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서리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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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밤서리 위기는 1958년 8월, 소련이 제3차 파게르홀름 내각의 구성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정치적 위기이다. 소련은 핀란드 사회민주당 내 우파에 대한 불만, 핀란드 공산당 창당 40주년 기념 행사에서 오토 빌레 쿠시넨의 비자 발급 거부 등을 이유로 압박했다. 소련은 경제 제재와 외교적 압박을 가했고, 결국 파게르홀름 내각은 붕괴되었다. 1959년 1월,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의 회담을 통해 위기는 해결되었고, 핀란드는 외교 관계를 회복했다. 이 사건으로 케코넨은 핀란드 정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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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서리 위기 | |
---|---|
사건 개요 | |
명칭 | 밤서리 위기 |
다른 명칭 | 요외파카스크리시 (Yöpakkaskriisi, 핀란드어) |
발생 시기 | 1958년 |
위치 | 핀란드 |
원인 | 핀란드 내각 구성에 대한 소련의 불만 |
결과 | 빌리오 내각의 사임 및 새로운 정부 구성 |
배경 | |
관련 국가 | 핀란드 소련 |
주요 인물 | 우르호 케코넨 니키타 흐루쇼프 |
경과 | |
주요 사건 | 소련의 핀란드 압력 증가 핀란드 내각의 분열 빌리오 내각의 사임 새로운 정부 구성 노력 |
영향 | |
정치적 영향 | 핀란드-소련 관계의 긴장 고조 |
핀란드 내 정치 | 핀란드 내 정치 불안정 심화 |
관련 정보 | |
참고 자료 | 소련 비밀 문서 공개 - 케코넨의 동방 관계에 대한 새로운 자료 포함 (핀란드어) |
2. 배경
1958년 8월, 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을 총리로 하는 제3차 파게르홀름 내각이 출범했으나, 소련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밤서리 위기'가 시작되었다.[12][2] 소련은 핀란드 사회민주당 내 우파 인사들, 특히 배이뇌 레스키넨과 올라비 린드블롬의 입각에 강하게 반발했으며,[12][2] 국민연합당 소속 농무장관 닐로 코솔라의 개인적인 배경과,[13][3] 친소련 성향의 핀란드 인민민주동맹이 연정에서 배제된 점[13][3] 등 여러 요인을 문제 삼았다.
이러한 내각 구성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핀란드 공산당 창당 기념행사와 관련된 오토 빌레 쿠시넨의 비자 발급 거부 사건[5] 또한 양국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로 인해 핀란드와 소련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며 밤서리 위기로 이어졌다.
2. 1. 정치적 배경
1958년 8월 출범한 제3차 파게르홀름 내각이 소련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위기가 시작되었다.[12][2] 소련 정부는 핀란드 사회민주당(사민당) 내 우파로 분류되던 배이뇌 레스키넨과 올라비 린드블롬의 입각을 문제 삼았다.[12][2] 특히 소련은 사민당 지도자 배이뇌 탄네르를 동계전쟁 당시 활동을 이유로 반역자로 간주하고 있었는데,[2] 레스키넨과 린드블롬이 탄네르의 지지를 받아 내각에 참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 소련은 이들 사민당 우파 세력을 농업동맹이나 국민연합당 같은 핀란드의 전통적인 우파 정당보다 더 부정적으로 보았다.[13]또한, 농무장관으로 임명된 국민연합당 소속 닐로 코솔라의 아버지 비흐토리 코솔라가 전간기 파시스트 정당인 라푸아 운동( Lapuan liikefi )의 지도자였다는 점도 소련의 반발을 샀다.[13][3] 게다가 직전 의회 선거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파 정당 핀란드 인민민주동맹( Suomen Kansan Demokraattinen Liittofi )이 연정 구성에서 배제된 것도 소련의 불만을 키웠다.[13][3]
내각 구성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아 외무장관이 된 요하네스 비롤라이넨은 마지막 순간에 배이뇌 탄네르에게 레스키넨을 입각시키지 말 것을 호소했으나, 탄네르는 "젊은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우리는 소련 정부가 아니라 핀란드 정부를 구성하고 있소."라며 거절했다.[4]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 역시 비롤라이넨에게 레스키넨의 입각이 가져올 문제에 대해 미리 경고한 바 있었다.[4] 케코넨 대통령은 8월 29일 새 내각을 임명하면서 "이것은 내가 한 최악의 연설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쓴 것은 아니었다."라는 말을 남기며 내각 구성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4]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 말 열린 핀란드 공산당 창당 40주년 기념행사도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소련 대표단으로 참석 예정이었던 오토 빌레 쿠시넨에게 핀란드 정부가 비자를 발급하지 않은 것이다.[5] 쿠시넨은 동계전쟁 당시 소련이 세운 괴뢰 정부인 테리요키 정부의 수장이었기에 핀란드 내에서는 반역자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비자 발급 거부 결정은 실제로는 이전 쿠스코스키 정부와 케코넨 대통령이 내린 것이었으나,[5] 책임은 파게르홀름 내각, 특히 외무장관 비롤라이넨에게 돌아갔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은 쿠시넨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비자 거부를 개인적으로는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지만,[5]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이 사건을 파게르홀름 내각을 공격하는 소재로 적극 활용했다.[5]
