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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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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은 독일의 작곡가로, 신고전주의, 무조성, 12음 기법을 거쳐 총렬주의에 도달했다. 그는 다름슈타트 악파와는 달리 전통과의 급진적인 단절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다양한 시대의 음악을 결합하는 다원주의적 "클랑콤포지치온"을 발전시켰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병사들》, 발레 《위뷔 왕의 만찬을 위한 음악》,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 등이 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음악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자살했다. 그의 작품은 사후에 재평가받았으며, 《병사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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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베른트 알로이스 치머만
출생지독일 제국 쾰른
사망지독일 바이에른주 쾨닉스도르프
국적독일
학력
대학쾰른 음악 대학교
직업
직업작곡가
음악 스타일
장르현대 음악

2. 생애

쾰른 근교 에어프트슈타트 블리스하임에서 태어난 치머만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학업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쾰른 음악 대학교와 쾰른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르네 레이보비츠로부터 음렬주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1956년 ISCM 독일 의장으로 승격되었고, 1957년에는 프랑크 마르탱(작곡가)의 후임으로 모교인 쾰른 음악 대학의 작곡과 교수가 되어 시노하라 마코토, 요하네스 프리체 등을 가르쳤다. 만년에는 자신의 음악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쾰른 근교 에어프트슈타트 블리스하임에서 태어난 치머만은 서독의 시골 가톨릭 공동체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국영철도(Deutsche Reichsbahn-Gesellschaft)에서 근무하면서 농부로도 일했다. 1929년, 치머만은 사립 가톨릭 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을 처음 접했다. NSDAP가 모든 사립 학교를 폐쇄한 후, 쾰른의 공립 가톨릭 학교로 전학하여 1937년에 아비투어를 받았다.

같은 해 Reichsarbeitsdienst의 의무를 다한 후, 1937년 말부터 1938년 초까지 본의 호흐슐레 퓌어 레러아우스빌둥(Hochschule für Lehrerausbildung, 문자 그대로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1938년 초, 쾰른 음악 대학에서 음악 교육, 음악학,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40년 Wehrmacht에 징집되었으나, 심각한 피부 질환으로 1942년에 제대했다. 학업에 복귀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1947년이 되어서야 학위를 받았다. 그 무렵 그는 이미 1946년에 프리랜서 작곡가가 되어 주로 라디오를 위해 활동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크라니히슈타이너/다름슈타터 페리엔쿠르세 퓌어 노이에 무지크에 참가하여 르네 라이보비츠와 볼프강 포르트너 등에게서 배웠다.[2]

1956년 ISCM 독일 의장으로 승격되었고, 1957년에는 프랑크 마르탱(작곡가)의 후임으로 모교인 쾰른 음악 대학의 작곡과 교수가 되어 시노하라 마코토, 요하네스 프리체 등을 가르쳤다.

2. 2. 교수 경력과 작품 활동

1957년, 치머만은 로마의 빌라 마시모에 있는 독일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또한 모교인 쾰른 음악 대학에서 프랑크 마르탱의 뒤를 이어 작곡과 교수로 임명되었고, 영화 및 방송 음악 교수직도 겸임했다. 시노하라 마코토나 요하네스 프리체 등을 길러 후년의 슈톡하우젠 체제의 가교 역할을 했다.[2]

1960년대에 그는 작곡가로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1963년 빌라 마시모에서의 두 번째 장학금과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특별 연구원 자격을 얻었다. 특히 그의 오페라 ''디 졸다텐''(Die Soldaten)이 1965년에 초연된 이후 더욱 성공했는데, 이 오페라는 필요한 출연자의 수가 엄청나고 난이도가 높아서 이전에 공연되지 못했다. 쾰른 오페라는 이 작품을 "연주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2]

2. 3. 《병사들》 초연과 성공

1960년대에 그는 작곡가로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그의 오페라 ''디 졸다텐''(Die Soldaten)''이 1965년에 초연된 이후 더욱 성공했다.[2] 이 오페라는 필요한 출연자의 수가 엄청나고 난이도가 높아 이전에 공연되지 못했다. 쾰른 오페라는 이 작품을 "연주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2]

