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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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러 2세는 1131년부터 1141년까지 헝가리의 국왕이었다. 그는 칼만의 동생 알모시 공작의 아들이었으나, 칼만이 왕위 계승을 위해 그의 눈을 멀게 했다. 맹인이 된 벨러 2세는 왕비 헬레나와 그녀의 오빠 벨로스에게 의존하여 국정을 운영했으며, 아라드에서 귀족 숙청을 단행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의 보리스를 격파하여 헝가리의 영토를 확장했다. 말년에는 과도한 음주로 인해 국정을 소홀히 하다가 114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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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러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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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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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헝가리 국왕, 크로아티아 국왕 |
통치 기간 | 1131년 3월 1일 – 1141년 2월 13일 |
대관식 | 1131년 4월 28일, 세케슈페헤르바르 |
이전 통치자 | 이슈트반 2세 |
다음 통치자 | 게저 2세 |
왕조 | 아르파드 왕조 |
아버지 | 알모시 |
어머니 | 프레드슬라바 스뱌토폴코브나 |
출생일 | 1109년경 |
사망일 | 1141년 2월 13일 |
매장지 |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개인 정보 |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헬레나 |
자녀 | 게저 2세 라슬로 2세 이슈트반 4세 조피아 엘리자베트, 폴란드 공작부인 |
2. 생애
칼만의 동생 알모시 공작과 키예프 대공국의 프레드슬라바 사이에서 태어난 벨러 2세는 1115년경 알모시의 무장 반란 실패 후 칼만에 의해 두 눈이 멀게 되었다.[1] 이후 아버지와 함께 되뫼시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1125년경 알모시가 비잔티움 제국으로 망명할 때 페치바러드 수도원에 정착했다.[2] 1131년 이슈트반 2세의 뒤를 이어 헝가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7]
벨러 2세는 즉위 후 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폴란드와의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려 노력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압력을 가해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2세가 헝가리 왕위 요구자 보리스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했다.[3]
2. 1. 초기 생애 (1108년경 ~ 1131년)
칼만의 동생인 알모시(Álmos) 공작과 그의 아내인 키예프 대공국의 프레드슬라바(Predslava) 사이에서 태어났다. 역사학자 줄러 크리스토와 페렌츠 마크는 벨러가 1108년에서 111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1115년경 헝가리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알모시가 무장 반란을 일으켰지만 칼만에 의해 진압되었다. 칼만은 알모시와 그의 아들인 벨러의 두 눈을 멀게 만들었고 알모시와 벨러를 되뫼시(Dömös) 수도원에 감금시켰다.[1]
일러스트 연대기|헝가리 일러스트 연대기hu에 따르면, 칼만왕은 벨러를 거세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이 임무를 맡은 군인은 이 명령을 수행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알모시는 1125년경 수도원을 떠나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지만, 벨러는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다.[2] 벨러는 페치바라드 수도원(Pécsvárad Abbey)에 정착했고, 그곳의 원장은 그를 비밀리에 보호했다.[3] 1127년 9월 1일, 벨러의 아버지 알모시는 망명지에서 사망했다.[4]
''일러스트 연대기''에 따르면, 벨러의 지지자들은 "국왕에게 벨러가 실명 이후 죽었다고 믿었던 그에게 벨러가 살아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를 들은 이슈트반 2세 국왕은 "자신에게 상속자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알았기 때문에 큰 기쁨으로 기뻐했다".[5] 국왕은 심지어 벨러와 세르비아의 헬레나의 결혼을 주선하고 1129년경 부부에게 톨나(Tolna, Hungary)를 하사했다.[6]
1131년 초, 이슈트반 2세 국왕이 사망했다.[7] 후기 자료인 ''Tarih-i Üngürüs'' 또는 ''헝가리의 역사''라고 알려진 오스만 투르크어(Ottoman Turkish language) 연대기에 따르면, 벨러는 그의 전임자의 조카 헝가리의 사울(Saul of Hungary)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는데, 이슈트반 2세는 그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했다.[8] 1131년 4월 28일, 벨러 2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이 보고의 신뢰성을 입증했다. 그러나 벨러의 즉위 상황에 대한 학문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줄러 크리스토에 따르면 벨러는 그의 지지자들과 사울의 지지자들 사이의 내전 이후에 에스테르곰의 펠리치안 대주교(Felician, Archbishop of Esztergom)에 의해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팔 엥겔은 벨러의 계승과 관련된 어떠한 갈등도 언급하지 않았다.
