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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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시춘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이후까지 활동하며 수많은 대중가요와 영화 음악을 작곡한 대한민국의 작곡가이다. 1913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유랑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을 시작하여 시에론레코드에서 작곡가로 데뷔했다. 〈애수의 소야곡〉, 〈고향초〉, 〈굳세어라 금순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영화 음악 감독, 영화 제작,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한국 전쟁 당시 해군 정훈국 소속으로 참전하여 군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1982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친일 가요를 작곡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96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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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춘 | |
---|---|
기본 정보 | |
이름 | 박시춘 |
본명 | 박순동 |
출생일 | 1913년 10월 28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
사망일 | 1996년 6월 30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장르 | 트로트 |
악기 | 기타 |
활동 시기 | 1929년 ~ 1984년 |
종교 | 불교 |
직업 | 작곡가, 기타 연주자 |
관련 정보 | |
원로 작곡가 타계 | 중앙일보 1996년 7월 1일 보도 |
2. 생애
박시춘은 뛰어난 기타 연주자이기도 했으며, 작곡에 매우 진지하여 전주와 간주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의 작품은 선율이 감각적이고 세련되었다는 특징이 있으며, 작사가 조명암과 잘 어울렸다.
2. 1. 초기 생애 (1913년 ~ 1930년대 초)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박순동'''이다. 아버지가 기생 양성소인 권번을 운영한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까이 했다. 유랑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하다가 시에론레코드의 이서구, 박영호를 만나 작곡가로 입문했다.[2]2. 2. 작곡가 데뷔와 전성기 (1930년대 초 ~ 1945년)
1929년 트럼펫 연주곡 〈몬테 카를로의 갓난이〉를 작곡하며 작곡가로 데뷔했다. 이후 트럼펫, 바이올린, 색소폰, 기타 등 다양한 악기 연주자로 활동했다. 1935년 〈희망의 노래〉,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을 발표하며 인기 작곡가가 되었다. 1938년 남인수가 불러 큰 반향을 얻은 〈애수의 소야곡〉으로 박시춘과 남인수는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애수의 소야곡〉은 서민의 애환을 잘 표현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노래로 평가받는다.[2]2. 3.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 1996년)
광복 후 〈고향초〉,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낭랑 18세〉,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 서울〉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약 3천여 곡의 노래와 악상을 남겼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박시춘의 등장 자체가 대중가요의 새 장을 열었으며 "한국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한국 전쟁 시기에는 대한민국 해군 정훈국 소속으로 참전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전우여 잘 자라〉는 이때 작곡한 곡으로,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의 전투와 국군의 북진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한국 전쟁 후에 발표한 〈샌프란시스코〉와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은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이국 취향의 음악이었다.[3]
1950년대에는 영화 음악 작업을 많이 했고, 영화사를 차려 직접 영화 제작을 하기도 했다. 1956년 영화 《청춘쌍곡선》의 단역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 1958년에 제작된 《삼등호텔》로 영화감독과 영화제작자로 데뷔했고 영화 음악감독 또한 담당, 같은 해 제작된 《딸 칠형제》는 직접 연출까지 맡았다. 영화 주제가로는 반야월과 호흡을 맞춘 〈딸 칠형제〉, 〈남성 No.1〉, 〈유정천리〉 등이 히트곡이 되었다.
1961년에 한국연예협회가 조직될 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보관장을 서훈받았다.[4] 대중가요 작곡가에게는 이때 문화훈장 보관장이 처음 서훈된 것이었다.
1996년 6월 30일, 향년 84세로 사망했다.
