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기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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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용기는 5.16 군사 정변 당시 이한림 1군 사령관을 납치하는 데 관여했으며, 4.19 기념일 쿠데타 기도에 연루되었다. 1962년에는 김지태 강제 헌납 사건과 관련하여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수사를 진행했으나, 재산 헌납에 반대하여 미움을 받았다. 이후 횡령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박용기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육사 8기 동기생들과 함께 쿠데타 계획에 참여했으며[1], 특히 정변에 반대 입장을 보인 이한림 당시 제1야전군사령관을 직접 납치하는 등 정변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3]
5.16 쿠데타 직후인 1962년 초, 박정희는 부산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던 박용기를 독대하여 김지태에 대한 수사를 직접 지시했다. 훗날 박용기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사실을 증언하며, 박정희가 김지태의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뿐 아니라 "혁명사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7] 이는 김지태 사건 수사 책임자의 육성이 직접 언론에 공개된 첫 사례였다.[7]
2. 5.16 군사정변
2. 1. 4.19 기념일 쿠데타 기도
박정희는 1961년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대규모 유혈 폭동으로 유도하여 장면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게 만들고, 이를 빌미로 폭동 진압 부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계획했다. 이 과정에서 김종필, 박종규 등이 동원한 비밀 학생 조직이 시위를 격화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4월 16일,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에 반대하는 이한림 제1야전군사령관 예하의 참모 부서에서는 오히려 쿠데타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작전처 소속 육사 8기 장교 11명이 박용기 중령의 집에 모여,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하면 군사첩보대와 235수송중대 병력을 동원해 이한림 사령관의 숙소와 사무실을 포위하고 특공대를 편성하여 그를 체포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한편,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박종규 소령 등은 한 달간 시위 동향을 살폈으나, 예상과 달리 시위가 질서 있게 진행되면서 폭력 시위를 유발하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1]
2. 2. 5.16 군사정변시 역할
박용기는 조창대 중령을 비롯한 이종근, 심이섭 등 육사 8기 동기생들과 함께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다. 당시 그는 실질적인 병력을 지휘하지 않는 참모장교 신분이었다. 군사정변에 반대하며 서울로 진입한 정변군을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을 가진 이한림 당시 제1야전군사령관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전화를 감청했다.[2][3]
1961년 5월 18일 새벽 6시, 박용기는 헌병 중위로 위장한 후 조창대 중령, 안찬희 대위, 김수만 대위와 함께 강원도 원주에 있는 이한림 사령관의 관사로 향했다. 관사에서 당시 참모장 황현친 소장, 군수참모 박원근 준장과 아침 식사를 하던 이한림 사령관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납치했다. 이들은 이한림 사령관을 차에 태우고 원주를 출발하여 경기도 여주, 이천,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을 거쳐 육본으로 강제로 데려갔다. 이 과정에서 김원호는 경비행기를 이용해 이송 차량을 감시하며 뒤따랐다.[2][3]
3. 김지태 강제 헌납 사건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1962년 3월 27일부터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김지태의 회사 임직원들을 구속하기 시작했으며, 해외에 있던 김지태를 귀국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까지 구속했다.[4] 결국 귀국한 김지태는 구속되었고,[5] 당시 군사혁명위원회는 김지태에게 부일장학회를 포함한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수사를 지휘했던 박용기는 이러한 강제 헌납 요구에 원칙을 내세우며 반대했고, 이로 인해 박정희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6]
3. 1. 박정희의 직접 지시
