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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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오군란은 1882년 구식 군인들의 봉기로 시작된 사건으로, 조선의 정치, 사회, 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73년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정권의 무능한 통치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대한 차별, 봉급 문제 등이 배경이 되었다. 군인들은 봉급에 섞인 모래와 썩은 쌀에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이는 일본 공사관 습격, 민씨 정권 고관들의 살해,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으로 이어졌다. 청과 일본은 군란에 개입하여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고, 조선은 청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임오군란은 국내적으로 척화파의 몰락과 온건 개화파의 부상, 청나라의 종주권 강화, 일본의 세력 확대를 가져왔으며, 갑신정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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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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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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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임오군란 |
한자 | 壬午軍亂 |
발생 날짜 | 1882년 (고종 19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 8월 30일(음력 7월 17일) |
주요 참가자 | 조선군 |
결과 | 중전 민씨의 피난 흥선 대원군의 재집권 |
원인 |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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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
임오년 | 육십간지 중 19번째 해(1882년) |
사건 진행 | |
주요 사건 |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반발한 구식 군인들의 봉기 일본 공사관 공격 민겸호 등 고위 관리 살해 명성황후의 피난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청나라의 개입 및 흥선대원군 납치 |
관련 인물 | 민겸호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礼造) |
해외 개입 | 청나라 군대 파견, 일본 군대 파견 |
기타 | |
관련 선박 | HMS 플라잉 피쉬 (1873년) |
2. 배경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여흥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전까지 조선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며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으나,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로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했지만, 여러 갈등을 낳았다.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들은 서양 문물 수용에 강하게 반발하며 민씨 정권에 정치적 부담을 주었다. 1881년에는 개화 정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신사척사상소운동이 벌어졌고, 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는 등[13][14]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었다.
개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재정 문제와 사회경제적 혼란도 군란의 주요 배경이었다.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 등 군제 개혁에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었고, 이는 가뜩이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특히 기존의 구식 군대 군인들은 별기군에 비해 봉급이 13개월이나 밀리는 등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아 생계에 위협을 느꼈다.[7][12][15][16] 이는 구식 군인들의 불만을 크게 증폭시켰다.
또한, 개항 이후 일본과 청나라 상인들의 경제적 침투가 심화되면서 쌀값이 폭등하는 등 민중의 생활고는 더욱 가중되었다.[9][18] 이러한 상황에서 군인들에 대한 차별과 봉급 체불, 그리고 관리들의 부정부패[12][13][16]는 쌓여가던 민중의 불만과 결합하여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상태였다. 결국, 구식 군인들에 대한 봉급미 지급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 사건은 임오군란이라는 대규모 봉기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처럼 임오군란은 정치적 갈등, 사회경제적 불안, 군인들에 대한 차별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발생한 사건이었다.
2. 1. 정치적 배경
1873년 최익현의 상소 등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와 그 친족인 여흥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19세기 이전 조선은 엄격한 쇄국 정책을 유지하며 중국, 일본과의 제한적인 교류 외에는 문호를 닫고 있었다. 1864년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아 왕권 강화와 양반 세력 약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하며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대원군은 외척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세력이 약한 여흥 민씨 가문의 명성황후를 왕비로 들였으나, 명성황후는 점차 세력을 키워 1873년 대원군을 권좌에서 밀어냈다.[7][8][9][10][11][12][13][14]
대원군이 물러난 후에도 쇄국을 지지하는 민심은 여전했고, 대원군 역시 최익현 등 척화파와 교류하며 영향력을 유지하여 민씨 정권에 정치적 부담을 주었다. 서계 문제와 운요호 사건을 거치며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은 결국 개항하게 되었다. 민씨 정권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우며 서구 기술을 받아들여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1880년에는 김홍집을 일본에 사절로 파견했고, 그는 청나라 외교관 황쭌셴(黄遵憲)으로부터 러시아 견제를 위해 미국과 동맹하고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으라는 내용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받아와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은 이를 외교의 기본 방향으로 삼으려 했으나, 서양과의 동맹이나 일본과의 우호 관계에 대한 위정척사파 등 보수 세력의 반발은 매우 거셌다.[7][8][9][10][11][12][13][14]
1881년 민씨 정권은 통리기무아문 설치 등 행정 개혁과 함께 일본에 기술 사절단을 파견하며 개화 정책을 본격화했다. 같은 해 5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훈련시켰다. 그러나 개화 정책 추진 과정에서 재정 문제가 발생했고, 이는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다. 기존의 5군영(훈련도감, 용호영,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축소하면서 많은 군인이 해고되었고, 남은 군인들에게는 13개월이나 봉급이 지급되지 않았다. 구식 군인들은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에 큰 불만을 품었으며, 특히 군량미 지급 책임자였던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와 전 호조판서 김보현 등을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하며 증오했다.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지만 민씨 정권을 지지하고 개항에 찬성했던 흥인군 이최응 또한 구식 군대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7][8][9][10][11][12][13][14]
