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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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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정숙은 1908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여성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경성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했으며, 1920년대 여성운동에 참여하여 공산당에 가입, 근우회와 신간회에서 활동했다. 자유로운 사랑과 성을 옹호하며, 여성 해방을 위해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주장했다. 1930년대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했고, 광복 후 북한으로 가서 문화부 장관, 법무부 장관, 최고인민재판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1991년 평양에서 사망했으며, 저서로 《은혜로운 사랑 속에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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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숙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5년의 허정숙
1945년의 허정숙
이름허정숙
출생 이름허정자
로마자 표기Heo Jeongsuk
로마자 표기 (출생 이름)Heo Jeongja
한자 표기許貞淑
한자 표기 (출생 이름)許貞子
출생일1908년 7월 16일
출생지서울, 대한제국
사망일1991년 6월 5일
사망지평양, 북한
국적북한
직업정치인, 활동가
아버지허헌
정당조선로동당
주요 직책
최고재판소 소장임기 시작: 1959년 10월 28일
임기 종료: 1960년 6월 24일
이전: 김하운
이후: 김익선
사법상임기 시작: 1957년 9월 18일
임기 종료: 1959년 8월 31일
후임: 직위 폐지
사법상임기 시작: 1957년 8월 3일
임기 종료: 1957년 9월 18일
이전: 홍기주
문화선전상임기 시작: 1948년 9월 9일
임기 종료: 1957년 8월 3일
이전: 직위 신설
이후: 한설야 (교육문화상)
기타 정보
활동 기간미상
주요 작품미상
기타 이름미상

2. 생애

허정숙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 유학 생활 중 얻은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귀국하여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와 조선여성해방동맹 등의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20] 조선공산당 조직, 신간회근우회 등에도 참여했고,[4] 동아일보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도미했으나 이듬해 귀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3]

광복 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1948년 4월 남북 협상에 북측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 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상, 1959년 사법상과 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는 전 남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1965년 정계에 복귀, 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제5·6·7·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이어 당선되었다.

그는 사랑 없이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고,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2. 1. 생애 초반

허정숙은 1902년 7월 16일 독립운동가 겸 변호사 허헌과 그의 부인 경주 정씨 정보영의 둘째 딸로 경성부 종로방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자(貞子)이고, 호는 수가이이다. 그의 생년은 불분명하여 1902년, 1903년, 1906년, 1908년등 다양한 설이 있다. 출생지는 경성부였으나, 본적은 아버지 허헌의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 하우면 하평리이었다.

아버지 허헌


할아버지 허추는 몰락 양반가 출신이었지만 자수성가하여 대한제국 시절 경원부사한성부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허헌은 15세에 부모를 여의었으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 정종언은 지주였고, 외가인 경주 정씨 역시 함흥군의 갑부였다.

일제강점기에 허정숙은 정자 대신 정숙(貞淑, 正淑) 등의 이름을 사용했고, 1945년 귀국 직후 아버지 허헌이 호적신고를 할 때 '정숙'으로 개명하였다. 중국 활동 시에는 정은주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어머니 정보영은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허정숙은 이를 보며 여성의 삶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가족과 가정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지 의심했다. 아버지 허헌경성에서 유덕희와 재혼하여 허근욱, 허선욱, 허종욱 등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허근욱은 소설가, 허선욱은 음악가, 허종욱은 북조선의 외교관이 되었다.[10]

허정숙은 1913년 배화학당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고, 1918년 평양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이화학당 전문부에 입학, 1919년 졸업 후 일본 간사이 학원에 유학하였으나, 3·1 운동 직후 귀국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만세 운동이 실패하자 은신하였고,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한다.

2. 1. 1. 젊은 시절

허정숙은 1902년 7월 16일 독립운동가 겸 변호사 허헌과 그의 부인 경주 정씨 정보영(다른 이름은 정긍자)의 둘째 딸로 경성부 종로방 관철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정자(貞子), 호는 수가이이다. 일찍이 요절한 언니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생년은 불분명하여 1902년생 설, 1903년생 설, 1906년생 설, 1908년생 설 등이 있다.[8] 출생지는 경성부였으나, 본적지이자 아버지 허헌의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군 하우면 하평리이었다. 따라서 명천군 출신으로도 본다.

몰락 양반가 출신이었지만 할아버지 허추의 대에 다시 집안을 일으켜세웠다. 자수성가했던 할아버지 허추는 조선 말에 관직에 올라 대한제국 시절 경원부사한성부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허헌은 15세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으나 집안은 유복하였다. 외할아버지 정종언은 지주로, 외가인 경주 정씨 역시 함흥군의 갑부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그는 본명 정자 대신 정숙(貞淑), 정숙(正淑) 등의 이름을 쓰다가, 1945년 귀국 직후 아버지 허헌이 호적신고를 할 때 '정숙'으로 개명하게 해달라고 한 뒤 정숙(貞淑)을 본명으로 개명하였다. 그밖에 중국 활동시 쓰던 정은주라는 가명도 있었다.

허정숙은 자신의 어머니 정보영을 통해 '여성의 삶'을 처음 발견했다.[9] 아버지 허헌은 늦게까지 공부하였고, 남편과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던 어머니 정보영을 통해 여성의 삶에 대해 회의하였다. 모든 것을 가족에게 투자하고 '자신의 욕망을 근원적으로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우직하게 헌신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허정숙은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9] 훗날 그는 과연 가족가정이 인간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고 회고하였다.

아버지 허헌은 계속 학업에 종사하여 경성으로 올라갔고, 가정의 생계는 어머니 정보영이 꾸려나갔다. 언니 허정희는 일찍 요절하여 사실상 허정숙이 장녀가 되었다. 그 후 아버지 허헌경성에서 유덕희와 재혼하고, 30년 연하의 이복 동생들인 허근욱, 허선욱, 허종욱, 허영욱, 허선욱, 허기욱 등이 태어난다. 이복 여동생 허근욱은 소설가 겸 작가이고, 허선욱은 음악가이며, 이복 남동생 허종욱은 북조선의 외교관이다.[10]

1913년 경성부 배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배화학당 시절 글과 시를 잘 지어 백일장 등에 나가 상을 받았으며, 시 읽기를 즐겨하였다. 배화학당 시절 차미리사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917년 배화학당을 졸업하고 평양고등여학교에 편입, 1918년 평양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18년 이화학당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며 미국 유학을 목표로 YMCA 기독교청년회에도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1919년초, 이화학당 전문부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에 체류하며 간사이 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낮선 환경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 문화의 차이 등은 그에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었고, 일본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후일 딸의 이같은 자유로운 감성을 간파한 아버지의 권고로 일본 고베(神戶)의 신학교인 간사이 학원으로 유학하게 된다.[11]

배화여고 시절 주세죽, 고명자와 함께 한강변에서 (1918년)


그의 집에 드나들던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낸 허정숙은 일찍부터 여성문제에 대한 글을 쓰고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면서 여성 해방 운동을 시작했다.[12]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식교육'을 받으며 자유로운 감성으로 성장한 허정숙은 금욕, 순종 따위의 전통적 여성의 미덕들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9] 그는 유교 사상은 여성과 인간을 억압하는 사상이며, 유교가 말하는 도덕과 예의는 인간의 권리와 본능을 존중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1919년 아버지 허헌의 뜻에 의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간사이 학원에 입학하였다. 간사이학원의 기숙사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13] 그는 기숙사의 엄격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기숙사 생활 외에도 그는 끝내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1919년 3월, 3·1 운동 직후 귀국하였다. 경성에서 3·1 운동 이후 계속 이어지던 만세 대열에 참여하였지만 만세 운동은 곧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검속을 피해 은신하였다. 일본 유학생활 중 습득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 공부한 뒤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한다.

허정자는 허헌의 딸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허정자는 일본 도쿄의 관세이 학원에 유학을 갔다. 이후 중국 상하이 조계(中華民國 상하이 조계)로 가서 상하이 외국 고등학교를 졸업했다.[3]

2. 1. 2. 소녀 시절

허정숙은 18세에 아버지 허헌이 학업으로 집을 비우는 동안, 어머니의 고민과 봉건적 가족 구조의 폐단을 일찍부터 보고 자랐다.[11]

어려서 기독교 교회에 다녔다. 아버지 허헌은 1910년 원산에서 이동휘를 만나 기독교인이 된 후, 교회를 세우고 청년교육에 힘쓰며 항일 운동가를 도왔기에 허정숙의 어린 시절에 기독교의 영향이 있었다.[11] 그러나 사회주의와 페미니즘 사상을 접하면서 기독교를 버렸고, 기독교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 인간을 지배자의 노예로, 여성을 남성의 노예로 만드는 사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착한 사람, 선량한 사람이 되자면서 평일에는 속된 인간으로 변모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허정숙으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만들었다.

