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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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준승은 전라북도 임실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891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손병희의 갑진개혁운동에 동참했다. 1916년 전라도 지역 천도교 수장이 되었으며,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낭독했다.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 후 출감했다. 1927년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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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인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신민회 활동, 3·1 운동 참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 박준승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박준승 |
| 원어 이름 | 朴準承 |
![]() | |
| 출생지 | 전라북도 임실군 청학면 |
| 국적 | |
| 직업 | 독립운동가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 웹사이트 | 박준승(독립유공자 공훈록) |
| 상훈 | |
| 훈장 | [[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
2. 생애
전라북도 임실 출생으로, 1891년 김영원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3년 뒤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다.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이 처형당한 후 남접에서 지하 활동을 계속하였고, 손병희의 갑진개혁운동에 동참했다. 1916년 전라도 지역 천도교 수장이 되었고, 1919년 손병희로부터 독립만세 시위 권유를 받고 기미독립선언서 5천 매를 미리 인쇄하여 전라북도의 임실, 남원, 장성 등지에서 배포하여 궐기하게 하였다. 2월 25일 상경했다가 3·1 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 낭독을 마치고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7년 3월 23일 사망하였다.
2. 1. 동학 농민 운동 참여
1891년 김영원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3년 뒤 발생한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하였다.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이 처형당한 후 남접에서 지하 활동을 계속하였고, 손병희의 갑진개혁운동에 동참했다.2. 2. 3.1 운동과 민족대표 33인
1916년 전라도 지역 천도교 수장이 되었다. 1919년 2월 손병희로부터 독립만세 시위 권유를 받고 기미독립선언서 5천 매를 미리 인쇄하여 전라북도의 임실, 남원, 장성 등지에서 배포하여 궐기하게 하였다. 2월 25일 상경했다가 3·1 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 낭독을 마치고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2. 3. 투옥과 최후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낭독한 뒤 체포되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1]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7년 3월 23일 지병으로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1]2. 4. 공판 중 진술 내용
박준승은 재판 과정에서 "조선은 4천 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는 고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아니하면 안될 줄로 생각한다."라고 진술하며 자신의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였다.[1]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박준승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정읍의 충무공원에는 박준승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2]
참조
[1]
웹사이트
수성동 유래연혁
http://jeongeup.go.k[...]
정읍시
[2]
웹사이트
수성동 유래연혁
http://jeongeup.go.k[...]
정읍시
200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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