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꽁뚜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부꽁뚜언은 후 레 왕조의 뚜옌꽝진 수장의 아들로, 1669년 부친의 사망 이후 도독첨사로 임명되어 뚜옌꽝을 다스렸다. 1672년 반란을 일으킨 그는 청나라와 막 왕조 잔당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웠으나, 1689년 청나라의 협조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후 1699년 뚜옌꽝 지역에 청나라의 침입이 있었으나, 후 레 왕조의 노력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버우 주 - 부반멋
부반멋은 후 레 왕조 시기 뚜옌꽝 지역의 토장으로, 막 왕조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뚜옌꽝을 세습할 권리를 얻었으며 그의 통치 하에 뚜옌꽝진은 번영을 누렸다. - 버우 주 - 부반우옌
부반우옌은 막 왕조 시기 후 레 왕조의 신하로서 뚜옌꽝을 근거지로 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막당중에 대항하며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하려 한 인물이다. - 후 레 왕조의 군공 - 응우옌푹코앗
응우옌 푹 코앗은 베트남 응우옌 주의 제8대 군주로, 1744년 칭왕을 선포하고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캄보디아 내란 개입과 참파 속국화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사치와 과세로 서산당의 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후 레 왕조의 군공 - 찐끼엠
찐끼엠은 후 레 왕조의 개국공신 찐카의 후손으로, 응우옌낌 사후 정권을 장악하여 찐씨 가문이 후 레 왕조의 정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막 왕조를 여러 차례 북벌하고 태국공으로 진봉된 인물이다. - 1689년 사망 - 김수항
김수항은 서인 및 노론의 중진으로 예송 논쟁에서 서인 측 입장을 대변하고 영의정을 역임했으나 기사환국으로 유배되어 사사된 조선 시대 문신이다. - 1689년 사망 - 효의인황후
효의인황후는 청나라 강희제의 황후이자 옹정제의 양모로, 귀비에서 황귀비를 거쳐 황후가 되었으나 자녀는 없었고 옹정제 교육에 힘썼으며, 옹정제 즉위 후 시호를 받고 태묘에 배향되었다.
| 부꽁뚜언 | |
|---|---|
| 기본 정보 | |
| 휘 | Vũ Công Tuấn (武公俊) |
| 시호 | Đoan Túc (端肅) |
| 작위 | |
| 작위명 | Khoan Quận Công (寬郡公) |
2. 생애
부꽁뚜언의 가문은 대대로 후 레 왕조의 뚜옌꽝진(宣光鎭)의 수장(守將)을 맡아왔다.[1] 1669년 부친인 부꽁득이 살해되자 후 레 왕조는 부꽁뚜언을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하고 관군공(寬郡公) 작위를 내려 뚜옌꽝을 진수하게 했다.[1]
부꽁뚜언은 1672년 병사를 일으켜 후 레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2] 이후 청나라 운남(雲南)의 토관(土官) 농씨(儂氏)에게 의탁하여 스스로 소교강왕(小交岡王)을 칭하고, 막 왕조의 잔당과 결탁하였다.[3] 1685년과 1686년에는 베트남 북쪽 변경의 뚜옌흥(宣興) 일대를 약탈하여 소란을 일으켰으나, 조정에서 보낸 관병의 토벌에도 섬멸되지 않았다.[3]
찐호아 10년(1689년) 조정에서 파견한 장수가 운남 몽자(蒙自)의 토사(土司)에게 재물을 보내 소통한 뒤, 운남총독(雲南總督)이 운남성 내 세 지역을 조사하여 120여 명을 잡아 후 레 왕조에 보냈다. 이때 부꽁뚜언은 체포되어 주살되었고, 그의 당우들도 흩어져 버우 주는 무너졌다.[4]
