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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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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지태는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근무와 중일전쟁 시기 군수 사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1949년 부산일보를 인수하고, 1950년과 1954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4.19 혁명 이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재산을 헌납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고, 1962년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 재산을 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에 기증했다. 김지태는 친일 의혹과 부정축재 논란에 휩싸였으며, 유족들은 정수장학회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또한 유서 조작 및 세금 포탈 의혹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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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
기본 정보
한자金智泰
가타카나キム・ジテ
한글김지태
로마자 표기Gim Ji-tae(2000년식)
Kim Chi-t'ae(MR식)
생애
출생김해 김씨
사망유서 조작 논란 있음 (신동아 보도)
활동
주요 활동광복 이전 기업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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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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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약력

연도내용
1908년부산 좌천동 출생[3]
1927년부산공립상업학교(후의 개성고등학교) 졸업,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입사
1932년폐결핵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퇴사
-조선섬유한국제사주식회사 사장 역임
-부산상공회의소 초대 회장 역임
-부산일보 사장 역임
-경남육상경기연맹 회장 역임[7]
1950년무소속으로 국회 제2대 의원 당선
1954년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 의원 당선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불하받은 울산의 2만 평 부지를 기반으로 자본가로 성장
-직물공장 사업 실패 후, 종이상자 제조업 진출, 중일전쟁 발발로 사업 성공
-종이상자 제조, 종이류 무역, 부동산업 등으로 부를 축적
1949년부산일보 인수
1958년부일장학회 설립
1959년부산문화방송 개국
1961년한국문화방송(후의 문화방송) 개국
1954년12월 제2차 헌법 개정(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여 자유당에서 제명
1957년5월 자유당 복당
1958년5월 제4대 민의원 선거 낙선, 정계 은퇴
1961년5·16 군사정변 이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 부정축재 환수금 납부
1962년국내재산도피방지법 등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구형,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일장학회 재산 기증 후 석방, 이후 정수장학회로 이관[4][5][6]
1982년사망[8]


2. 1. 출생과 성장

1908년 부산 좌천동에서 아버지 김경중(金京仲)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산에서 12대째 살아온 재력가였다. 조부 김채곤은 통도사 신도회장을 맡았을 뿐 아니라 육영제(育英齊·부산진초등학교 전신) 운영에 헌신해 인근 주민들로부터 '金사일 영감님'으로 칭송을 받았다.[15] 부친 김경중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으나 가정에는 소홀했다. 김지태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외가가 있는 동래군 서면 초읍리로 이사했다.

이후 부산진공립보통학교에 진학했는데, 그는 특히 산수에 소질을 보였다.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김지태는 보통학교 5학년 때인 1922년 4월에 영주동에 있는 3년제 부산진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에 입학했다.[16]

2. 2. 동양척식주식회사 근무와 사업 시작

1927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일제 수탈의 핵심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하였다.[15] 1932년 폐결핵으로 퇴사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울산 지역 토지 2만 평을 불하받았다. 이는 그의 자본가로서의 시초였다. 부산지점장에게 인심을 얻어 동경의 본사와 의논하여 불하받았다고 전해지며, 이 땅을 기초로 자본가로 성장한다.[15] 이후 인조견을 생산하는 직물공장 사업을 시작했으나 얼마 못 가 실패하였다. 이후 제지업에 진출하여 지류 제조, 지류 무역, 부동산업 등으로 중일전쟁에 일제 군납사업으로 부를 쌓았다.[15]

2. 3. 해방 이후 기업 활동

해방 후 김지태는 조선견직(전 아사히 견직), 삼화고무, 제사업(製絲業) 등을 주축으로 부산 일대를 넘어 전국적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15] 1949년 부산일보를 인수하였다.[15] 1958년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였고,[15] 1959년 부산문화방송을 개국하고, 1961년 문화방송(서울)을 개국하였다.[15]

2. 4. 정치 활동

1950년 무소속으로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4년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15] 1954년 12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다가 자유당에서 제명되었으나,[17] 1957년 5월에 복당했다.[17]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17]

