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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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군영은 조선 후기 한성부와 경기도 일대의 방어를 담당했던 중앙군으로,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으로 구성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군대의 전술을 받아들여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차례로 설치되었으며, 각 군영은 국왕 호위, 궁궐 숙위, 도성 순찰, 수도 외곽 방어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인조 반정 이후 후금의 침략과 이괄의 난을 겪으며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오군영 체제가 확립되었고, 숙종 때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오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후 정조의 개혁과 고종 시기의 군제 개편을 거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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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군영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 |
| 명칭 | 오군영 (五軍營) |
| 국가 | 조선 |
| 소속 | 조선군 |
| 종류 | 중앙군 |
| 역할 | 수도 방위 |
| 주둔지 | 한양 |
![]() | |
| 상세 정보 | |
| 창설 시기 | 1596년 |
| 해체 시기 | 1884년 |
| 지휘관 | |
| 전투 및 작전 | |
| 주요 전투 | 이괄의 난 후금의 조선 침공 청나라의 조선 침공 1728년 이인좌의 난 |
2. 배경
조선군의 중앙군 제도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규정된 오위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화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부대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훈련도감이 세워졌고, 그 뒤로 중앙군의 강화를 위해 차례로 오군영의 각 군영들이 들어서면서 오위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23] 오군영 가운데 처음 설치된 훈련도감은 당시의 전시 상황에 맞게 임시적인 아문으로 세워진 것이 출발점이었고, 그 뒤에 세워진 오군영의 다른 군영들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설립된 것이어서 오군영 체제의 확립 배경에는 정치적, 외교적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다.[22]
1592년(선조 25년), 약 20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조선 초기 5군 체제와 진관(鎭管) 및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대표되는 지방 방어 체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이에 조정은 새로운 군사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전쟁을 극복하기 위해 군사 체제의 개편을 서둘렀다.[1]
새로운 군사 제도의 조직은 명나라 군대의 전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4만 명의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왔을 때, 명나라 장군 낙상지(駱尙志)는 류성룡에게 군사 훈련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선조의 허락을 받아 류성룡은 낙상지에게 곤봉(棍棒), 등패(籐牌), 낭선(狼筅), 장창(長鎗), 당파(鐺鈀), 쌍수도(雙手刀) 등의 무기 사용을 포함한 군사 전술을 훈련시켰다.[1]
2. 1. 군사적 배경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화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부대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훈련도감이 세워졌고, 그 뒤로 중앙군 강화를 위해 차례로 오군영의 각 군영들이 들어서면서 오위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23] 오군영 가운데 처음 설치된 훈련도감은 당시의 전시 상황에 맞게 임시적인 아문으로 세워진 것이 출발점이었고, 그 뒤에 세워진 오군영의 다른 군영들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설립된 것이어서 오군영 체제의 확립 배경에는 정치적, 외교적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다.[22]조선 전기에도 총통을 다루는 포수(砲手)는 조선군의 핵심 전력 가운데 하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대항하면서 새로운 무기와 전법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조선은 기존의 총통 대신 조총을 받아들여 포수를 양성하고 척계광의 《기효신서》에서 언급된 전략에 따라 활을 쏘는 사수(射手)와 창칼 등의 근접 무기를 사용하는 살수(殺手)를 추가하여 삼수병(三手兵)이 집단을 이루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삼수병 가운데 핵심 전력은 포수로 원거리에서 적을 타격하게 하였다. 조총 등의 화승총은 발사 후 재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활을 쏘는 사수가 이들을 보조하게 하였고, 살수는 근접해 오는 적의 기병이나 보병으로부터 포수와 사수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24] 훈련도감은 애초에 포수를 양성하기 위한 임시기관이었으며, 도감(都監)은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걸쳐 수시로 설치되었던 임시 기구를 가리킨다.[25] 인조 시기에는 후금의 기마병에 대응하기 위해 마병을 새롭게 추가하였다.[27] 《기효신서》에 바탕을 둔 삼수병 체계는 이후 오군영 군사 편제의 표준적 기준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약 20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조선 초기 5군 체제와 진관(鎭管) 및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대표되는 지방 방어 체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이에 조정은 새로운 군사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전쟁을 극복하기 위해 군사 체제의 개편을 서둘렀다.[1]
