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선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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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 선무제는 북위 효문제의 둘째 아들로, 499년 효문제의 사망으로 17세의 나이에 즉위한 북위의 황제이다. 즉위 후 양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유연에 대타격을 입혔으나, 불교에 심취하여 국정을 외척 고조에게 맡겼다. 고조의 권력 강화와 황족 숙청으로 정국이 혼란해졌으며, 515년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뤄양에 묻혔으며, 현재 뤄양 고대 무덤 박물관에 능묘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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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선무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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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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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 499년 5월 7일 ~ 515년 2월 12일 |
휘 | 원각(元恪) |
묘호 | 세종(世宗) |
시호 | 선무황제(宣武皇帝) |
능호 | 경릉(景陵) |
신상 정보 | |
출생 | 483년 |
사망 | 515년 2월 12일 |
아버지 | 북위 효문제(孝文帝) |
어머니 | 문소황후(文昭皇后) |
왕조 | |
성씨 | 초기: 탁발(Tuoba, 拓拔) 496년 이후: 원(Yuán, 元) |
왕조 | 북위(Northern Wei) |
통치 | |
연호 | 경명(景明): 500년 ~ 503년 정시(正始): 504년 ~ 508년 영평(永平): 508년 ~ 512년 연창(延昌): 512년 ~ 515년 |
계승자 | 북위 효명제(Emperor Xiaoming of Northern Wei) |
배우자 | |
배우자 유형 | 후궁 |
황후 | 우황후(于皇后) 고황후(高英) 영황후(靈皇后) 호씨(胡氏) |
2. 생애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숙부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상서령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5]
재위 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넓혔고, 북방의 유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열렬한 불교 신자였기에, 점차 불교 신앙에 빠져들었다. 501년, 국정을 측근과 외척인 고조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으며,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5] 508년 고조의 진언으로 숙부 원희와 팽성왕 원협, 이복동생 경조왕 원유 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왕숙에게도 자살을 명령했다.[5]
효문제처럼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뤄양 교외에 매장되었다.[5]
2. 1. 즉위 전
483년 윤4월, 효문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귀인 고조용(고구려인)이다. 총명하고 배려심이 깊었으며, 미남이었다고 한다.[4] 496년, 효문제는 황족의 성씨를 탁발에서 원(元)으로 바꾸었고, 그 이후부터는 원각(元恪)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96년 12월, 이복 형인 원순이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자, 497년 1월에 원각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4] 그해 말, 평성에 있던 고조영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뤄양으로 갔지만, 도중에 사망했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그녀가 원각을 직접 키우고 싶어했던 효문제의 황후 풍윤 황후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믿는다.
499년 4월, 효문제가 남제에 대한 원정 중 병으로 사망했다. 효문제의 형제인 원협 팽성왕은 긴급히 철수하는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원협은 원각을 군대에 합류시키기 위해 소환하면서 효문제의 죽음을 비밀로 유지했다. 원각의 측근들은 원협이 왕위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지만, 원협은 원각을 만나자 존경심을 보이며 충성을 확신시켰다. 16세의 원각은 군대가 뤄양으로 돌아오기 전에 뤄양(魯陽, 현재의 허난성 핑딩산)에서 선무제로 즉위했다.
2. 2. 즉위와 통치
499년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17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숙부인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상서령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5]재위 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했고, 북방에서는 유연에 대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불교 신자였고 점차 불교 신앙에 빠졌다.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으며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 508년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원협,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 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했다.
선무제는 처음에 인기가 많고 평판이 좋았던 원협을 재상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원협이 거절하여 대신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정무는 효문제의 형제인 원희 (元禧) 선양왕(咸陽王)과 원상 (元詳) 북해왕(北海王), 효문제의 사촌인 원징 (元澄) 임성왕(任城王), 효문제의 먼 친척인 원가 (元嘉) 광양왕(廣陽王), 그리고 관리인 왕숙 (王肅)과 송변 (宋弁) 등 6명의 관리가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원징은 왕숙을 반역 혐의로 잘못 체포하여 곧 해임되었다. 500년, 선무제는 원협을 재상으로 다시 불렀다.
선무제는 뤄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니 고씨를 황후로 추존하고,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高顯), 사촌 고맹(高猛)을 공작으로 봉했다. 특히 고조는 선무제의 통치 기간 동안 점점 더 강력한 권력을 얻었다.
500년, 소보권 황제의 폭정으로 혼란에 빠진 남제(南齊)에서 남제 장수 배숙업이 소보권의 불리한 조치를 두려워하여 수양(壽陽, 현대의 루안시, 안후이성)을 북위에 항복하면서 북위는 중요한 도시를 병합했다. 그러나 북위는 남제가 장군 최혜경과 소연의 반란으로 내전에 휩싸였을 때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501년, 장군 유렬(于烈)과 원상은 선무제에게 원희가 부패하고 원협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고 있다고 경고하며 그들의 직위에서 해임할 것을 제안했다. 선무제는 그렇게 했고, 공식적으로 정무를 직접 맡았지만, 나이가 어려 실제로 정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뢰하는 측근들과 고조가 더욱 강력해지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를 북위 쇠퇴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501년 말, 자신의 권력이 삭감되고 살해될 것을 두려워한 원희는 황하 남쪽의 지방을 분리하려는 반란을 계획했다. 그러나 그의 음모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 시점부터 선무제는 황족 구성원에 대해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
501년 10월 5일,[5] 선무제는 유렬의 조카인 유소의를 황후로 책봉했다.