2. 5. 부정축재와 5.16 군사정변

1960년 4·19 혁명 당시 부정축재자 명단 1호에 올랐다.[15]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1961년 12월 30일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5.457000000000001억을 냈다.[17]

1962년 5월, 국내재산도피방지법, 관세법 및 형법, 농지개혁법 위반 혐의로 군검찰로부터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17] 같은 해 6월 20일 구속된 상태에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부일장학회 소유의 부산 시내 땅 10만 147평을 5·16 장학회에 무상 기증한다는 기부 승낙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형식은 합법을 취했으나 강압이었고 기부 승낙서가 변조된 사실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17]

1971년 8월 7일, 김지태는 자필로 쓴 (부일장학회·부산일보·문화방송 등의) 양도경위서를 5·16장학회에 보냈다. 당시 정·재계에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매각설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김지태는 이 서신에서 매각한다면 창설자인 본인이 인수하겠다고 강조했다. 그 내용 중에는 부일장학회의 강압적인 양도서류 날인 내용이 담겨있다. <<1962년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용기씨에 의하여 본인이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어 군사재판이 진행 중, 계엄사령부 법무관실에서 고원증씨가 미리 작성한 양도 서류를 지참하여 날인을 강요당하고, 쇠고랑을 찬 손으로 본의 아닌 날인을 하게 되었음>>[18]

2. 6. 사망

[8] 1982년 사망했다. 부인은 파평 윤씨이다. 장지는 양산시 하북면 초산리 산17이다.

3. 친일 활동 논란

김지태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불하받은 땅을 담보로 1934년에 대출을 받아 인조견을 생산하는 부산진직물공장을 인수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첫 사업은 실패했지만, 직물 사업 경험과 일본 직물도매상 하기노 상점의 소개로 일본 오사카의 이시이(石井) 철공소에서 지류 관련 기계들을 주문하고 실습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시절 불하받은 땅이 사업 재기의 발판이 된 것이다. 1935년 9월, 김지태는 울산농장을 담보로 부산 제2금융조합에서 융자를 받아 범일동에서 조선지기(紙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원료는 일본 굴지의 제지회사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설립한 왕자제지와 태양제지에서 공급받았는데, 이는 당시 조선 사업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특혜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쟁 특수까지 겹쳐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

사업에 자신감이 붙은 김지태는 조선식산은행 부산지점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지류 무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조선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나석주 의사가 폭탄 투척을 고려했던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 수탈 기구였다. 조선식산은행의 일본인 부산지점장은 김지태가 동척에 근무하던 시절 바둑을 같이 두던 상대로, 이러한 인연으로 그에게 상당한 자본을 빌려주었다고 한다.[21] 김지태는 부동산업에도 진출하여 부산, 김해, 동래, 경주에까지 농토를 확보하고 목산(牧山)농장과 부산부동산회사를 설립했다.

1938년 5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지태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에 있는 대흥금산을 광업권자로부터 매수했다. 당시 광산 사업은 일제의 도움 없이는 원활한 진행이 어려웠다는 점에서, 이 또한 김지태가 일제에 협력하여 사업을 번창시켰다는 정황 증거로 볼 수 있다.[22]

1960년 4.19 혁명 당시 김지태는 부정축재자 명단 1호에 올랐으며, 부산 학생들은 김지태의 집으로 몰려가 “악질친일재벌을 처단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자유당 시절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20여만 평의 농지를 편법으로 구입한 것이 부산 민심을 자극했고, 흥분한 시민들이 김지태의 집에 똥물을 뿌리는 일도 있었다.[24]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8월 24일, 민주당은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을 발의했다. 원안에는 친일행위 대상을 "은행, 회사 등의 간부 또는 직원으로서 우리 민족의 재산을 수탈한 행위, 경제침탈을 위해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각종 경제기관과 단체에 재직한 자 중 침탈행위에 적극협력한 자"로 규정하여 김지태가 친일 명단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규정이 변경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 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로 친일행위 대상이 축소되면서 김지태는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개정안은 2004년 3월 2일 본회의 통과).[25]

