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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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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리 공작은 프랑스의 작위로, 1360년 장 2세가 아들 장에게 베리 백작령을 분봉하면서 시작되었다. 발루아 가문, 발루아-앙굴렘 가문, 부르봉 가문을 거치며 여러 인물에게 주어졌으며, 특히 17세기 이후 프랑스 왕가의 구성원에게 주로 수여되었다. 현재는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이 명목상 이 작위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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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공작
개요
샤를 드 베리의 문장
1376년 이후 베리 문장
칭호베리 공작
국가프랑스
봉건 영주베리
상세 정보
생성일1360년 10월
군주장 2세
귀족 계급프랑스의 귀족
첫 번째 소유자장 드 베리
마지막 소유자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
상태소멸
소멸일1820년 2월 14일

2. 역대 베리 공작

역대 베리 공작은 다음과 같다.

가문시기
발루아 가문1360년 ~ 1505년
발루아-앙굴렘 가문1517년 ~ 1601년
부르봉 가문1686년 ~ 1820년


  • 발루아 가문 (1360년–1505년): 프랑스의 장 2세가 셋째 아들 베리의 장에게 베리 백작령을 봉분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샤를 7세 시기 일시적으로 왕실에 귀속되었다가,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동생 베리의 샤를에게 다시 수여했다. 이후 베리의 잔이 상속받았다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다시 왕실에 귀속되었다.

  • 발루아-앙굴렘 가문 (1517년-1601년): 프랑수아 1세가 누이 나바르의 마르그리트에게 베리 공작령을 하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발루아의 마르가리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 앙주의 프랑수아, 로렌의 루이즈 등이 상속받았다.

  • 부르봉 가문 (1686년-1820년): 루이 14세가 손자 샤를에게 베리 공작위를 수여하면서 시작되었다. 루이 16세, 샤를 페르디낭 등이 이 작위를 사용했다.

2. 1. 발루아 가문 (1360년–1505년)

1360년 10월,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셋째 아들 푸아티에의 장에게 베리 백작령을 분봉령으로 만들었다.[1] 이는 아르마냐크의 잔과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푸아티에의 장은 1416년 사망했고, 그의 증손자 프랑스 도팽 장이 베리 공작위를 계승했다. 도팽 장은 1417년에 사망하여, 그의 남동생 도팽 샤를에게 분봉령이 넘어갔다. 도팽 샤를은 이후 백년 전쟁 동안 진격하는 영국군을 피해 베리의 수도 부르주로 궁정을 옮겼다.[3]

도팽 샤를이 샤를 7세로 왕위에 오르자 베리는 다시 왕실 영지로 반환되었다. 1461년, 루이 11세는 그의 남동생 샤를에게 베리를 수여했다. 샤를은 형과 경쟁 관계를 유지하며, 샤롤레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귀족들의 반왕실 동맹인 공익 동맹에 가담했다. 1465년 콩플랑 조약으로 종결된 루이 11세와의 짧은 전쟁 이후, 샤를은 노르망디 공작령을 얻었고 (이후 1469년에 기옌 공작령과 교환했다). 샤를은 1472년 매독으로 적자가 없이 사망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독살의 희생자라고 믿었다.[4] 남성 상속자가 없었기에, 이 작위는 다시 왕실로 돌아갔다.

1498년, 루이 12세는 전 부인 프랑스의 잔에게 결혼 무효에 대한 보상으로 베리를 수여했다. 그녀는 최초의 ''자체 권리'' 여공작이었고, 그녀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베리는 다시 왕실로 돌아갔다.

공작출생재위 기간사망결혼
자녀
--
프랑스의 장
1340년 11월 30일
뱅센 성
프랑스의 장 2세의 아들
룩셈부르크의 보네
1360년 10월 ~ 1416년 6월 15일1416년 6월 15일
파리
자연사
(75세)
아르마냐크의 잔 (1360년 결혼, 1387년 사망)
오베르뉴의 잔 2세 (1389년 결혼, 1416년 사망)

프랑스의 장
1398년 8월 31일
파리
프랑스의 샤를 6세의 아들
바이에른의 이자보
1416년 ~ 1417년 4월 5일1417년 4월 5일
콩피에뉴
자연사
(18세)
에노의 자클린 (1415년 결혼, 1417년 사망)

프랑스의 샤를
1403년 2월 22일
파리
프랑스의 샤를 6세의 아들
바이에른의 이자보
1417년 ~ 1422년 (왕실에 병합)1461년 7월 22일
메옹쉬르예브르
자연사
(58세)
앙주의 마리 (1422년 결혼, 1461년 사망)