1913년 경성부 배화학당에 입학하여 유복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배화학당 시절 글과 시를 잘 지어 백일장 등에서 상을 받았고, 시 읽기를 즐겨하였다. 차미리사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1917년 배화학당을 졸업하고 평양고등여학교에 편입, 1918년 평양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버지의 권고로 일본 간사이 학원으로 유학하게 된다.[11] 1918년 이화학당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며 미국 유학을 목표로 YMCA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웠다. 1919년 초, 이화학당 전문부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에 체류하며 간사이 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낯선 환경과 권위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 문화 차이 등으로 일본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는 장성하면서 부친과 신뢰하는 사이가 되어, 부녀관계인 동시에 정치적, 사상적 동지 관계였고 때로는 사상적 충돌도 있었다고 한다.[13]

집에 드나들던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고, 일찍부터 여성문제에 대한 글을 쓰고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면서 여성 해방 운동을 시작했다.[12]

유복한 집안에서 '신식교육'을 받으며 자유로운 감성으로 성장한 허정숙은 금욕, 순종 따위의 전통적 여성의 미덕들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9] 유교 사상은 여성과 인간을 억압하는 사상이며, 유교가 말하는 도덕과 예의는 인간의 권리와 본능을 존중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1919년 아버지 허헌의 뜻에 의해 일본 유학, 간사이 학원에 입학하였다. 간사이학원의 기숙사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13] 그는 기숙사의 엄격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기숙사 생활 외에도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1919년 3월, 3·1 운동 직후 귀국하였다. 경성에서 3·1 운동 이후 계속 이어지던 만세 대열에 참여하였지만, 만세 운동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검속을 피해 은신하였다. 일본 유학생활 중 습득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 공부한 뒤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한다.

2. 1. 3. 공개 단발과 단발의 보급

1920년 허정숙은 공개적으로 머리를 자르는 단발을 하였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오두가단 차발불가단을 외치던 성리학자들은 그를 패륜아라며 공격하였다. 그러자 허정숙은 더욱 저항하는 의미에서 자주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을 공개하였다.

자유주의자 여성들이 위생에 좋고 편리하며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단발을 한 반면,[15] 허정숙, 주세죽, 심은숙, 정칠성 같은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여성 해방과 반봉건운동 차원에서 단발을 하였다.[16] 성리학자들은 모던걸을 자칭하는 그와 일부 여성들을 가리켜 毛斷 걸, 못된 걸, 못된 년이라는 단어로 희화화하여 불렀다. 허정숙은 대한제국 때의 남자 단발령 조차도 매국으로 간주하던 당시의 성리학자들을 아집이 강한 꽁생원이라며 조롱하였다.

당시 여성 지식인들 중 가장 먼저 단발을 했던 허정숙은 다시 머리를 기르면서 그것(단발)은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일 뿐, 특별하게 겉모습에 신경 쓴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32] 머리 감는 시간도 절약되고 위생적이므로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단발을 단행했으나, 여성운동을 해나가면서 일반 여성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사회적 필요에 의해 도로 머리를 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17] 이후 여학생들 사이에 단발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기르기도 했고 단발하기도 하였는데, 단발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공개 단발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허정숙은 1920년대 여성의 단발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여자가 단발해야 되는 이유로 편하고, 머리감기에도 수월하며, 위생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1921년 경성에서 공개 단발을 한 이후 여러번 머리를 길렀다가, 공개 단발하기를 반복하였다.

1920년대에는 기생들에 의해 여성 단발이 주도됐다. 강명화, 강향란, 박연화 등은 당시의 유명한 단발 기생이었다. 그러나 여성 단발에 대한 거부감은 컸다.[95] 허정숙은 기생들의 단발에 적극 동조하며 이를 지지하였다. 이어 남성들은 1900년대부터 단발을 시행하였는데 여성들은 왜 단발하면 안되느냐며 항변하였다.

당시 신여성들의 호칭인 모던걸(modern girl)은 모단 걸로도 불렸는데, 이는 여성들이 기존 체제에 대한 반발의 상징을 단발에서 찾았기 때문이다.[95] 특히 허정숙, 주세죽, 심은숙, 강아그니아 등 사회주의 운동권 여성들은 전통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단발을 했다.[95] 허정숙은 서구의 여성들이 단발머리한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을 인쇄, 경성부내에 배포하며 단발머리의 유익함을 적극 홍보하였다.

2. 1. 4. 여성 단발 운동 주도

1920년 허정숙은 공개적으로 머리를 자르는 단발을 하였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오두가단 차발불가단을 외치던 성리학자들은 그를 패륜아라며 공격하였다. 그러자 허정숙은 더욱 저항하는 의미에서 자주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을 공개하였다.[12]

자유주의자 여성들이 위생에 좋고 편리하며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단발을 한 반면,[15] 허정숙, 주세죽, 심은숙, 정칠성 같은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여성 해방과 반봉건운동 차원에서 단발을 하였다.[16] 성리학자들은 모던걸을 자칭하는 그와 일부 여성들을 가리켜 毛斷 걸, 못된 걸, 못된 년이라는 단어로 희화화하여 불렀다. 허정숙은 대한제국 때의 남자 단발령 조차도 매국으로 간주하던 당시의 성리학자들을 아집이 강한 꽁생원이라며 조롱하였다.

당시 여성 지식인들 중 가장 먼저 단발을 했던 허정숙은 다시 머리를 기르면서 그것(단발)은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일 뿐, 특별하게 겉모습에 신경 쓴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32] 머리 감는 시간도 절약되고 위생적이므로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단발을 단행했으나, 여성운동을 해나가면서 일반 여성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사회적 필요에 의해 도로 머리를 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17] 이후 여학생들 사이에 단발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기르기도 했고 단발하기도 하였는데, 단발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공개 단발 퍼포먼스를 감행한다.

허정숙은 1920년대 여성의 단발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여자가 단발해야 되는 이유로 편하고, 머리감기에도 수월하며, 위생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1921년 경성에서 공개 단발을 한 이후 여러번 머리를 길렀다가, 공개 단발하기를 반복하였다.

1920년대에는 기생들에 의해 여성 단발이 주도됐다. 강명화, 강향란, 박연화 등은 당시의 유명한 단발 기생이었다. 그러나 여성 단발에 대한 거부감은 컸다.[95] 허정숙은 기생들의 단발에 적극 동조하며 이를 지지하였다. 이어 남성들은 1900년대부터 단발을 시행하였는데 여성들은 왜 단발하면 안되느냐며 항변하였다.

당시 신여성들의 호칭인 모던걸(modern girl)은 모단 걸로도 불렸는데, 이는 여성들이 기존 체제에 대한 반발의 상징을 단발에서 찾았기 때문이다.[95] 특히 허정숙, 주세죽, 심은숙, 강아그니아 등 사회주의 운동권 여성들은 전통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단발을 했다.[95] 허정숙은 서구의 여성들이 단발머리한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을 인쇄, 경성부내에 배포하며 단발머리의 유익함을 적극 홍보하였다.