2. 2. 케코넨 대통령의 입장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은 제3차 파게르홀름 내각 구성 과정에서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다. 그는 내각 구성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하네스 비롤라이넨에게 소련이 반대하는 배이뇌 레스키넨의 입각에 대해 미리 경고하기도 했다.[4] 그러나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배이뇌 탄네르 등은 이러한 우려를 일축하며 내각 구성을 강행했다.[4]결국 1958년 8월 29일, 케코넨 대통령은 새 내각을 임명하면서 "이것은 내가 한 최악의 연설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쓴 것은 아니었다"라는 말을 남기며 내각 구성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4] 이는 소련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케코넨의 입장과 달리, 소련의 반발을 살 수 있는 인물들이 포함된 내각이 출범한 것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보여준다.
또한, 핀란드 공산당 창당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려던 오토 빌레 쿠시넨에게 비자가 발급되지 않은 사건 역시 케코넨 대통령과 연관이 있다. 비자 거부의 책임은 표면적으로 파게르홀름 내각의 외무장관 비롤라이넨에게 돌려졌으나, 실제 결정은 전임 쿠스코스키 내각 시기에 케코넨 대통령의 관여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5] 이는 케코넨이 소련과의 관계를 관리하면서도 핀란드 내부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했던 복잡한 입장을 반영한다.
2. 3. 쿠시넨 비자 거부 사건
1958년 8월, 새로 출범한 파게르홀름 정부가 소련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서 위기가 시작되었다.[2] 소련은 사회민주당 우파를 대표하는 바이뇌 레스키넨과 올라비 린드블롬이 당 지도자 바이뇌 타너의 승인 하에 입각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타너는 동계전쟁 당시 활동으로 인해 소련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소련은 국민연합당 소속 농업부 장관 니일로 코솔라와 그의 아버지이자 1930년대 극우 라푸아 운동(Lapuan liikefi) 지도자였던 비흐토리 코솔라를 연관 지어 비판했다.[3] 게다가 핀란드 인민 민주 연맹( Suomen Kansan Demokraattinen Liittofi )은 직전 의회 선거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정 구성에서 배제되었다.정부 구성에 핵심 역할을 했고 외무부 장관이 된 요하네스 비롤라이넨은 바이뇌 타너에게 레스키넨의 입각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으나, 타너는 이를 거절했다.[4]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 역시 비롤라이넨에게 레스키넨과 함께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미리 경고한 바 있었다. 8월 29일 정부를 선언한 후, 케코넨은 "이것은 내가 한 최악의 연설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쓴 것은 아니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 8월 말 핀란드 공산당 창당 40주년 기념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소련 대표단에는 동계전쟁 시기 소련이 세운 괴뢰정부인 테리요키 정부의 수장이었고 핀란드 내에서 반역자로 여겨지던 오토 빌레 쿠시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핀란드 정부는 쿠시넨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다. 이 결정의 책임은 공식적으로 파게르홀름 3차 정부의 외무부 장관인 요하네스 비롤라이넨에게 돌아갔지만, 실제 결정은 이전 쿠스코스키 내각과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에 의해 내려진 것이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쿠시넨의 비자 거절을 개인적으로는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이 사건을 파게르홀름 정부를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다.[5]
3. 전개
소련은 먼저 사이마 운하 사용권 협상, 핀란드만 어로권 조약, 무역 협상 등을 중단하거나 연기하며 경제적으로 핀란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가을에는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 빅토르 레베데프를 사실상 철수시키는 등 정치적 압박도 가했다.