새로운 군사 제도의 조직은 명나라 군대의 전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4만 명의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왔을 때, 명나라 장군 낙상지(駱尙志)는 류성룡에게 군사 훈련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선조의 허락을 받아 류성룡은 낙상지에게 곤봉(棍棒), 등패(籐牌), 낭선(狼筅), 장창(長鎗), 당파(鐺鈀), 쌍수도(雙手刀) 등의 무기 사용을 포함한 군사 전술을 훈련시켰다.[1]
2. 2. 정치적 배경
조선군의 중앙군 제도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규정된 오위였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화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부대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이후 중앙군 강화를 위해 오군영의 각 군영들이 차례로 설치되면서 오위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23] 오군영 가운데 처음 설치된 훈련도감은 당시 전시 상황에 맞게 임시적인 아문으로 세워진 것이 출발점이었고, 그 뒤에 세워진 오군영의 다른 군영들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설립되어 오군영 체제 확립 배경에는 정치적, 외교적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다.[22]인조 반정과 이어지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는 국왕 호위를 위한 중앙군 강화가 절실하였다.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수도 방어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후금에 대한 주력 방어군은 평안도 병마절도사였던 이괄 휘하의 병력 1만여 명이었으나,[28] 후금 군대가 한성부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성에 국왕이 친정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는 전략이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방어 담당자로 임명된 개성유수 이귀가 포수 260명을 모아 근위대로 삼고자 하였고, 인조는 이귀를 여영사로 삼아 어영청을 신설하였다.[29] 이괄의 난으로 어영청은 인조를 호위하여 공주성까지 따라나섰고, 이괄 진압 후에도 상설화되었다. 어영청 신설을 주도한 이귀는 반정을 계획할 당시부터 인조의 핵심 측근 중 하나였고, 반정 이후 이귀 등의 소서와 김자겸 등의 노서는 병권 장악을 놓고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귀의 어영청은 이후 이어지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속에서 지속적으로 세를 키워 정파색이 강한 근위대로 성장하였다.[30] 이후 설치된 총융청과 수어청 역시 서인이 설치를 주도하였고, 제일 늦게 설립된 금위영은 중앙군 유지에 대한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에, 오군영은 조선 후기 국왕의 친위 병력이면서 동시에 서인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군대였다는 평가를 받는다.[31] 정조의 오군영 개혁과 장용영 설치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대한 변화를 시도한 것이었으나, 정조 사망 이후 중앙군은 다시 오군영 체계로 환원되었다.[32]
3. 설치 시기 및 임무
오군영의 설치 시기와 주요 임무는 다음과 같다.
| 군영 | 지휘관 | 설치 시기 | 임무 |
|---|---|---|---|
| 훈련도감 | 훈련대장 | 1593년(선조 26년) | 국왕 호위, 궁궐 숙위 및 도성 순라 |
| 어영청 | 어영대장 | 1623년(인조 1년) | 국왕 호위, 궁궐 숙위 및 도성 순라 |
| 총융청 | 총융사 | 1624년(인조 2년) | 북한산성 및 경기 서북부 방어 |
| 수어청 | 수어사, 광주부윤 | 1626년(인조 4년) | 남한산성 및 경기 동남부 방어 |
| 금위영 | 금위대장 | 1682년(숙종 8년) | 국왕 호위, 궁궐 숙위 및 도성 순라 |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한양도성을 셋으로 나누어 순라를 담당했다.[22]
- 훈련도감: 도성 내외 순라. 종각 - 돈의문, 숭례문 - 마포 및 서강, 흥인문 - 종암
- 어영청: 오간수문 기준 청계천 주변, 종각 - 돈의문
- 금위영: 남산 - 삼청동, 서빙고 - 마포 - 망원정
1593년 8월, 선조와 류성룡은 임진왜란 중 군사력 강화를 위해 훈련도감 설치를 확정했다. 훈련도감은 당초 정식 군영이 아닌 임시 시설로, 척계광의 군사 교범 "기효신서"에 기반한 포병(포법, 砲法), 궁술(사법, 射法), 검술(감법, 砍法) 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평양성 전투에서 화기의 효과를 확인한 조선은 화기 생산 및 운용에 주력하고, 새로운 군사 전술을 모색했다.[1]
1593년 9월, 훈련도감은 정식 군영으로 개편되어 군대를 부대와 중대로 나누고, 각 중대는 궁수, 조총병, 검객, 창병 분대로 구성되었다. 또한, 전국 각지에 사단을 설치하고 성에 대대를 주둔시키는 등 체계적인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 상류층 시민과 노예를 징병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무기를 지급했으며, 무관 한교는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무술 교범 무예제보를 저술했다. 훈련도감은 초기 80명 미만의 병력으로 시작했으나, 곧 10,000명 규모로 성장했다.[2]
1594년 이후, 삼수병(三手兵) 체제가 구축되었고, 훈련소는 우의정을 겸임하는 도제조, 병조판서, 호조판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지휘 체계는 1명의 대장, 1명의 중장, 2명의 성장, 2명의 천총, 3명의 국별장, 6명의 파총, 6명의 종사관, 34명의 초관으로 구성되었다.[1] 훈련도감 병사들은 "급료병"(給料兵)으로 불리며, 국왕 호위뿐 아니라 수도와 변경 수비 임무도 수행하여 오군영의 핵심이 되었다.[1]
훈련도감은 1593년 유성룡의 건의로 설립되어 이듬해부터 방위 부대로 인정되었다. 종전 후에는 수도 한양 방어와 신병 훈련을 담당하는 약 1,000명 규모의 직업군인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1882년에 폐지되었다. 훈련도감은 경희궁 동쪽에 설치되었다.