2. 2. 여성주의 운동과 독립 운동

1919년 3·1 운동 이후, 허정숙은 일본 유학 생활 중 얻은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귀국하여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 5월 조선여성해방동맹 등의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20]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신간회근우회 등에도 참여했다.[4] 동아일보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허정숙은 엥겔스, 베벨, 콜론타이 등의 여성 해방론을 수용, 한국 사회에 맞게 적용하려 노력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였다.[23] 그는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사회 변화가 필요하며, 개인의 참여가 사회를 바꾸는 중요한 동인이라고 주장했다. 1924년 여성동우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시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성 해방은 사회 변혁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였다.[23]

1926년 5월 도미했으나 이듬해 귀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같은 해 5월에는 근우회의 강령과 비전을 제시한 근우회 선언과 근우회 운동의 역사적 지위와 당면임무를 작성하였다. 허정숙은 대중여성운동체로서의 근우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근우회가 일부 배운 여성들만의 모임이 아닌 전체 여성의 모임으로 발전하고 사회로 침투할 것을 주장했다.[31]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3]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이 되고, 그해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교원이 되었다. 군정학교 교원으로 소련레닌주의 이론을 가르쳤으며, 기서(驥西) 지역에서 선전, 조선인 일본군 및 만주군 탈영자들을 합류, 훈련시키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김명시 등과 함께 여성 교관으로써 여군 병력 양성과 관리도 맡았다. 1942년 조선의용군 창설에 참여하였다.[63] 1944년 조선독립동맹의 집행위원, 조선의용군 참모에 선출되었으며, 반일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2. 2. 1. 사회주의 운동 참여

1919년 아버지 허헌의 뜻에 의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간사이 학원에 입학하였다. 간사이학원의 기숙사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13] 그는 기숙사의 엄격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기숙사 생활 외에도 그는 끝내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1919년 3·1 운동 직후 귀국하였다. 경성에서 그는 3·1 운동 이후 계속 이어지던 만세 대열에 참여하였지만 만세 운동은 곧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검속을 피해 은신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 중 습득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 공부한 뒤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한다.

주세죽박헌영


그러나 간사이 학원의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1920년 여름 방학 때 간사이 학원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허헌의 뜻에 의해 다시 일본으로 보내져, 고베 신학교로 진학하였으나 역시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한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수녀원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해 중도에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간사이 학원을 수료하였다.

1920년 가을, 상하이로 유학, 이동휘의 집에 머무르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었고, 그의 집에 있으면서 상하이 기독교청년회에서 연 외국어강습소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다가 상하이 외국어 학교에 입학했다. 상하이 외국어 학교에서 영어일본어를 배웠다. 상하이 외국어 학교 재학 중 허정숙은 공산주의운동가인 임원근을 만났다. 그는 상하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임원근을 만나게 된다.[14] 그리고 임원근을 통해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 조봉암, 김조이 등을 만났고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이후 임원근과 자주 만나다가 연인관계가 되었고 허정숙은 아버지 허헌에게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이 사실을 알렸다 한다. 아버지 허헌은 둘의 관계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1921년 진링 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늑막염으로 귀국하였다.

일본, 중국, 미국 등지로 유학을 하면서 당시의 진보적인 이론과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길렀다.[13] 동시에 잘못된 가족제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3] 유학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조선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 식민지와 계급의 문제임을 깨닫고 이른바 '인습 타파'와 '교육 계몽'에 중점을 두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운동과는 또 다른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12] 한편 유학생 공산주의자들 끼리의 만남도 주선하여 박헌영주세죽의 만남을 적극 주선하기도 해 주었다.

1924년 1월부터 그는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YMCA청년회와 사회주의 모임, 여성 계몽 강연에 나가 여성해방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여성 지식인들의 참여와 자각을 호소하였다. 1924년 5월 주세죽, 허정숙, 박원희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운동가들이 조선여성동우회를 만들었다.[20] 1924년 5월 23일 허정숙은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는 등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작성한 조선여성동우회의 강령 초안에는 '사회진화의 법칙', '신사회 개척', '조선여성해방운동' 등이 있었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 등에도 글과 컬럼을 기고했는데 이때 그는 '수가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고[21], 한자로는 '秀嘉伊'라 하였다.

김명순, 김일엽, 나혜석, 윤심덕, 박인덕3·1 운동을 전후하여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20년대 중반까지 문화계에서 활동을 한 여성들이 신여성의 대표로 알려졌다.[22]1920년대 대중들 앞에 등장한 허정숙과 정종명은 의식적으로 사회 해방을 추구하고, 낭만적 사랑보다는 동지애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지향점은 그들과는 달랐지만 신여성으로 통칭되었다.[22]

허정숙은 당시에 풍미하던 엥겔스, 베벨, 콜론타이 등의 여성 해방론을 수용, 한국 사회의 특성에 맞게 그 이론 틀을 모색하고 실천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 적용하고자 노력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였다.[23] 1922년 귀국 이후 활동 초기부터 그는 수가이라는 필명으로 신문, 잡지 등에많은 글을 발표하였다.[23] 또한 칼럼과 계몽 강연 활동에도 수시로 나갔다.

허정숙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가 필요함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의 개인의 참여가 사회를 바꾸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1924년에는 여성동우회의 주요 멤버로, 그리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직접 참여는 않았지만 그는 여성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였다.[23]

당시 조선총독부는 공산당을 불법화했지만, 허정자는 공산당 활동으로 인한 박해를 피했다. 1924년 세계 여성의 날을 접하게 된 후, 1925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여성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1927년에는 근우회 창립 멤버가 되었고 신간회에도 참여했다.[4]

2. 2. 2. 여성해방론의 토착화 노력

허정숙은 어린 시절 집에 드나들던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일찍부터 여성문제에 대한 글을 쓰고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등 여성 해방 운동을 시작했다.[12] 그는 유교 사상이 여성과 인간을 억압하며, 유교가 말하는 도덕과 예의는 인간의 권리와 본능을 존중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귀국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했으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검속을 피해 은신했다.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연구했으며,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했다. 유학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한 그는 조선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 식민지와 계급 문제임을 깨닫고, '인습 타파'와 '교육 계몽'에 중점을 두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운동과는 다른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했다.[12]

1920년 허정숙은 공개적으로 단발을 감행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오두가단 차발불가단을 외치던 성리학자들은 그를 패륜아라고 비난했으나, 허정숙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의 의미로 자주 머리를 자르는 모습을 공개했다. 자유주의자 여성들이 위생, 편리성, 합리성을 이유로 단발을 한 반면,[15] 허정숙, 주세죽, 심은숙, 정칠성사회주의자 여성들은 여성 해방과 반봉건운동의 일환으로 단발을 실천했다.[16]

1924년 1월부터 허정숙은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고, YMCA 청년회와 사회주의 모임, 여성 계몽 강연 등에서 여성 해방론을 강연했다. 또한 국내 여성 지식인들의 참여와 자각을 촉구했다. 1924년 5월 주세죽, 허정숙, 박원희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운동가들이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했다.[20] 허정숙은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어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허정숙은 엥겔스, 베벨, 콜론타이 등의 여성 해방론을 수용하여 한국 사회의 특성에 맞게 이론 틀을 모색하고 실천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 적용하고자 노력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였다.[23] 1922년 귀국 이후부터 '수가이'라는 필명으로 신문, 잡지 등에 많은 글을 발표하고,[23] 칼럼 기고와 계몽 강연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24년 여성동우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시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성 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지지했다.[23]

2. 2. 3. 가정에 대한 비판

허정숙은 유교 사상이 여성과 인간을 억압하며, 유교에서 말하는 도덕예의는 인간의 권리와 본능을 존중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가정이 여성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으며, 남성에게도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족에게 투자하고 '자신의 욕망을 근원적으로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우직하게 헌신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9]

1925년 11월 허정숙은 신여성지에 '가정은 지옥[30]'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는 "여성이라는 것은 오래 예전부터 구속과 압박 밑에서 자유 없이, 오직 노예의 생활을 하고 지나왔습니다. 가정이라는 지옥 속에서 남편의 노예, 부모의 노예, 자식의 노예, 예의, 도덕의 노예, 가사노동의 노예, 경제의 노예로써 이중 삼중의 노예로 있던 것은 (지금까지의) 사실이 웅변으로 증명"한다고 하였다.[30]"

허정숙은 서로, 상호간에 지키지 않는 예의도덕은 참된 예의, 도덕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가 예의도덕이 인간을 억압하는 굴레이며, 여자들을 괴롭히는 압제이며, 여자를 노예로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자 성리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망발이라며 비판했다. 가정은 지옥, 가족은 지옥이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 기독교계와 남자 지식인들, 여자 지식인 일부에서도 그를 비방하였다.

그는 가정이 안락한 휴식처, 쉼터가 아니라 여자를 옭아매는 하나의 족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가족이 지옥인 이유로 설날, 한식, 추석 등의 명절에 여자는 각종 음식과 잡일을 하는데 동원되어 쉬지도 못한다는 점과 성격이 이상한 가족, 친척들의 수발과 비위를 맞춰야 되는 이중, 삼중의 고통도 감내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가정이 여자를 '예의, 도덕의 노예, 가사노동의 노예, 경제의 노예[30]'로 만들어 비참한 상태로 몰고간다고 했다.