찐호아 20년(1699년) 뚜옌꽝, 바오락(保樂) 지역에 청나라 안주(安州)의 잠지봉(岑池鳳) 부대가 침입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나, 후 레 왕조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유세 및 조정(調停)한 결과 해당 지역은 안정을 되찾았다.[5]
2. 1. 후 레 왕조와의 관계
부꽁뚜언의 가문은 대대로 후 레 왕조의 뚜옌꽝진(宣光鎭)의 수장(守將)을 맡아왔다.[1] 아버지인 부꽁득이 까인찌 7년(1669년) 음력 9월에 살해되자, 후 레 왕조는 부씨 가문이 "큰 훈공이 있으니 의로 보아 끊을 수 없다"고 하여 부꽁뚜언을 후계자로 삼았다.[1] 부꽁뚜언은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되고 관군공(寬郡公)의 작위를 받아 뚜옌꽝을 계속 진수했으며, 해당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1]부꽁뚜언은 후 레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즈엉득 원년(1672년) 음력 6월, 레 가종과 찐깐이 응우옌 주를 정벌하러 떠난 틈을 타 탕롱(하노이)에서 도망쳐 뚜옌꽝진으로 돌아가 부근 주의 백성들을 공격해 약탈하였다.[2]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은 그의 영향력과 강함을 '한편의 소동(騷動)이 되었다[一方為之騷動]'는 말로 묘사하였다.[2]
이후 부꽁뚜언은 청나라 운남(雲南)의 토관(土官) 농씨(儂氏)에게 의탁하여 스스로 소교강왕(小交岡王)을 칭하고, 막 왕조의 잔당과 결탁하였다.[3] 1685년과 1686년에 베트남 북쪽 변경의 뚜옌흥(宣興) 일대를 약탈하여 소란을 일으켰으나, 조정의 토벌에도 섬멸되지 않았다.[3]
찐호아 10년(1689년) 음력 6월, 조정에서 파견한 장수가 몽자(蒙自)의 토사(土司)에게 재물을 보내 소통하고 운남총독(雲南總督)이 운남성 내 여러 지역을 조사하여 120여 명을 잡아 후 레 왕조에 보냈다. 이 과정에서 부꽁뚜언은 체포되어 주살되었고, 그의 당우들도 흩어졌다.[4]
찐호아 20년(1699년), 뚜옌꽝, 바오락(保樂) 지역에 청나라 안주(安州)의 잠지봉(岑池鳳) 부대가 침입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나, 같은 해 음력 4월 후 레 왕조 조정의 유세와 조정으로 평온을 되찾았다.[5]
2. 2. 반란과 독자 세력 구축
부꽁뚜언의 가문은 대대로 후 레 왕조의 뚜옌꽝진(宣光鎭) 수장(守將)을 맡아왔다. 1669년 부친 부꽁득이 살해되자, 후 레 왕조는 부씨 가문의 공을 인정하여 부꽁뚜언을 후계자로 삼아 도독첨사(都督僉事) 및 관군공(寬郡公)으로 임명하고 뚜옌꽝을 계속 다스리게 했다.[1]부꽁뚜언은 후계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를 일으켜 후 레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1672년 레 가종과 찐깐이 응우옌 주 정벌을 위해 수도 탕롱을 비운 틈을 타, 뚜옌꽝진으로 도망쳐 주변 지역 백성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에는 그의 영향력이 '한편의 소동(騷動)이 되었다[一方為之騷動]'라고 기록되어 있다.[2]
이후 부꽁뚜언은 청나라 운남(雲南)의 토관(土官) 농씨(儂氏)에게 의탁하여 스스로 소교강왕(小交岡王)이라 칭하고, 막 왕조의 잔당과 결탁하였다. 1685년과 1686년에는 베트남 북쪽 변경 뚜옌흥(宣興) 일대를 약탈하기도 했다. 조정에서 관군을 보내 토벌하였으나, 부꽁뚜언 세력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다.[3]
1689년 후 레 왕조는 청나라 몽자(蒙自)의 토사(土司)에게 재물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고, 운남총독(雲南總督)의 조사를 통해 부꽁뚜언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의 세력은 와해되었다.[4]