그해 말, 소연의 군대가 소보권을 격파하자 선무제의 장군 원영은 남제의 내전을 틈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남제를 점령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선무제는 소규모 공격만 허가했고, 이는 일반적으로 성과가 없었다. 소연은 곧 소보권을 격파하고 502년에는 남제를 전복하고 양나라를 무제(武帝)로 세웠다. 양나라 장군 진백지는 그 후 강주(江州, 현대의 장시성 및 푸젠성)를 북위에 항복하려 했지만, 양나라 군대는 진과 그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북위 군대를 모두 격파했고, 진은 북위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두 라이벌 사이에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으며, 특히 북위가 소연이 남제 황족 구성원을 죽이기 시작하자 남제 왕자 소보인을 제나라 왕으로 책봉하고 남제를 재건하는 것을 돕겠다고 발표하면서 전쟁이 더욱 심화되었다.
504년, 원희의 직위를 승계한 원상이 고조에게 부패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는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곧 사망했다. 고조의 제안에 따라, 그리고 원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무제는 그 후 황족 왕자들을 엄중히 감시하여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두었다.
한편, 양나라와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양측 모두 승패를 거듭했지만, 북위는 505년에 양나라 장군 하후도천이 남정(南鄭, 현대의 한중시, 산시성)과 주변 지역을 북위에 항복하면서 상당한 이득을 얻었으며, 506년 봄에는 반독립국 추치를 추가로 병합했다. 505년 겨울, 양나라는 무제의 동생 소굉 임천왕(臨川王)이 지휘하는 국경 동쪽에서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으나, 소굉이 무능한 장군이었고 506년 여름 뤄커우(洛口, 현대의 벙부시, 안후이성)에서 군대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야경증 상황이 발생하여 양나라 군대는 북위 군대와 교전하지도 않고 스스로 붕괴되었다. 원영과 소보인은 양나라 요새 중리 (鍾離, 현대의 추저우시, 안후이성)를 공격했지만, 507년 봄 양나라 장군 위예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두 나라는 그 후 서로에 대한 군사 활동을 대체로 중단했다.
507년 겨울, 유황후가 갑자기 사망했고, 508년 초에는 그녀의 어린 아들인 원창(元昌), 당시 선무제의 유일한 아들이 갑자기 사망했다. 고조가 그 시점까지 지나치게 강력해졌고 그의 조카인 고소의가 선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이었기 때문에 고조와 고씨가 그들을 살해했다는 의혹이 컸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508년, 선무제는 원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씨를 유씨를 대신하여 황후로 책봉했고, 이 시점부터 고조는 원협을 원망하게 되었다.
2. 3. 황족 숙청과 죽음
501년, 선무제는 국정을 측근과 외척인 고조에게 위임하고 친정을 시작했으나,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5] 508년 고조의 진언으로 숙부 원희와 그의 막내 동생인 팽성왕 원협, 이복동생 경조왕 원유 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왕숙에게도 자살을 명령했다.[5]선무제는 아버지 효문제처럼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여, 뤄양 교외에 매장되었다.[5]
3.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
순황후 우씨(488~507) | 제1황자: 왕자 원창(506~508) |
숭헌황후 고영(~518) | |
영황후 호씨(?~528) | 제3황자: 태자 원후(510~528) |
귀빈 사마현자(491~521)[7] | |
귀화 왕보현(487~513)[8] | |
빈 이씨 | |
생모 미상 |
4. 연호
연호 | 기간 | 육십간지 |
---|---|---|
경명(景明) | 500년 ~ 504년 | 경진(庚辰) ~ 갑신(甲申) |
정시(正始) | 504년 ~ 508년 | 갑신(甲申) ~ 무자(戊子) |
영평(永平) | 508년 ~ 512년 | 무자(戊子) ~ 임진(壬辰) |
연창(延昌) | 512년 ~ 515년 | 임진(壬辰) ~ 을미(乙未) |
5. 능묘
뤄양 북쪽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현재 뤄양 고대 무덤 박물관의 일부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능묘는 다른 맹산 능묘군과 함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1992년에 도굴을 당하여 유적 보호를 위해 긴급 발굴되었다. 판축으로 만들어진 원형의 능은 지름 112m, 높이 약 23m~24m이며, 중심의 지하에 있는 방형의 묘실에서 남쪽으로 묘도가 뻗어 있다. 연장선상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 높이 4m의 거대한 석인상이 있었지만, 도굴로 인해 현재는 머리가 없어졌다.[1]
참조
[1]
서적
Book of Wei
[2]
서적
Book of Wei
[3]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4]
서적
Book of Wei
[5]
서적
Book of Wei
[6]
서적
Book of Wei
[7]
문서
第一貴嬪司馬顕姿墓誌銘
[8]
문서
貴華夫人王普賢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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