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효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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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 효문제는 북위의 제5대 황제이다. 467년에 태어나 471년에 즉위했으며, 499년에 사망했다. 그는 풍태후의 섭정 하에 즉위하여, 풍태후 사후 친정을 시작했다. 효문제는 중앙집권 강화와 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 선비족의 성씨를 한족식으로 바꾸는 등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치세는 북위의 최전성기로 평가받지만, 급격한 한화 정책은 선비족의 반발을 초래하여, 사후 북위의 분열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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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효문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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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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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황제 |
성 | 원래: 퉈바(拓拔) 이후: 원(元, 496년 변경) |
이름 | 홍(宏) |
묘호 | 고조(高祖) |
시호 | 효문황제(孝文皇帝, "효성스럽고 문명한") |
출생일 | 467년 10월 13일 |
사망일 | 499년 4월 26일 (31세) |
매장지 | 장릉(長陵) |
재위 | |
국가 | 북위 |
기간 | 471년 9월 20일 ~ 499년 4월 26일 |
이전 | 헌문제 |
이후 | 선무제 |
섭정 | 문성문명황후 풍씨 (490년까지) |
연호 | 연흥(延興): 471년–476년 승명(承明): 476년 태화(太和): 477년–499년 |
가계 | |
아버지 | 헌문제 |
어머니 | 사황후 이씨 |
배우자 | 풍청 유황후 풍씨 문조황후 정황후 |
자녀 | 참조 |
기타 | |
왕조 | 원 (탁발) |
2. 생애
헌문제의 맏아들로 467년에 태어났다. 효문제의 생모 이씨(李氏)는 469년 북위의 황태자 생모를 죽이는 풍습인 자귀모사(子貴母死)에 의해 자결을 강요당했다.[20] 471년 아버지 헌문제가 적모(嫡母) 풍태후와 대립하다 패하고 풍태후의 압박으로 반강제로 양위하여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효문제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20] 즉위한 뒤 대대적인 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고쳤다.
490년 풍태후가 사망하면서 효문제는 직접 정치를 하기 시작했지만, 풍태후의 정책은 그대로 이어받아 북위의 중앙집권과 한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20]
493년 효문제는 제나라 원정을 구실로 삼아 반대를 무릅쓰고 산서성 대동시 평성(平城)에서 낙양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장군들의 남정(南征)에 대한 간언을 따르는 조건으로 낙양 천도를 실현시켰다고 한다.[20]
효문제는 선비족의 성씨를 한풍(중국풍)으로 고치기로 하고 국성(國姓)을 탁발씨에서 원(元)씨로 고쳤으며, 신하들에게도 반강제적으로 한풍 성씨를 하사하였다. 그 밖에도 선비어를 포함한 선비족의 말과 복장 비롯한 선비족의 풍습을 금지시키고 선비식 관명을 배제하는 등 선비의 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20]
나아가 한족과 마찬가지로 선비족 귀족의 등급을 매기고 선비족과 한인 명족(名族)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선비와 한인의 융화, 한인 사회에서의 선비의 명족으로써의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또한 한족의 구품관인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본뜬 북조귀족제를 성립시켰다.[20]
499년 효문제는 곡당원(谷塘原)의 행궁(行宮)에서 33세로 붕어하였다.[20]
2. 1. 출생과 즉위
헌문제의 맏아들로 467년에 태어났다. 효문제의 생모 이씨(李氏)는 469년 북위의 황태자 생모를 죽이는 풍습인 자귀모사(子貴母死)에 의해 자결을 강요당했다.[20] 471년 아버지 헌문제가 적모(嫡母) 풍태후와 대립하다 패하고 풍태후의 압박으로 반강제로 양위하여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효문제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20] 즉위한 뒤 대대적인 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고쳤다.2. 2. 풍태후의 섭정 (476년 ~ 490년)
풍태후는 헌문제의 치세 때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수렴 정치를 펼쳤는데, 헌문제를 퇴위시키고 효문제를 즉위시켰을 때 효문제는 겨우 다섯 살이었기에, 다시금 어린 황제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는 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풍태후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기에 반란을 진압하고 반록제, 삼장제, 균전제 등의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고 중앙 재정(공조公調)과 지방재정(조외調外)을 분리[21]하는 등 북위의 중앙집권화에 힘써 많은 치적을 쌓았다.대태후 풍씨는 이전보다 더 독재적이었지만, 현명한 결정과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녀는 문학에 매우 능했을 뿐만 아니라 수학에도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환관들을 신뢰하여 그들이 정부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연인인 왕예(王叡)와 이충(李沖)을 크게 승진시켰는데, 둘 다 재능 있는 관료였지만, 그들의 승진은 재능과 공헌에 비해 과도했다. 연인이 아닌 존경받는 관리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평판을 유지했다. 부도덕한 행위로 비난받을까 우려하여, 그녀를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사람들을 사형을 포함한 가혹한 처벌로 다스렸다. 희생자 중 한 명은 이신(李訢)이었는데, 그는 이전에 그녀의 연인 이역(李奕)의 죽음에 기여했기 때문에 477년에 처형되었다. 효문제의 모친 가문이 권력을 잡으려 할까 두려워, 478년에 그의 외조부 남군왕 이혜(李惠)를 반역죄로 허위 고발하여 그와 그의 일족을 몰살했다. 사회 계층화를 포함한 한화 정책을 가속화했는데, 478년에 사람들에게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혼하도록 요구하는 조칙을 발표했다.