개화 정책에 대한 위정척사파의 반발도 거셌다. 1881년 전국의 유생들이 서울에 모여 개화 정책 책임자 처벌과 척사 정책 실행을 요구하는 상소 운동(신사척사상소운동)을 벌였으나, 민씨 정권은 주도 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 보내며 강경하게 탄압했다. 위정척사파는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같은 해 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기도 했다. 이러한 국내의 정치적 불안과 갈등 속에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려 했고 일본은 조선의 정치·경제적 독립을 통해 자국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면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었다.[7][8][9][10][11][12][13][14]
2. 2. 사회경제적 배경
조선 후기 사회는 삼정의 문란과 같은 문제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국왕 스스로 관직 매매를 행하기도 했으며, 지배 계급인 양반들은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9]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일본과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시장에 진출하여 경제적 침투를 심화시켰다. 특히 외국 상인들의 곡물 대량 구매는 국내 쌀값 폭등으로 이어져 일반 민중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9][18]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정권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지원을 받아 별기군과 같은 신식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추진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었고, 이는 국가 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7] 특히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여러 면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15], 국가 재정난으로 인해 봉급미(俸給米)가 13개월이나 지급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12][15][16] 1882년 여름에는 극심한 가뭄까지 겹쳐 정부의 재정은 거의 고갈 상태였다.[17]
1882년 7월 19일, 13개월 만에 구식 군영인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 병사들에게 마침내 봉급미가 지급되었으나, 이는 겨우 한 달 치에 불과했다.[12] 더욱이 지급을 담당했던 선혜청의 창고 관리가 쌀에 모래와 겨, 썩은 쌀 등을 섞어 양을 부풀리는 부정을 저질렀다.[12][13][16] 이에 격분한 군인들이 항의했으나, 책임자였던 민겸호는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려 했다.[12][13][16] 쌓여왔던 불만과 봉급미 부정 지급 사건은 결국 구식 군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개항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도시 빈민층과 부랑자들까지 가세하면서 대규모 폭동, 즉 임오군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2][18]
2. 3. 군사적 배경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정권이 권력을 장악했다. 민씨 정권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일본은 조선의 정세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일본 지도부는 조선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부족하여 외세의 영향력 아래 놓일 경우, 이는 "일본 심장을 겨냥한 단검"처럼 자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이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민씨 정권은 이러한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7] 일본은 군사 교관으로 호리모토 레이조(ja) 중위를 파견하여 별기군의 훈련을 지원했다. 그러나 별기군 창설과 운영에는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었고, 이는 국가 재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7] 이 과정에서 기존의 구식 군대(오군영) 소속 군인들은 심각한 차별 대우에 놓였다. 별기군 군인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생계 수단인 봉급(군료)조차 13개월 동안이나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7] 이러한 극심한 차별과 생계의 위협은 구식 군인들의 불만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이는 임오군란이 발발하는 결정적인 군사적 배경이 되었다.[7]
또한,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은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 유생층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1881년에는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한성에 모여 김홍집 등 개화파 관료의 처벌과 척사 정책의 실행을 요구하는 대규모 상소 운동(신사척사상소운동)을 벌였으나, 민씨 정권은 주동자를 처형하는 등 강경하게 진압했다.[13] 같은 해 여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는 등[13][14] 정치적 불안정 역시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불안과 구식 군인들의 누적된 불만이 결합되면서 군사적 충돌의 위험은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3. 전개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선혜청에서 구식 군인들에게 밀린 봉급으로 지급한 쌀에 모래와 겨가 섞여 있는 사건(도봉소 사건)이 발생하면서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초기 봉기는 책임자 처벌 요구에서 시작되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인들은 민씨 척족에 의해 실각했던 흥선대원군과 접촉하여 지지를 얻었다.
대원군의 암묵적 지원 아래 봉기는 조직적으로 확산되었다. 군인들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고 포도청과 의금부의 옥문을 열어 동료들과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봉기의 대상은 민겸호, 김보현 등 민씨 척족 고관들과 별기군, 나아가 일본 공사관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등이 살해되었으며,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은 제물포를 통해 간신히 탈출했다.[47]
7월 24일(음력 6월 10일), 봉기 군인들은 궁궐까지 난입하여 민겸호, 김보현, 흥인군 이최응 등 다수의 고위 관료를 살해했다.[45] 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하여 충주로 피신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고종은 결국 흥선대원군에게 정권 수습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9년 만에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즉시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폐지하고 오군영과 삼군부를 복구하는 등 개화 정책 이전으로 되돌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또한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아들 이재면과 위정척사파 인물들을 요직에 등용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 명성황후가 실종 상태에 이르자 국상(國喪)을 선포하여 군란의 명분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3. 1. 도봉소 사건과 초기 봉기
전라도에서 세곡선이 도착하자, 선혜청은 도봉소에서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밀린 봉급 중 1개월분만 우선 지급했다. 그러나 지급된 쌀은 썩은 데다 모래와 겨가 잔뜩 섞여 있어 군병들의 분노를 샀다. 정당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지급 담당관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믿고 강압적으로 나오자, 옛 훈련도감 포수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홍만복 등을 중심으로 한 군병들은 선혜청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가했다. 이로 인해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이를 '''도봉소 사건'''(都捧所事件)이라 부른다.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즉시 주동자 김춘영, 유복만 등 4~5명을 체포하여 포도청에 넘겼다. 이들이 혹독한 문초를 당했으며 그 중 두 명은 곧 사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45] 소요에 가담했던 군병들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인 유춘만(柳春萬)을 중심으로 투옥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한 통문을 작성했다.