김지태의 유족들은 김지태가 오히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 간부를 지냈다고 주장하며, “자유한국당 (현 국민의힘) 측이 김지태를 친일파로 부르는 이유는, 언론 장악과 개인 재산 형성을 위한 목적으로 (박정희 정권) 그의 재산을 빼앗은 것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유족은 장학회를 빼앗긴 한(恨)을 안고 산다”고 말했다.[9] 한편, 월간 신동아의 2013년 기사에서는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와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의 조사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지태의 재산을 강탈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김지태가 재산 헌납으로 처벌을 면하고 기업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하면서, 김지태 유족 간에 격렬한 상속 분쟁이 있었던 것을 폭로했다.[2]

3. 1. 동양척식주식회사 근무

김지태는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일제 식민지 수탈의 핵심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하였다. 당시 내선일체를 강조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김지태가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입사했다는 사실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19]

김지태는 자서전 '나의 이력서'(1976)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해 직무에 충실했던 내용을 썼다. 1927년부터 1932년까지 5년간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말단 사원으로 근무한 것만으로는 친일파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으나, 5년은 당시 시대상을 감안했을 때 민간 경력으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동시대 인물들의 이력을 보면, 언론인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엘리트들 중 민간 분야에서 10년 이상 근속한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당시 5년 경력은 현재와 판이하게 다른, 짧지 않은 기간이라 할 수 있다.[19] 다른 정황 증거들과 종합해 볼 때 김지태의 친일 의혹은 더욱 짙어진다.

3. 2. 동양척식주식회사 불하 토지

김지태가 자본가로서 기반을 다진 것은 1932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불하받은 울산 땅 2만 평이었다. 당시 일본인도 1만 평 이상 불하받기 어려웠는데, 김지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5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2만 평을 받았다는 점은 특혜라는 주장이 있다.[19] 김지태 평전에서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가 '엄청난 특혜'였음을 기록하고 있다.[20] 이 토지에서 수확한 벼는 분할상환금을 갚고도 매년 100석 이상의 쌀이 남았다고 한다.[19]

3. 3. 중일전쟁 시기 군납 사업

김지태는 조선지기(紙器)주식회사,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 등을 운영하면서 군복, 포장상자, 군수물자 생산 등 일제 군납 사업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23] 자신의 회고록에서 중일전쟁 시기 일제 군수사업으로 부를 이뤘다고 밝힌 바 있다. 중일전쟁 시기부터 일제 군납 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며, 이는 이례적인 일제의 특혜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에 따르면,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일정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고 있다.[23]

3. 4. 광복 이후 적산 기업 인수

김지태는 광복 이후 적산(敵産) 기업이던 아사히견직(조선견직주식회사의 전신)의 관리인을 맡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8] 1954년에는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신발제조공장이었던 삼화고무를 인수해 전국 10대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8]

3. 5. 친일 의혹 관련 법적 판단

김지태는 정황상 친일파로 볼 여지는 많으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 명단이나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25]

2012년 대한민국 법원에서는 김지태의 친일을 주장했던 박근혜의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혐의없음"으로 종결시켰다.[26] 2019년 김지태 유족들이 제기한 곽상도·나경원·민경욱 의원의 사자명예훼손 혐의 역시 무혐의로 종결되었는데, 이는 일반 국민들의 상식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김지태가 친일을 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27]

하지만, 공적 또는 민간 자료에는 김지태가 친일파라는 기록이 전혀 없다. 2019년 유족은 문재인 비판 과정에서 김지태를 “친일파”라고 언급한 자유한국당 (현 국민의힘)의원 곽상도 등을 고소했고, 2021년 김지태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행위는 사자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9][10] 유족은 2012년에도 박근혜가 김지태를 “부정축재자”라고 부른 행위에 대해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당시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6]