2. 2. 즉위와 통치 (1131년 ~ 1141년)
칼만의 동생 알모시 공작과 키예프 대공국의 프레드슬라바 사이에서 태어난 벨러 2세는 1115년경 알모시의 무장 반란 실패 후 칼만에 의해 두 눈이 멀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되뫼시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알모시는 1125년경 수도원을 떠나 비잔티움 제국으로 망명했지만, 벨러는 페치바러드 수도원에 정착했다. 1131년 이슈트반 2세의 뒤를 이어 헝가리의 국왕으로 즉위했다.벨러 2세는 즉위 후 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폴란드와의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 통해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2세가 헝가리 왕위 요구자 보리스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했다.
벨러 2세는 맹인이었기에 왕비 일로나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즉위 직후 아라드에서 열린 집회에서, 일로나 왕비는 모인 사람들을 학살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그녀는 오빠 베로스를 변경백으로 임명하고 헝가리군 총사령관의 지위를 부여하여 궁정 요직에 앉혔다.
벨러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칼만 1세가 인정을 거부한 아들 보리스와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 보리스는 폴란드 왕국과 생모의 친정인 키예프 대공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1132년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3세는 폴란드-키예프 대공국 연합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원정했다. 벨러 2세는 귀족들을 모아 회합을 열고 보리스를 사생아라고 맹세하지 않는 자들을 죽였다. 볼레스와프 3세와 보리스는 슬라나 강(현재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국경) 인근에서 헝가리군에게 패배했지만, 이후에도 보리스는 여러 차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침입을 반복했다.
벨러 2세의 치세는 대외 정책으로 알려져 있다. 1136년, 벨러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점령된 달마티아를 되찾으려 했고, 보스니아에 원정군을 보냈다. 이 원정에서 공을 세운 차남 라슬로에게 보스니아 공작 칭호와 보스니아 전토를 주었다.
1141년에 과도한 음주로 사망했다.
2. 2. 1. 왕권 강화와 귀족 숙청
벨러 2세는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왕국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아내인 헬레나와 그녀의 오빠인 벨로스를 신뢰했다.[3] 벨러 2세 시대의 왕실 및 개인 헌장들은 헬레나 왕비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벨러 2세가 아내를 공동 통치자로 여겼음을 증명한다.[3]1131년 초에서 중순, 아라드 근처에서 열린 왕국 집회에서 헬레나 왕비는 남편을 맹인으로 만든 것에 콜로만 왕에게 조언한 혐의를 받는 모든 귀족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3] 학살당한 귀족들의 재산은 새로 설립된 아라드 장과 11세기 초 오부다 장에 분배되었다.
벨러 2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는 보리스라는 헝가리 왕위 요구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보리스는 콜로만 왕의 두 번째 아내인 에우페미아에게서 태어났지만, 에우페미아가 간통죄로 추방당한 후 콜로만 왕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리스가 폴란드에 도착하자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그에게 합류했고, 다른 이들은 보리스에게 사신을 보내 헝가리를 차지하도록 초대했다.[4]
1132년 중반, 보리스는 폴란드와 키예프 루스의 병사들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벨러 2세는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와 동맹을 맺고, 셔요 강 근처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벨러 2세는 헝가리의 귀족들에게 보리스가 사생아인지 콜로만 왕의 아들인지 물었고,[4] 왕의 충성파는 회의 중에 불성실하고 분열된 사람들을 공격하고 살해했다.[4] 헝가리 영주들 대다수가 자신의 주장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보리스는 자신의 대리인 중 한 명을 벨러 2세의 진영으로 보내 왕의 개인 수행원에게 반란을 선동하게 했다.