2. 4. 죽음

1970년 8월 10일, 치머만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나는 돌아서서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의를 보았다(Ich wandte mich und sah an alles Unrecht das geschah unter der Sonne)''의 악보를 완성한 지 5일 만에 쾰른 근처 쾨니히스도르프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했다.[2] 당시 그는 한스 헤니 야흔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또 다른 오페라 ''메데이아''를 준비하고 있었다. 작곡가의 우울증은 정신적인 위기로 이어졌고, 이는 급격히 악화되는 눈 문제와 겹쳐졌다. 말년에는 결국 자신의 음악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음악적 특징과 발전

치머만은 신고전주의 음악에서 시작하여 무조성, 12음 기법, 총렬주의를 거쳐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의 음악은 "시간의 구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음악적 요소를 결합하고 중첩하는 다원주의적 특징을 보인다.

"무반주 첼로 소나타"는 하나의 음렬로 전곡이 구성되어 있으며,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작품이다.[2] 1965년에 작곡된 오페라 "병사들"은 극도로 난해하지만, 등박(等拍) 펄스를 사용하는 등 선구적인 악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3] 같은 시기,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디알로그"는 전년도에 작곡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놀로그"를 편곡한 것으로, 거대하고 복잡한 음악적 구조가 극대화된 시기의 작품이다.[3]

3. 1. 초기: 신고전주의와 12음 기법

그는 나치 정권 시절 단절되었던 새로운 음악의 흐름에 합류하기 위해 자신의 작곡 발전을 통해 노력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자유로운 무조성과 12음 기법을 거쳐 총렬주의에 도달했다(1956년). 그의 재즈에 대한 애정은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트럼펫 협주곡 등 그의 몇몇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피아노 트리오", "무반주 비올라 소나타", "일악장의 교향곡" 등으로 신고전적 서법을 성숙시켰던 그는, 1950년대 전위 세대와 대립했다.[2] "원근법 - 상상의 발레를 위한 음악", "콘피구라치오넨" 등에서 음렬적인 서법을 도입했지만, 그의 관심은 "시간"의 다양한 표현에 항상 있었다.[2]

3. 2. 총렬주의와 다름슈타트 악파와의 관계

그는 나치 정권 시절 단절되었던 새로운 음악의 흐름에 합류하여,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총렬주의까지 다양한 작품을 썼다. 재즈에 대한 그의 애정은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트럼펫 협주곡 등에서 엿볼 수 있다.[1]

슈톡하우젠, 불레즈, 노노 등으로 대표되는 다름슈타트 악파와 달리, 치머만은 전통과의 급진적인 단절을 추구하지 않았다. 1950년대 말, 그는 다양한 시대의 음악적 재료를 첨단 음악 기법으로 결합하는 다원주의적 "클랑콤포지치온"이라는 개인적인 작곡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여 개별적인 음악 인용구를 삽입하는 것부터 전체를 콜라주로 구성한 작품까지 다양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의 성악 작품인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에서는 다양한 출처의 텍스트를 중첩하여 작품을 발전시켰다.[2]

1950년대에 그는 전위 세대와 대립하며, "시간"의 다양한 표현에 관심을 두고 음렬적 서법을 도입했다. 슈톡하우젠이 주장하는 "올바른 궤도"라는 사고에 격분하여, 1966년 작품 "위뷔 왕의 저녁 식사 음악"에서는 슈톡하우젠을 인용하고 그 위에 욕설을 덧붙이는 등 전위 음악의 태도에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위 이디엄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수용하는 과정에서 양식상의 모순을 겪으며, 그의 음악은 점차 난해하게 변화해갔다.[4]

1967년의 "인테르콤니카치오네", 1968년의 "포토프토시스"에서는 정지된 지속음이 D음에 나타나는 부분이 많아져 "정지주의"의 경향을 짙게 드러냈다. 치머만의 창작 태도는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고립된 것이었다.[5]

3. 3. 클랑콤포지치온과 다원주의

그는 자신의 작곡 발전을 통해, 나치 정권 시절 독일 작곡가들이 대부분 단절되었던 새로운 음악의 흐름에 합류했다. 그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자유로운 무조성과 12음 기법을 거쳐 마침내 총렬주의에 도달했다(1956년). 그의 재즈에 대한 애정은 그의 몇몇 작품,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트럼펫 협주곡에서 종종 엿볼 수 있다.