4. 유족들의 독립운동 조작 의혹

2004년 김지태의 유족들은 김지태가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청년총동맹의 "부산지부 간부직을 맡았다가 부산경찰서에 구속까지 됐다"고 주장했다.[28] 그러나 조선청년총동맹은 1924년 220여 개의 사회주의 계통 청년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로 1925년 일제에 의해 와해되었으며, 유족들이 주장하는 시기에 김지태의 나이는 불과 17-18세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청년총동맹을 이끌었던 김사국, 최창익, 이영 등은 각각 1895년생, 1896년생, 1889년생으로 모두 1908년생인 김지태보다 10살 이상 많았다.

김지태의 유족들은 김지태가 1927~31년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간부를 역임하였고, 한글학교에서 야학을 열었다고 주장했다.[29] 그러나 이 시기는 김지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일하고 있을 때였다(김지태는 1927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입사하여 1932년 폐결핵으로 퇴사하였다). 일제의 대표적인 수탈 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일하며 독립운동단체의 간부를 역임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20~24세의 나이에 불과했던 김지태가 쟁쟁한 사회주의자들을 제치고 거대 사회단체의 간부가 되었을 리는 더욱 만무하다. 당시 신간회의 주요 구성원은 안재홍, 이상재, 김병로, 오화영, 홍명희, 허헌 등 김지태의 아버지뻘 이상 되는 세대들이었다(더구나 김지태는 교장의 추천을 받고 동척에 입사했다).

이처럼 개연성이 떨어지는 주장들은 유족들의 유서 조작 의혹과 맞물려 김지태에 대한 친일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김지태와 동명이인인 항일운동가 김지태(1911-1937)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에서 일하다 투옥되었다는 사실만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다.[30]

5. 부정축재 논란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와 김지태의 유족들은 김지태가 친일파가 아니며 부정축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한홍구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사진을 실은 신문사가 김지태가 운영하던 부산일보였다는 점을 들어 그를 자유당이승만에 맞서 싸운 인물인 것처럼 묘사했다.[31] 그러나 김지태의 부정축재는 역사적 사실이다.

김지태는 1950년대에도 비리 의혹으로 구설수에 올랐으며, 1959년 국세청으로부터 생사 수출 시 2.05억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5개 회사 대표들과 함께 조세처벌법 위반 혐의로 고소당했다.[31]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 때도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다. 이기붕에게 조선견직의 탈세 묵인조로 자유당에 선거 자금 1000만을 제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3.15 부정선거를 도왔다는 비난을 받았다.[31] 5·16 군사정변 이전에도 부정축재 환수금을 추징당했고, 1961년 2월에는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 대상자 심사 명단에 올랐다.[31] 장면 총리 및 제2공화국의 핵심 인사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31]

1950년 후반~60년대 초반의 언론 기사들은 김지태가 부정축재를 했으며, 이승만의 자유당에 자금을 헌납했다는 것을 구체적인 액수와 시기까지 지적하고 있다.[32][33][34][35][36][37][38]

1962년 고등군법회의는 김지태에게 징역 7년형을 구형했는데, 이때 김지태의 부정축재 혐의는 크게 농지개혁법 위반, 탈세, 밀수 세 가지였다.

5. 1. 농지개혁법 위반

1952년 부산 대연동 마을에 '국군이 토지를 징발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주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주민들은 군인들에게 "땅을 이렇게 빼앗아가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애원했지만,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항의할 수 없었다. 결국 마을 주민들은 언젠가 되돌려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삶의 터전을 내놓았다.[31] 그러나 당시 국방위원회 소속이었던 김지태가 징발당한 농민들의 땅을 인수하면서 주민들의 기대는 무너졌다. 김지태의 유족이 박정희 정부에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토지 10만 평 중 4만 평이 바로 이 대연동 토지이며, 본래 주인은 땅을 경작하던 이 지역 농민들이었다.[31]