이러한 소련의 압박 속에서 핀란드 내부에서는 농업동맹( Maalaisliittofi )과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의 움직임이 있었고, 결국 1958년 12월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총사퇴했다.[14][4] 이 과정에서 미국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가 케코넨 대통령에게 경제적 지원을 제안했으나, 핀란드 외무부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1959년 1월 13일, 케코넨 대통령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15][6] 농업동맹의 비에노 유시 숙셀라이넨을 총리로 하는 소수 여당 내각(제2차 숙셀라이넨 내각) 구성을 발표하며 위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3. 1. 소련의 압박
소련은 먼저 경제적으로 핀란드를 압박했다. 사이마 운하 사용권 협상, 핀란드만 어로권 조약, 무역협상이 모두 유예되거나 연기되었다.가을이 되자 모스크바는 정치적으로도 압박 수위를 높였다. 1958년 10월,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 빅토르 레베데프는 "휴가"를 떠나면서 의례적으로 외무부 장관 요하네스 비롤라이넨을 만나지 않았다. 이후 소련은 레베데프가 다른 업무로 전출되었으며 후임자를 임명할 계획이 없다고 통보했다. 11월에는 농업동맹이 자당 소속 각료들에게 정부에서 사임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농업동맹 당원인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 역시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12월 4일, 비롤라이넨 외무장관이 사임했고, 곧이어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 총리가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14][4] 1959년 1월 13일, 케코넨 대통령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15][6] 농업동맹의 비에노 유시 숙셀라이넨을 후임 총리로 지명하고, 그가 이끄는 소수 여당 내각인 제2차 숙셀라이넨 내각 구성을 발표했다.
이러한 밤서리 위기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핀란드 재계 대표인 요한 뉘코프의 주선으로, 1958년 11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 허버트 험프리가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케코넨 대통령을 만났다. 험프리는 소련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제안했으나, 핀란드 외무부는 어려운 입장에 놓였고 결국 핀란드의 국제적 평판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이 제안을 거절했다.
3. 2. 핀란드 내부의 움직임
소련은 먼저 경제적으로 핀란드를 압박했다. 사이마 운하 사용권 협상, 핀란드만 어로권 조약, 무역협상이 모두 중단되거나 연기되었다.가을이 되자 모스크바는 정치적으로도 핀란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0월,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 빅토르 레베데프는 "휴가"를 떠나면서 의례적인 외무장관 요하네스 비롤라이넨 방문도 생략했다. 이후 소련은 레베데프가 다른 업무로 전보되었으며 후임자를 임명할 계획이 없다고 통보했다. 11월에는 농업동맹(Maalaisliittofi)이 자당 소속 각료들에게 내각에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농업동맹 소속인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 역시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12월 4일 비롤라이넨 외무장관이 사퇴했고, 곧이어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 총리가 내각 총사퇴를 발표했다.[4] 1959년 1월 13일, 케코넨 대통령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6] 농업동맹의 비에노 유시 숙셀라이넨을 후임 총리로 하는 소수 여당 내각(제2차 숙셀라이넨 내각) 구성을 발표했다.