1132년 7월 22일, 셔요 강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벨러 2세와 그의 오스트리아 동맹군은 보리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격파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셔요 전투 이후 보리스를 도울 수 없었다. 벨러 2세의 동맹들인 보헤미아의 소베슬라프 1세와 페레미실의 볼로디미르코는 1132년부터 1135년 사이 매년 폴란드를 침공했다. 소베슬라프 1세는 1133년, 1134년, 1137년, 1139년에 정기적으로 벨러 2세의 궁정을 방문했다. 체코의 군주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 설득하여 1135년 8월에 볼레스와프 3세가 보리스를 포기하고 헝가리에서 벨러 2세의 통치를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2. 2. 2. 대외 관계와 확장
벨러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폴란드와의 적대 관계를 종식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 통해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2세가 헝가리 왕위 요구자 보리스(Borisz)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했다.[3] 신성 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를 견제했다.[3]볼레스와프 3세는 보리스를 지원했고, 보리스는 키예프 루스의 병사들과 함께 헝가리로 진격했다.[4] 벨러 2세는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와 동맹을 맺고, 1132년 7월 22일 셔요 강 전투에서 보리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격파했다.[4]
샤요 전투 이후 벨러 2세의 동맹인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1세와 페레미실의 볼로디미르코는 1132년과 1135년 사이에 매년 폴란드를 침공했다.[4] 소베슬라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 설득하여 볼레스와프 3세가 보리스를 포기하고 헝가리에서 벨러 2세의 통치를 인정하도록 강요했다.[4]

보리스가 벨러 2세를 폐위하려는 시도 이후 헝가리는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6] 1136년경 스플리트가 벨러 2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있다.[6] 보스니아는 1137년까지 저항 없이 벨러 2세의 종주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6] 헝가리군은 라마 강 계곡으로 진입했고, 벨러 2세는 라마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이 지역을 영구적으로 점령하지는 못했다.[6]
1139년, 헝가리군은 키예프 대공 야로폴크 2세를 지원했고, 벨러 2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6] 그의 딸 소피아와 독일 왕 콘라트 3세의 아들 헨리 베렌가르의 약혼을 주선했다.[6]

벨러 2세의 친여동생 헤드비히는 오스트리아 변경백레오폴트 3세의 아들과 결혼했고, 친누나 아델라이데는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1세의 왕비였다. 소베슬라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타르 3세와 관계가 깊었고, 로타르 3세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통해 볼레스와프 2세가 보리스를 지원하지 못하게 했다.
1136년, 벨러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점령된 달마티아를 되찾으려 했고, 보스니아에 원정군을 보냈다. 이 원정에서 공을 세운 차남 라슬로에게 보스니아 공작 칭호와 보스니아 전토를 주었다.
2. 2. 3. 죽음
벨러 2세는 1141년에 사망했는데, 과도한 음주가 원인이었다고 한다.[7]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벨러 2세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술에 몹시 취해 있었다.[8] 그의 측근들은 그가 술에 취한 틈을 타 그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냈으며, 그는 알코올성 혼수 상태에서 가끔 무고한 사람들의 처형을 명령하기도 했다.[8]벨러 2세는 1141년 2월 13일, 2월의 이데스 목요일에 사망했다.[7] 그는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묻혔다.[7]
3. 가족
벨러 2세는 1129년 초 이슈트반 2세의 주선으로 헬레나와 결혼했다.[3] 헬레나는 우로스 1세와 그의 아내 안나 디오게니사의 딸이다.[3]
헬레나 왕비는 최소 6명의 아이를 낳았다.[2] 1130년에 태어난 장남 게저 2세는 이후 왕위를 계승했다.[2] 라슬로 2세, 이슈트반 4세, 알모스 세 형제는 1130년대 초에 태어났다.[2] 1135년경에 태어난 첫째 딸 소피아는 독일의 하인리히 베렌가르와 약혼이 파기된 후 아드몬트 수도원에서 수녀로 생을 마감했다.[2] 1140년경에 태어난 막내딸 엘리자베스는 미에슈코 3세와 결혼했다.[2]
벨러 2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배우자 | 자녀 |
---|---|
헬레나 |
4. 유산
벨러 2세는 1141년 2월 13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게자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1]
참조
[1]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2]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3]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4]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5]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6]
서적
Archdeacon Thomas of Split: History of the Bishops of Salona and Split
[7]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8]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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