김지태와 몇몇 브로커들은 국가에 징발된 땅이라는 점을 악용해 "정부에선 보상금을 주지 않으니 일단 넘기라"는 말로 농민들을 속여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31] 김지태의 수사를 맡았던 박용기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은 “국군에 징발되어 있는 농민들 소유 전답을 김씨가 국방위원이라는 신분을 활용해 헐값에 넘겨받아 치부 수단으로 이용했다”면서 “땅을 징발당한 농민 후손들의 주장은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또 “특히 땅 부분은 김씨가 농민들에게 원성을 사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덧붙였다.[31]

김지태는 부산 서면 일대 토지 10만 평을 자신의 석방을 위해 국방부에 기증했으나, 담당 검사인 오영근이 땅을 받고 석방해 줄 수는 없다며 석방을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이에 김지태는 황영주를 통해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접촉하여 5.16장학회에 토지 기증을 제안하여 기증했다. 이 부산 토지는 부일장학회 소유가 아니었으며, 전부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었다.[31]

5. 2. 탈세 및 밀수

1959년 김지태는 조선방직을 운영하면서 영업세, 물품세, 법인소득세 등을 포탈했다는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32][33][34][35][36][37][38] 이듬해 이기붕에게 조선견직의 탈세 묵인조로 자유당에 선거자금 1000만을 공여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3.15 부정선거를 거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31]

군사정권 당시 김지태가 재산을 헌납한다고 각서를 썼을 때, 그의 집에서는 다이아몬드 반지, 외제 카메라 등 밀수품이 발견되었다. 당시 사회는 이기붕이 집에서 귤 한 박스 나왔다고 비난받고, 미제 중고 냉장고를 뇌물로 받았다고 비난받던 시대였다.[8]

6. 박정희 정부와의 유착 의혹

김지태 유족들은 박정희 정부 시기 내내 부일장학회 재산을 빼앗기는 등 핍박받는 '희생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김지태가 1960~70년대 국내 10대 재벌로 성장했고,[40] 1968년에는 이병철 다음으로 많은 출자 기업체를 소유한 기업인으로 보도되기도 했다.[41] 박정희 정부로부터 각종 훈장을 받았다는 점은 유착 의혹을 뒷받침한다. 김지태는 1962년 재산 헌납 이후 정부로부터 해외 차관, 은행 차입 등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42] 전직 중앙정보부 고위 관료 역시 비슷한 증언을 했다.[43]

실제로 김지태는 1968년 석탑산업훈장, 1969년 동탑산업훈장, 1970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44][45] 1976년 김지태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는 박정희와 함께 찍은 사진, 박정희가 쓴 '성업백세(盛業百世)' 휘호가 실려 있다.[46]

1973년, 김지태는 동방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 진출했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 때는 박정희 정부로부터 거액의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다.[47] 이러한 정황들은 김지태와 박정희 정부 간의 유착 의혹을 제기하게 한다.

7. 정수장학회 반환 소송

박정희 정권이 만든 5.16 장학회(82년 정수장학회로 명칭 변경)는 1961년 김지태가 헌납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MBC)이 모태가 되어 만들어졌다.[4][5][6] 김지태의 유족들은 정수장학회가 김지태가 1958년 설립한 부일장학회의 재산을 모태로 만들어졌음을 주장하며 국가를 상대로 주식반환소송을 제기했고, 이 때문에 18대 대선 당시 정수장학회 장물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김지태의 부일장학회는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소규모 단체였다. 장학재단을 설립하려면 문교부 인가가 필요하고 기본 재산 보유가 필수적인데, 부일장학회는 공익재단으로 설립 허가를 받은 적도 없고 기본 재산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부일장학회라는 비영리법인이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정수장학회 재산의 15.96%만이 김지태가 기부한 것이고, 나머지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박흥식 화신산업 사장 등 국내 기업인과 일반 국민, 재미교포, 석호필 박사와 같은 친한파 외국인들이 기부했다.[2]

김지태 유족들은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 거사 자금으로 500만 환을 김지태에게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재산을 빼앗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지태는 1976년 펴낸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고, 오히려 박정희의 친필 휘호와 함께 찍은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46]

김지태 유족들은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주식 양도 등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김지태의 재산 기부가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증여 행위 취소 기간도 지났다고 판결했다.