흥인군 이최응이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해 소요를 조기에 진압하도록 고종에게 건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병들은 더욱 격분했다. 다음 날 김장손과 유춘만은 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에게 찾아가 통문을 보이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경하는 서신 한 통을 써주며 민겸호에게 직접 가보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할 수 없이 민겸호의 집으로 향한 군병들은 그가 부재중이자 집안의 가재도구를 부수며 분노를 표출했다.[46][47]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자 군병들은 흥선대원군이 칩거하던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민씨 척족 세력에 의해 10년 가까이 실각해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이는 재집권의 좋은 기회였다. 그는 군병들의 사정을 듣고 밀린 봉급의 완전 지급을 약속하며,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하고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자신의 심복 허욱과 긴밀히 협력하도록 지시했다.
흥선대원군의 지지를 얻은 군병들은 조직적인 행동에 나섰다. 일부는 동별영(東別營)의 무기고를 약탈하고 포도청을 습격하여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했다. 다른 일부는 의금부를 습격하여 위정척사론자인 백낙관 등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또한 전직 선혜청 당상이었던 김보현이 관찰사로 있던 경기감영을 공격했으며,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민씨 척족 세력의 집들을 습격했다.

흥선대원군은 민심을 얻고 자신의 복귀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군병들의 소요를 반외세 운동으로 확대시키려 했다. 그날 저녁, 흥선대원군의 수하들과 군병들은 일본 공사관을 포위하고 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와 공관원들은 제물포 항으로 겨우 피신했고, 공사관 건물은 불탔다. 군병들은 민씨 척족의 사병과 다름없던 별기군과 충돌하여 이들을 제압했으며, 별기군 병영인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공병 소위를 비롯한 일본인 13명을 살해하며 봉기를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봉기 군인들은 궁궐까지 난입하여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찾아내 구타한 끝에 살해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무위대장 이경하가 직접 동별영으로 가 부하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뒤늦게 조정은 사태 수습을 위해 이미 사망한 민겸호와 도봉소 당상 심순택,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 신정희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을 임명했다. 한편, 개화파이자 별기군 영병관이었던 윤웅렬은 일본 공사에게 서한을 보내 정변 소식을 알렸으나, 일본 공관원들은 이미 제물포로 피신한 뒤였다.
3. 2. 봉기의 확산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도봉소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김춘영(金春永), 유복만(柳卜萬) 등 네다섯 명을 체포하여 포도청에 넘겼다. 이들은 혹독한 문초를 당했으며, 그중 두 명이 곧 사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45] 이에 소요에 가담했던 군병들은 김장손(金長孫)과 유춘만(柳春萬, 유복만의 동생)을 중심으로 투옥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한 통문을 작성했다.흥인군 이최응이 별파진(別破陣)을 동원하여 소요를 초기에 진압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자, 군병들은 더욱 격분했다. 다음 날, 김장손과 유춘만은 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를 찾아가 통문을 보이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경하는 직접 쓴 서신 한 통을 주며 민겸호에게 직접 가보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어쩔 수 없이 민겸호의 집으로 향한 군병들은 문을 부수고 난입했으나, 민겸호는 집에 없었고 대신 집안의 기물들을 부수며 분노를 표출했다.[46][47]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자 군병들은 운현궁으로 몰려가 흥선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민씨 세력에게 밀려나 10년 가까이 실권 없이 지내던 흥선대원군에게 이는 재집권의 좋은 기회였다. 대원군은 군병들의 사정을 듣고 밀린 급료의 완전한 지급을 약속하며,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했다. 또한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불러 자신의 심복인 허욱(許煜)과 긴밀히 협력하도록 지시했다.

흥선대원군의 지지를 얻은 군병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동별영(東別營)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포도청의 옥문을 부수어 김춘영, 유복만 등을 구출했다. 다른 일부는 의금부를 습격하여 위정척사론자(斥邪論者)인 백낙관(白樂寬) 등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또 다른 이들은 전직 선혜청 당상이었던 김보현이 관찰사로 있는 경기감영을 공격했으며, 나머지는 강화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외척 수구당들의 집을 습격했다.
대원군은 민심을 얻고 봉기를 위정척사 운동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날 저녁, 대원군의 지시를 받은 군병들은 일본 공사관을 포위하고 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일본어와 공관원들은 급히 제물포 항으로 도피했고, 공사관 건물은 불탔다. 군병들은 민씨 정권의 사병처럼 여겨지던 별기군과 충돌하여 이들을 제압했으며, 별기군 병영인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일본어 공병 소위를 포함한 일본인 13명을 살해했다.