허정숙은 가정이 여성에게만 지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가정은 여자, 남자, 그리고 어린아이, 젊은이에게도 지옥과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가족 제도, 가부장제 하에서는 남자들도 불행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남성이 가장, 가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되기 때문에 남성들에게는 취직해야 된다, 좋은 직업을 골라야 된다,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부담감을 안겨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가족가정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환상이라 주장하였다.

2. 2. 4. 신여성지 기자 생활

1925년 10월 신여성지에 입사하여 《신여성》지 편집부 기자가 되었다. 여기서 김일엽 등을 만나 교분을 쌓았다. 그러나 자유로운 연애, 자유로운 남녀 관계를 주장하던 김일엽과 달리 허정숙은 남자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여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개벽사 《신여성》지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신여성》의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신여성》지 편집 책임자로서 논설, 편집, 인쇄 교정에 이르기까지 능력을 한껏 발휘하였다.[14] 그는 홀로 편집과 인쇄 교정 외에도 신문용지로 보급되는 종이의 재질을 검사하여 종이의 질을 판별했다.

《신여성》지의 기자, 편집, 인쇄 교정, 종이 재질 검수를 하면서도 동아일보 객원 칼럼니스트 활동과 여성동우회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때 직접 참여는 않았으나,[23] 여성 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였다.[23]

그는 신여성을 비롯한 여러 잡지에 여성 의식 계몽과 여성 운동에 대한 글을 발표했으며, 여성 해방론에 입각한 이론 전개 위에 한국 여성의 현실에 맞는 여성 운동을 단계적으로 실시해야 함을 적극 주장하였다.[31] 또한 유교의 도덕, 윤리, 예의는 허울뿐인 명분이며 여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인간에게 자비심과 인간성을 박탈하는 족쇄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신여성》지에 〈단발호〉를 내어 여성 단발을 주창, 자신은 물론 주세죽 등 여성동우회원들의 단발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또한 그는 월급의 대부분을 동지들을 위한 단체 활동비로 썼으며, 그래도 모자라면 부친에게서, 또는 집안의 골동품을 팔아 사용하였다고 한다.[14] 그해 11월에 발생한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허정숙 역시 종로 관철동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검거·투옥되면서 일시 휴직 제의를 사양하고 입사 2개월 만에 신여성지 기자직을 그만두게 된다.

2. 2. 5. 자유 연애 활동

1919년 아버지 허헌의 뜻에 의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간사이 학원에 입학하였다. 간사이 학원의 기숙사는 엄격하여, 그는 기숙사의 엄격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1920년 여름 방학 때 간사이 학원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허헌의 뜻에 의해 다시 일본으로 보내져, 고베 신학교로 진학하였으나 역시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한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간사이 학원을 수료하였다.

1920년 가을, 상하이로 유학, 이동휘의 집에 머무르면서 상하이 외국어 학교에 입학했다. 상하이 외국어 학교에서 영어일본어를 배웠다. 상하이 외국어 학교 재학 중 허정숙은 공산주의운동가인 임원근을 만났다. 그는 상하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임원근을 만나게 된다.[14] 그리고 임원근을 통해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 조봉암, 김조이 등을 만났고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이후 임원근과 자주 만나다가 연인관계가 되었고 허정숙은 아버지 허헌에게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이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 허헌은 둘의 관계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1921년 진링 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늑막염으로 귀국하였다.

일본, 중국, 미국 등지로 유학을 하면서 당시의 진보적인 이론과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길렀다.[13] 동시에 잘못된 가족제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3] 유학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조선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 식민지와 계급의 문제임을 깨닫고 이른바 '인습 타파'와 '교육 계몽'에 중점을 두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운동과는 또 다른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12] 한편 유학생 공산주의자들 끼리의 만남도 주선하여 박헌영주세죽의 만남을 적극 주선하기도 해 주었다.

1924년 1월, 주세죽과 함께 평양형무소에 출소하는 임원근, 박헌영을 마중나갔다. 1922년 6월부터 임원근은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박헌영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다 검거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 반을 복역하였다.[19] 허정숙과 주세죽은 흰옷을 지어 함께 이들을 마중했고, 허정숙과 임원근은 곧 결혼했다.[19] 그는 아버지 허헌이나 집안의 의향을 묻지 않고 자기 스스로 결혼을 결정했다. 이 일로 집안 어른들의 비판이 있었지만 아버지 허헌과 어머니 정보영이 이를 막아주었다.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이 감옥에 있는 동안 동지 송봉우와 사랑에 빠져 동거한 뒤 주위로부터 “정조관념이 희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9] 그러나 허정숙은 이에 개의치 않고 다른 남자들과도 만나며 자유롭게 연애하고, 동거하였다. 허정숙은 정조를 문제삼는 견해에 대해 정조는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느냐며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첩으로 두고, 술집 여자와도 놀아나면서 왜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느냐며 반박하였다. 허정숙은 강연과 칼럼을 통해 정조는 의미가 없다는 정조 무용론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주장하던 자유 연애론, 연애 유희론을 직접 실천하였다. 그는 자유로운 연애와 동거,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것 역시 남성과 가정, 가족으로부터의 해방이라 역설하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중의 비난에 대해 그는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허정숙은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수절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허위”라며 반박했다.[9] 그는 사랑성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이를 터부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위선자들이 부르짖는 무지의 소치라고 하였다.

그의 자유 연애는 이슈화되어 1930년 11월 삼천리지에 '남편의 재옥과 망명중 처의 수절 문제'라는 특집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52] 허정숙은 이를 불쾌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삼천리지의 특집 기사를 위한 설문조사에도 참여했다.

1930년 11월 남편이 감옥에 갇혔거나 독립운동으로 망명했을 때 부인이 순결을 지켜야 되느냐 라는 주제로 삼천리지 등의 주최하에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정칠성과 이덕요 등은 정조를 지켜야 된다라고 주장했고, 허정숙과 유영준은 '경제적인 문제 혹은 성욕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허정숙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며, 그 사람과 영원히 갈라서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다른 남자와의 자유로운 연애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김일엽은 '최소한 1년에서 3년 정도는 참아야 된다'고 절충안을 내세우기도 했다. 남편이 투옥되거나 망명했을 때 부인이 정조를 지켜야 되느냐를 두고 토론회가 벌어지자 일부 성리학자들이 상경해서 회의를 무산시키려 했다가 저지되기도 했다.

한편 그의 콜론타이식 연애론과 자유 연애론, 연애 유희론에 대해 김옥엽은 1931년 11월 신여성지에 '청산할 연애론'을 발표, 일시적인 성 결합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준다며 비판했고, 안회남은 1933년 5월 신여성지에 청춘과 연애를 발표하여 연애를 가벼운 것으로 취급한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허정숙은 이들과도 토론, 논쟁을 벌이며 사랑이라는 개념이 항구적이고 영원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정조론을 말과 글로써 풀기보다는 직접 실행으로 보여주었다.[90] 그녀의 정조관은 인간생활에서 감정생활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녀는 감정생활의 중요성을 솔직하게 표현하였다.[90] 그녀는 결혼에 상관 없이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어야 된다는 나혜석의 견해에 적극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김일엽이 현실에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유교적 허위의식을 피해 법당으로 도피했다고 지적했다. 허정숙의 정조관은 콜론타이의 연애관을 그대로 따라 실행에 옮긴 것으로, 남녀간의 사랑은 사회 진보에 공헌하는 동지애적 사랑이며, 자각한 남녀의 사상적 결합이라 여겼다.[91] 몸과 정신이 결합할 때, 그리고 정신과 육체가 결합할 때 완벽한 합일을 이뤄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또한 연애는 개인사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므로 그녀는 매력을 느낀 때 서로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자유였지만,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일차적인 임무로 규정했던 사회주의 운동에는 장애를 주지 않았다.[91] 그녀는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적절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91]

허정숙은 남편인 임원근조선공산당사건으로 구속중이었을 때, 또다른 공산주의자인 송봉우와 동거하는 등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서대문형무소에 본인이 복역 중에 출산을 위해 한때 가출옥했다가 다시 투옥되어 많은 화제를 뿌렸다.[104]

2. 2. 6. 콜론타이 사상 소개

허정숙은 1919년 아버지 허헌의 뜻에 의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간사이 학원에 입학하였다.[13] 그러나 간사이 학원의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1920년 여름 방학 때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일본 유학 생활 중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한다.