7. 1.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발전위원회는 2005년 7월 22일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 의혹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49][50][51]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의해 수사가 이루어졌음이 당시 중앙정보부 지부장이었던 박용기의 진술에서 확인되었다.
  • 1962년 6월 20일 김지태가 구속 상태에서 강압에 의해 작성된 기부승낙서에 서명했으나, 이마저도 구속 중 기부 의혹을 지우기 위해 석방 이후인 6월 30일로 변조되었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에 의해 확인되었다.
  • 부산일보 주필이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의 석방을 빌미로 김지태에게 재산 포기를 종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 경향신문 매각 과정에서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앞세워 여러 차례 간첩사건을 일으켜 압력을 행사했음이 확인되었다.
  • 일련의 과정이 중앙정보부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비롯한 국가 주요 기관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음이 국가 기관에 의해 최초로 사실로 규명되었다.


2007년 5월 29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정부가 정수장학회(옛 부일장학회) 재산을 강탈했다고 결론내렸다. 1962년 부산의 실업가 김지태가 토지와 문화방송 주식 등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 것은 구속 수사 등 국가 권력의 강압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과거사위원회는 국가가 김지태 유족에게 사과하고 헌납받은 재산도 반환하라고 권고했다.[52]

7. 2. 법원의 판결

부산에서 진행된 소송에서 1·2심 재판부는 모두 "김지태 씨가 강박으로 인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토지를 헌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판결했다. 또한 "증여 의사 표시는 강박을 이유로 취소할 수 있지만, 김 씨가 주식을 증여한 1962년 6월 20일부터 10년이 지날 때까지 증여 행위를 취소했다고 볼 증거가 없으므로 취소권은 이미 소멸했다"라고 밝혔다. (사건번호: 2010가합56697) 대법원은 2014년 2월 13일 김지태 유가족이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낸 주식 양도 등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내렸다.[53]

재판부는 김지태의 재산 기부가 박정희 정부의 강압이 일부 있었더라도, 김지태 본인이 구속 상태를 면하기 위해 협상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

8. 김지태 유족의 유서 조작 및 세금 포탈

김지태는 1982년 사망하면서 유산을 남겼다. 유족들은 상속세를 신고하면서 김지태의 유서를 제출했는데, 여기에는 김지태가 부동산을 세 아들이 경영하는 회사에 증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 그러나 필적 감정 결과 유서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 유족들은 상속세 부과 취소 소송에서 승소했지만,[1] 이후 유서가 가짜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1] 만약 유족들이 유서를 조작한 것이 사실이라면, 9300억에 달하는 세금을 불법적으로 포탈한 것이 된다.[1]

9. 이외 이력

동아대학교 특임강사를 지냈다.

10.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대수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국회의원경남 부산시 갑무소속12,521표28.89%1위당선초선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제3대국회의원경남 부산시 갑자유당27,659표33.97%1위당선재선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제4대국회의원경남 부산시 부산진구 갑무소속9,911표22.05%2위낙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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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김지태 씨 유서는 유족이 조작했다|신동아 https://shindonga.do[...] 2023-09-11
[3] 웹사이트 김지태(金智泰) https://encykorea.ak[...] 2023-08-14
[4] 뉴스 좌파들은 정수장학회에 대한 정치공세를 중단하라 http://www.newstown.[...] 뉴스타운 2012-10-16
[5] 뉴스 노무현 “삼성 8000억 강탈은 뭔데” http://frontiertimes[...] 프런티어타임스 201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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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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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저널 과거사위 "부일장학회 강탈 맞다” https://news.naver.c[...] 시사저널 2007-05-29
[53] 저널 김지태 유족, '정수장학회 반환소송' 패소 확정 https://news.naver.c[...] 뉴시스 201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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