1699년 뚜옌꽝, 바오락(保樂) 지역에 청나라 군대의 소요가 있었으나, 후 레 왕조 조정의 노력으로 평화를 되찾았다.[5]
2. 3. 청나라 및 막 왕조 잔당과의 연계
부꽁뚜언의 일족은 대대로 후 레 왕조의 뚜옌꽝진(宣光鎭)의 수장(守將)을 맡아왔다.[1] 부꽁득이 1669년 살해되자 후 레 왕조는 부꽁뚜언을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하고 관군공(寬郡公) 작위를 내려 뚜옌꽝을 진수하게 하였다.[1]부꽁뚜언은 1672년 병사를 일으켜 후 레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2] 레 가종과 찐깐이 응우옌 주를 정벌하러 떠난 틈을 타 탕롱(하노이)에서 도망쳐 뚜옌꽝진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2]
이후 부꽁뚜언은 청나라 운남(雲南)의 토관(土官) 농씨(儂氏)에게 의탁하여 스스로 소교강왕(小交岡王)을 칭하고, 막 왕조의 잔당인 막낀쭈(莫敬晭), 막낀토(莫敬璹) 등과 결탁하였다.[3] 1685년과 1686년에는 베트남 북쪽 변경의 뚜옌흥(宣興) 일대를 약탈하였으나, 조정의 토벌에도 섬멸되지 않았다.[3]
1689년 조정은 몽자(蒙自)의 토사(土司) 이세병(李世屛)에게 재물을 보내 소통하였고, 운남총독(雲南總督)이 운남성 내 세 지역을 조사하여 120여 명을 잡아 후 레 왕조에 보냈다.[4] 부꽁뚜언은 체포되어 주살되었고, 그의 당우들도 흩어졌다.[4]
1699년 뚜옌꽝, 바오락(保樂) 지역에 청나라 안주(安州)의 잠지봉(岑池鳳) 부대가 침입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나, 조정의 유세와 조정으로 평온을 되찾았다.[5]
2. 4. 최후
부꽁뚜언의 일족은 대대로 후 레 왕조의 뚜옌꽝진(宣光鎭)의 수장(守將)을 맡아왔다.[1] 1669년 부친인 부꽁득이 살해되자 후 레 왕조는 부꽁뚜언을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하고 관군공(寬郡公) 작위를 내려 뚜옌꽝을 진수하게 했다.[1]부꽁뚜언은 1672년 병사를 일으켜 후 레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2] 이후 청나라 운남(雲南)의 토관(土官) 농씨(儂氏)에게 의탁하여 스스로 소교강왕(小交岡王)을 칭하고, 막 왕조의 잔당과 결탁하였다.[3] 1685년과 1686년에는 베트남 북쪽 변경의 뚜옌흥(宣興) 일대를 약탈하여 소란을 일으켰으나, 조정에서 보낸 관병의 토벌에도 섬멸되지 않았다.[3]
1689년 조정에서 파견한 장수가 운남 몽자(蒙自)의 토사(土司)에게 재물을 보내 소통한 뒤, 운남총독(雲南總督)이 운남성 내 세 지역을 조사하여 120여 명을 잡아 후 레 왕조에 보냈다. 이때 부꽁뚜언은 체포되어 주살되었고, 그의 당우들도 흩어져 버우 주는 무너졌다.[4]
1699년 뚜옌꽝, 바오락(保樂) 지역에 청나라 안주(安州)의 잠지봉(岑池鳳) 부대가 침입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나, 후 레 왕조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 유세 및 조정(調停)한 결과 해당 지역은 안정을 되찾았다.[5]
3. 사후 뚜옌꽝 지역의 정세
참조
[1]
서적
大越史記全書·本紀續編·黎紀·玄宗穆皇帝
http://www.nomfounda[...]
東京大學東洋文化硏究所
[2]
서적
《大越史記全書·本紀續編·黎紀·嘉宗美皇帝》
http://www.nomfounda[...]
東京大學東洋文化硏究所
[3]
서적
《大越史記全書·越史續編·黎紀·熙宗章皇帝》
http://www.nomfounda[...]
東京大學東洋文化硏究所
[4]
서적
《大越史記全書·越史續編·黎紀·熙宗章皇帝》
http://www.nomfounda[...]
東京大學東洋文化硏究所
[5]
서적
《大越史記全書·越史續編·黎紀·熙宗章皇帝》
http://www.nomfounda[...]
東京大學東洋文化硏究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