상월대의 답도는 정각원에 남아있고, 하월대의 답도는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전에 있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19] 동국대학교 정각원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 건축의 좋은 예로 평가받는다.[5]
崇政殿|숭정전중국어은 1616년에 건립되었으나 1926년에 동국대학교로 옮겨져 일제강점기에는 불교 사찰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1988년부터 1994년 사이에 원래 위치로 옮겨 복원되었다.[5]
3. 3. 편전 영역
경희궁의 편전 영역에는 정전인 숭정전과 자정전 등이 있었다. 숭정전 영역은 궁궐의 서쪽에, 융복전, 회상전 영역은 동쪽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19] 경종, 정조, 헌종은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7] 정조는 숭정전에서 즉위하였지만 자객의 위협을 받고 궁을 옮겼다.[8]3. 3. 1. 자정전
자정전(資政殿)은 서궐도안의 묘사를 바탕으로 복원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3. 4. 진전 영역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태령전은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발굴조사 때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의 자정전과 숭정전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泰寧殿|태령전중국어은 《서궐도안》의 묘사를 바탕으로 복원되었다.[7]3. 4. 1. 태령전
태령전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었다. 발굴조사 때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의 자정전과 숭정전의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태령전(泰寧殿중국어)은 《서궐도안》의 묘사를 바탕으로 복원되었다.[7]3. 5. 기타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궐(西闕)로 불렸고,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도 불렸다. 인조는 재위 후 약 9년 동안 경희궁에 머물렀다. 효종과 현종은 잠시 머무르는 용도로만 사용했지만, 숙종은 남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다루며 경희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760년 영조는 원종의 시호인 경덕(慶德)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궁명을 '''경희궁'''으로 바꾸고 19년 동안 머물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죽을 때까지 거의 이 곳에서 지냈다. 정조는 숭정전에서 즉위했지만 자객의 위협을 받고 궁을 옮겼다. 경희궁은 순조 29년(1829년) 10월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고, 이후 철종이 약 7개월간 머물렀다.[7][8] 1844년 헌종의 가례 이후 더 이상 활용되지 않았다.[8]경희궁에는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해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5]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매우 독특하다.[19]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이 아닌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19]
3. 5. 1. 경희궁 방공호
1944년 초, 경성중앙전신국이 폭격당할 경우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을 유지하기 위해 설치된 지하전신국 겸 방공호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경성중학교 내에 방공호를 조성하기로 결정된 뒤, 경성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교내 방공호 조성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파 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하였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20] 서울특별시청은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 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21]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22]을 계획하였으나, 2013년 수립된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다.3. 5. 2. 황학정
원래 경희궁에 있었던 정자로, 고종이 청-일-러 3국의 각축전을 근심하며 이곳에서 활을 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사직공원의 옛 등과정 자리에 있다.[15]4. 훼철된 궁역 내 유적
경희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훼철되기 시작했다. 1865년 《경복궁영건일기》에는 경희궁의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흥정당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헐어 그 목재를 경복궁 공사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9]
1868년(고종 5년)에는 경복궁 공사를 위해 경희궁 일부 전각들이 추가로 헐렸고, 빈터는 용동궁, 명례궁, 수진궁, 어의궁에 분배되어 밭으로 사용되었다.[23][10] 이후 조폐소, 양잠소 등이 설치되었는데, 특히 양잠소는 1884년 독일인 마에르텐스(A. H. Maertens)가 운영을 맡았고, 1886년에는 청나라에서 뽕나무를 수입하기도 했다.[11] 1899년에는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방문하여 관명식을 진행했고, 1901년 외국인이 제작한 지도에는 이 일대가 뽕나무 공원(mulberry park)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02년 경운궁에 연결된 운교가 설치되는 등 대한제국 광무 연간까지는 경희궁의 모습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12] 그러나 1910년 경성부에서 발행한 《경성부사》에는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만이 남아있다고 언급되어 있다.[13]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경희궁 터에서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발굴된 유적은 모두 원형보존되어 복토 후 건물 신축이 진행되었다.[23]
발굴 위치 | 발굴 내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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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2가 1-120번지 | 조선시대 건물지와 배수로, 17세기 이후 유물 다수 | 배수로는 경희궁의 어구(御溝, 궁궐 배수로)로 추정[23] |