프랑스의 샤를
1446년 12월 26일
투르 성
프랑스의 샤를 7세의 아들
앙주의 마리
1461년 11월 ~ 1472년 5월 24일1472년 5월 24일
보르도
매독으로 사망
(25세)
미혼

프랑스의 잔
1464년 4월 23일
노장르후아
프랑스의 루이 11세의 딸
사보이의 샤를로트
1498년 4월 7일 ~ 1505년 2월 4일1505년 2월 4일
부르주, 베리
자연사
(40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 (1476년 결혼, 1498년 무효)


2. 2. 발루아-앙굴렘 가문 (1527년-1601년)

1527년, 프랑수아 1세는 그의 누이인 나바르의 마르그리트에게 나바르의 앙리 2세와의 결혼을 기념하여 베리 공작령을 하사했다.[6] 마르그리트는 1549년 후사 없이 사망했고, 베리 공작령은 왕실로 반환되었다.

1550년, 앙리 2세는 그의 누이 발루아의 마르가리타에게 평생 베리 공작령을 하사했다.[7] 1574년 발루아의 마르가리타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 앙리 3세는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에게 베리와 라 마르슈 백작령을 하사했다.[8] 그러나 1577년, 뵈리외 칙령의 결과로 앙리 3세는 엘리자베스에게 베리와 라 마르슈를 그의 동생 앙주의 프랑수아의 영지로 교환하도록 강요했다.[9] 1584년 앙주의 프랑수아가 사망한 후, 베리는 다른 영지와 함께 다시 왕실로 반환되었다.

1589년, 앙리 4세는 로렌의 루이즈에게 그녀의 평생 동안 베리 공작령을 하사했다.

초상화이름출생재위 기간사망결혼 및 자녀
나바르의 마르그리트1492년 4월 11일
앙굴렘 성
오를레앙의 샤를과 사부아의 루이즈의 딸
1527년 1월 24일
~
1549년 12월 21일
1549년 12월 21일
오도스, 나바라 왕국
(57세, 자연사)
(1) 알랑송의 샤를 4세 (1509년 결혼, 1525년 사망): 자녀 없음
(2) 나바르의 앙리 2세 (1527년 결혼, 1549년 사망): 자녀 1명
발루아의 마르가리타1523년 6월 5일
생제르맹앙레 성
프랑수아 1세와 브르타뉴의 클로드의 딸
1550년 4월 29일
~
1574년 9월 15일
1574년 9월 15일
토리노, 사보이 공국
(51세, 자연사)
사보이 공작 엠마누엘 필리베르 (1559년 결혼, 1580년 사망): 자녀 1명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1554년 7월 5일
, 오스트리아 대공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의 딸
1575년 11월 21일
~
1577년 9월 25일
(칭호 박탈)
1592년 1월 22일
, 오스트리아
(37세, 흉막염)
프랑스의 샤를 9세 (1570년 결혼, 1574년 사망): 자녀 1명
앙주의 프랑수아1555년 3월 18일
퐁텐블로 성
프랑스의 앙리 2세와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의 아들
1577년 9월 25일
~
1584년 6월 10일
1584년 6월 10일
샤토티에리
(29세, 말라리아)
미혼
로렌의 루이즈1553년 4월 30일
노메니, 바루아
메르쾨르의 니콜라스와 에그몬트의 마가렛의 딸
1589년 8월
~
1601년 1월 29일
1601년 1월 29일
물랭, 부르봉네
(47세, 자연사)
프랑스의 앙리 3세 (1575년 결혼, 1589년 사망): 자녀 없음


2. 3. 부르봉 가문 (1686년-1820년)

1686년 루이 14세는 자신의 셋째 손자인 샤를에게 베리 공작 작위를 수여했으며, 샤를은 1714년 사망할 때까지 이 작위를 사용했다.[10] 1754년 루이 15세는 갓 태어난 손자 루이-오귀스트를 베리 공작으로 칭했다. 루이-오귀스트는 1765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도팽이 되었다.

1778년 루이 16세는 갓 태어난 조카 아르투아의 샤를 페르디낭을 위해 베리 공작령을 다시 설립했는데, 샤를 페르디낭은 1820년 보나파르트주의자인 루이 피에르 루벨에게 살해당했다.