봉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은 궁궐 안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발각되었다. 분노한 군병들은 이들을 심하게 구타한 끝에 중희당(重熙堂) 아래에서 살해했다. 단순한 군병들의 불만 표출로 시작된 사건은 외세와 집권 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으로 번져나갔다.
3. 3. 일본 공사관 습격
흥선대원군은 단순한 군병들의 소요 사태를 자신의 재집권 기회로 삼고, 이를 위정척사 운동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민심을 얻는다는 명분 하에 자신의 수하들과 군병들을 동원하여 일본 공사관 습격을 사주했다.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저녁, 약 3,000명의 군병들이 약탈한 무기로 무장하고 일본 공사관을 포위하여 습격했다.[47]
공사관 안에는 주한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일본어, 직원 17명, 공관 경찰 10명이 있었다. 군병들은 공사관을 포위하고 "안에 있는 모든 일본인을 죽이겠다"고 외쳤다. 위협을 느낀 하나부사 공사는 중요한 문서를 불태우고 공사관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불길이 빠르게 번지는 혼란 속에서 공사관 직원들은 뒷문을 통해 탈출하여 제물포 항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인천 관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서울의 상황이 알려지자 태도가 변해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비를 맞으며 항구로 도망쳤고, 추격해온 조선 군인들과 충돌하여 일본인 6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살아남은 공관원들은 작은 배를 타고 공해로 나갔다가 사흘 뒤 영국의 측량선 HMS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한편, 군병들은 민씨 척족의 사병처럼 여겨지던 별기군과도 충돌하여 이들을 제압했다. 군병들은 별기군 병영인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일본어 공병 소위를 포함한 일본인 13명을 살해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호리모토 소위는 숙소에서 군병들에게 둘러싸여 여러 차례 칼에 찔리는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3. 4. 왕궁 난입과 민씨 일족 살해
흥선대원군의 명이 떨어지자 군병들은 창덕궁으로 난입했다. 1882년 7월 24일(음력 6월 10일), 군병들은 궁궐 내에서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전 선혜청 당상이자 경기도 관찰사였던 김보현을 발견하여 심하게 구타한 뒤 중희당(重熙堂) 아래에서 살해했다.[45] 또한 흥선대원군의 형이지만 개화파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흥인군 이최응을 포함한 여러 고위 관리들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군병들은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인물로 여겨진 명성황후를 찾아 살해하려 했으나, 명성황후는 기지를 발휘하여 평범한 궁녀 복장으로 변장했다. 그리고 무예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 뒷문을 통해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에 있는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무위대장 이경하가 직접 나서 군병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뒤늦게 조정에서는 사태 수습을 위해 이미 살해된 민겸호를 비롯하여 도봉소 당상 심순택,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 신정희 등을 파직했다. 그 후임으로 흥선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을 새로운 무위대장으로 임명했다. 한편, 개화파이자 별기군 영병관이었던 윤웅렬은 일본 공사에게 서한을 보내 정변 소식을 알렸으나, 이때는 이미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비롯한 일본 공사관 직원 전원이 제물포로 피신한 뒤였다.
3. 5.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복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부대부인 민씨와 장남 이재면을 데리고 입궐했으며, 훈련도감 출신 난 가담자 200여 명이 그를 호위했다. 9년 만에 다시 조정을 장악한 대원군은[12] 고종에게 자책교지(自責敎旨)를 반포하게 하여 군란을 정당화했다.대원군은 곧바로 복고적인 정책을 추진했다[12].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으며, 군제를 종전의 오군영 체제로 되돌리고 별기군과 양영(장어영, 무위영)을 폐지했다[12][13]. 또한 장남 이재면에게 훈련대장,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을 겸임하게 하여 군사력과 국가 재정을 장악하려 했다.
인사 면에서는 민씨 척족들을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 요직에서 파직하고, 민씨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던 척사위정파 인물들을 대거 등용했다[12][13]. 유배되었던 인물들을 사면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백낙관 등 정치범들을 석방하여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고 심복들을 요직에 임명했다[12][13].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난 가담자들에게 해산을 명하는 한편, 대대적인 사면령도 내렸다. 그러나 일부 가담자들이 중전 민씨의 처단을 요구하며 해산을 거부하자, 대원군은 중전이 실종된 것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국모 상(喪)을 공포하여 군병들의 해산을 관철시켰다.