어영청은 1623년 한양 방어를 위해 설치된 6,000명 규모의 군영으로, 종묘 남동쪽에 설치되었다.
총융청은 1624년 한양 교외와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도 북부 방어를 담당하는 군영으로 설치되었다. 병력은 최대 20,000명이었으며, 북한산성에 설치되었다가 1884년에 폐지되었다.
수어청은 1626년 경기도 남부와 남한산성 방어를 담당하는 군영으로 설치되었다. 병력 규모는 6,000명이었으며, 1894년에 폐지되었다.
금위영은 1682년 내금위가 겸사복, 어영청과 통합되어 내삼청의 부속이 되면서 권한이 축소됨에 따라, 새롭게 국왕의 근위병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창덕궁 돈화문 남서쪽에 설치되었다.
4. 각 군영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 제도는 크게 변화했다. 기존의 총통 중심 전력에서 벗어나, 조총과 같은 새로운 무기와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기반한 삼수병(三手兵) 전술을 도입하였다. 삼수병은 활을 쏘는 사수(射手), 창과 칼을 쓰는 살수(殺手), 그리고 포수(砲手)로 구성되어, 원거리 공격과 근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1593년(선조 26년) 유성룡의 건의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은 초기에는 임시 기관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상설화되어 오군영의 핵심 군영으로 자리 잡았다. 훈련도감은 삼수병 양성을 위한 훈련 기관이자, 수도 한양 방어와 국왕 호위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거치면서 인조는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한 중앙군 강화에 힘썼다. 특히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수도 방어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이에 따라 어영청(1623년), 총융청(1624년), 수어청(1626년)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 어영청: 1623년(인조 1년) 설치, 한양 방어와 국왕 호위 담당. 초기에는 260명의 포병 부대로 시작했으나, 효종 대에는 21,000명까지 증강되었다.
- 총융청: 1624년(인조 2년) 설치, 한양 외곽과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경기도 북부 방어 담당. 최대 20,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숙종 대에는 훈련도감의 일부와 정초영을 통합하여 금위영이 설치되었다(1682년, 숙종 8년). 금위영은 국왕 호위와 한성부 방어를 담당했으며, 훈련도감, 어영청과 함께 "삼군(三軍)"으로 불렸다.
이처럼 오군영은 조선 후기 중앙 군사 제도의 핵심으로,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통해 왕조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4. 1. 훈련도감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총통을 다루는 포수 중심의 전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조총을 도입하고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따른 전략을 채택하여, 활을 쏘는 사수(射手), 창과 칼을 쓰는 살수(殺手), 그리고 포수(砲手)로 구성된 삼수병(三手兵) 전술을 채택하였다. 포수는 원거리 공격, 사수는 조총 재장전 시간 보완, 살수는 근접전에서 포수와 사수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24]훈련도감은 이러한 포수 양성을 위한 임시 기관으로, '도감(都監)'은 고려부터 조선까지 설치된 임시 기구를 뜻한다.[25] 초기에는 1천여 명 규모였으나,[26] 임진왜란 이후 상설화되어 후금에 대한 방비를 맡았고, 인조 때 마병(馬兵)이 추가되었다.[27] 《기효신서》 기반 삼수병 체계는 이후 오군영 군사 편제의 표준이 되었다.