소위 다름슈타트 악파(슈톡하우젠, 불레즈, 노노 등)와는 대조적으로, 치머만은 전통과의 급진적인 단절을 시도하지 않았다. 1950년대 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작곡 스타일인 다원주의적 "''클랑콤포지치온''"(''음색과 음색의 면에 초점을 맞춘 작곡 스타일을 지칭하는 독일어'')을 발전시켰다. 다양한 시대(중세 음악부터 바로크 음악과 고전주의 시대를 거쳐 재즈 음악과 팝 음악까지)의 음악적 재료를 첨단 음악 기법을 사용하여 결합하고 중첩하는 것이 ''클랑콤포지치온''의 특징이다. 치머만은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여 개별적인 음악 인용구를 삽입하는 것(오케스트라 작품 ''포토프토시스''에서 다소 볼 수 있음)부터 전체를 콜라주로 구성한 작품(발레 ''유비 왕을 위한 만찬 음악'')까지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그의 성악 작품, 특히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에서, 텍스트는 다양한 출처의 텍스트를 중첩하여 작품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된다. 그는 "시간의 구형"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자신의 음악적 입장을 구축했다.

3. 4. 후기 작품 경향

그는 자신의 작곡 발전을 통해, 나치 정권 시절 독일 작곡가들이 대부분 단절되었던 새로운 음악의 흐름에 합류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자유로운 무조성과 12음 기법을 거쳐 마침내 총렬주의에 도달했다(1956년). 그의 재즈에 대한 애정은 그의 몇몇 작품,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트럼펫 협주곡에서 종종 엿볼 수 있다.

1950년대 말,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작곡 스타일인 다원주의적 "클랑콤포지치온"(음색과 음색의 면에 초점을 맞춘 작곡 스타일을 지칭하는 독일어)을 발전시켰다. 다양한 시대(중세 음악부터 바로크 음악과 고전주의 시대를 거쳐 재즈 음악과 팝 음악까지)의 음악적 재료를 첨단 음악 기법을 사용하여 결합하고 중첩하는 것이 클랑콤포지치온의 특징이다. 치머만은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여 개별적인 음악 인용구를 삽입하는 것(오케스트라 작품 포토프토시스에서 다소 볼 수 있음)부터 전체를 콜라주로 구성한 작품(발레 유비 왕을 위한 만찬 음악)까지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그의 성악 작품, 특히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에서, 텍스트는 다양한 출처의 텍스트를 중첩하여 작품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된다. 그는 "시간의 구형"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자신의 음악적 입장을 구축했다.

"원근법 - 상상의 발레를 위한 음악", "콘피구라치오넨" 등에서 음렬적인 서법을 도입했지만, 그의 관심은 "시간"의 다양한 표현에 항상 있었다.[1]

슈톡하우젠이 말하는 "올바른 궤도"라는 사고에 격분하여, 전곡이 "인용"으로 구성된 1966년의 위뷔 왕의 저녁 식사 음악에서 슈톡하우젠을 인용하고 그 위에 욕설을 덧붙이는 등, 전위 음악의 태도에 도발적인 태도를 보였다.[3] 그러나, 전위 이디엄을 몸에 걸치면서의 비판은 당연히 양식상의 모순을 안게 되었고, "모놀로그", "디알로그", 안티포넨, 파 드 트로이의 양식에 의한 협주곡에서는 고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며, 난해한 음악으로 변해간다.[3] 그의 인용 기법은 후년의 구석구석까지 철저하게 이어진다.[3]

1967년의 "인테르콤니카치오네", 1968년의 포토프토시스에서는 정지된 지속음이 D음에 나타나는 부분이 많아 "정지주의"의 양상을 짙게 해간다.[4] 1969년의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에서 창작의 총결산을 하고, 1970년의 전도 행위와 정지와 반전의 두 작품을 완성했다.[4] 전체적으로 치머만의 창작 태도는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고립된 인생이었다.[4]

