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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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명국사는 고려 숙종의 셋째 아들로, 승려가 되어 승통을 지냈다. 1090년에 태어나 처음 이름은 징길이었으나 송 휘종의 이름 '길'자를 피휘하여 징엄으로 바꾸었다. 8세에 흥왕사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며, 숙종의 명으로 중광사의 주지가 되고 승통이 되었다. 예종 시대에는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인종 즉위 후 5교 도승통이 되었으나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물러났다. 인종의 존경을 받으며 흥왕사에 머물다 1141년에 입적하였고, 원명국사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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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국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원래 이름 | 원명국사(圓明國師) |
본명 | 왕징엄(王澄儼) |
출생일 | 1090년 |
사망일 | 1141년 4월 21일 (음력) |
시호 | 원명(圓明) |
종교 | 불교 |
가족 관계 | |
부친 | 숙종 |
모친 | 명의왕후 유씨 |
기타 정보 | |
작위 | 고려 숙종의 왕자 |
2. 생애
원명국사는 1090년(선종 7년) 고려 문종의 아들이자 선종의 동생인 계림공(숙종)과 명의왕후 유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징길(澄佶)이었으나, 이후 북송 휘종의 이름인 '길(佶)'자를 피휘하여 징엄(澄儼)으로 바꾸었다. 어렸을 때부터 진귀한 장난감에 욕심내지 않았다고 한다.[1]
1095년 아버지 계림공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자가 되었고, 1097년(숙종 2년) 8세 때 숙부 의천이 있던 흥왕사에 의탁하였다. 1098년(숙종 3년) 명경전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 불일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2]
1102년(숙종 7년) 숙종의 명으로 중광사의 주지가 되었다. 1105년(숙종 10년)에는 승통이 되었고 복세라는 호를 받았다. 예종 시대에는 홍원사와 개태사, 귀신사 등의 주지를 지냈다. 1118년(예종 13년)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다가 다음 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후 숭선사에 머물다 귀신사의 주지를 맡았고, 이후 귀신사에 머물렀다.[3]
1122년(인종 즉위년) 인종이 즉위하자 5교 도승통이 되었으나,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물러났다. 1131년(인종 9년) 인종이 원명국사를 서울로 불러 흥왕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황숙으로 존경하며 극진히 예우하였다.
1141년(인종 19년) 4월 21일 입적하였다.[4] 입적 후 '''원명국사'''(圓明國師)로 추증되었다.[4] 4월 28일 흥왕사 서쪽 천덕산 남쪽 기슭에서 화장하였고, 유골은 승천부 약산촌 북쪽 언덕에 안장하였다.[4] 예부시랑 권적(權適)이 왕명을 받아 원명국사의 묘지명을 지었다.[4]
2. 1. 탄생과 출가
1090년(선종 7년), 고려 문종의 아들이자 선종의 동생인 계림공(숙종)과 명의왕후 유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징길(澄佶)이었으나, 이후 북송 휘종의 이름인 '길(佶)'자를 피휘하기 위해 징엄(澄儼)으로 바꾸었다. 어렸을 때 금과 옥으로 만든 진귀한 장난감을 앞에 두고도 탐내지 않았다고 한다.[1]1095년 아버지 계림공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자가 되었고, 1097년(숙종 2년) 8세 때 숙부 의천이 있던 흥왕사에 가서 의탁하였다. 1098년(숙종 3년) 명경전 앞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일사에서 구족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았다.[2]
2. 2. 승려 생활과 활동
1102년(숙종 7년), 숙종의 명을 받고 중광사의 주지가 되었다. 1105년(숙종 10년) 승통이 되었으며 복세(福世)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예종 시대에는 홍원사와 개태사, 귀신사 등의 주지를 지냈다. 1118년(예종 13년),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다가 다음 해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후 숭선사에 거주하다가 귀신사의 주지를 맡았고 이후 귀신사에 머물렀다.[3]1122년(인종 즉위년), 인종이 즉위하자 5교 도승통이 되었으나,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물러났다. 1131년(인종 9년), 인종이 원명국사를 서울로 불러와 흥왕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황숙으로 존경하여 돈독히 예우하였다.
2. 3. 입적
1141년(인종 19년) 4월 21일 입적하였다.[4] 입적 후 '''원명국사'''(圓明國師)로 추증되었다.[4] 4월 28일, 흥왕사 서쪽의 천덕산 남쪽 기슭에서 화장하였고, 이후 유골을 수습하여 승천부 약산촌 북쪽 언덕에 안장하였다.[4] 예부시랑 권적(權適)이 왕명을 받아 원명국사의 묘지명을 지었다.[4]3. 묘지명
예부시랑 권적(權適)이 왕명을 받아 원명국사의 묘지명을 지었다.[4] 묘지명에는 원명국사의 탄생, 출가, 승려 생활, 입적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있다.
참조
[1]
문서
흥왕사원명국사묘지명
[2]
문서
흥왕사원명국사묘지명
[3]
문서
흥왕사원명국사묘지명
[4]
문서
흥왕사원명국사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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