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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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애는 일제강점기 지하 노동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과정에 참여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으로, 조선공산주의운동 국내파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김일성의 단일지도체계 확립에 기여했다. 조선민주녀성동맹 초대 위원장, 조선로동당 비서 등을 역임했으며, 국제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고 세계여성연맹에서 활동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활동했다. 1966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후 1986년 공적 생활에 복귀했으며, 198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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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파 - 김용범 (공산주의자)
김용범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해방 후 북한 정치인으로, 중국 공산당 입당 후 항일 운동을 전개했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를 역임하며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으며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을 지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성주의자 - 정칠성
정칠성은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사회운동에 투신, 여성 계몽과 사회 부조리 개선을 주장하며 신간회와 근우회에서 항일 의식을 고취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성주의자 - 허정숙
허정숙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 작가, 언론인으로, 여성 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여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자유 연애, 정조 무용론을 주장했으며, 해방 후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로동당 간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 - 홍명희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정치인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 참여, 언론 및 교육계 활동 후 해방 후 남북협상 참여, 월북하여 북한에서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 - 리승엽
리승엽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남로당 간부, 한국 전쟁 당시 서울시 인민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월북 후 금강정치학원 사건으로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이념 갈등과 권력 투쟁을 드러내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 박정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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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자 표기 | Bak Jeongae | 
| 한글 표기 | 박정애 | 
| 한자 표기 | 朴正愛 | 
| 정치 경력 | |
| 직위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 임기 시작 | 1953년 8월 6일 | 
| 임기 종료 | 1961년 9월 18일 | 
| 겸임 | 박창옥, 김일, 박용빈, 박금철, 최용건, 정일룡, 김창만 | 
| 직위 | 농업상 | 
| 내각 | 2기 | 
| 임기 시작 | 1961년 10월 | 
| 임기 종료 | 1962년 10월 23일 | 
| 이전 | 림해 | 
| 이후 | 김만금 | 
| 개인 정보 | |
| 출생일 | 1907년 | 
| 출생지 | 함경북도, 대한제국 | 
| 사망일 | 1986년 이후 | 
| 배우자 | 김용범 | 
| 자녀 | 박순희 | 
| 소속 정당 | |
| 정당 | 조선로동당 | 
| 이전 정당 | 북조선로동당 | 
| 수상 | |
| 수상 내역 | 국제 스탈린 평화상 (1950년), 국기훈장 (1급, 2급) | 
2. 생애
박정애는 함경북도 출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인이다. 소련 유학 후 귀국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했으며, 해방 후에는 김일성을 지지하며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조선민주녀성동맹 초대 위원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1966년 숙청되었다가 1986년 복귀했다.
로버트 A. 스칼라피노와 이종식은 그녀를 "조선노동당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유일한 여성"이라고 칭했다. 안드레이 란코프는 그녀를 "그 놀라운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4]
1968년 이후 갑자기 정치 무대에서 사라져, 소련 외교관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박정애가 숙청되었다고 생각했지만, 1986년에 다시 등장했다. 대성산혁명렬사릉에는 박정애와 김용범의 공동 묘비가 있으며, 박정애는 1987년에 80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 박정애와 김용범에게는 박순희(Пак Сун-Хвиru)[21]라는 딸이 있는데, 모친의 성을 사용하고 있다. 2000년 10월, 박순희의 이름이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 위원장 인사와 관련하여 보도에 등장했다.
2. 1. 초기 생애 및 항일 운동
박정애는 1907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3]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과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유학했다.[3] 이후 정계에 입문하기 전 소련에서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다.[4][5] 1930년대 초, 한국으로 파견되어 활동 중 일본 당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2] 1931년 같은 유학생이었던 김용범과 만났으며,[19] 같은 해 귀국하여 지하 공작을 하다가 1935년 주녕하, 김용범과 함께 체포되어 1945년까지 복역했다.[19]2. 2.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국내에서 지하 노동운동을 하다가 장기간 복역하였으며, 1945년 광복 후 출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과정에 김용범과 함께 깊숙이 참여했다.[19]박정애와 김용범 부부는 조선공산주의운동 계보에서 국내파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가 주 활동 무대였던 이들은 국내파 가운데서 김일성의 단일지도체계 확립에 가장 먼저 동조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함경남도 등 다른 지역을 근거지로 한 국내파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1945년 조선민주녀성동맹(여맹) 초대 위원장을 시작으로[19]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허정숙, 정칠성 등과 함께 여성단체의 대표로 참석하였고, 그해 6월에는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도 참여하였다.