1920년 가을, 상하이로 유학하여 이동휘의 집에 머무르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었고, 상하이 외국어 학교에 입학했다. 상하이 외국어 학교에서 영어일본어를 배웠다. 상하이 외국어 학교 재학 중 공산주의운동가인 임원근을 만났고[14], 임원근을 통해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 조봉암, 김조이 등을 만나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일본, 중국, 미국 등지로 유학하면서 당시의 진보적인 이론과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길렀다.[13] 유학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조선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 식민지와 계급의 문제임을 깨닫고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12] 한편 유학생 공산주의자들 끼리의 만남도 주선하여 박헌영주세죽의 만남을 적극 주선하기도 했다.

2. 2. 7. 근우회 활동

1928년 2월 근우회 경성지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5월 1일 경성청년총동맹 상임위원에 피선되었으며, 근우회 경성지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10일부터는 근우회의 기관지 근우의 편집,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1928년 7월 경성에서 근우회 임시전국대회가 개최되자 근우회 전형위원과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1929년 1월부터는 한신광, 정칠성, 박호진 등과 함께 근우회의 기관지인 《근우》의 편집 겸 발행위원으로 참여했고, 허정숙은 근우 지 발행 책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3월에는 사리원청년회 주최 사상강연대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1929년 5월에는 근우회의 강령과 비전을 제시한 근우회 선언과 근우회 운동의 역사적 지위와 당면임무를 작성하였다. 허정숙은 대중여성운동체로서의 근우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근우회가 일부 배운 여성들만의 모임이 아닌 전체 여성의 모임으로 발전하고 사회로 침투할 것을 주장했다.[31]

그는 근우회 강연이나 그밖의 여러 활동 등으로 언제나 경찰의 요주의 대상인물이 되었으며 걸핏하면 검거, 조사받곤 하였다. 1929년 9월에는 정칠성과 함께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퇴학처분에 항의문을 발송했다가, 1929년 9월 30일에 종로경찰서에검거, 각각 구류 3일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43]

1929년 일본인조선여학생 희롱 문제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하여 서울까지 확대되자, 근우회 서무부장으로 있던 그는 모교인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찾아가 시위 동참을 호소, 독려하였다. 바로 이화여전 여학생과 함께 학생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세운동을 사주, 선동했다 하여 검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929년 8월 근우회 상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2. 2. 8. 광주학생운동과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

1929년 일본인조선여학생 희롱 문제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하여 서울까지 확대되자, 근우회 서무부장으로 있던 허정숙은 모교인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찾아가 시위 동참을 호소, 독려하였다. 바로 이화여전 여학생과 함께 학생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세운동을 사주, 선동했다 하여 검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43]

2. 2. 9. 자유 연애에 대한 논쟁

허정숙은 어린 시절 집에 드나들던 사회주의 운동가와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등 여성 해방 운동을 시작했다.[12]

1930년 11월 삼천리지 등은 남편이 감옥에 갇히거나 독립운동으로 망명했을 때 부인이 순결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정칠성과 이덕요 등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허정숙과 유영준은 경제적인 문제나 성욕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허정숙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며, 상대방과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다른 남자와의 자유로운 연애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김일엽은 최소한 1년에서 3년 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일부 성리학자들은 토론회에 상경하여 회의를 무산시키려 했으나 저지당했다.[52]

김옥엽은 1931년 11월 신여성지에 '청산할 연애론'을 발표하여 허정숙의 콜론타이식 연애론과 자유 연애론, 연애 유희론을 일시적인 성 결합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준다며 비판했다. 안회남은 1933년 5월 신여성지에 '청춘과 연애'를 발표하여 연애를 가벼운 것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다. 허정숙은 이들과 토론, 논쟁을 벌이며 사랑이라는 개념이 항구적이고 영원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허정숙은 여러 남자와 연애하고 동거한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신문에는 "정조 관념이 희박한 허정숙 여사"라는 비난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53] 이들은 민족해방운동 동료로 만나 연애했으며, 봉건적인 정조 관념에 얽매이지 않았다.[53] 장건상은 후일 '허정숙은 시집을 일곱 번이나 간 여자입니다.[54]'라고 증언할 정도로 허정숙의 남성 편력은 널리 알려졌다.

그는 이혼녀라는 사실보다 자유로운 연애 편력, 그리고 자유 연애론과 연애 유희 이론을 펼친 것이 더 화제가 되었다.

허정숙은 남편 임원근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공산주의자 송봉우와 동거하는 등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보였다. 또한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출산을 위해 가출옥했다가 다시 투옥되어 많은 화제를 낳았다.[104]

2. 2. 10. 병원 운영과 망명 결심

감옥에서 배운 의학 지식을 활용하여 허정숙은 태양광선치료소 병원을 운영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다.[37] 그는 침을 놓고 을 뜰 줄 알았다. 1932년 둘째 아들 송길한과 어머니 정긍자가 병으로 사망하였다.[37]

송봉우와 재결합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송봉우가 전향하면서 관계가 끊어졌다. 1932년 내내 허정숙은 병원을 운영하면서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감시는 계속되었다. 또한 사회주의와 페미니즘 사상을 버리라는 권고를 받기도 했다.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아래 전향을 강요받는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37] 허정숙은 망명을 결심한다. 병원 운영 외에도 주말마다 명천군, 북청군, 원산 등지로 계몽 강연을 다녔다. 1933년 3월 병원을 다른 한의사에게 맡기고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내려갔다. 부당한 월급 미지급, 적은 월급, 해고가 자주 일어난 다는 소문을 듣고 동래군 (주)율전고무에 위장 취업하였다. 1933년 5월 5일 동래군 율전고무공장 여공 파업을 주도하였다.[55] 4월 30일부터 율전고무의 휴직을 주도하였으나 월급이 지급되지 않자, 5월 5일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공장장 강원길이 그를 강제로 끌어내자 기절하였고, 이 시위는 각지로 보도되었다. 이때 총파업을 유도하기 위해 파견된 남성 운동가 2명이 체포되었으나,[55] 허정숙은 실신을 이유로 체포를 모면하였다. 정숙, 정자라는 이름을 병행하여 사용하였고, 얼마 뒤 감시망을 피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1930년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근우회 해산 이후 자리를 찾지 못했다.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허정숙은 망명을 결심한다.[56]

2. 2. 11. 중국에서의 활동

1933년 국내에서의 항일 저항활동과 여성 해방 운동이 어렵다고 본 허정숙은 아버지 허헌의 집에 출입하던 최창익, 한빈 등을 만나 이들과 망명을 계획한다. 1934년 최창익이 석방되자 구체적인 망명 계획을 세운다. 1936년 11월 아들 임경한(임표)과 신영한을 아버지 허헌과 계모 유덕희에게 맡기고, 배편으로 최창익, 한빈 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난다.[57][58]

허정숙은 "비록 녀성의 몸이기는 하나 총을 메고 반일투쟁의 대오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고 낯설은 이국 땅으로 망명한다."고 하였다. 그는 여성 해방 운동을 비판하는 아버지 허헌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으나, 아버지 허헌은 그를 일종의 정치적 동지로 보기도 했다. 장사꾼으로 위장한 그는 곧 난징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찾아간다. 한편 아버지 허헌은 딸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부고를 알리고,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한 뒤 장례식을 치루어, 조선총독부나 일본 헌병의 추적을 피하게 해주었다.

1942년 중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조선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조선독립동맹의 지부 설치, 홍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이 되고, 그해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교원이 되었다. 군정학교 교원으로 소련레닌주의 이론을 가르쳤으며, 기서(驥西) 지역에서 선전, 조선인 일본군 및 만주군 탈영자들을 합류, 훈련시키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김명시 등과 함께 여성 교관으로써 여군 병력 양성과 관리도 맡아보았다.