4. 청과 일본의 개입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머물던 김윤식, 어윤중 등을 통해 청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12][15] 이에 청나라는 북양대신 직무대리 장수성[48][49][50]의 지시로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이 이끄는 함대와 병력을 8월 10일 제물포에 파견했고, 사절로 마건충을 보냈다.[12][15][13]
한편,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고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이 탈출한 뒤, 일본 정부는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8월 13일 제물포에 파견했다.[12][13][15] 그러나 청나라가 8월 20일 오장경이 이끄는 회군 3,000명을 추가로 남양만에 상륙시키며[12][13][15] 군사적 우위를 점하자, 일본은 적극적인 군사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청군은 8월 26일 한양에 입성한 뒤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으로 압송했으며,[15] 왕십리와 이태원 등지에 주둔하던 군란 가담 세력을 진압했다.[13] 이후 청의 영향력 아래 조선 정부는 일본과 8월 30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 측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게 되었다.[11] 이러한 혼란 속에 미국 또한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을 파견하기도 했다.[7]
4. 1. 청의 개입


명성황후가 피신하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자, 민씨 외척 세력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영선사로 청나라에 머물고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 등에게 급보를 보내 청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요청 수신일: 8월 2일/음력 6월 19일).[12][15] 김윤식과 어윤중은 이 사건을 고종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수구파의 쿠데타로 보고, 일본과의 충돌 가능성을 우려하며 청나라의 파병과 조정을 요청했다.[12][13][15]
청나라는 8월 1일, 주일 청국 공사 여서창(리서창)의 보고를 통해 군란 소식을 처음 접했다.[12][15] 당시 이홍장은 모친상 중이었으므로, 북양대신 직무를 대리하던 장수성[48][49][50]이 김윤식, 어윤중과 논의 후 파병을 결정했다.[12][15] 8월 7일, 광서제는 "파병하여 (조선과 일본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15]
8월 10일, 북양수사 제독 정여창이 이끄는 북양함대의 군함 3척(초용, 위용, 양위)[51]이 병력 4~500명과 이홍장의 사절 자격인 마건충, 그리고 어윤중을 태우고 제물포에 도착했다.[12][15][13] 마건충은 정보를 수집하고 조선 및 일본 측과 접촉하며 청나라에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15]
한편, 청나라 내부에서는 흥선대원군을 제거할 계획이 세워졌다. 이홍장의 참모 설목상이 제안하고 장수성과 영선사 김윤식이 찬성하여 대원군 납치안이 채택되었고,[12][15] 마건충, 정여창, 오장경 세 사람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15] 이는 조선의 개화 정책을 지속시키기 위한 조치로 여겨졌다.[15]
8월 20일, 오장경이 이끄는 회군 (의용군) 3,000명이 군함 3척의 호위를 받으며 남양만 마산포(현 경기도 화성시)에 상륙했다.[12][13][15] 김윤식도 이때 함께 귀국했다. 청군은 곧바로 한양으로 진주하여 일본군을 압도하는 병력을 배치했다.[12][15]
8월 26일, 오장경 등 청나라 장수들은 흥선대원군을 자신들의 군영으로 초청하여 연회를 열었다. 연회 도중 미리 약속된 신호에 따라[15] 청나라 군인들이 대원군을 체포하여 가마에 태워[15] 군함 '위원(威遠)' 호로 옮긴 뒤 톈진으로 압송했다.[15] 청나라는 대원군이 청 황제가 책봉한 조선 국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하려 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15] 대원군은 톈진에서 이홍장의 심문을 받았으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3년간 보정부에 유폐되었다.[15] 대원군 납치 소식에 미국 정부는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며 한반도에서의 봉건적 지배는 청국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입장을 밝혔다.[24]
대원군이 납치된 후, 청군은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던 군란 가담자들을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그중 11명을 사형에 처했다.[13] 이로써 군란은 진압되었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청나라의 신속하고 압도적인 군사 개입으로 인해, 먼저 제물포에 상륙해 있던 일본군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청나라의 조정을 받아들여 제물포 조약 체결에 응했다.[12]
4. 2. 일본의 개입

군란이 격화되면서 군중의 시선은 일본인들에게 향했다. 한 무리의 군중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 소위의 숙소로 쳐들어가 그를 살해했다. 또 다른 약 3,000명의 군중은 약탈한 무기로 무장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당시 공사관에는 주한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직원 17명, 공관 경찰 10명이 있었다. 군중은 공사관을 포위하고 안에 있는 모든 일본인을 죽이겠다고 외쳤다.