1946년 8월, 조선노동당 제1차 중앙위원회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19] 1949년 조선노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을 때, 박정애는 3명의 비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제2차, 제3차, 제4차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또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기도 했다.[7]
6.25 전쟁 발발 직전에 북한의 남침 계획에 대해 중국에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8]
195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 장례식에 북한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그녀의 중국 측 대표는 외교부장 저우언라이였다.[9] 그해 말, 그녀는 김일성의 호감을 잃은 전 남로당원들에 대한 숙청에 참여했다. 박정애는 김일성의 지배를 공고히 한 정치위원회의 5명의 위원 중 한 명이자 유일한 여성 위원이었다. 박정애는 위원회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김일성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었다.[10] 그녀는 휴전 문서에 김일성이 서명할 때 참석했으며, 해외 방문에도 동행했다.[11]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그녀는 특별하게 "김일성에게 그의 사생활에 대해 조언하고 여성과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받았다.
그녀는 조선민주녀성동맹의 초대 위원장이었다.[12] 1940년대부터 1965년까지 재임 기간 동안,[17] 이 단체는 다른 나라의 단체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여성 대중 조직이었다. 그 이후 위원장들이 이 단체에 더 전체주의적인 특징을 부여했다.[4] 박정애는 또한 세계여성연맹 (WIDF)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집행위원회 위원이었다. 1951년, 그녀의 주도로 WIDF 국제 여성 위원회가 세계 여론을 동원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그녀는 1950년 국제 스탈린 평화상을 받았으며[20] 요리스 이벤스와 예르지 보삭의 반전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가 승리하리라''에 출연하기도 했다.[13][14] 또한 북한의 국기훈장을 1, 2급 모두 받았다.[3]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북한의 농업상이었으며,[20] 장관을 역임한 북한 여성 6명 중 한 명이었다. 박정애는 또한 김여정 전까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활동한 유일한 여성으로, 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였다.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그 회의에서는 주로 경제 담당 관리들에 대한 숙청이 있었지만, 박정애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으며, 이는 김일성이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욕망 때문에 숙청되었음을 시사한다.[16] 박정애는 숙청 이후 시골로 추방되었다. 1986년에 공적 생활에 다시 등장했다.[5] 당시 그녀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녀는 단지 작은 직책만을 맡을 수 있었다.
2. 3. 국제 활동
박정애는 세계여성연맹(WIDF)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2] 1948년 집행위원회 위원이었다. 1951년, 그녀의 주도로 WIDF 국제 여성 위원회가 세계 여론을 동원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13] 1950년 국제 스탈린 평화상을 받았으며 요리스 이벤스와 예르지 보삭의 반전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가 승리하리라''에 출연하기도 했다.[14][13] 또한 북한의 국기훈장을 1, 2급 모두 수훈하였다.[3]1949년에는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평화평의회에 정부 대표단장으로 참가했다.[20] 1952년에는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지역평화회의에 정부 대표단장으로 참가했다.[20]
2. 4. 숙청과 복귀
1953년, 박정애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 장례식에 북한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중국 측 대표는 외교부장 저우언라이였다.[9] 그 해 말, 그녀는 김일성의 호감을 잃은 전 남로당원들에 대한 숙청에 참여했다. 박정애는 김일성의 지배를 공고히 한 정치위원회의 5명의 위원 중 한 명이자 유일한 여성 위원이었다.[10] 박정애는 위원회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김일성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었다.[10] 그녀는 휴전 문서에 김일성이 서명할 때 참석했으며, 해외 방문에도 동행했다.[11]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김일성에게 그의 사생활에 대해 조언하고 여성과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받았다.[10]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주로 경제 담당 관리들에 대한 숙청이 있었지만, 박정애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으며, 이는 김일성이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욕망 때문에 숙청되었음을 시사한다.[16] 박정애는 숙청 이후 시골로 추방되었다.[4] 그녀는 1986년에 공적 생활에 다시 등장했으나,[4][5] 당시 그녀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어 작은 직책만을 맡을 수 있었다.[4]