1942년 조선의용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그때까지 김원봉과 연락했지만 1942년 연락을 끊고 독자적으로 조선의용군을 창설하였다. 무정은 1942년 여름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그들의 치하에 있는 산서성을 근거지로 하여 김두봉, 최창익, 김창만, 박일우, 허정숙 등과 함께 조선독립동맹의 산하에 조선의용군을 창설했다.[63] 이때 허정숙은 조선의용군의 훈련교관 겸 정치부 주임으로 병력 양성과 교육에 참여하였다. 1944년 조선독립동맹의 집행위원, 조선의용군 참모에 선출되었으며, 반일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선전, 홍보활동을 통해 만주군과 일본군을 탈영한 병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광복군의 3개 지대와 경쟁하였다. 1945년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이 되고, 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 15일 해방 소식을 듣고 배편으로 출발, 그해 9월 남한으로 귀국하였다.

2. 3. 해방 이후

해방 이후 허정숙은 1945년 8월 광복 직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선 이북으로 월북,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조선공산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되고, 10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선전국장을 역임했으며, 11월 11일 조쏘문화협회 및 조쏘친선협회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1946년에는 북조선로동당 간부부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에 북측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 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상, 1959년 사법상과 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는 전 남편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했다. 1965년 정계에 복귀하여 9월 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그해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에 선출된 뒤, 제6, 7,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이어 당선되었다.

1946년 5월부터 38선 이북 각지를 찾아다니며 인재 영입에 힘썼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취직을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2. 3. 1. 광복 직후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그해 9월 경성부로 왔다가 새로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집행위원이 되었으나 1945년 11월 월북했다. 이후 소군정 지역에 정착한 뒤 남북을 오가며 활동했다. 그러나 시중에서는 그를 청소년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유해한 인물이라며 멸시와 욕설을 퍼부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되고, 10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자 임시인민위원회 선전국장이 되었으며, 11월 11일에는 조쏘문화협회와 조쏘친선협회가 창설되자 조쏘문화협회·조쏘친선협회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1946년 북조선로동당 간부부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27일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처음에는 박헌영 등과 함께 반탁을 선언했다가 찬탁이 결정되자 결국 찬탁으로 돌아섰다. 해방 직후 그는 남북을 자유로이 오고 갔으나 1946년 5월 이후 테러를 두려워하여 남한 지역에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북한으로 올라가면서 남쪽은 이상하게도 애국심, 민족, 가족 등의 명분만 있으면 범죄도 정당화되는 이상한 사회라는 한탄을 남기고 월북했다. 3.8선 이북에서 그는 아버지 허헌에게 새로 호적신고를 해달라 하여 1908년생으로 하고 새로 호적신고를 했다. 이때 이름은 정자에서 필명이자 가명으로 써오던 정숙(貞淑)으로 정식 개명하였다.

1947년 7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청사 앞에서 (앞줄 맨 왼쪽은 최용건, 세 번째부터 김책, 김일성, 김달현, 허정숙, 리강국 순)

2. 3. 2. 해방 정국의 정치활동

1946년 1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주비회에 참여하고,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였다.[64] 2월 14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64] 그러나 미군정의 좌익 탄압으로 대구, 대전 등 전국 각지로 피신하였다.

남편 최창익이 새로운 여성과 사랑에 빠져 이혼을 제안하자, 흔쾌히 동의하며 이혼하였다.[64] 1946년 최창익이 재혼하자, 그는 오히려 남편 최창익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기도 했다.[64] 이후 전 남편인 최창익과는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로 지냈으나 1950년대 이후 서서히 멀어졌다. 두 아들의 양육권은 허정숙이 맡았으며, 두 아들은 소련 모스크바로 유학보냈다.[64]

1946년 3월 정칠성 등과 함께 서울에서 국제부녀절 행사를 개최하였다.[64] 1946년 8월 30일 북조선공산당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되자 박정애와 함께 북조선로동당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64]

1946년 7월 북조선로동당 주도로 평양에서 개최된 '북조선 민주주의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회의'에 참석,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발족에 참여하였다.[64] 이후 문화, 선전 사업과 여성 단체 구성 조직 사업에 전념했고, 소련군 철군 시에는 소련군 환송을 주관하였다.

1947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가 정식 인민위원회로 승격, 발족되자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선전국장을 거쳤고,[64] 1948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2. 3. 3. 남북 협상 전후

1948년 3월 북조선로동당 제2차 당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69] 1948년 4월부터 5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연안파의 한 사람이자 38선 이북 측 여성단체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6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석하여 여성단체를 대표해 축사를 낭독중인 허정숙 (1948.04.10)


1949년 6월 24일 남조선로동당북조선로동당이 통합하여 조선로동당이 출범하자 통합된 조선로동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는 먼저 1차 협상의 성과를 재확인했다. 그에 따라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남북조선 대표자들로 조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북에서는 총선거를 통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총선거가 결정되자, 허정숙은 당시 여성들이 학력이 낮았으므로 투표에 불참할 것을 염려하여, 여성들의 민주적 선거 참여를 호소, 독려하였다.

38선 이북에서는 1947년 애국가를 제정해놓고 있었다. 1948년 3월 허정숙은 '애국가'의 보급 문제를 김일성에게 건의했다.[69] 4월 평양에서 개막되기로 예정된 남북한 연석회의를 바로 앞둔 때였다.[69]

김일성1947년과 애국가 제정 직후와 마찬가지로 시기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좀더 기다려 볼 것을 권유했다. 김일성은 허정숙의 건의에 대해 "남북연석회의를 앞두고 애국가를 보급했으면 하는 동무의 심정은 안다"며 "그러나 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대표들의 구성이 복잡하기 때문에 이를 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69] 당시 상황에서 애국가를 내놓는다는 것은 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남한 정치인들에게 통일적 중앙정부 수립을 주장해 온 북한의 주장에 의혹을 품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69]

2. 3.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활동

1946년 1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주비회에 참여하고,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해 2월 14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좌익 탄압으로 은신처를 마련하여 대구, 대전 등 전국 각지로 피신생활을 하였다. 1946년 3월 정칠성 등과 함께 서울에서 국제부녀절 행사를 개최하였다. 1946년 8월 30일 북조선공산당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되자 허정숙은 박정애와 함께 북조선로동당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64]

1946년 7월 북조선로동당 주도로 평양에서 개최된 '북조선 민주주의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회의'에 참석,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발족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문화, 선전 사업과 여성 단체 구성 조직 사업에 전념했고, 소련군 철군 시에는 소련군의 환송을 주관하였다. 1947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가 정식 인민위원회로 승격, 발족되자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선전국장을 거쳤고, 1948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64]

1946년 5월부터 허정숙은 38선 이북 각지를 찾아다니며 인재를 영입하여 정권에 참여시키려 노력하였다. 평양교원대,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동시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박봉조 역시 허정숙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었다.[65] 박봉조를 찾아간 허정숙은 "박 교수, 학생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이 더 중요한 과업 아니오?[65]"라며 참여를 요청했다. 박봉조가 거절하자 허정숙의 눈빛이 벌겋게 변했고, 말투도 거칠어졌다고 한다.[65] 박봉조는 허정숙 등의 거듭된 부탁에 못이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외무성 관리가 되었다가[65], 월남한다. 한편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취직을 적극 주선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사람됨됨이나 능력을 보고 그에 맞는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1948년 북조선로동당 중앙당 간부부장이 되었다. 허정숙은 이미 최창익과 이혼한 상태였다.[66]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 김학철과 같은 총각들은 당시 다 그를 '누님 大姐'으로 대접했다.[67] 해방 후에도 그는 중국의 민족혁명당계 출신과 조선독립동맹 출신들의 취직과 생계문제 해결에 적극 노력했고, 이들로부터 큰 누님 혹은 형님으로 통했다.

황태성 역시 허정숙의 주선으로 산업성의 공무원으로 취직하였다. 황태성은 황해일보사에 머물면서 허정숙에게 편지를 냈다고 한다. 이 덕분에 그는 무역성의 전신인 산업성 지방국장 자리를 받아 평양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68]

그녀는 연안파였다.[78] 연안파 사건 이전부터 그는 최창익, 윤공흠 등과 선을 긋고 있었지만 연안파로 분류되었다. 1959년 10월 29일 최고재판소 소장이 되었다. 1959년 법무상에 임명되었으나 1961년 숙청되었다.[78] 그해 5월 13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에 참여하여 조평통 부위원장이 되었다. 1961년 11월 24일 신병을 이유로 최고재판소 소장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찰스 암스트롱1961년에 그가 숙청되었다[78]고 보았다.