이러한 밤서리 위기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핀란드 재계 대표인 요한 뉘코프의 주선으로, 미국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가 1958년 11월 모스크바로 가던 중 케코넨 대통령을 만났다. 험프리는 소련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제안했지만, 어려운 입장에 놓인 핀란드 외무부는 핀란드의 국제적 평판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고심 끝에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3. 3. 미국의 개입 시도
밤서리 위기는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핀란드 산업계를 대표하는 기구의 수장이었던 요한 뉘코프가 주선하여, 1958년 11월 모스크바로 향하던 미국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가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을 만났다. 이 회담에서 험프리는 핀란드가 소련의 압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제안했다. 그러나 핀란드 외무부는 이러한 미국의 도움이 핀란드의 국제적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고심 끝에 제안을 거절하였다.[4]4. 해결
밤서리 위기는 1959년 1월, 케코넨 대통령 부부가 레닌그라드로 사적인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만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16][7] 이 만남에 이은 협상을 통해 양국 간의 긴장 관계가 완화되었고,[16][7] 위기의 원인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17][8] 결국 1959년 2월 3일, 양국의 외교 관계는 정상적으로 복구되었으며, 소련은 알렉세이 자하로프를 새로운 주핀란드 대사로 임명했다.[18][9]
4. 1. 흐루쇼프의 선언
밤서리 위기는 1959년 1월, 케코넨 대통령 부부가 레닌그라드로 사적인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소련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만나면서 해결되었다.[16] 점심 식사에 이어진 협상 자리에서 흐루쇼프는 핀란드는 스스로 내각을 결정할 권리가 있지만, 소련 역시 그 내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16] 케코넨 대통령은 밤서리 위기가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내부 분열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설명하자고 제안했다.[17] 이후 1959년 2월 3일, 양국의 외교 관계가 복구되었고 소련은 알렉세이 자하로프를 후임 주핀란드 대사로 임명했다.[18]4. 2. 케코넨의 입장
밤서리 위기는 1959년 1월, 케코넨 대통령 부부가 레닌그라드로 사적인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만나면서 해결되었다.[16] 이어진 오찬 협상에서 흐루쇼프는 핀란드가 스스로 내각을 구성할 권리가 있지만, 소련 역시 그 내각에 대한 입장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언급했다.[16] 이에 케코넨 대통령은 밤서리 위기가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내부 분열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17] 이러한 외교적 노력 끝에 1959년 2월 3일, 양국의 외교 관계는 복구되었고, 소련은 알렉세이 자하로프를 새로운 주핀란드 대사로 임명했다.[18]4. 3. 외교 관계 복구
밤서리 위기는 1959년 1월, 케코넨 대통령 부부가 레닌그라드로 사적인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소련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만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점심 식사에 이어진 협상 자리에서 흐루쇼프는 핀란드가 스스로 내각을 구성할 권리가 있지만, 소련 역시 그 내각에 대한 입장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언급했다.[16] 이 자리에서 케코넨은 밤서리 위기가 핀란드 사회민주당 내부의 분열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설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17] 결국 1959년 2월 3일, 양국의 외교 관계는 복구되었고, 소련은 알렉세이 자하로프를 새로운 주핀란드 대사로 임명했다.[18]5. 결과
밤서리 위기를 해결한 결과, 우르호 케코넨은 핀란드 국내 정치에서 확고한 지도력을 구축했다.[19][10]
5. 1. 케코넨의 동기에 대한 논쟁
국제 위기를 해결한 우르호 케코넨은 핀란드 정계에서 지도자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후 20여 년간 케코넨은 핀란드 내부 정치를 좌지우지했으며, 그의 허락 없이는 어떤 정당이나 개인도 정부에 참여할 수 없었다.[19][10] 역사학자들은 오늘날까지 케코넨이 파게르홀름 정부를 무너뜨린 동기에 관해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19][10]참조
[1]
뉴스
Neuvostoliiton salaisia papereita julki – sisältävät uutta aineistoa myös Kekkosen idän-suhteista - Aamulehti
https://www.aamuleht[...]
2017-10-18
[2]
서적
Presidentin ministeri - Ahti Karjalaisen ura Urho Kekkosen Suomessa
Otava
1989
[3]
서적
Puhemiehen ääni
Tammi
1977
[4]
서적
Itsenäinen Suomi: seitsemän vuosikymmentä kansakunnan elämästä
Otava
1987
[5]
서적
Pelon ja toivon aika − 20. vuosisadan tilinpäätös II
Otava
2001
[6]
뉴스
Presidentti Kekkosen yöpakkaspuhe
https://yle.fi/aihe/[...]
2010-06-11
[7]
문서
Tarkka & Tiitta, p. 222.
[8]
서적
Veteen piirretty viiva
Otava
1980
[9]
간행물
Mitä-Missä-Milloin
1960
[10]
간행물
Mitä-Missä-Milloin
1960
[11]
뉴스
Neuvostoliiton salaisia papereita julki – sisältävät uutta aineistoa myös Kekkosen idän-suhteista - Aamuleh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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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8
[12]
서적
Presidentin ministeri - Ahti Karjalaisen ura Urho Kekkosen Suomessa
Otava
1989
[13]
서적
Puhemiehen ää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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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14]
서적
Itsenäinen Suomi - Seitsemän vuosikymmentä kansakunnan elämästä
Otava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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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ti Kekkosen yöpakkaspuhe
https://yle.fi/aihe/[...]
201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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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Tarkka &Tiitta, p. 22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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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teen piirretty viiva
Otava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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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Mitä-Missä-Milloin
1960
[19]
간행물
Mitä-Missä-Milloin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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