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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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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는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발굴 조사를 통해 17세기 중엽 경기도 광주 선동리에서 제작된 것이 밝혀진 조선 시대 백자이다. 17세기 전반, 전란으로 인한 청화 안료 부족으로 인해 '가화' 용준의 폐단을 보완하고자 '석간주'로 무늬를 그린 철화백자 용준이 제작되었으며, 이 항아리는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다. 이 항아리는 회백색 유약, 독특한 형태, 운룡문, 당초문, 삼각선 문양 등의 특징을 가지며, 1489년 제작된 백자 청화 항아리에서 기형이 비롯되어 17세기 전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운룡문으로 보아 궁중에서 사용된 용준항의 하나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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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문화재 정보
이름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 (白瓷 鐵畵雲龍文 立壺)
유형보물
번호645
지정일1978년 12월 7일
소재지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 이화여대박물관 (대현동)
시대조선 (17세기)
소유자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참고 사항높이 45.8cm, 입지름 15.8cm, 밑지름 15.7cm
수량1개
문화재청 ID12,06450000,11

2. 역사적 배경

17세기 전반 조선은 거듭된 전란으로 물자와 청화 안료가 부족해지면서 청화백자 용준(龍罇, 용 무늬 항아리)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다.[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석간주 안료를 사용한 철화백자 용준이 대안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성된 백자에 임시로 그림을 그린 '가화(假畵)' 방식도 사용되었으나,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철화백자가 주요 대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3]

이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는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를 통해 17세기 중엽 경기도 광주 선동리에 위치했던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4] 항아리의 형태는 성종 대의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에서 시작하여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양식을 보여주며,[5] 표면의 운룡문(雲龍文)은 이 항아리가 당시 궁중에서 사용되었던 용준항의 하나였음을 시사한다.[5] 항아리의 세부적인 특징들은 당시 광주 관요 백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2. 1. 제작 배경

기록과 유적 조사 등을 통해 철화백자 용준은 17세기 전반경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3] 이는 당시 조선이 겪은 거듭된 전란으로 물자와 청화 안료가 부족하여 청화백자 용준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대안이 모색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완성된 백자 위에 임시로 그림을 그려 청화백자처럼 꾸민 '가화(假畵)' 용준이었다. 그러나 가화 용준은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여, 이와 함께 '석간주'라는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철화백자 용준이 제작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요지에서 출토된, 간지(干支)가 새겨진 철화백자 용문 항아리 조각들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3]

이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는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17세기 중엽 관요 중 하나였던 경기도 광주 선동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4] 항아리에 보이는 회백색 유약, 독특한 형태, 구름과 용 무늬(운룡문), 당초문, 삼각선 문양 등의 철사(鐵砂) 안료 문양, 오목하게 들어간 굽 등은 경기도 광주군 일대의 17세기 관요 가마터(상림리, 선동리, 정지리 등)에서 발견되는 백자들의 특징과 유사하다.

이 항아리의 형태는 1489년(성종 20년)에 만들어진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에서 비롯되어, 16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는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로 이어지며 변화된 모습이 이 항아리에서 나타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항아리 표면에 장식된 운룡문은 이 항아리가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용준항(龍罇缸), 즉 용을 그린 항아리의 하나였음을 시사한다.[5]

2. 2. '가화(假畵)' 용준

17세기 전반 조선은 거듭된 전란으로 물자와 청화 안료가 부족하여 청화백자 용준(龍罇, 용 무늬 항아리)을 만들기가 어려웠다.[3]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대안이 모색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가화(假畵)' 용준이었다. '가화'는 이미 완성된 백자 위에 임시로 필요한 그림을 그려 넣어 마치 청화백자처럼 보이도록 꾸미는 방식이었다.[3]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고, 이에 따라 석간주 안료를 사용하여 용 무늬를 그린 철화백자 용준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3]

2. 3. 관요지 발굴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이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가 경기도 광주시 선동리에 위치했던 17세기 중엽 관요 중 한 곳에서 제작된 사실이 밝혀졌다.[4]

이 항아리에서 보이는 회백색 유약, 독특한 형태, 철화(鐵畵) 기법으로 그린 운룡문(雲龍文), 당초문(唐草文), 삼각선 문양, 그리고 오목하게 깎은 굽 등은 경기도 광주시 일대의 다른 17세기 관요 터인 상림리, 정지리 등에서 출토된 백자 조각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5] 이러한 특징들은 이 항아리가 당시 관요에서 제작되었음을 뒷받침한다.

3. 특징

이 항아리는 궁중 연향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철화백자로, 본래 청화백자로 만들던 용준(龍樽)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1] 조선 전기의 준(樽) 양식을 계승한 S자 곡선의 몸체 형태가 특징적이다. 표면에는 회백색의 백자유가 전면에 고르게 칠해져 있으며, 철사(鐵砂) 안료로 그린 문양은 짙고 선명한 빛깔을 띤다. 특히 몸체 전면에는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움켜쥐려는 듯한 의 모습이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2] 입술 부분의 당초문대, 어깨의 연판문대, 아랫부분의 삼각선문대 등 각 부위의 문양 또한 뚜렷하다. 철사 안료는 붉은 기가 도는 짙은 갈색(철정색)으로 발색되어 바탕의 백자 유약과 강렬한 색 대비를 보여준다. 굽은 안쪽을 오목하게 파낸 형태이며, 굽다리에는 구울 때 사용했던 가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남아 있고, 유약이 씌워지지 않은 태토는 회황색을 띤다.

