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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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민족대표 33인 명단
- 2.1. 천도교
- 2.1.1. 손병희 (孫秉熙, 1861~1922)
- 2.1.2. 권동진 (權東鎭, 1861~1947)
- 2.1.3. 오세창 (吳世昌, 1864~1953)
- 2.1.4. 임예환 (林禮煥, 1865~1949)
- 2.1.5. 나인협 (羅仁協, 1872~1951)
- 2.1.6. 홍기조 (洪基兆, 1865~1938)
- 2.1.7. 박준승 (朴準承, 1866~1927)
- 2.1.8. 양한묵 (梁漢默, 1862~1919)
- 2.1.9. 권병덕 (權秉悳, 1867~1944)
- 2.1.10. 김완규 (金完圭, 1876~1949)
- 2.1.11. 나용환 (羅龍煥, 1864~1936)
- 2.1.12. 이종훈 (李鍾勳, 1856~1931)
- 2.1.13. 홍병기 (洪秉夔, 1869~1949)
- 2.1.14. 이종일 (李鍾一, 1858~1925)
- 2.1.15. 최린 (崔麟, 1878~1958)
- 2.2. 개신교
- 2.2.1. 이승훈 (李昇薰, 1864~1930)
- 2.2.2. 박희도 (朴熙道, 1889~1952)
- 2.2.3. 이갑성 (李甲成, 1889~1981)
- 2.2.4. 오화영 (吳華英, 1880~1960)
- 2.2.5. 최성모 (崔聖模, 1874~1937)
- 2.2.6. 이필주 (李弼柱, 1869~1942)
- 2.2.7. 김창준 (金昌俊, 1890~1959)
- 2.2.8. 신석구 (申錫九, 1875~1950)
- 2.2.9. 박동완 (朴東完, 1885~1941)
- 2.2.10. 신홍식 (申洪植, 1872~1939)
- 2.2.11. 양전백 (梁甸伯, 1869~1933)
- 2.2.12. 이명룡 (李明龍, 1872~1956)
- 2.2.13. 길선주 (吉善宙, 1869~1935)
- 2.2.14. 유여대 (劉如大, 1878~1937)
- 2.2.15. 김병조 (金秉祚, 1877~1948)
- 2.2.16. 정춘수 (鄭春洙, 1873~1953)
- 2.3. 불교
- 2.1. 천도교
- 3. 민족대표 33인의 한계와 의의
- 참조
1. 개요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종교계 인사 33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각 종교를 대표하며 독립선언서를 통해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표명했다.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맞선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었으나, 민족대표가 종교계 인사로 제한되어 사회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일부 민족대표의 친일 행위는 역사적 오점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3·1 운동과 독립선언서는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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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대표 33인 명단
다음은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린, 박희도, 정춘수를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2. 1. 천도교
1919년 당시 천도교는 국내 최대 종교 중 하나였으며, 3.1 운동을 주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천도교 측 민족대표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등 15인이 참여하였다.이들 중 손병희, 이종일, 최린은 징역 3년형을,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권병덕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양한묵은 재판 중 사망하였다. 최린은 3.1 운동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다.
2. 1. 1. 손병희 (孫秉熙, 1861~1922)
손병희는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천도교 3세 교주였다. 1919년 3.1 운동을 총지휘하였으며,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6] 병보석으로 출감 후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2. 권동진 (權東鎭, 1861~1947)
권동진(權東鎭, 1861년~1947년)은 충북 괴산 출생의 천도교 도사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6] 3·1 운동 이후,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등에 참여하며 민족 운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3. 오세창 (吳世昌, 1864~1953)
서울 출생으로, 천도교 도사였다.[6] 서예가, 전각가, 금석학자 및 역사학자로 활동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4. 임예환 (林禮煥, 1865~1949)
임예환(林禮煥, 1865~1949)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천도교 도사였다.[6]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6]
2. 1. 5. 나인협 (羅仁協, 1872~1951)
나인협(羅仁協, 1872년 ~ 1951년)은 평안남도 성천 출생의 천도교 도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2. 1. 6. 홍기조 (洪基兆, 1865~1938)
홍기조(洪基兆, 1865~1938)는 평안남도 남포 출생의 천도교 도사였다.[6]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6]
2. 1. 7. 박준승 (朴準承, 1866~1927)
박준승(朴準承, 1866년~1927년)은 전라북도 임실 출신의 천도교 도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8. 양한묵 (梁漢默, 1862~1919)
186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한 천도교 도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재판 중 사망하였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9. 권병덕 (權秉悳, 1867~1944)
권병덕(權秉悳, 1867년 ~ 1944년)은 충북 청주 출신의 천도교 도사였다.[1]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1]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1]
2. 1. 10. 김완규 (金完圭, 1876~1949)
서울 출생으로, 천도교 전제관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6]2. 1. 11. 나용환 (羅龍煥, 1864~1936)
나용환(羅龍煥, 1864년 ~ 1936년)은 평안남도성천 출신의 천도교 도사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6]
2. 1. 12. 이종훈 (李鍾勳, 1856~1931)
이종훈(李鍾勳, 1856년 ~ 1931년)은 경기도 광주 출신의 천도교 장로였다.[6]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2. 1. 13. 홍병기 (洪秉夔, 1869~1949)
홍병기(洪秉夔, 1869~1949)는 여주시 출신 천도교 장로였다.[6] 3.1 운동 이후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2. 1. 14. 이종일 (李鍾一, 1858~1925)
이종일(李鍾一, 1858년 ~ 1925년)은 충청남도 태안 출신으로, 천도교 월보과장이자 보성사 사장이었다. 3.1 운동 당시 제2의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2. 1. 15. 최린 (崔麟, 1878~1958)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3.1 운동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다.[7]2. 2. 개신교
3·1 운동 당시 개신교는 서구 문물의 유입 통로이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개신교계에서는 이승훈 장로를 비롯한 16명이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했다.