1593년(선조 26년) 유성룡의 건의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이는 이여송이 평양 탈환 후 군제 개편 필요성을 느껴 《기효신서》의 삼수병 체계를 본따 훈련도감을 신설하고 유성룡을 도제조로 삼은 결과였다.[34] 처음에는 임시 시설이었으나, 포병 부대가 먼저 편성되고, 검객(살수)과 궁수(사수)가 추가되었다. 훈련은 《기효신서》의 포병(砲法), 궁술(射法), 검술(砍法) 세 기술(산수기합, 三手技法)을 기반으로 했다.[1]
1593년 9월, 선조와 유성룡은 훈련도감을 단일 군영으로 설립, 부대와 중대로 나누고, 중대는 궁수, 조총병, 검객, 창병 분대로 구성했다. 각 지역에 사단을 설치하고 성에 대대를 주둔시켰으며, 상류층 시민과 노예가 징병 대상이었다. 모든 남성은 군대에 입대하여 훈련받고 무기를 익혀야 했다. 이 무렵 한교는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무예제보를 저술했다. 초기 80명 미만에서 곧 10,000명 정도로 병력이 증가했다.[2]
1594년(선조 27년) 이후 삼수병 체제가 구축되었다. 훈련소는 우의정을 겸하는 도제조, 병조판서, 호조판서를 중심으로, 대장 1명, 중장 1명, 성장 2명, 천총 2명, 국별장 3명, 파총 6명, 종사관 6명, 초관 34명으로 지휘 체계를 구성했다.[1]
"급료병"으로 불린 훈련도감 병사들은 왕의 호위병이자 수도와 변경 수비병으로 복무하며, 오군영의 핵심이 되었다.[1] 1882년 폐지되었고, 경희궁 동쪽에 설치되었다.
4. 2. 어영청
인조 반정과 이어지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는 국왕의 호위를 위한 중앙군의 강화가 절실하였다. 더욱이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수도 방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후금에 대한 주력 방어군은 평안도 병마절도사인 이괄 휘하의 병력 1만여 명이었으나[28] 후금의 군대가 한성부로 진격해 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개성에 국왕이 친정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는 전략이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방어 담당자로 임명된 개성유수인 이귀가 포수 260명을 모아 근위대로 삼고자 하였고 인조는 이귀를 여영사로 삼아 어영청을 신설하였다.[29] 이괄의 난으로 어영청은 인조를 호위하여 공주까지 따라나섰고 이괄을 진압한 뒤로도 상설화되었다. 어영청 신설을 주도한 이귀는 반정을 계획할 당시부터 인조의 핵심 측근 가운데 하나였고 반정 이후 이귀 등의 소서와 김자겸 등의 노서는 병권의 장악을 놓고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귀의 어영청은 이후 이어지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와중에서 지속적으로 세를 키워 정파색이 강한 근위대로서 성장하였다.[30]어영청(御營廳)은 조선 후기에 국왕의 숙위와 수도의 방어를 담당하던 군영이다.[35] 1623년(인조 1년) 당시 관계가 악화되던 후금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국왕의 친위대로 신설되었고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까지 몽진할 때 근위대로서 함께 이동하였다.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몽진한 인조를 호위하였고 이후 궁궐의 경계와 국왕의 호위를 맡는 군영으로 자리잡았다.[36] 효종은 정축하성의 굴욕을 갚겠다는 북벌론을 내세워 어영청의 인원을 2만 1천 명까지 증원하였으나[37] 이후 국가 재정 문제로 점차 감축하여 숙종 30년(1704년) 1만 6천 3백 명으로 축소하였다.[35] 어영청의 병력은 군역을 지고 징병되는 정병으로 순번에 따라 근무하는 번상군(番上軍)이었고 대략 3년에 한 번 꼴로 근무가 돌아와 서울에 상주하는 인원은 7백 명 가량이었다.[29] 1881년(고종 18년) 총융청, 금위영과 합쳐져 장어영(將禦營)이 되었다가, 1884년 총어영(總禦營)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894년에 폐지되었다.[35] 고종 시기 오군영 혁파의 이유로 군기 문란과 근무 태만이 거론되면서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다"라는 뜻의 "어영비영"(御營非營)이란 말이 돌았고 이것이 오늘날 일을 흐지부지하게 처리한다는 "어영부영"의 어원이 되었다.[38]
