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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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별기군은 1881년 조선 정부가 근대 군대 창설을 위해 창설한 신식 군대이다. 일본군 무관 호리모토 레이조의 자문 하에 귀족 출신 젊은이 80~1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본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구식 군대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이로 인해 구식 군대의 반발을 샀다. 별기군에 대한 차별은 1882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고, 호리모토 레이조가 사망한 후 별기군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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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기군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한글 명칭 | 별기군 |
| 한자 명칭 | 別技軍 |
| 로마자 표기 | Byeolgigun |
| 설립 | 1881년 |
| 군사 정보 | |
| 창설 목적 | 조선의 첫 번째 근대화된 군대 |
| 훈련 교관 | 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 |
| 훈련 장소 | 훈련장은 편의에 따라 선택함 |
| 지휘관 | 별도의 장령을 임명하여 통솔 |
| 선발 기준 | 각 영의 건장한 병사를 선발하여 점검 |
| 역사적 배경 | |
| 배경 | 고종 18년(1881년)에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조선에 근대적인 군사 훈련을 위한 교관 파견을 제안 |
| 제안 내용 | 조선의 병사들을 선발하여 훈련하고, 호리모토 레이조를 교관으로 임명, 훈련장을 선정 |
| 왕의 승인 | 고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병사 선발과 훈련을 지시하고, 장령을 임명 |
| 기타 | |
| 관련 문서 | 고종실록 18년 4월 23일 기록 참조 |
| 참고 자료 | 고종실록 18년 4월 23일 기록 사진속의 역사/신식군대 별기군 오후여담>동대문운동장 |
2. 역사적 배경
1881년 5월, 조선 정부는 국가 근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군 무관 호리모토 레이조 중위를 초빙하여 근대식 군대 창설을 위한 자문관으로 임명하였다. 오군영과는 다른 새로운 군대인 별기군은 당시 사람들에게 왜별기(倭別技)라 불리며 시샘을 받았다. 이러한 차별 대우는 1882년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임오군란 당시 호리모토 레이조는 살해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별기군은 폐지되고 오군영으로 돌아갔다.
2. 1. 별기군 창설
1881년(고종 18년) 5월, 조선 정부는 국가 근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군 무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일본어) 중위를 초청하여 근대 군대 창설 자문관으로 임명했다. 귀족 출신의 젊은이 80~100명이 일본식 군사 훈련을 받고 새롭게 창설된 특수기술대를 구성하게 되었다.오군영에서 80명을 특별히 선발하여 무위영에 소속시키고, 그 이름을 별기군이라 하였다. 한성(현재의 서울) 주재 일본 공사관 소속의 호리모토 레이조 공병 소위를 교관으로 초빙하고, 다케다 칸타로(武田勘太郎일본어)를 통역관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교련소 당상관에는 민영익, 정령관(대좌 상당)에 한성근, 좌부령관(중좌 상당)에 윤웅렬, 우부령관(중좌 상당)에 김로완, 참령관(소좌 상당)에 우범선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러나 양반 출신의 사관생도들은 양반이 아닌 교관을 “너”라고 멸시하며 불렀다. 이에 대해 교관은 “너희들이 훈련을 마쳐도 참위(소위 상당)에 불과한데, 우수한 상급자이자 교관인 나를 ‘너’라고 부르는 것은 참을 수 없다”라고 일갈하고 옷을 벗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훈련은 같은 해 5월 9일부터 서대문 밖 모화관을 임시 교장으로 하여, 후에 현재 서울사대부고 자리인 하도감으로 옮겨서 진행되었다.
2. 2. 구식 군대의 불만과 차별 대우
1881년 5월, 조선 정부는 국가 근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일본군 무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중위를 초청하여 근대 군대 창설 자문관으로 임명했다. 귀족 출신의 젊은이 80~100명이 일본식 군사 훈련을 받고 새롭게 창설된 특수기술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규군 병사들은 특수기술대가 자신들보다 훨씬 더 좋은 장비와 대우를 받는 것을 시샘하며, 이러한 부대 편성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군 개편 과정에서 1,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제대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노령이거나 부상당한 병사들이었고, 나머지는 13개월 동안 쌀 봉급을 받지 못했다.[1] 별기군은 봉급과 피복 지급 등의 대우가 구식 군대보다 좋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를 왜별기(倭別技)라 부르며 시샘하였다.
2. 3. 양반 출신 사관생도와 교관의 갈등
양반 출신의 사관생도들은 양반이 아닌 교관을 “너”라고 멸시하며 불렀다. 이에 대해 교관은 “너희들이 훈련을 마쳐도 참위(소위 상당)에 불과한데, 우수한 상급자이자 교관인 나를 ‘너’라고 부르는 것은 참을 수 없다”라고 일갈하고 옷을 벗고 나가버렸다고 한다.[1]3. 임오군란과 별기군 폐지
별기군에 대한 차별 대우는 1882년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 이때 호리모토 레이조는 하도감 훈련장에서 살해되었다.[1] 임오군란 이후, 별기군은 폐지되고 오군영으로 돌아갔다.[1]
참조
[1]
웹사이트
고종十八年 四月二十三日實錄
https://sillok.histo[...]
2024-07-04
[2]
서적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
[3]
뉴스
사진속의 역사/신식군대 별기군
세계일보
2007-01-25
[4]
뉴스
<오후여담>동대문운동장
문화일보
2007-10-25
[5]
간행물 # 또는 다른 적절한 type
을미사변 당시 궁궐 경비와 친위대 창설 및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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