5.16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2년 정초 연휴에 부산을 방문하여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이던 박용기를 독대하였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김지태가 “부산일보 및 문화방송을 미끼로 부정축재 및 탈세”를 하고 있으며 “혁명사업에 비협조적이니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훗날 박용기는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이러한 사실을 직접 증언했다. 그는 "1962년 초 부산에 내려온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단둘이 만났을 때 박 전대통령이 (5·16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김지태씨를 수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라고 밝혔다. 박정희는 김지태의 부정 축재, 탈세 혐의뿐만 아니라 혁명 사업에 비협조적인 행적까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7] 이른바 ‘김지태 사건’ 수사 책임자였던 박용기의 육성이 언론에 직접 공개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7]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1962년 3월 27일,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부산일보 전무 윤우동, 한국생사 상무 이상학, 조선견직 전무 배정기 등 김지태 회사 임직원 10여 명을 구속했다. 또한, 당시 일본 출장 중이던 김지태를 귀국시키기 위해 사흘 뒤에는 그의 부인 송혜영을 구속하기도 했다.[4]
결국 중앙정보부 측의 설득으로 귀국한 김지태는 구속되었다.[5] 당시 군사혁명위원회는 부일장학회를 포함한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을 국가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합의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박용기는 이러한 재산 헌납 요구에 원칙을 내세우며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박정희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6]
3. 2. 수사 및 강제 헌납 과정
5.16 쿠데타 이후 1962년 초, 박정희는 부산 방문 중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를 독대하여 김지태에 대한 수사를 직접 지시했다.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박용기는 훗날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가 김지태의 부정축재, 탈세 혐의뿐 아니라 "혁명사업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고 증언했다.[7]
이에 따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1962년 3월 27일부터 김지태의 회사 임직원들을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하기 시작했으며, 해외에 있던 김지태를 귀국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까지 구속했다.[4] 결국 귀국한 김지태는 구속되었고,[5] 당시 군사혁명위원회는 김지태에게 부일장학회,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수사를 지휘했던 박용기는 이러한 강제 헌납 요구에 원칙을 내세우며 반대했고, 이로 인해 박정희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6] 박용기의 이러한 반대는 이후 그가 혁명정부에 의해 구속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8][9]
3. 2. 1. 박용기의 구속
1962년 초,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부산에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를 만나 김지태에 대한 수사를 직접 지시했다. 박정희는 김지태가 부정축재와 탈세를 저지르고 혁명 사업에 비협조적이라며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7] 이에 따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1962년 3월 27일 김지태 회사 임직원 10여 명을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으며, 당시 일본에 있던 김지태를 귀국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까지 구속했다.[4]
정보부의 압박으로 귀국한 김지태는 결국 구속되었다.[5] 당시 군사혁명위원회는 김지태에게 부일장학회를 포함하여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석방을 제안했다. 그러나 수사를 담당했던 박용기는 이러한 재산 헌납 요구에 원칙을 내세우며 반대하였고, 이 일로 박정희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6]
결국 1962년 9월 24일, 박용기 대령은 혁명정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사건 무마를 대가로 금품을 받아 횡령하거나 기부금을 불법으로 모금했다는 등의 횡령 혐의였다. 이 혐의로 박용기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8][9]
참조
[1]
웹인용
4·19 기념일 시위 不發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1-02-16
[2]
웹인용
李翰林 1군 사령관 체포 작전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1-03-18
[3]
뉴스
윤보선 회고록 외로운 선택의 나날. 제2공화국의 종장
동아일보
1989-06-02
[4]
뉴스
"[한홍구 교수 연재 기고 정수장학회를 말한다] ③ 사건의 발단"
http://news20.busan.[...]
부산일보
2012-07-19
[5]
뉴스
5.16 자금 거절하자 부산일보 뺏어
한겨레
1988-07-16
[6]
뉴스
박용기씨는 왜 재산 몰수에 반대했나
http://www.sisapress[...]
시사저널
2012-02-22
[7]
저널
문화방송 기부승낙서 변조됐다
http://www.sisajourn[...]
시사저널
2012-02-26
[8]
뉴스
박용기 대령에 징역 5년
동아일보
1962-12-22
[9]
뉴스
탈세 혐의 등 무마 기부금 불법 모금 공소장
경향신문
196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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