신문로2가 1-39번지 및 1-140번지 | 조선 후기 건물지 3기, 담장지, 배수로, 조선 전기 장대석석렬, 배수로, 잡석독립기초, 잡석줄기초 4기, 박석 2기 | 경희궁 동궁 영역 내 추모당 북쪽 및 중서헌 동쪽 지역으로 추정[23] |
신문로2가 1-116번지 | 경희궁 조성 이전 사대부 집터로 추정되는 조선 전기 건물지, 배수시설, 석렬, 집석시설 등 7기 유구 | 배수로는 경희궁 어구였을 가능성 제기[24][23] |
사직동 49번지 일원 | 역사시대 미상 건물지와 우물 | [23] |
2008년 신문로2가 1-176번지 일원 | 경희궁 건물지 | [23] |
1998년 신문로2가 1-107번지 및 1-108번지 | 근대, 일제강점기 건물지 | [23] |
신문로2가 1-158번지 | 역사시대 미상 구상유구 | [23] |
신문로2가 1-124번지 | 역사시대 미상 건물지, 수혈, 지정석렬 | [23] |
신문로2가 1-146, 1-332번지 | 고려시대, 근대, 일제강점기 유물산포지 | [23] |
종로구 신문로2가 1141번지 일대 | 조선시대, 현대 석렬 | [23] |
5. 현대의 활용
경희궁은 광복 후 서울중·고등학교 부지로 사용되다가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그 용도가 변경되었다. 1978년 현대건설이 부지를 매입하여 사옥을 지으려 했으나, 공원 녹지를 조성해야 한다는 여론에 서울특별시가 다시 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다. 이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서울시의회의 예산 문제 제기로 중단되었다.
서울시는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하면서 경희궁이 다시 훼손되었다. 원래 경희궁은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 기상청 서울관측소 일부 등이 포함된 넓은 영역이었다.[15][8] 현재는 종로구 신문로2가 일대가 경희궁 추정 궁역으로, 동측 매각 부지에는 광화문 풍림스페이스본아파트 104동 일부, 축구회관, 성곡미술관, 아산정책연구원, 경희팔레스빌리지, 범한서적,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한국관광연구원, 서울시교원단체연합회, 교보생명보험 직장보육시설, 체코대사관, 세종로복지센나, 메트로신문사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12]
2013년 1월, 서울특별시청과 종로구청은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이 계획은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경희궁 2차 복원을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주요 내용은 흥화문을 원래 위치로 복원하고, 방공호를 철거한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하며,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을 철거하고 흥정당을 복원하는 것이다. 또한 성곡미술관 주변에 남아있는 궁장을 포함하여 경희궁 궁장을 일부 복원할 계획이다. 2단계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 이전과 궁궐터 내 민간 건물 매입이 추진된다.[16]
2016년 11월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철거되었으며,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을 과거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로 옮기고 기존 주차장 자리는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17]
현재 경희궁터에는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2009년에는 프라다의 트랜스포머 전시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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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The 5 Palaces of Seoul
http://english.chosu[...]
2012-01-2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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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huigung Palace
http://jikimi.cha.go[...]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2015-09-11
[3]
웹사이트
http://parks.seoul.g[...]
2017-12-01
[4]
웹사이트
흥화문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1-02-06
[5]
웹사이트
숭정전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1-02-06
[6]
백과사전
경희궁
[7]
서적
2004
[8]
서적
경희궁은 살아있다 전시도록
서울역사박물관
2015-12-01
[9]
서적
경복궁 영건일기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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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서울풍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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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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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보고서
서울 경희궁 서측 궁장 유적
https://www.e-minwon[...]
문화재청
2020-03-17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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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90년전 일제가 훼손한 '경희궁 회상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종합)
https://www.yna.co.k[...]
2017-01-31
[15]
서적
2004
[16]
뉴스
일제가 망친 경희궁 내년부터 복원한다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3-01-27
[17]
웹인용
경희궁지 시립미술관 연말까지 철거…편전·침전 복원한다
https://n.news.naver[...]
2023-01-02
[18]
뉴스
경희궁 흥화문의 일제수난 생생히
http://news.hankooki[...]
2009-02-25
[19]
서적
2004
[20]
보고서
경희궁 영조·훼철 사료조사 및 활용방안
서울특별시청
2004
[21]
뉴스
일제가 만든 경희궁 방공호, '유물 수장고' 활용
http://news.sbs.co.k[...]
SBS
2010-02-05
[22]
뉴스
일제가 경희궁에 만든 거대 '방공호'…'유물 수장고' 된다
https://news.naver.c[...]
노컷뉴스
2012-02-17
[23]
보고서
서울 신문로2가 1-39번지 유적
https://www.e-minwon[...]
문화재청
2017-06-23
[24]
보고서
서울 신문로 2가 1-116번지 유적
https://www.e-minwon[...]
문화재청
201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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