이 중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설립해 민족 교육에 힘썼고, 이갑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오화영은 광주학생운동과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길선주는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1년 7개월간 구금되었다. 김병조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박희도와 정춘수는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다.
2. 2. 1. 이승훈 (李昇薰, 1864~1930)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장로교회 장로였다.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다. 3·1 운동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7]
2. 2. 2. 박희도 (朴熙道, 1889~1952)
박희도[7]는 188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북감리교)였으며,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으며,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2. 2. 3. 이갑성 (李甲成, 1889~1981)
이갑성(李甲成, 1889년 ~ 1981년)은 경상북도대구 출신으로, 세브란스의전 부설병원 사무원이었다. 장로교 신자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했다.[7]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2. 4. 오화영 (吳華英, 1880~1960)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남감리교 목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7] 광주학생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는 북한에 남았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2. 2. 5. 최성모 (崔聖模, 1874~1937)
최성모(崔聖模, 1874~1937)는 황해도 해주 출신 북감리교 목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7]2. 2. 6. 이필주 (李弼柱, 1869~1942)
이필주(李弼柱, 1869년 ~ 1942년)는 서울 출신으로, 정동교회 목사 (북감리교)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에는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2. 7. 김창준 (金昌俊, 1890~1959)
김창준(金昌俊, 1890년 ~ 1959년)은 평안남도강서 출신의 북감리교 전도사였다.[7]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에는 목회 및 신학 공부에 전념하였으며, 한국 전쟁 중 월북하였다.[7]
2. 2. 8. 신석구 (申錫九, 1875~1950)
신석구(申錫九, 1875년 ~ 1950년)는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남감리교 목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2. 2. 9. 박동완 (朴東完, 1885~1941)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기독교신보사 서기(북감리교)였다.[7] 3·1 운동 이후 신간회에서 활동하고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7]2. 2. 10. 신홍식 (申洪植, 1872~1939)
신홍식(申洪植, 1872년 ~ 1939년)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의 북감리교 목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에는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2. 2. 11. 양전백 (梁甸伯, 1869~1933)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8]2. 2. 12. 이명룡 (李明龍, 1872~1956)
이명룡(李明龍, 1872년 ~ 1956년)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의 장로교 장로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8]2. 2. 13. 길선주 (吉善宙, 1869~1935)
평안남도 안주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다.[8]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1년 7개월간 구금되었다.[8] 이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되었다.[8]2. 2. 14. 유여대 (劉如大, 1878~1937)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장로교회 목사[8]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8] 출소 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8]2. 2. 15. 김병조 (金秉祚, 1877~1948)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장로교회 목사였다.[8] 3·1 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2. 2. 16. 정춘수 (鄭春洙, 1873~1953)
정춘수(鄭春洙, 1873년 ~ 1953년)는 충북 청주 출신의 남감리교 목사였다.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8] 그러나 3.1 운동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으며,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2. 3. 불교
불교계에서는 한용운과 백용성이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다.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 승려로 신흥사에서 수행하였으며, 신간회 활동과 사회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백용성은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해인사에서 수행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두 사람 모두 3·1 운동에 참여하여, 한용운은 징역 3년, 백용성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6]
2. 3. 1.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충청남도 홍성 출생으로, 불교 승려였다. 신흥사에서 수행하였다. 신간회 활동 및 사회계몽 운동에 참여했으며, 3.1 운동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2. 3. 2. 백용성 (白龍城, 1864~1940)
白龍城|백용성중국어(1864년 ~ 1940년)은 전라북도 장수 출신의 승려이다. 해인사에서 수행하였다.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3. 민족대표 33인의 한계와 의의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자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의 근거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1]
일제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인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다.[2]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계 인사였고, 이들 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행위로 변절하였다는 한계가 있다.[3][4]
3. 1. 한계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자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의 근거가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1]일제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인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다.[2] 사회 전반이 친일화된 상황에서 독립선언서 작성 및 배포 등 3.1운동 전반에 종교계가 앞장섰으나, 이는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계 인사라는 한계로 이어졌다.[3] 이들 33인 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다.[4]
3. 2. 의의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 되었다.[1] 3.1 독립선언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의 근거가 되었고, 현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잇는 대한민국 정부에 그 정신이 계승된다.[2]일제의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로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하였다.[3] 사회 전반이 친일 변질된 상황에서 독립선언서 작성 및 배포 등 3.1운동 전반에 종교계가 앞장섰으나, 민족대표 33인 모두 종교계 인사들이라는 한계가 있다.[4] 이들 33인 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행위로 변절하였다.[5]
참조
[1]
서적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도서출판 풀빛
2001-12-20
[2]
서적
한국사 새로 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12-20
[3]
본문
[4]
서적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서문당
[5]
본문
[6]
본문
[7]
본문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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