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1. 개요
민영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민치삼의 손자이자 민태호의 아들이다. 1877년 문과에 급제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1883년에는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했다. 갑신정변 당시 독립파에게 피습당했으나,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뉴턴 앨런의 치료를 받고 회복했다. 1886년 조로밀약 체결을 반대하여 청나라로 망명했고, 이후 홍콩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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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민영익 |
|---|---|
| 한글 | 민영익 |
| 한자 | 閔泳翊 |
| 가타카나 | ミン・ヨンイク |
| 로마자 표기 | Min Yeong-ik |
| 출생 | 1860년 10월 28일 |
|---|---|
| 사망 | 1914년 11월 17일 |
| 본관 | 여흥(驪興) |
| 직업 | 조선의 문신, 정치가 |
|---|---|
| 주요 활동 | 보빙사 부사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민족 운동가 |
| 가족 | 아버지: 민태호 어머니: 이씨 부인: 해주 최씨 아들: 민건식 딸: 민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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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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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하계 올림픽
1996년 하계 올림픽은 미국 애틀랜타에서 개최되어 26개 종목 271개 세부 종목으로 구성, 197개국이 참가했으나,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 폭탄 테러 사건과 재정적 성공, 도시 인프라 개선이라는 양면성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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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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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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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원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종손으로, 교육학자이자 대학교수, 교육행정 관료로서 서울대학교 교수, 문교부 차관, 여러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문교부 장관, 학술회 회원,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
서재필 -
김홍집
김홍집은 조선 말기 온건 개화파 정치가로서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주도했으나, 친일 정책과 단발령으로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때 살해당하며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으나 일본 간섭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 생애
민영익은 1860년에 태어나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민대호의 아들이다. 1877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고, 1878년 정삼품으로 승진하여 이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80년부터는 통리기무아문 당상 등을 역임하며 개화 정책 추진에 힘썼다.
1882년 8월 박영효를 수행하여 일본에 갔고, 1883년에는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아서 대통령을 알현하고 국서를 봉정한 뒤 유럽을 방문하고 1884년에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에게 습격당해 칼을 맞았으나,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뉴턴 앨런의 치료로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으로 실부 민대호를 잃었다.
1885년 4월, 고종의 명으로 톈진에 파견되어 흥선대원군의 귀국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7월 귀국하여 친군우영사, 협변(차석) 내무부사, 병조 판서가 되고 정이품으로 승진했다. 1886년에는 조로밀약 체결에 반대하여 청의 주차 조선 대사(원세개)에게 밀고했다가 옌타이로 망명했다.
2.1. 출생과 가계
민영익은 1860년 민태호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계비(인현왕후)로 책봉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고조부가 예조판서를 지낸 이후로는 권력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민태호는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콩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였다. 흥선대원군의 본부인 여흥부대부인은 민태호, 민규호와 촌수가 멀었고, 대원군 역시 척신을 미워하여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다.
민태호 부친, 즉 민영익의 조부의 초상 때 관을 살 돈이 없어 시신을 짚자리로 말아 출상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7세 되던 해인 1866년 민치록의 딸(명성황후)이 왕비로 책봉되면서부터였다. 민비 책봉 이전 몇 안 되는 과거 합격자였던 그의 숙부 민규호는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1870년 그의 부친도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유년기를 몰락한 양반 집안의 후예로 보냈던 민영익도 10대에 접어들면서 권문세가의 후예로 신분이 상승했다. 1874년 당시 민왕후(민비)의 오빠 민승호가 집으로 배달된 의문의 소포가 폭발해 사망했다. 민승호는 민치구의 아들로 태어나 민치록에게 입양된 명성황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2.2. 정치 활동
민대호의 아들이나, 민승호의 사후 양자로 들어갔다. 1877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고, 1878년 정삼품으로 승진하여 도승지와 의정부 유사당상, 이조 참판에 재직했다. 1880년 이후 통리기무아문 당상, 통리기무아문사를 역임하며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임오군란 이후인 1882년 8월 박영효를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 1883년에는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아서 대통령을 알현하고 국서를 봉정하였으며, 유럽을 방문하고 1884년 귀국했다.
1883년 5월 푸트 주한 미국 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자, 그해 7월 고종은 미국으로 보빙사(報聘使: 답례 사절)를 파견한다. 민영익은 보빙사의 정사 및 전권대신이 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주 대륙을 횡단한 다음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과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였다. 보스턴 등 각지를 순회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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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갑신정변에서 독립파 김옥균 등에게 습격당해 실부 민대호를 잃었지만, 민영익은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뉴턴 앨런의 치료를 받고 회복했다. 1885년 4월에는 고종의 명으로 톈진에 파견되어 대원군의 귀국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월에 귀국하여 친군우영사, 협변(차석) 내무부사, 병조 판서가 되고 정이품으로 승진했다. 1886년에는 조로밀약 체결에 반대하여 청의 주차 조선 대사(원세개)에게 밀고했기 때문에 옌타이로 망명했다.
2.2.1. 온건 개화파 활동
18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동도서기적 개화 정책을 지지하면서 별기군의 운영 책임을 맡았다. 1881년 이조참의,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 협판통리아문사무(協辦通理衙門事務)를 역임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왼쪽 얼굴에 칼을 맞아 크게 다치고 오른쪽 귀가 잘렸으며, 칼 33방을 맞았지만 알렌의 치료로 목숨을 건졌다.
1878년 정삼품으로 승진하여 도승지와 의정부 유사당상, 이조 참판에 재직했으며, 1880년 이후로는 통리기무아문 당상, 통리기무아문사를 역임하며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임오군란 이후인 1882년 8월 박영효를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 1883년에는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아서 대통령을 알현하고 국서를 봉정한 뒤 유럽을 방문하고 1884년 귀국했다. 같은 해 갑신정변에서 독립파 김옥균 등에게 습격당해 실부 민대호를 잃었지만, 민영익은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뉴턴 앨런의 치료를 받고 회복했다. 1885년 4월에는 고종의 명으로 톈진에 파견되어 대원군의 귀국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7월에 귀국하여 친군우영사, 협변(차석) 내무부사, 병조 판서가 되고 정이품으로 승진했다. 1886년에는 조로밀약 체결에 반대하여 청의 주차 조선 대사(원세개)에게 밀고했기 때문에 옌타이로 망명하였다.
2.2.2. 갑신정변과 피습
민승호의 사후에 양자로 들어갔으나, 실부는 민대호이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에게 습격당해 실부 민대호를 잃었다. 민영익은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뉴턴 앨런의 치료를 받고 회복했다. 1885년 4월 고종의 명으로 톈진에 파견되어 대원군의 귀국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2.2.3. 외교 활동
1883년 5월 푸트 주한 미국 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자, 그해 7월 고종은 미국으로 보빙사(報聘使: 답례 사절)를 파견한다. 민영익은 보빙사의 정사 및 전권대신이 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였다.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주 대륙을 횡단한 다음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과 회동하고 국서를 전하였다. 보스턴 등 각지를 순회하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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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망명과 죽음
1885년 군국기무아문 협판, 병조 판서, 한성 판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886년 조선 정부의 친러 거청(親露拒淸) 정책에 반대하여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이를 밀고했다가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여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
이후 귀국하여 1889년 판의금부사, 1894년 선혜청 당상이 되었다. 대한제국 성립 후 1898년 의정부 찬정이 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1910년 한일 병탄 소식을 들었음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상하이에서 체류하다 1914년 사망했다.
3. 평가
민영익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4. 가족 관계
5. 기타
그는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측의 권유로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로 일한 적도 있었다. 행서를 잘 썼으며 묵란도에도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