공작출생재임 기간사망결혼 및 자녀
--
프랑스의 샤를
Charles de France프랑스어
1686년 7월 31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아들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1686년 7월 31일
1714년 5월 5일
1714년 5월 5일
베르사유
사냥 사고로 사망
(27세)
오를레앙의 루이즈 엘리자베스
(1710년 혼인, 1714년 사별)
--
프랑스의 루이-오귀스트
Louis-Auguste de France프랑스어
1754년 8월 23일
베르사유
프랑스의 도팽 루이의 아들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1754년 8월 23일
1765년 12월 20일
(도팽이 됨)
1793년 1월 21일
혁명 광장, 파리
반역죄로 처형
(38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1770년 혼인, 1793년 사별)

아르투아의 샤를 페르디낭
Charles Ferdinand d'Artois프랑스어
1778년 1월 24일
베르사유
아르투아의 샤를의 아들
사보이의 마리아 테레사
1778년 1월 24일
1820년 2월 14일
1820년 2월 14일
파리 오페라 밖에서
루이 피에르 루벨에게 살해당함
(42세)
시칠리아의 마리-카롤린
(1816년 혼인, 1820년 사별)


2. 4. 부르봉 가문 (명목상)

(1686–1714)
샤를 드 프랑스 (1686년)의 문장
1686년 8월 1일1714년 5월 5일마리루이즈엘리자베트 도를레앙[14][22][21][23]샤를 달랑송루이오귀스트 드 부르봉
(이후 루이 16세)
(1754–1793)--1754년 8월 24일1765년 12월 20일마리 앙투아네트[18][19]
샤를 10세의 초상화
샤를 다르투아
(이후 샤를 10세)
(1757–1836)1765년 12월 20일1778년 1월 25일마리아 테레사 디 사보이아[12][24]
샤를페르디낭 다르투아의 초상화
샤를페르디낭 다르투아
(1778–1820)--1778년 1월 25일1820년 2월 14일마리 카롤린 드 부르봉둑스시실리--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2010–)--2010년 5월 29일재임중미혼


참조

[1] 서적 Ars subtilior and the Patronage of French Princes 2003
[2] 서적 Jean de Berry: L'art et le pouvoir 2000
[3] 서적 John the Fearless: The Growth of Burgundian Power Boydell Press 2005
[4] 서적 Histoire du siége de Beauvais en 1472 https://books.google[...] 1847
[5] 웹사이트 St. Joan of Valois http://catholic.org/[...] 2014-10-26
[6] 웹사이트 L'œuvre et la vie de Marguerite de Navarre, un plaidoyer pour la tolérance http://www.m2navarre[...] 2006-06-27
[7] 서적 Scottish Queens, 1034-1714 Tuckwell Press
[8] 서적 Nobiliaire du diocèse et de la généralité de Limoges http://gallica.bnf.f[...] 1878
[9] 서적 The French Religious Wars 1562-98 2002
[10] 문서 Letters patent: Louis, par la grâce de Dieu, roy de France et de Navarre, à tous présens et à venir, SALUT. (…) Notre très-cher et très-amé petit-fils Charles, fils de France, a dignement répondu à nos espérance (…) Pour ces causes et autres à ce Nous mouvans, de l’avis de notre conseil, Nous avons donné, octroyé et délaissé, et par ces présentes signées de notre main, donnons, octroyons et delaissons à notredit petit-fils Charles, fils de France, et à ses enfans mâles descendans de lui en loyal mariage, pour leur appanage et entretenement, selon la nature des appanages de la Maison de France et les lois de notre royaume, les duchés d’Alençon et d’Angoulême, le comté de Ponthieu et les châtellenies de Coignac et de Merpins, réunis à notre couronne par le décès de notre cousine Elisabeth d’Orléans, duchesse de Guise, ensemble les terres et seigneuries de Noyelles, Hiermont, Coutteville et le Mesnil, par Nous acquises par contrat passé entre les commissaires par Nous nommez, et Marie d’Orléans, duchesse de Nemours, le 16 Decembre 1706, en échange de la baronie, terre et seigneuries de Parthenay (…).
[11] 문서 푸아티에 여백작
[12] 문서 오베르뉴 여백작
[13] 문서 마콩의 여백작
[14] 문서 앙굴렘 배우자 목록|앙굴렘 백작 또는 공작 부인
[15] 문서 Countess of Saintonge
[16] 문서 Countess of Étampes
[17] 문서 몽팡시에 여백작
[18] 문서 프랑스의 도피네
[19] 문서 비엔누아의 도피네이자, 발렝티누아와 디우아 백작부인
[20] 문서 투렌 백작 부인
[21] 문서 폰티외 백작부인
[22] 문서 Duchess of Alençon
[23] 문서 베르농, 앙드리, 지조르 여자작이자, 리냐크와 메르팽 성의 주인
[24] 문서 아르투아 백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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