전 남편 최창익은 연안파 숙청 때 몰락했으나, 허정숙은 최창익과의 관계를 끊고 김일성을 지지하면서 계속 권력의 중심에 머물렀다. 연안파와 종파 사건 등으로 일시적으로 반당종파분자로 몰려 정계에서 물러나 협동농장에 갔다가 다시 복귀, 1965년 9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의 서기국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그해 12월 12일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고,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으며, 제5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198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서 등에 선임되었다.

2. 3. 5. 연안파 숙청 이후

허정숙은 연안파였다.[78] 연안파 사건 이전부터 최창익, 윤공흠 등과 선을 긋고 있었지만 연안파로 분류되었다. 1959년 10월 29일 최고재판소 소장이 되었다. 1959년 법무상에 임명되었으나 1961년 숙청되었다.[78] 그해 5월 13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에 참여하여 조평통 부위원장이 되었다. 1961년 11월 24일 신병을 이유로 최고재판소 소장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찰스 암스트롱1961년에 그가 숙청되었다고 보았다.[78]

전 남편 최창익연안파 숙청 때 몰락했으나, 허정숙은 최창익과의 관계를 끊고 김일성을 지지하면서 계속 권력의 중심에 머물렀다. 연안파와 종파 사건 등으로 일시적으로 반당종파분자로 몰려 정계에서 물러나 협동농장에 갔다가 다시 복귀, 1965년 9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의 서기국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그해 12월 12일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고,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으며, 제5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198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비서 등에 선임되었다.

2. 4. 생애 후반

1945년 광복 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남북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에 북측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과 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상, 1959년 사법상과 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는 전 남편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1965년 정계에 복귀, 9월 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그해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8년 8월부터 1991년 6월까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을 맡아보았다. 198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이 되고,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1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장과 정무원 부총리에 피선되고, 1981년 4월에는 북한을 방문한 시리아인민의회대표단을 접견하였다. 1981년 11월 조선로동당 정치국원과 비서국원에 겸임되고, 당 중앙위원회 비서에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직을 사퇴하였고, 1984년 부총리직을 사퇴하였다.

198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에도 선출되었다. 1986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대표단장에도 선출되었다.

허정숙의 여동생 허근욱의 자전적 소설 《내가 설 땅은 어디냐》(1961)와 이 책의 후편인 《흰 벽 검은 벽》(1963)은 허헌과 허정숙, 허근욱 부녀에 얽힌 가족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1989년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에 재임명되었다. 1990년 4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는 불출마하였으나, 조평통과 조국전선 부위원장직과 당 정치국원, 비서국원의 직책은 보유한 채 활동을 계속하였다. 1990년 12월 조선로동당 당 대회에서도 다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초기 공산주의 사상가이며 조봉암, 서상일 등과 함께 1950년대의 진보 정당 운동을 하던 장건상 조차도 그를 '허정숙은 말하기 뭐한 존재[54]'라며 비판하였다. 1990년대까지 허정숙은 해방 정국에 월북한 인물이었고, 사회주의자에 북한의 각료를 역임했으며, 자유 연애를 주장하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금기시되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는 군사 정권 기간 중 성을 금기시하였으므로 그의 성해방론, 연애 유희론은 심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2001년 일본의 여성전쟁인권학회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전쟁과 여성인권센터’와의 공동 연구에서 한일 양국의 여성운동가에 대한 공동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발굴, 언급되었다.[82] 이후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언급,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2. 4. 1. 남북적십자 회담 전후

1971년 9월 20일 남북적십자회담 1차 예비회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대표로 참여하였다.[79]

1972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에도 참석하였다. 당시 허정숙은 평양을 방문한 서영훈, 송건호 일행을 만났으며, 환영 파티에서 남한 측 대표단을 직접 접견하였다. 송건호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허정숙이 앉아 은근히 서영훈에게 "소감이 어떻소"라고 묻자, 송건호는 "평양도 많이 발전했고 서울도 발전했는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답했다.[79]

이에 허정숙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한국전쟁을 우리가 한 겁니까. 외세에 의해서 한 거지"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주필 송건호는 자신을 상대하던 북측 대표에게 허정숙이 누구냐고 물었고, 허정숙 여사라는 답을 들었다.[79]

송건호는 "나는 동아일보 주필 송건호라고 하는데 선생님 동생을 내가 잘 알고 친합니다"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허정숙은 "그래요"라고 한마디 하고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79] 훗날 서영훈은 이를 '송건호의 실수였다.[79]'라고 평했다. 허정숙의 여동생은 북한 체제가 싫어 1.4 후퇴 때 남하했던 것이다.

1972년 7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장에 재선임되었다. 이후 제6대, 7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2. 4. 2.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77년 11월 11일 제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에 당선되었다.[8] 제6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8]

1982년 2월 28일 제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이 되었다.[8] 제7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8]

1986년 11월 2일 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이 되었다.[8]

2. 4. 3. 최후

허정숙은 오랜 병환 끝에 1991년 6월 5일 오후 3시 20분 평양에서 사망했다.[80] 사망 당시 조평통 부위원장, 조국전선중앙위 의장, 해외동포원호위원장 등의 직책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향년 89세였다.[80] 저서로는 《은혜로운 사랑 속에서》(1981), 《민주건국의 나날에》(1986), 《위대한 사랑의 력사를 되새기며》(1989) 등이 있다.[80]

북한은 로동당, 중앙인민위, 정무원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하고, 이종옥 부주석을 위원장으로 하여 박성철 부주석, 연형묵 총리, 김영남 외무부장, 계응태 조선로동당 당비서 등 31명으로 장의위원회를 구성했으며 6월 7일 국장으로 거행하였다.[80] 1991년 6월 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으로 7일장이 거행되었으며 평양방송을 통해 생중계되었다.[81] 시신은 국장으로 거행된 뒤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81]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81]

3. 사상과 신념

허정숙은 여성 해방의 방법으로 경제력을 제시했다. 여성이 가정과 사회로부터 독립, 해방되려면 경제적 독립과 정신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보고 1920년대, 1930년대 내내 강연 활동과 계몽 활동, 여성의 직업 참여를 호소했다.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특혜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남자들과 같은 환경, 같은 조건에서 일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여성 해방의 이론적 무기로서 사회주의를 적극 수용했고, 부인의 지위가 열악한 이유에 대해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자인 남성에게 노예가 되었고, 성적으로 남편에게 구속을 받고 있는 이중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9]

허정숙은 1925년에 발간된 신여성 12월호에서 "지나간 날의 미지근한 감정을 내어버리고 정열 있고 예민한 감정의 주인공의 되어 자기 개성을 살릴 줄 아는 여성이 되자"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인식하고 자신의 인간적 권위를 확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인간다워 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근대적인 억압 속에 묶여있던 "조선 여성들의 감정을 북돋우자![12]"고 하였다.

허정숙은 늘 여자도 남자와 동일한 조건에서 활동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여자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거나 남자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다면 남자들이 승복하지 않을 것이니, 도리어 여자라는 이유로 특혜나 배려를 요구한다면 이제까지 공을 들인 여성의 권리 향상 운동이 물거품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허정숙은 가정이 여성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남성에게도 반드시 행복을 보장한다는 법은 없다고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족에게 투자하고 '자신의 욕망을 근원적으로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우직하게 헌신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9]

허정숙은 특히 봉건적 가부장제 아래에서 '가정노예'로 신음하고 있는 다수의 농촌 여성들에 주목했다.[9] 그는 당시까지도 각종 가사노동과 농사, 제사, 명절에 시달리는 농촌 여성들의 참상을 거듭 지적했다. 또한 농촌 여성 야학당의 설치를 주장하여 무지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켜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허정숙은 강연과 칼럼, 연설을 통해 '결혼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야 된다. 그리고 쉽게 이혼하고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결혼을 강요하고 가정, 가족이 정답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규정했다.

허정숙은 여성에게도 성욕의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수절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허위”라며 반박했다.[9] 그는 여성에게도 성적 욕구가 있고, 여성의 성욕 역시 식욕이나 수면욕과 같은 당연한 것으로서 하나의 취향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30년대에 그는 '연애 유희론'을 주장하였다. 허정숙은 정신적 사랑이 없어도 육체적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유희론을 직접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사랑이 없이도 성관계는 가능했으며 사랑해야만 성관계를 가져야 된다, 결혼을 해야만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자 폭력이며 독선이라고 지적했다.

