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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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리 공작은 프랑스의 작위로, 1360년 장 2세가 아들 장에게 베리 백작령을 분봉하면서 시작되었다. 발루아 가문, 발루아-앙굴렘 가문, 부르봉 가문을 거치며 여러 인물에게 주어졌으며, 특히 17세기 이후 프랑스 왕가의 구성원에게 주로 수여되었다. 현재는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명목상 이 작위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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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0세는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국왕(1824년-1830년)이었으나 반동적인 정책으로 1830년 7월 혁명을 초래하여 퇴위하고 망명 생활을 하다 사망하며 부르봉 왕가의 몰락을 가져왔다. - 베리 공작 - 샤를페르디낭 다르투아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는 베리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 시기에 망명 생활을 하고 콩데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나폴레옹 1세가 엘바 섬에서 돌아오자 파리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암살당했다.
2. 역대 베리 공작
역대 베리 공작은 다음과 같다.
- 발루아 가문 (1360년–1505년): 프랑스의 장 2세가 셋째 아들 베리의 장에게 베리 백작령을 봉분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샤를 7세 시기 일시적으로 왕실에 귀속되었다가,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동생 베리의 샤를에게 다시 수여했다. 이후 베리의 잔이 상속받았다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다시 왕실에 귀속되었다.
- 발루아-앙굴렘 가문 (1517년-1601년): 프랑수아 1세가 누이 나바르의 마르그리트에게 베리 공작령을 하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발루아의 마르가리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앙주의 프랑수아, 로렌의 루이즈 등이 상속받았다.
- 부르봉 가문 (1686년-1820년): 루이 14세가 손자 샤를에게 베리 공작위를 수여하면서 시작되었다. 루이 16세, 샤를 페르디낭 등이 이 작위를 사용했다.
2. 1. 발루아 가문 (1360년–1505년)
1360년 10월,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셋째 아들 푸아티에의 장에게 베리 백작령을 분봉령으로 만들었다.[1] 이는 아르마냐크의 잔과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푸아티에의 장은 1416년 사망했고, 그의 증손자 프랑스 도팽 장이 베리 공작위를 계승했다. 도팽 장은 1417년에 사망하여, 그의 남동생 도팽 샤를에게 분봉령이 넘어갔다. 도팽 샤를은 이후 백년 전쟁 동안 진격하는 영국군을 피해 베리의 수도 부르주로 궁정을 옮겼다.[3]도팽 샤를이 샤를 7세로 왕위에 오르자 베리는 다시 왕실 영지로 반환되었다. 1461년, 루이 11세는 그의 남동생 샤를에게 베리를 수여했다. 샤를은 형과 경쟁 관계를 유지하며, 샤롤레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귀족들의 반왕실 동맹인 공익 동맹에 가담했다. 1465년 콩플랑 조약으로 종결된 루이 11세와의 짧은 전쟁 이후, 샤를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얻었고 (이후 1469년에 기옌 공작령과 교환했다). 샤를은 1472년 매독으로 적자가 없이 사망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독살의 희생자라고 믿었다.[4] 남성 상속자가 없었기에, 이 작위는 다시 왕실로 돌아갔다.
1498년, 루이 12세는 전 부인 프랑스의 잔에게 결혼 무효에 대한 보상으로 베리를 수여했다. 그녀는 최초의 ''자체 권리'' 여공작이었고, 그녀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베리는 다시 왕실로 돌아갔다.
2. 2. 발루아-앙굴렘 가문 (1527년-1601년)
1527년, 프랑수아 1세는 그의 누이인 나바르의 마르그리트에게 나바르의 앙리 2세와의 결혼을 기념하여 베리 공작령을 하사했다.[6] 마르그리트는 1549년 후사 없이 사망했고, 베리 공작령은 왕실로 반환되었다.1550년, 앙리 2세는 그의 누이 발루아의 마르가리타에게 평생 베리 공작령을 하사했다.[7] 1574년 발루아의 마르가리타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 앙리 3세는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에게 베리와 라 마르슈 백작령을 하사했다.[8] 그러나 1577년, 뵈리외 칙령의 결과로 앙리 3세는 엘리자베스에게 베리와 라 마르슈를 그의 동생 앙주의 프랑수아의 영지로 교환하도록 강요했다.[9] 1584년 앙주의 프랑수아가 사망한 후, 베리는 다른 영지와 함께 다시 왕실로 반환되었다.
1589년, 앙리 4세는 로렌의 루이즈에게 그녀의 평생 동안 베리 공작령을 하사했다.
2. 3. 부르봉 가문 (1686년-1820년)
1686년 루이 14세는 자신의 셋째 손자인 샤를에게 베리 공작 작위를 수여했으며, 샤를은 1714년 사망할 때까지 이 작위를 사용했다.[10] 1754년 루이 15세는 갓 태어난 손자 루이-오귀스트를 베리 공작으로 칭했다. 루이-오귀스트는 1765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도팽이 되었다.1778년 루이 16세는 갓 태어난 조카 아르투아의 샤를 페르디낭을 위해 베리 공작령을 다시 설립했는데, 샤를 페르디낭은 1820년 보나파르트주의자인 루이 피에르 루벨에게 살해당했다.
2. 4. 부르봉 가문 (명목상)
(1686–1714)(이후 루이 16세)
(1754–1793)

(이후 샤를 10세)
(1757–1836)
(1778–1820)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