북위는 480년대에 한족(漢族) 엘리트들이 선비족 탁발 황족의 딸과 결혼하도록 주선하기 시작했다.[8] 일부 한족 망명 황족들은 남중국에서 도망쳐 선비족에게 귀순했다. 선비족 효문제의 여러 딸들이 한족 엘리트와 결혼했는데, 한족 유송의 황족 유휘(劉輝)는 북위의 란릉공주(蘭陵公主)와 결혼했고,[9][10] 화양공주(華陽公主)는 진(266-420) 왕족의 후손인 사마비(司馬朏)와, 제남공주(濟南公主)는 노도건(盧道虔)과, 남양장공주(南陽長公主)는 소보인과 결혼했는데, 그는 남제 왕족의 일원이었다.[11] 북위 효장제의 누이인 수양공주(壽陽公主)는 양나라의 통치자 양 무제의 아들 소종(蕭綜)과 결혼했다.[12]

481년에 불교 승려 법수(法秀)는 평성(平城)에서 민중 봉기를 시도했지만 발각되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일부 관리들은 모든 불교 승려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대태후 풍씨는 거부했다. 또한 그 해, 평성 근처의 방산(方山)에 자신의 미래 묘를 짓기 시작했고, 죽은 후 남편인 문성제와 함께 묻히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지시를 남겼는데, 문성제는 옛 북위 수도였던 신락(盛樂, 현재의 후허하오터, 내몽골) 근처에 묻혔다. 그 해 말, 고려(高呂)에게 쓰도록 위임한 새로운 형법이 완성되었는데, 832개 조항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16개는 일족 몰살을, 235개는 개인 사형을, 377개는 다른 형태의 처벌을 규정했다.
효문제가 권력을 잡는 동안, 대태후 풍씨는 그를 구금하고 그의 동생 탁발희(拓拔禧)를 옹립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측근들이 그녀를 설득했다. 대태후 풍씨는 그에게 공식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483년경에는 그가 정부를 상당히 장악한 것으로 보였고, 대태후 풍씨는 상당한 권력을 유지했다. 실제로 그 해, 효문제의 후궁 임빈(林嬪)이 그의 장남 탁발순을 낳은 후, 북위의 관습에 따라 임빈은 자살하도록 강요받았는데, 이는 그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는 탁발순을 직접 길렀다. 485년, 효문제가 그의 남동생들을 왕으로 봉한 후, 대태후 풍씨는 이 왕자들을 위한 황실 학교를 설립했다.
계모와 의붓아들 사이의 권력 분배는 489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문성제의 동생인 여음왕 탁발천사(拓拔天賜)와 남안왕 탁발진(拓拔楨)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대태후 풍씨와 효문제는 공동으로 황실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의 처벌을 논의했다. 대태후 풍씨는 관리들에게 "우리는 가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법을 파괴해야 할까요, 아니면 가족 관계를 무시하고 법을 따라야 할까요?"라고 질문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관리들은 대체로 왕자들의 목숨을 구명해 달라고 간청했다. 대태후 풍씨가 침묵하자, 효문제가 말했다. "두 왕자가 저지른 범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대태후께서는 고종[문성제의 묘호]의 형제애를 본받고 계십니다. 게다가, 남안왕은 그의 어머니에게 지극히 효도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사형을 면하고,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며, 정치적 권리가 없는 평민 신분으로 강등될 것입니다."