인조 재위 기간 동안 어영청이 설치되었다. 인조반정을 통해 1623년 왕위에 오른 인조는 후금의 압박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따라서 1624년(인조 2년) 이귀를 어영사로 임명하여 국왕을 호위하게 하면서 어영군이 창설되었다. 이괄의 난 이후 어영군은 훈련도감과 함께 수도 방어와 국왕 호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으로 자리 잡았다. 어영청은 한성 성곽을 방어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260명의 포병 부대를 갖추었다. 청의 침략 이후 7,000명, 효종 재위 기간 동안 21,000명으로 증강되었다. 어영청은 5개 부(部), 3개 별삼사(別三司), 별중초(別中哨)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숙종 재위 기간 동안 금위영과 함께 5개 부(部), 25개 사(司), 125개 초(哨)로 개편되었다.[1]
4. 3. 총융청
인조 반정과 이괄의 난 이후, 인조는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군 강화를 추진하였다. 특히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수도 방어의 중요성이 커졌다. 1624년(인조 2년) 경기감사였던 이서를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로 임명하면서 총융청(摠戎廳)이 설치되었고, 북한산성을 비롯한 경기 북서부 방어를 담당하였다.[39][40]북한산성을 통해 23,500명의 병력으로 북한 방어사령부는 한성의 북쪽 외곽을 방어했다. 총융청은 처음 설치될 당시 사직동 북이영(北二營)에 군영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669년(현종 10년) 삼청동으로 이전했고, 1747년(영조 23년)에는 북한산성을 관리하기 위해 연영대로 이전하여 경기도 지역 수도 북쪽 외곽 방어를 담당했다.[1] 최대 20,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던 총융청은 1884년(고종 21년)에 폐지되었다.
4. 4. 수어청
인조 반정과 이어지는 이괄의 난으로 인조는 국왕 호위를 위한 중앙군 강화가 절실하였다.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수도 방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후금에 대한 주력 방어군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 휘하 병력 1만여 명이었다.[28] 총융청, 수어청은 서인이 설치를 주도하였고, 금위영은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에 오군영은 조선 후기 국왕 친위 병력이면서 서인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31]수어청(守禦廳)은 조선 후기 한성부 남측, 남한산성, 경기도 동남부 방어를 위해 세워진 군영이다.[41] 1626년(인조 4년) 남한산성 개축과 함께 설치되었다.[42] 여러 조직 변화 끝에 정조 시기 경기도 광주부 유수가 총괄하는 것으로 조정된 뒤 속오군을 주로 운영하였고, 19세기 이후 점차 유명무실해지다가 1894년(고종 31년) 폐지되었다.[43]
왕실 방어 사령부는 1626년(인조 4년) 남한산성 방어를 위해 설립되었다. 16,500명 병력으로 남한산성을 통해 한성 남쪽을 방어했다. 요새 방어와 관리를 담당하는 소영 제도가 처음 도입된 1656년(효종 7년) 군영 체제가 확립되었다. 남한산성 북쪽과 남쪽 모두 외부 침략에 대한 방어는 경기도 일대 군사력에 국한되지 않고 적 침략 경로를 따라 지방 군사력도 포함하여 소영 체제에 통합, 요새 방어에 집중했다. 수어청은 한성부 북쪽 진장방에 본부인 경청(수도청)을 설치했다. 사령관인 수사(수비대)는 한성부윤을 겸임했다. 1795년(정조 19년) 정조는 수어청 조직을 개편했다. 경청은 폐지, 본부는 남한산성으로 이전, 광주부윤 지위는 광주유수로 승격되어 수사를 겸임했다.[1]
수어청(守禦廳)은 1626년(인조 4년) 설치되어, 경기도 남부와 남한산성 방위를 담당하는 군영으로, 병력 규모는 6,000명이었다. 1894년(고종 31년) 폐지되었다.