3. 평가
박정애는 조선공산주의운동 계보에서 국내파에 속하는 인물로,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들은 국내파 중에서도 김일성의 단일지도체계 확립에 가장 먼저 동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6] 북한 정치 초기에 김일성을 지지했으며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4]
6.25 전쟁 발발 직전에 북한의 남침 계획에 대해 중국에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8]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 북한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휴전 문서에 김일성이 서명할 때 참석했고, 해외 방문에도 동행했다. 김일성에게 그의 사생활에 대해 조언하고 여성과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던 특별한 인물이었다.[11]
3. 1. 김일성과의 관계
박정애는 조선공산주의운동 계보에서 국내파에 속하는 인물로,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들은 국내파 중에서도 김일성의 단일지도체계 확립에 가장 먼저 동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6] 박정애는 북한 정치 초기에 김일성을 지지했으며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 되었다.[4]6.25 전쟁 발발 직전에 박정애는 북한의 남침 계획에 대해 중국에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8]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 북한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그해 말에는 김일성의 호감을 잃은 전 남로당원들에 대한 숙청에 참여했다. 박정애는 김일성의 지배를 공고히 한 정치위원회의 5명 위원 중 한 명이자 유일한 여성 위원이었다.[10] 위원회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김일성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었다. 휴전 문서에 김일성이 서명할 때 참석했으며, 해외 방문에도 동행했다.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멤버 중 한 명으로서 그녀는 특별하게 "김일성에게 그의 사생활에 대해 조언하고 여성과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다".[11]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그 회의에서는 주로 경제 담당 관리들에 대한 숙청이 있었지만, 박정애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으며, 이는 김일성이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욕망 때문에 숙청되었음을 시사한다.[16]
3. 2. 숙청 배경
1953년 말, 박정애는 김일성의 호감을 잃은 전 남로당원들에 대한 숙청에 참여했다.[10] 박정애는 김일성의 지배를 공고히 한 정치위원회의 5명 위원 중 한 명이자 유일한 여성이었다.[10] 위원회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김일성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었다.[10]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그 회의에서는 주로 경제 담당 관리들에 대한 숙청이 있었지만, 박정애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으며, 이는 김일성이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욕망 때문에 숙청되었음을 시사한다.[16] 박정애는 숙청 이후 시골로 추방되었다.[16]
4. 가족 관계
박정애는 1940년대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위원장이었던 김용범과 결혼했다.[17] 김용범과 박정애 사이에는 딸 박순희(Пак Сун-Хвиru)가 있는데,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21] 박순희는 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17]
5. 기타
박정애는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정계 입문 전 소련에서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다.[3][4][5] 1930년대 초에는 한국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본 당국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5][2]
6.25 전쟁 발발 직전, 박정애는 북한의 남침 계획을 중국에 알렸을 가능성이 있다.[8] 1953년에는 스탈린 장례식에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으며, 이때 중국 측 대표는 저우언라이였다.[9]
박정애는 1950년 국제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요리스 이벤스와 예르지 보삭의 반전 다큐멘터리 영화 ''평화가 승리하리라''에 출연했다.[13][14] 또한 북한의 국기훈장 1, 2급을 모두 받았다.[3]
로버트 A. 스칼라피노와 이종식은 박정애를 "조선노동당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유일한 여성"이라고 평가했다.[4] 그녀는 숙청으로 많은 고위 정치인들이 제거된 20세기 중반 북한 정치에서 살아남은 인물이다.[4] 안드레이 란코프는 그녀를 "그 놀라운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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