허정숙은 붉은 연애론과 함께 정조란 소용없는 것이라는 정조 무용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동지적인 관계, '동지애 연애'를 가장 좋은 연애라고 여겼다.[92] 허정숙은 특히 여러 번 결혼한 것으로 유명하였다.[92]

허정숙은 기독교의 폐쇄성과 배타성을 오래도록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미국 숭배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종교인들의 신앙 생활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미국놈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을 바에야 조선의 하느님을 믿어야지…․[85]”라고 하였다.

허정숙은 종교 간 갈등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종교는 상호 존중해야 되는 것이라며 “우리는 그가 어떤 종교를 믿든 간에 그가 지니고 있는 애국심의 깊이와 건국 사업에 어떻게 나서고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종교를 믿는다고 덮어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거나 멀리하며 차별대우를 해서는 안 됩니다.[85]”라고 하기도 했다.

1920년미국에 유학한 허정숙에게 미국은 “인간인 여자를 돈 잘 아는 인형으로 제조하는 공장”이었다.[96] 미국은 “돈의 힘이 아니면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이 나라”로 파악한 허정숙은 재미 한인 동포들을 가리켜 “자본가들에게 사역을 당하는 무리”로, 미국의 여성을 “돈이라면 얼른 삼키는 인형”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38]

1919년 첫 일본 유학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그는 여성 해방의 이론적 무기로서 사회주의를 선택, 적극 수용했고, 부인의 지위가 열악한 이유에 대해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자인 남성에게 노예가 되었고, 성적으로 남편에게 구속을 받고 있는 이중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9]

허정숙은 한국 여성들이 민주시민, 혹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일어설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각하고 일어설 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인식하고 자신의 인간적 권위를 확보하려고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강연에서 '감정을 살리라'고 호소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독립된 삶을 살고 싶다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였다.

허정숙은 여성에 대한 교육과 계몽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허정숙은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무지해서라고 보았고, 1920년대, 1930년대, 여성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여자들도 양질의 교육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여자들 역시 남자와 똑같이 알 권리가 있음을 호소하였다. 동시에 일부 배운 여성들이 깨이지 못한 여성을 계몽시키는 일에 참여하지 않음을 비판하였다.

허정숙은 여성운동에서 차지하는 여성교육과 계몽운동의 비중을 강조하고 여성지도자의 연구 필요성을 역설하였다.[89]

그는 중등학교 이상 배운 여성들에게 농촌으로 가서 혹은 도시의 가난한 부녀자들을 계몽하고 문자와 숫자를 가르치고 교육할 것을 역설하였다. 허정숙은 당대 신여성의 주자들인 여학생들에게 하기, 겨울 방학 등을 이용하여 농촌 여성들을 계몽할 것을 주장하였다.[100] 그는 배운 것, 학문으로 만족하지 말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깨우치게 하고 계몽하는 것이 바로 배운 자의 도리이자 책무임을 역설하였다.

4. 평가

1991년 6월 7일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으로 7일장이 거행되었으며, 평양방송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시신은 국장으로 거행된 뒤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81]

조봉암, 서상일 등과 함께 1950년대의 진보 정당 운동을 하던 장건상은 허정숙을 '말하기 뭐한 존재[54]'라며 비판하였다. 1990년대까지 허정숙은 월북, 사회주의자, 북한 각료 역임, 자유 연애 주장 등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다. 또한 군사 정권 기간 중 성을 금기시한 한국 사회에서 그의 성해방론, 연애 유희론은 심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2001년 일본의 여성전쟁인권학회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전쟁과 여성인권센터’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한일 양국 여성운동가에 대한 공동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발굴, 언급되었다.[82] 이후 20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여자 스스로의 경제적, 사회적 자립 운동을 추진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제일선'이라는 30년대 잡지에서는 허정숙을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사상 잊혀지지 않는 한 용감한 투사... 객관적 정세에 뒤지지 않고 꾸준히 그 이데올로기가 발전됐으며..."라고 평가했다.[12] 여성들의 일상적인 억압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극복하려 했던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9]는 평가도 있다.

신영숙은 그를 '끊임없는 이론 연구와 실천을 병행한, 당시의 대표적인 여성운동가[89]'라고 평가하였다.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여성해방을 고민하며 실천하던 탁월한 혁명가이자 이론가이며 맑스주의 여성해방론을 체계화시킨 장본인이라는 평가도 있다.[12]

'공식 결혼을 7차례나 하는 등 삶의 형태도 자유로웠다.[101]' 허정숙은 “우월권을 가진 남성으로부터 인격을 유린당하는 것은 신여성이나 구여성이나 마찬가지다.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는 여성은 가사를 돌볼 수 없거나, 가사를 돌보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지만 여성의 진정한 해방, 이성간의 사랑, 생활의 안정, 가정의 문제, 직업과 일에서 여성이 갖는 근본적 고통을 해결할 열쇠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지금의 여성에게도 울림을 갖는다.[86]'는 시각도 있다.

성적 만족을 위해 정신적 사랑 없는 육체적 결합을 실천했던 여성해방주의자[102]라는 평가도 있다. 사회주의성향의 독립운동가인 장건상은 훗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일곱 번 결혼한 경력을 들어 '말하기 뭐한 존재[54]'라며 폄하하기도 했다.

5. 기타

일본중국 유학 후 귀국하여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 등 여성단체를 조직,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신간회근우회 등에도 참여하였다. 동아일보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6년 일제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귀국했다가 미군정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1948년 4월 남북 협상에 북측 여성계 대표로 참여 후 북조선에 정착했다. 그해 9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고, 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각 문화선전상과 보건성 부상, 1949년 보건상, 1959년 사법상과 최고재판소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안파 숙청 때는 전 남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1965년 정계 복귀, 9월 최고재판소 소장에 복직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고, 같은 해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에 선출된 뒤, 제6, 7,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연임, 재선되었다.

사랑 없이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고, 사랑 없이도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변호사 허헌의 맏딸이며, 조선공산당 간부인 임원근, 송봉우, 중국 연안조선독립동맹 부주석 최창익의 부인이었고, 신일룡 등의 연인이었다. 본명은 허정자(許貞子), 다른 이름은 허정숙(許貞淑) 또는 허정숙(許正淑), 필명은 수가이(秀嘉伊), 가명은 정은주(鄭恩珠), 별칭은 '조선의 콜론타이'이다. 1945년 이름을 정자에서 정숙(貞淑)으로 개명하였다.[103]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윤치호는 허정숙을 '그(허헌)의 전처 소생(허정숙)은 그에게 골칫거리만 안겨주는 존재라는게 입증되었다[104]'고 비판하였다.

허정숙은 언론노동자답게 타자를 잘 쳤으며[105] 속기에도 능하였다.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 4개 국어를 능히 구사하여 통역 없이도 대화가 가능하였다. 여가 시간에는 연극이나 오페라 공연 관람,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겼다.

이혼녀라는 타이틀보다 자유로운 연애 편력, 자유 연애론과 연애 유희 이론을 펼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남편 임원근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 중일 때, 공산주의자 송봉우와 동거하는 등 자유분방한 남성 편력을 보였고,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출산을 위해 가출옥했다가 다시 투옥되어 화제를 뿌렸다.[104]

장건상은 '그는 일곱 번이나 시집간 여자[54]', '임원근은 첫 번째 남편이고, 최창익은 일곱 번째 남편이지요. 어느 책에 보면 임원근최창익의 별명이라고 해놓았던데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허정숙의 남편이라니까 다 같은 남자로 생각한 것이지요.[54]'라고 증언하였다. 장건상은 또한 '허정숙은 말하기 뭐한 존재[54]'라며 비판하였다.

잡지 ‘삼천리’는 1931년 7월호에서 박헌영의 부인이자 경성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던 주세죽, 최초의 동아일보 여기자이며 여러 남성 독립운동가와 인연을 맺었던 허정숙, 기생 출신의 정칠성 등 여성 사회운동가 10명의 삶을 ‘그들의 남자’, 즉 사생활을 중심으로 소개했다.[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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