상황이 악화되자 하나부사 공사는 공사관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고, 중요 문서를 소각했다. 불길이 빠르게 번지는 틈을 타 공사관 직원들은 뒷문을 통해 탈출하여 제물포 항구로 피신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인천으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인천 관리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나, 서울의 상황이 전해지자 태도가 돌변하여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비를 맞으며 항구로 도망쳤고, 조선군의 추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6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생존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공해로 나갔다가 사흘 후 영국 측량선 HMS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하나부사 공사는 즉시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사건을 보고했다.[15] 일본에서는 자국민이 살해되고 공사관이 불탄 것에 대한 분노가 컸으며, 이는 일본의 국가적 명예를 훼손한 사건으로 여겨졌다.(Keene 2002, p.374) 일본 내에서는 조선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론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각지에서 의용병 지원자가 쇄도했다.[17] 일본 정부는 우선 하나부사 공사를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여 조선 정부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과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노우에 외무경은 시모노세키로 이동하여 직접 지휘를 맡았다.[15]
일본 정부는 하나부사 공사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조선 정부에 제시하도록 훈령했다.[15][12]
항목 | 내용 |
---|---|
1 | 조선 정부의 공식 사과 |
2 | 피해자 유족에 대한 부조료 지급 |
3 | 범인 및 책임자 처벌 |
4 | 손해 배상 (50만엔) |
5 |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허용 |
6 | (조선 정부 책임이 중대할 경우) 거제도 또는 울릉도 할양 |
7 | 조선 정부가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인천 점령 |
이후 훈령에는 함흥, 대구, 양화진 개시, 외교 사절의 내지 여행권, 통상 조약상의 권익 확대 등이 추가되었다.[15] 일본은 선발대로 군함 2척과 수송선 1척에 육군 병력 300명을 태워 파견했다.[15]
8월 5일, 주일 청국 공사 여서창(黎庶昌)이 일본 정부에 청나라의 조정을 제안했지만, 일본 외무경 대리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清成)는 조선은 "자주(自主)의 나라"이므로 양국 간의 문제는 조약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며 청의 개입을 거부했다.[15] 이에 청국 측은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내세우며 개입의 정당성을 주장했다.[15][23]
한편, 청나라는 8월 1일 주일 공사 여서창의 보고를 통해 군란 소식을 접했다.[12][15] 당시 이홍장은 모친상 중이었으므로, 북양대신 대리 장수성(張樹声)이 톈진에 머물던 조선 관료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자문을 구했다.[12][15] 민씨 정권의 개화파였던 이들은 사건을 수구파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일본의 군사 개입 가능성을 경고하며 청나라의 파병과 조정을 요청했다.[12][13][15] 8월 7일, 광서제는 조선 파병을 명했다.[15] 8월 10일,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이 이끄는 군함 3척이 외교 교섭을 맡은 마건충(馬建忠)과 어윤중을 태우고 제물포에 도착했다.[12][15][13]
8월 13일, 하나부사 전권 공사가 이끄는 일본 함대(군함 4척, 수송선 3척)와 육군 1개 대대 병력 천 수백 명이 제물포에 도착했다.[12][13][15] 일본 육군 지휘관은 다카시마 도모노스케(高島鞆之助) 육군소장, 해군 지휘관은 니레 가게노리(仁礼景範) 해군소장이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이미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했고, 병력 규모에서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자 일본은 적극적으로 군사 행동에 나서기 어려웠다. 현실을 인지한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비밀리에 흥선대원군의 쿠데타 정권을 인정하는 훈령을 작성하기도 했다.
8월 16일, 하나부사 공사는 2개 중대를 이끌고 파괴된 한성 공사관 터로 입경하여 창덕궁에서 고종을 만나고 대원군과도 회견했다.[12][15] 그는 일본 정부의 7개 항 요구 조건을 영의정 홍순목에게 전달했지만, 조선 정부는 고액의 배상금(50만엔) 마련 등을 이유로 즉답을 피하고 답변 기한 연기를 요청했다.[12][15] 이는 대원군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12]
8월 20일, 오장경이 이끄는 청나라 회군 3,000명이 남양만에 상륙하여 한성으로 진주했다.[12][13][15] 청나라 군대는 일본군보다 우세한 병력을 배치했다. 8월 23일, 하나부사 공사는 조선 측의 약속 불이행을 비난하며 인천으로 돌아가 군대를 정비했다.[12][15] 8월 24일, 하나부사는 인천에서 청나라의 마건충과 회담했다. 다음 날 재회담에서 마건충의 중재 약속을 받고 조선과의 재협상에 응하기로 했다.[12][15] 일본이 청의 조정을 받아들인 것은 청나라 군대와의 충돌을 피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12] 이 과정에서 개화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대원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본과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가능성이 있다.[15]
8월 26일, 마건충은 정여창, 오장경과 협의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기로 결정하고, 어윤중을 통해 고종에게 이를 통보했다.[12] 청나라 군대는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했다.