4. 5. 금위영
인조 반정과 이괄의 난 이후, 인조는 국왕 호위를 위한 중앙군 강화를 추진했다. 후금과의 관계 악화로 수도 방어 필요성이 커지면서 숙종은 한양 방어와 국왕 호위를 위해 8만 5천 명 규모의 금위영을 설치했는데, 이 중 3만 명은 다른 4영에서 차출된 전문 군인이었다.[7][8][9][10] 금위영은 "신영"이라고도 불렸으며, 창덕궁 금호문 밖 중선방에 주둔했다.[1] 1682년(숙종 8년) 3월, 훈련도감 대장 김석주가 훈련별대와 정초군을 통합하여 금위영이라는 독립 군영을 창설하는 군제 개편을 제안해 설치되었다.[7][8][9][10]조선 후기 중앙군인 오군영 중 하나인 금위영은 조선 국왕 호위와 한성부 방어를 담당했다.[44] 효종의 북벌론 이후 중앙군 규모는 커졌으나 재정이 부족했고,[45] 장기 복무 상비군인 장번군(長番軍)으로 운영되던 훈련도감의 급료 지급을[46] 위해 삼수미 등 별도 재원을 마련했으나 재정 압박은 여전했다. 이에 훈련도감 일부와 현종 때 설치된 정초영을 통합, 번상군(番上軍)으로 운영하는 금위영이 설치되었다.[47]
금위영은 1682년(숙종 8년) 내금위가 겸사복, 어영청과 통합되어 내삼청의 부속이 되면서 권한이 축소되자, 새로운 조선 국왕 근위병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창덕궁 돈화문 남서쪽에 설치되었으며, 예하 부대로는 낙선동 남쪽에 남별영(南別營)이, 그 주변에 남창(南倉)과 하남창(下南倉)이 설치되었다. 서영(西營)은 창덕궁 경추문 맞은편, 남영(南營)은 경희궁 개양문 위에 있었다.[1]
5. 편제 및 계급
| 오군영 | |||||||
|---|---|---|---|---|---|---|---|
| 호칭 | 관위 | 훈련도감 | 어영청 | 총융청 | 수어청 | ! 금위영 | |
| 관명 | |||||||
| 대감(大監) | 정1품 | 도제조(都提調) | 도제조(都提調) | 도제조(都提調) | |||
| 종1품 | |||||||
| 정2품 | 제조(提調) | 제조(提調) | 사(使) | 제조(提調) | |||
| 영감(令監) | 종2품 | 대장(大将) 중군(中軍) | 대장(大将) 중군(中軍) | 사(使) 중군(中軍) | 대장(大将) 중군(中軍) | ||
| 정3품 당상관 | 별장(別将) | 별장(別将) | 천총(千摠) | 중군(中軍) | 별장(別将) | ||
| 나우리 | 정3품 당하관 | ||||||
| 종3품 | | | ||||||
| 정4품 | |||||||
| 종4품 | 파총(把摠) | 파총(把摠) | 파총(把摠) | 파총(把摠) | 파총(把摠) | ||
| 정5품 | |||||||
| 종5품 | |||||||
| 정6품 | |||||||
| 종6품 | 종사관(従事官) | 종사관(従事官) | 종사관(従事官) | ||||
| 정7품 | |||||||
| 종7품 | |||||||
| 정8품 | |||||||
| 종8품 | |||||||
| 정9품 | |||||||
| 종9품 | 초관(哨官) | 초관(哨官) | 초관(哨官) | 초관(哨官) | 초관(哨官) | ||
6. 삼군
조선 후기 수도 방어 체계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중앙 군영이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으로 구성되었다. 삼군영의 군인들은 한양에 주둔하며 국왕 호위, 궁궐 수비, 수도 방어, 치안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2][13][14][15][1]
훈련도감(訓錬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은 한양 방위를 담당하는 군대로서 "삼군(三軍)"으로 불렸다. 한양의 동북부는 어영청이, 서북부는 훈련도감이, 남부는 금위영이 담당했다. 창경궁 내에 훈국군번소(訓局軍番所), 어국군번소(御局軍番所)가 설치되었다.
7. 해체
1881년(고종 18년) 5군영은 무위영과 수도 방위 부대인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7] 그러나 이 부대들은 더 나은 대우와 장비를 받는 별기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군은 군대 개편 과정에서 1,000명 이상의 병사를 해고했는데, 대부분 노령이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군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 13개월 동안 급료로 지급될 쌀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일본 군사 고문단과 그들의 법안, 그리고 일부 조선 관리들이 사망했다. 대원군은 잠시 권력을 되찾아 질서를 회복하면서 무위영, 장어영, 별기군을 해체하고 오군영을 부활시켰다.[7] 1882년 12월, 대원군이 체포된 후 정부는 오군영을 다시 해산시켰다. 이후 위안스카이 휘하의 중국 군대가 새로운 조선 군대인 친군영으로 재편성되어 훈련받았다.[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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