풍태후는 태화(太和) 14년(490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 효문제는 풍태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닷새 동안이나 식사를 들지 않고 넉 달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풍태후가 실제로 효문제의 생모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2. 3. 친정과 한화 정책 (490년 ~ 499년)
490년 태화(太和) 14년, 풍태후가 사망하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풍태후의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어 북위는 중앙집권과 한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20]493년 효문제는 제나라 원정을 구실로 삼아 반대를 무릅쓰고 산서성 대동시 평성(平城)에서 낙양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장군들의 남정(南征)에 대한 간언을 따르는 조건으로 낙양 천도를 실현시켰다고 한다.[20]
효문제는 선비족의 성씨를 한풍(중국풍)으로 고치기로 하고 국성(國姓)을 탁발씨에서 원(元)씨로 고쳤으며, 신하들에게도 반강제적으로 한풍 성씨를 하사하였다. 그 밖에도 선비어를 포함한 선비족의 말과 복장 비롯한 선비족의 풍습을 금지시키고 선비식 관명을 배제하는 등 선비의 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20]
나아가 한족과 마찬가지로 선비족 귀족의 등급을 매기고 선비족과 한인 명족(名族)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선비와 한인의 융화, 한인 사회에서의 선비의 명족으로써의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또한 한족의 구품관인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본뜬 북조귀족제를 성립시켰다.[20]
이러한 효문제의 한화 정책은 거친 기마 민족이 한족의 문명에 동경하여 문명화를 추진했다는 기존의 해석과 달리, 최근의 역사학에서는 당시 북중국의 사회와 북위 왕조에 필요한 것이 한화였다는 설도 등장하고 있다.
499년 효문제는 곡당원(谷塘原)의 행궁(行宮)에서 33세로 붕어하였다.[20]
2. 4. 죽음
태화 23년(499년) 4월 초하루(양력 4월 26일), 효문제는 곡당원(谷塘原)의 행궁(行宮)에서 33세로 붕어하였다.[20]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효문황제(孝文皇帝)였다.[20]효문제는 남제 장군 진현달(陳顯達)의 보복 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하던 중 사망했다.[20] 원사와 원징은 효문제의 시신이 낙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죽음을 비밀로 유지했고, 그 후 그의 죽음을 발표했다. 효문제의 뒤를 이어 원각이 선무제로 즉위했다.[20] 효문제는 유언을 남겨 풍황후에게 자결을 명했다.[20]
3. 효문제의 개혁에 대한 평가
효문제의 치세에 북위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효문제는 풍태후의 개혁을 이어받아 보다 나아간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북위는 그때까지의 유목민 중심의 국가 체제에서 보편적인 국가 체제로 변모하였고, 훗날 수나라에 의한 중원 왕조의 재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급격한 한화정책 추진으로 북위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선비족 고유의 소박한 상무 정신이 사치와 문약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지배층이었던 선비족의 불만을 초래하였는데, 496년 옛 도읍 평성에서 일어난 반란에는 효문제의 맏아들로 황태자였던 원순도 가담했을 정도였다. 반란은 단기간에 진압되었고 효문제는 맏아들 원순을 폐적시키고 처형하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불만은 사그러들지 않았고, 효문제 사후 육진의 난(523년)이라는 반란으로 북위의 동서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19]
4. 가계도
배우자 | 자녀 |
---|---|
폐황후 풍씨 | 없음 |
유황후 풍씨 | 없음 |
문소황후 고씨 | 제2황자 원각 (선무제) |
제5황자 원회 (무목제) | |
황손 원수 (효무제) | |
장락공주 | |
폐황후 임씨 | 제1황자 폐태자 원순 |
소의 풍씨 | 없음 |
귀인 원씨 | 제3황자 원유 (서위 문경제) |
부인 나씨 | 제4황자 원역 (동위 문헌제) |
제6황자 원열 | |
부인 이씨 | 없음 |
빈 조씨 | 의양공주 |
대빈 정씨 | 없음 |
소빈 정씨 | 제7황자 은왕 원조 |
빈 왕씨 | 없음 |
대빈 최씨 | 없음 |
소빈 최씨 | 없음 |
빈 위씨 | 없음 |
빈 노씨 | 없음 |
생모 미상 | 난릉공주 |
회양공주 | |
화양공주 | |
서하공주 | |
순양공주 | |
시평공주 | |
제남공주 | |
의양공주 | |
고평공주 | |
남양공주 |
5. 연호
효문제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
서력 (西曆) | 471년 | 472년 | 473년 | 474년 | 475년 | 476년 | 477년 | 478년 | 479년 | 480년 |
간지 (干支) | 신해(辛亥) | 임자(壬子) | 계축(癸丑) | 갑인(甲寅) | 을묘(乙卯) | 병진(丙辰) | 정사(丁巳) | 무오(戊午) | 기미(己未) | 경신(庚申) |