4. 주요 작품


  • 피아노를 위한 ''즉흥곡'' (1946)
  • 피아노를 위한 ''카프리치오''
  • 괴테의 풍자 칸타타 ''어리석음 찬가'' (합창과 대규모 오케스트라, 1947)
  • 피아노를 위한 ''엔키리디온 I'' (1949)
  • 오케스트라를 위한 ''동화 모음곡'' (1950)
  • 발레 모음곡 ''알라고아나(브라질의 변덕)'' (1950)
  • ''라인 지방의 축제 춤'' (1950, 1962년에 13개의 관악기로 편곡)
  • ''바이올린 협주곡'' (오케스트라, 1950)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951)
  • 단악장 교향곡 (1951, 1953년 개정)
  • 피아노를 위한 ''엔키리디온 II'' (1951)
  • 오보에와 실내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52)
  •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마티아스 붕가르트가 각색한 3막 라디오 오페라 ''신의 대한 인간의 유지 소송''
  • 트럼펫과 실내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아무도 내가 보는 고통을 알지 못하네'' (1954)
  • 무반주 비올라 소나타 (1955)
  • 피아노를 위한 ''구성'' (1956)
  •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원근법 — 가상의 발레를 위한 음악'' (1956)
  • 빌헬름 부슈의 ''경건한 헬레네''가 내레이터와 악기 앙상블을 위한 "민속 론도"로 연주됨 (1957)
  • 첼로와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 ''희망의 노래'' (1957)
  • 소프라노와 17개의 악기를 위한 칸타타 ''모든 것은 때가 있다'' (1957)
  • 오케스트라를 위한 ''즉흥곡'' (1958)
  • 2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대화'' (1960)
  •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독백''으로 재작성 (1964)
  • 무반주 첼로 소나타 (1960)
  • 피아노 삼중주와 내레이터를 위한 ''프레장스, 발레 블랑''(폴 푀르트너의 가사, 1961)
  • 비올라와 25명의 기악 연주자를 위한 ''대위법'' (1961)
  • 무반주 플루트를 위한 ''템푸스 로쿠엔디'' (1963)
  •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 왕''을 바탕으로 한 발레 ''위뷔 왕의 만찬을 위한 음악''(''7개의 부분과 입구로 구성된 발레 누아르'', 1966)
  • 4막 오페라 ''병사들'', 야코프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의 동명의 드라마를 바탕으로 한 작곡가의 대본 (1965)
  •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파 드 트루아 형식'' (1966), 지크프리트 팔름에게 헌정
  • ''트라토'' 전자 음악 (1967)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상호 소통'' (1967)
  • 재즈 5중주를 위한 ''기한이 있는 사람들'' (1967)
  •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포토토피아'' 전주곡 (1968)
  • 내레이터, 소프라노, 바리톤, 3개의 합창단, 전기 테이프, 오케스트라, 재즈 콤보 및 오르간을 위한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 — 언어'' (1969)
  • 무반주 첼로를 위한 ''4개의 짧은 연습곡'' (1970)
  • ''침묵과 반전'' 오케스트라 스케치 (1970)
  • ''트라토 2'' 전자 음악 (1970)
  • 2명의 내레이터, 베이스 및 오케스트라를 위한 ''나는 돌아서서 해 아래에서 행해진 모든 불의를 보았다 — 코헬렛적 행위'' (1970)
  • 라디오, 연극 및 영화를 위한 다양한 작품[5]

5. 평가 및 영향

전위적 이념과 과거 음악 문화를 절충한 독자적인 양식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태어난 작곡가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치머만을 괴롭혔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전위의 정체가 제기되고 작곡상의 진보가 의심스러워지자 다원주의를 내세운 작곡가들이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치머만은 사후에 평가받게 되었다. 연주 난이도로 인해 신뢰할 만한 음반도 적었고, CD 발매로 그의 작풍이 온전히 이해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걸작이자 난해하고 복잡함의 대명사로 평가받는 오페라 『병사들』은 2008년 5월 10일 신국립극장에서 빌리 데커 연출, 와카스기 히로시 지휘, 도쿄 필하모닉 교향악단의 연주로 일본에서 초연되었다[6]

참조

[1] 서적 Zimmermann, Bernd Alois Macmillan Publishers
[2] 웹사이트 Bernd Aloïs Zimmermann http://www.larousse.[...] Larousse 2013-05-12
[3] 웹사이트 Look Back In Angst http://nymag.com/nym[...] 2009-04-10
[4] 웹사이트 Bernd Alois Zimmermann, Germany (1918–1970) http://www.ubu.com/s[...] 2006-05-28
[5] 웹사이트 Bernd Alois Zimmermann https://www.schott-m[...] 2024-08-31
[6] 뉴스 朝日新聞 2008-05-16
[7] 서적 Zimmermann, Bernd Alois Macmillan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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