3. 음악적 특징 및 평가
박시춘의 작품은 선율이 감각적이고 세련된 점이 특징이며, 작사가 조명암과 잘 어울렸다. 뛰어난 기타 연주자이기도 했던 박시춘은 작곡에 대해 매우 진지하여 전주와 간주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2]
그는 약 3천여 곡의 노래와 악상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으로 박시춘의 등장 자체가 대중가요의 새 장을 열었으며, "한국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
4. 친일 행적 및 논란
태평양 전쟁 시기에 박시춘은 〈혈서지원〉,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목단강 편지〉 등 친일 가요를 작곡했다.[5] 이 가운데 조명암이 작사한 〈혈서지원〉은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로 혈서를 쓴다는 가사를 담고 있으며, 군국가요 중에서도 친일성이 짙은 노래로 평가받는다.[6][7]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고, 박시춘을 기념하는 가요제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8]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5. 주요 작품
박시춘의 주요 작품으로는 데뷔작인 〈몬테칼로의 갓난이〉, 〈어둠에 피는 꽃〉이 있다. 1935년 〈희망의 노래〉,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을 발표하며 인기를 얻었다. 1938년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은 큰 인기를 얻으며 두 사람을 절정의 인기로 이끌었다. 박시춘은 양복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기타를 연주했고, 남인수는 애절한 노래를 불렀다. 〈애수의 소야곡〉은 일제 강점기 서민의 애환을 잘 표현한 대표적인 노래로 꼽힌다.[2]
이후 〈고향초〉,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낭랑 십팔세〉, 신세영의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 서울〉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약 3천여 곡을 작곡했으며, "한국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샌프란시스코〉,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등 이국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발표했다.[3]
1943년 영화 《조선해협》으로 영화음악감독으로 데뷔했다.[2] 1950년대에는 영화 음악 작업을 많이 했고, 영화사를 설립해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반야월과 함께 작업한 영화 주제가로는 〈딸 칠형제〉, 〈남성 No.1〉, 〈유정천리〉 등이 있다.
5. 1. 가요
데뷔작은 〈몬테칼로의 갓난이〉, 〈어둠에 피는 꽃〉이다. 1935년 〈희망의 노래〉에 이어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을 발표하며 인기 작곡가가 되었다. 특히 1938년 남인수가 불러 큰 반향을 얻은 〈애수의 소야곡〉으로 두 사람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박시춘은 양복 차림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기타를 연주하고, 남인수는 애절한 곡조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상징되는 〈애수의 소야곡〉은 서민의 애환을 잘 표현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노래로 자리잡았다.[2]이후 〈고향초〉,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낭랑 십팔세〉, 신세영이 부른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 서울〉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약 3천여 곡의 노래와 악상을 남겼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박시춘의 등장 자체가 대중가요의 새 장을 열었으며 "한국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전쟁 후에 발표한 〈샌프란시스코〉와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은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이국 취향의 음악이었다.[3]
5. 2. 영화 음악
1943년 영화 《조선해협》으로 영화음악감독으로 데뷔하였다.[2] 1950년대에는 영화 음악 작업을 많이 했고, 영화사를 차려 직접 영화 제작을 하기도 했다. 영화 주제가로는 반야월과 호흡을 맞춘 〈딸 칠형제〉, 〈남성 No.1〉, 〈유정천리〉 등이 있다.6. 소속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참조
[1]
뉴스
원로 작곡가 박시춘씨 83세로 타계
중앙일보
1996-07-01
[2]
서적
한국사 이야기 22: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 바람
한길사
2004-05-01
[3]
뉴스
한국전쟁과 대중음악의 ‘분단’ - ③ 미아리와 테네시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5-06-01
[4]
뉴스
[발굴] 주요 친일명단 120명 중 34명 해방후 훈·포장·표창 서훈 - 김성수는 2등급, 유관순은 3등급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8-31
[5]
뉴스
"이 사람도 친일파?" 예상밖 '친일인사들' - 월북배우 문예봉, 고전가요 남인수, 박시춘 등 대중사랑 받던 연예인들 다수 포함
http://www.cbs.co.kr[...]
노컷뉴스
2005-08-29
[6]
뉴스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44) - 가수 남인수·백년설이 정말 '혈서'를 썼을까?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05-28
[7]
뉴스
〈신라의 달밤〉과 〈혈서 지원〉
http://www.sbook.co.[...]
작은책
2005-03-01
[8]
뉴스
'친일파 가요제', 조명암·박시춘 '폐지' - 남인수 '계속'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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