연호 (年號) | 연흥(延興)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승명(承明) 원년 | 태화(太和) 원년 | 2년 | 3년 | 4년 |
효문제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16년 | 17년 | 18년 | 19년 | 20년 |
서력 (西曆) | 481년 | 482년 | 483년 | 484년 | 485년 | 486년 | 487년 | 488년 | 489년 | 490년 |
간지 (干支) | 신유(辛酉) | 임술(壬戌) | 계해(癸亥) | 갑자(甲子) | 을축(乙丑) | 병인(丙寅) | 정묘(丁卯) | 무진(戊辰) | 기사(己巳) | 경오(庚午) |
연호 (年號)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효문제 | 21년 | 22년 | 23년 | 24년 | 25년 | 26년 | 27년 | 28년 | 29년 | |
서력 (西曆) | 491년 | 492년 | 493년 | 494년 | 495년 | 496년 | 497년 | 498년 | 499년 | |
간지 (干支) | 신미(辛未) | 임신(壬申) | 계유(癸酉) | 갑술(甲戌) | 을해(乙亥) | 병자(丙子) | 정축(丁丑) | 무인(戊寅) | 기묘(己卯) | |
연호 (年號) | 15년 | 16년 | 17년 | 18년 | 19년 | 20년 | 21년 | 22년 | 23년 |
참조
[1]
간행물
bingwu day of the 8th month of the 5th year of the Huangxing era, per volume 7 (part 1) of Book of Wei
[2]
간행물
wushen day of the 8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Huangxing era, per volume 7 (part 1) of Book of Wei
[3]
간행물
bingwu (1st) day of the 4th month of the 23rd year of the Taihe era, per volume 7 (part 2) of Book of Wei
[4]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5]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2, The Six Dynasties, 220-589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6]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2, The Six Dynasties, 220–589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7]
서적
The Economic History of China: From Antiquity to the Nineteenth Century
2016
[8]
서적
Marriage and Inequality in Chinese Societ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
서적
Lee
2014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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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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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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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Metropolitan Museum of Art
[12]
서적
Ancient and Early Medieval Chinese Literature (vol.3 & 4): A Reference Guide, Part Three & Four
https://books.google[...]
BRILL
2014-09-22
[13]
간행물
See Zizhi Tongjian, vol. 135.
[14]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15]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Part Two: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2 vols)
https://books.google[...]
BRILL
2009-11-23
[16]
서적
魏書』高祖紀
[17]
서적
川本芳昭、講談社『中国の歴史』第5巻、P. 231
[18]
서적
宮脇2018
[19]
서적
한편 형사취수에 따라 효문제의 친어머니는 사실 풍태후였다는 설도 당시부터 존재하고 있었다(川本芳昭、講談社『中国の歴史』第5巻、P. 231).
[20]
서적
전한(前漢) 이래 지방에 모인 조세는 지배호수 1호당 정액을 매겨서 정해진 공납액만 중앙에 보내고 나머지는 양에 상관없이 지방 관청의 비용으로 쓰였다. 이에 대해 정부의 중앙 집권이라는 점에서 지역 주군이 쓸 수 있는 비용의 제한을 두었던 것이다(渡邊信一郎『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汲古書院、2010年)第9章「北魏の財政構造」(原論文発表2002年))
[21]
문서
6진은 평성 주변을 방위하던 6곳의 군사 주둔지였고, 예로부터 선비족의 유력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매우 중요시 되어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수도를 천도한 뒤 대우가 나빠지면서 주둔 군인의 불만이 쌓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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