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1. 개요
남인수는 1918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의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36년 김상화의 시에 곡을 붙인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으며,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크게 히트하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 군국 가요를 부른 행적으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62년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동료 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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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이름 | 南仁樹 |
|---|---|
| 본명 | 원명은 최창수(崔昌洙) |
| 개명 | 강문수(姜文秀) |
| 출생일 | 1918년 10월 18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진주 |
| 사망일 | 1962년 6월 26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종교 | 불교 |
| 장르 | 트로트 |
| 활동 시기 | 1936년 ~ 1962년 |
| 직업 | 가수 |
| 가족 | 자형 손홍팔(법조인) |
| 배우자 | 김은하(이혼) |
| 웹사이트 | 가요황제 남인수 전승보전회 |
| 학력 | 진주제2소학교 졸업 |
|---|---|
| 학력 | 진주고등보통학교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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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어린이 가수 -
황금심
황금심은 1936년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1등으로 데뷔하여 〈알뜰한 당신〉, 〈울산 큰애기〉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활동하다가 1996년 파킨슨병으로 투병, 2001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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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가수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큰 인기를 얻어 당대 최고의 여가수가 되었고, 저고리 시스터즈 멤버로 활동했으며, 김해송과 결혼 후 김시스터즈를 결성하여 미국 무대에 진출시키는 등 후진 양성에도 기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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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월 (작사가)
반야월(본명 박창오)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활동한 작사가이자 가수로, 진방남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여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러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작사가로 전향하여 서민들의 애환과 향토적인 정서를 담은 수많은 곡을 작사하며 한국 대중가요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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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심은 1936년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1등으로 데뷔하여 〈알뜰한 당신〉, 〈울산 큰애기〉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활동하다가 1996년 파킨슨병으로 투병, 2001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봉래초등학교 (경남) 동문 -
김민우 (축구 선수)
김민우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연세대학교 축구부, 사간 도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상주 상무, 청두 룽청을 거쳐 2024년 울산 현대에 입단했으며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과 성인 국가대표팀을 거쳐 FIFA 월드컵과 EAFF 동아시안컵에 참가한 왼쪽 풀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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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 (1930년)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조용수는 민족일보를 창간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으며, 사후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를 상대로 일부 손해 배상 승소 판결을 받았다.
2. 생애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와 강문수(姜文秀)이다.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일제시대 학적부를 통해 확인된다.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남인수의 친어머니 장하방은 처음 최씨 집안(진주시 미천면 미곡리)으로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사망하자 진주 하촌동 드무실에 사는 강영태의 소실로 들어가 강문수(예명 남인수)를 낳았다.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인수의 가족은 미국에 살고 있으며, 진주의 강씨 집안과는 교류가 없었다. 이는 남인수의 어린 시절이 힘들었기 때문으로 강씨 집안에서는 추정한다. 현재 진주 강씨 집안과 남인수 전승 보전회에서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강씨 집안 묘지에 남인수의 묘를 이장하여 단장하고 관리하고 있다. 남인수 묘소 근처에는 진주시에서 설치한 '문수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남인수의 본명인 '강문수'에서 이름을 따왔다.
가수 데뷔와 활동,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 이난영과의 관계, 사망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라.
2.1. 출생과 성장
본명은 姜文秀중국어이며,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최창수(崔昌洙)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진주고등보통학교는 중퇴했다.
2.2. 가수 데뷔와 활동
1936년 김상화의 시에 곡을 붙인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고, 1938년 이 노래를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크게 히트하면서 약 20여 년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남아일생〉, 〈일가 친척〉,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 등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약 1천 곡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주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노래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으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발표한 데뷔곡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남인수는 박영호, 박시춘을 통해 시에라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옹골찬 미성에 정확한 음높이와 발음으로 고음 처리에 뛰어났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 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들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가 열렸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강점기 말기,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혈서지원〉, 〈그대와 나〉, 〈아들의 혈서〉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취입하였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남인수를 백년설과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으나, 당시 대중 가수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을 인정하여 기각했다.
주요 노래로는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 "추억의 소야곡",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과 함께 1949년 9월 1일 대한민국 최초로 금지곡이 된 여순사건을 다룬 "여수야화"가 있다.
2.3.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
일제 강점기 말, 남인수는 〈혈서지원〉, 〈그대와 나〉, 〈아들의 혈서〉 등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강제 동원 가요, 즉 친일 군국 가요를 불렀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남인수가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남인수를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포함시켰으나, 당시 대중 가수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는 점을 고려하여 기각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남인수의 친일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그의 예술적 업적과 친일 행적을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2.4. 이난영과의 관계
동료 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 이난영은 작곡가 김해송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남인수의 도움으로 운영했다. 1962년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난영이 간호했다.
2.5. 사망
1962년 7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이난영과의 로맨스가 유명한데, 한국 전쟁 때 남편 김해송이 실종되면서 남인수가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대신 운영하도록 도왔고, 1962년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난영이 간호했다.
3. 사후
1962년 7월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망 전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진주에 있는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동상과 노래비도 건립되었다.
진주시가 주최하는 예술제에 포함된 남인수가요제 개최를 두고 시민단체가 남인수의 친일 경력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
4. 주요 노래
1936년 당시 9세의 소년 시인이었던 김상화 작가의 시에 곡을 붙인 〈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약 1천 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주요 노래로는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 〈추억의 소야곡〉,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과 함께 1949년 9월 1일에 대한민국 최초로 금지곡이 된 여순사건을 다룬 〈여수야화〉가 있다. 그 외에도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남아일생〉, 〈일가 친척〉,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청춘 고백〉,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