대원군 납치 이후 고종과 민씨 정권이 복귀하자, 청나라 마건충의 중재로 조선 정부는 제물포에 있던 하나부사 공사에게 사과문을 전달했다.[13] 하나부사는 이를 수락하고 일본 군함 금강 함상에서 협상 재개를 약속했다. 8월 28일 밤부터 조선 전권대신 이유원, 부관 김홍집 등이 금강함에서 하나부사와 협상을 시작했다.[11] 마건충의 사전 교섭 덕분에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어 8월 30일(음력 7월 17일), 6개 조항의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었다.[11] 동시에 조일수호조규 속약도 체결되었다.[11]
제물포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폭동 책임자 처벌
- 일본인 희생자 장례비 지급
- 피해 유족 및 부상자 위문금 지급 (5만엔)
- 일본 공사관 및 관원 피해 보상금 지급 (50만엔)
-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허용
- 조선 정부의 공식 사과 사절 파견
일본 측의 요구 대부분이 관철되었으며, 특히 조선 측이 강력히 반대한 거액의 배상금과 일본군 주둔 권리가 포함되었다.[11][25][26][27] 청나라는 조약 내용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으나, 대원군을 제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에게 유리한 협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18] 당시 청나라는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긴장 관계에 있어 일본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려 했고, 일본 역시 이노우에 외무경의 대청 협조 방침에 따라 강경 일변도는 아니었다.[18] 하나부사 공사는 조인 후 "대만족할 만한 조약을 체결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제물포 조약은 비준이 필요 없었으나, 조일수호조규 속약은 10월 30일 메이지 천황에 의해 비준되었다.[11][29]
5. 결과 및 평가
임오군란은 단순한 구식 군인들의 봉급 불만에서 시작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일시적 재집권과 외세의 개입을 거치면서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7]
국내적으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보수적인 척화파 세력이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정국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척족 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청나라의 양무 운동을 모델로 삼아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청나라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동시에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와의 갈등을 격화시켜 이후 갑신정변의 배경이 되었다.[7][26]
국외적으로는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청은 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상주시키고, 마젠창(馬建常)과 묄렌도르프 등 고문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숙이 간섭했다.[11][34] 특히 1882년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청나라 상인의 특권과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선을 속국으로 명시하는 등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어, 조선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경제적 예속을 심화시켰다.[11][26][31][32]
한편, 일본은 군란 중 입은 피해를 빌미로 조선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을 받고 공사관 경비를 명목으로 조선 내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확보했다.[7] 이는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발판이 되었으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 구도를 본격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임오군란은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을 약화시키고, 청나라의 종주권 강화와 일본의 세력 침투를 가속화하여 조선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 1. 국내적 영향
임오군란은 군 해직자 소요로 시작하여 척화파의 쿠데타로 발전했으나, 결과적으로 국내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척화파는 완전히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7] 대신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다수파이자 외척 세력인 온건개화파(사대당, 수구당)였다. 이들은 청나라의 양무 운동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반면, 김옥균 등을 중심으로 한 소수 급진개화파(개화당)는 이러한 온건적인 개화 노선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빠른 속도의 개혁을 추구하며 민씨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26] 이는 결국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척족 세력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7][26]군사적으로는 신식 군대였던 별기군이 해체되었다. 이후 개화파 관료들의 건의로 병조 산하에 훈련원을 설치하여 다시 신식 군대를 양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질적인 군권은 민씨 세력에게 넘어갔다. 특히 故 민겸호의 아들인 민영환을 위시한 민씨 외척들은 1884년 해방영(海防營)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다시 장악했다.[52]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인 1882년 9월 14일(음력 8월 5일), 개국과 개화를 국가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삼는다는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에서 고종은 동양의 전통 도덕을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 군사, 제도를 받아들이는 동도서기(東道西器)를 개화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기독교는 배척할 것을 명시하며 전국에 세워졌던 척화비의 철거를 명령했다.[30] 그러나 이러한 개화 정책은 청나라에 크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조영하, 김홍집 등은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개혁 방안인 '선후육책(善後六策)'을 제시하고 자문을 구하는 등,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개화가 진행되었다.[30]
민씨 정권은 청나라의 제도를 본떠 정치 개혁을 단행하여 외교·통상을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과 내정·군무를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설치했다.[34]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한성 주둔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일본군 주둔 병력은 비교적 규율이 잡혀 있었던 반면, 3,000명에 달하는 청나라 군대는 한성 곳곳에서 약탈과 폭행을 저질러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34]
한편, 임오군란 당시 충주로 피신했던 명성황후는 환궁하면서 한 명의 무당을 데려왔는데, 이 무당이 궁궐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34] 명성황후는 이 무당을 극진히 대우하며 매일 제사를 지내고 고관들에게도 이를 권유하여 막대한 국가 재정이 낭비되었다.[34] 또한 각지의 종교인들이 궁궐에 모여들고 매관매직이 다시 성행하는 등, 국내 정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34]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중 사이에서는 동학과 같은 종교적 성격의 반외세 움직임이 오히려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5. 2. 국외적 영향

대외적으로는 청과 결탁한 민씨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더욱 청에 의존하면서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다. 청나라는 원세개의 군대를 조선에 상주시키고 군사 고문을 보내 조선 군대를 감시했으며, 마젠창(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내정 및 재정 고문으로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섭했다.[11][34] 특히 청나라 조정의 사주를 받은 묄렌도르프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시켜 조선 경제를 교란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청나라는 군란 진압 후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으로 연행했으며,[7] 외교적 우위를 바탕으로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민씨 정권을 복귀시켰다.[7] 또한 우장칭(吳長慶)이 지휘하는 3,000명의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키고,[11][7] 원세개에게 군대 양성과 군제 개혁을 담당하게 하여 조선의 군사권을 장악했다.[11]
1882년 10월 4일, 청나라와 조선은 톈진에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11] 이 장정은 청나라 측 이홍장, 주복, 마건충(馬建忠)과 조선 측 조영하, 김홍집, 어윤중이 서명했으며,[11]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명확히 하고 속국 지배를 실질화하는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11][26][31][32] 장정 서문에서는 기존의 조공 관계가 불변함을 재확인하고, 이 장정이 청이 속방(屬邦)인 조선을 특별히 우대하는 조치임을 명시하여 다른 외국은 최혜국 대우를 받더라도 이 장정상의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규정했다.[11][30][33][15] 청나라 상인에게는 한성과 양화진에서의 점포 경영권 및 조선 내지 통상권 등 특권이 부여되었고,[11][30] 청에만 영사재판권이 주어지는 등 불평등 조항을 포함했다.[11][30] 특히 제1조에서는 청나라 북양대신이 조선 국왕과 동격임이 명시되었다.[32] 이 조약 체결로 청나라 상인의 수가 크게 증가하여 조선 상인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청나라는 '영약삼단(另約三端)'이라는 규정을 통해 조선의 외교 활동을 제약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1]
#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한다.