3. 1. 형태

이 항아리는 본래 청화백자로 만들던 궁중 연향용 용준(龍樽)을 철화백자로 제작한 것이다.[1]

입 부분은 안으로 약간 기울어지며 세워져 있다. 몸체는 어깨 부분에서 가장 불룩하다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좁아지는 S자 곡선을 그리며, 밑부분에서 다시 살짝 벌어지는 형태를 띤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 전기부터 내려오는 준(樽, 술 항아리)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표면에는 회백색을 띠는 백자유가 전면에 고르게 발라져 있으며, 철사(鐵砂) 안료의 빛깔은 짙고 선명하다. 문양은 입 부분 테두리에 당초무늬 띠(唐草文帶),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무늬 띠(蓮瓣文帶), 그리고 밑부분에는 이중의 삼각형 선무늬 띠(三角線文帶)가 짙은 철사 안료로 그려져 있다. 몸통 전면에는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움켜쥐려는 듯한 용의 모습이 부릅뜬 눈, 입, 뿔, 수염, 갈퀴, 비늘 등과 함께 구름 속에서 약동하는 듯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2]

철사 안료의 발색은 붉은 기가 도는 짙은 갈색(철정색, 鐵錆色)이어서 바탕의 흰색과 강렬한 색 대비를 이룬다. 굽은 바닥의 안쪽을 오목하게 파내어 만들었으며, 굽다리 부분에는 구울 때 사용했던 가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약이 발리지 않고 노출된 태토는 회황색을 띠고 있다.

3. 2. 유약 및 발색

유약은 회백색의 백자유로 항아리 전면에 발라져 있다. 철화백자에 사용된 철사(鐵砂) 안료의 빛깔은 짙고 뚜렷하다.[2] 철사의 발색은 붉은 철정색(鐵呈色)이 짙어서 바탕의 회백색 유약과 강렬한 색 대비를 이룬다. 굽은 안바닥을 오목하게 파내었으며, 굽다리에는 가는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유약이 덮이지 않아 노출된 태토(胎土)는 회황색을 띤다.

3. 3. 문양

항아리의 문양은 짙고 뚜렷한 철사(鐵砂) 안료를 사용하여 그려졌다. 입 부분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 어깨에는 연판문대(蓮瓣文帶), 밑부분에는 이중의 삼각선문대(三角線文帶)를 둘렀다.

몸체 전면에는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부릅뜬 눈, 입, 뿔, 수염, 갈퀴, 비늘 등의 세부적인 표현이 구름과 함께 어우러져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2] 철사 안료는 붉은 빛이 도는 짙은 갈색(철정색)으로 발색되어, 회백색의 바탕 자기와 강렬한 색 대비를 이룬다.

3. 4. 굽

굽은 오목하게 안바닥을 파내어 만들었다. 굽다리에는 가는 모래받침을 받쳐서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유약이 칠해지지 않아 노출된 태토는 회황색을 띤다.

4. 17세기 관요와의 연관성

이 항아리는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17세기 중엽 관요 중 하나인 경기도 광주 선동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4] 항아리에서 나타나는 회백색의 유약, 특이한 기형, 운룡문·당초문·삼각선 문양 등의 철화 문양, 오목한 굽의 표현 등은 경기도 광주군 일대의 다른 17세기 관요 유적인 상림리, 선동리, 정지리 등의 가마터에서 출토된 백자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5]

4. 1. 기형의 계승

이 항아리의 기형은 1489년(성종 20년)에 만들어진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6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는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로 이어지며 변화하였고, 17세기 전반경에 이르러 이 항아리에서 나타나는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5]

4. 2. 용준항(龍罇缸)

이 항아리 표면에 장식된 구름과 용 무늬(운룡문)는 이것이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용준항(龍罇缸, 용을 그린 항아리)의 하나였음을 보여준다.[5]

원래 궁중에서는 청화백자로 용준을 만들었으나, 17세기 전반 조선은 거듭된 전란으로 물자와 청화 안료가 부족해 청화백자 용준을 만들기 어려워졌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완성된 백자 위에 임시로 그림을 그린 '가화(假畵)' 용준이 사용되기도 했으나 폐단이 많았다. 결국 '석간주' 안료를 사용한 철화백자 용준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요 유적에서 발견된 철화백자 용문 항아리 조각들이 이를 뒷받침한다.[3]

이 항아리는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를 통해 17세기 중엽 관요 중 하나인 경기도 광주 선동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4] 항아리의 회백색 유약, 독특한 형태, 운룡문, 당초문, 삼각선 문양 등의 철화 문양, 오목한 굽 등은 경기도 광주 일대의 17세기 관요(상림리, 선동리, 정지리 등) 백자의 특징과 일치한다. 이 항아리의 형태는 1489년(성종 20) 제작된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에서 시작되어, 16세기 후반의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를 거쳐 17세기 전반에 이 항아리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5]

참조

[1] 서적 조선백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15-05-27
[2] 웹인용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 http://encykorea.aks[...]
[3] 서적 조선백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15-05-27
[4] 서적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명품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99-02-27
[5] 웹인용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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