# 조선 공사는 중대 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1882년 8월 30일에는 일본과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군란 중 발생한 일본인 사상자와 공사관 등 일본 재산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과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 군대의 조선 주둔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7] 이로써 조선 반도는 청나라와 일본 양국 세력의 각축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본 내에서는 군란 소식이 전해지자 동포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민족주의적 여론이 비등했다.[38] 일본은 이 사건에서 청나라의 신속한 군사 행동에 뒤처졌고 군사적 열세를 절감하여, 이후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을 중심으로 군비 확장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39][40] 1882년 11월 24일, 메이지 천황은 군비 확장과 증세에 관한 칙유를 발표했고,[39] 1883년부터 군사비가 대폭 증액되었다.[26][40][41][42] 언론계에서도 변화가 나타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사신보』 사설에서 청나라가 일본 주도의 조선 "문명화"를 방해하는 적이라고 주장하며, 김옥균 등 조선 내 개화파(독립당) 세력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36][43]
결과적으로 임오군란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강화와 노골적인 내정 간섭을 초래했으며, 일본의 군비 확장과 조선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의지를 자극했다. 이는 향후 갑신정변과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6. 새로운 해석
2006년 7월 1일, 명성황후(대한제국 건국 전이므로 당시에는 중전 민씨)의 피난 행적이 상세히 기록된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가 발견되었다. 이 일기는 당시 중전 민씨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인물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51일간의 피난 생활 동안 일행의 숙소와 일정, 중전의 건강 상태 등이 자세히 담겨 있다.
특히,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입성한 날의 기록에는 '명성황후가 사람을 시켜 경성에 붙은 방문(榜文, 방을 붙여 알리는 글) 내용을 베껴오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개입을 직접 유도했다는 기존의 학설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일기에는 “중궁전하(명성황후)를 위한 탄원서를 청나라의 오장경 제독에게 전했는데, 곧 받들어 모셔오라는 희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기록도 있어, 명성황후의 환궁이 오장경과의 연락 이후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56] 이는 명성황후가 청의 개입을 일방적으로 요청했다기보다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환궁을 위해 청나라 측과 소통했음을 시사한다.
현재 이 자료는 대전광역시 한밭도서관 대전광역시향토사료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2008년 12월 2일 은진 송씨 제월당가 기탁유물 특별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일기의 발견으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역할과 청나라 개입 과정에 대한 보다 다각적인 연구가 가능해졌다.
7. 민겸호와 김보현 피살 당시 일화
임오군란 당시 난병들은 궁궐로 난입하여 고위 관리들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전(前) 선혜청 당상이자 당시 경기 관찰사였던 김보현 등이 살해되었다.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 역시 이때 살해되었다.
난병들이 궁궐 안에서 민겸호를 발견하여 끌고 가자, 그는 당황하여 흥선대원군을 바라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답하며 외면했다.[53] 대원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민겸호를 계단 아래로 내동댕이쳤고, 그 자리에서 살해한 뒤 총과 칼로 시신을 마구 훼손했다.[53][54]
한편, 김보현은 경기 감영에 있다가 변란 소식을 듣고 급히 입궐하려 승정원에 들렀다.[55] 당시 승지로 있던 조카 김영덕이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55] 김보현은 "내가 재상의 위치에 있고 직책을 맡고 있는데, 나라에 변고가 생겼다고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피하겠는가?"[55] 라고 말하며 입궐을 강행했다. 그러나 궁궐 돌층계에서 난병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55] 그 역시 흥선대원군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했으나, 대원군은 외면했다. 공교롭게도 김보현은 바로 그날 경기 관찰사에서 해임되어 명예직인 지중추부사로 옮겨진 상태였다.
난병들은 민겸호의 시신을 총칼로 다시 난도질했으며,[53] 김보현의 시신 역시 심하게 훼손했다. 특히 김보현의 시신은 발로 차이고 입을 찢어 엽전을 쑤셔 넣었는데, 돈이 가슴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전해진다.[55] 두 사람의 시신은 한성부 궁궐 앞 개천에 함께 버려졌다.[55] 마침 큰 비가 내려 개천에 물이 가득했고 날씨는 무더웠는데,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시신들이 며칠 동안 개천에 버려져 물에 불어 허옇게 흐물거리는 모습이 마치 썰어놓거나 씻어놓은 고기 같았다고 기록했다.[55] 백성들은 삼정의 문란의 원흉으로 지목되던 이들의 비참한 죽음을 보며 탐욕스러운 자들의 말로라고 조롱했고, 어린아이들조차 시신을 보며 비웃었다고 황현은 덧붙였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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