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는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주도하여 일어난 쿠데타로,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강력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받는다. 총재 정부의 무능과 나폴레옹의 군사적 명성을 배경으로, 시에예스의 계획 하에 나폴레옹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시에예스가 주도하고 나폴레옹은 칼의 역할이었으나, 나폴레옹은 권력을 장악하여 시에예스를 배제하고, 통령 정부를 수립한 후 1804년 황제로 즉위하여 프랑스 제1제정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종말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후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와 프랑스의 정치적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쿠데타 -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는 1797년 프랑스 총재정부가 군사력을 동원하여 왕당파의 부상을 억누르고 권력을 강화한 사건으로, 선거 결과 무효화 및 반대파 숙청을 통해 공화정을 유지했으나 민주주의 원칙 훼손 및 공포 정치 연장 비판을 받는다. - 프랑스의 쿠데타 - 1851년 프랑스 쿠데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에 대한 불만과 국민의회와의 갈등 속에서 군부를 장악하여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 1799년 프랑스 - 공화력 8년 헌법
공화력 8년 헌법은 나폴레옹의 쿠데타 후 프랑스에 수립된 헌법으로, 나폴레옹을 제1통령으로 하는 통령정부를 통해 행정 권력을 집중시키고, 권한이 축소된 삼원제 입법부와 간접 선거 방식, 그리고 행정부 지원을 위한 국무원 신설을 특징으로 한다. - 1799년 프랑스 - 유사전쟁
유사전쟁은 프랑스 혁명 후 미국과 프랑스 간 관계 악화로 1798년부터 1800년까지 벌어진 미선포 해전으로, 미국 해군이 프랑스 사략선을 제압하며 카리브해와 미국 동부 해안에서 주로 전개되었고 몰트퐁텐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나폴레옹 전쟁과 1812년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 |
---|---|
쿠데타 개요 | |
다른 이름 | Coup d'État du 18e Brumaire (프랑스어) |
날짜 | 1799년 11월 9일 |
장소 | 상-클루 성 |
관련 인물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로제 뒤코 폴 바라스 뤼시앵 보나파르트 조제프 보나파르트 장 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샤를프랑수아 르브룅, 플레상스 공작 기타 |
결과 | 쿠데타 성공 프랑스 통령 정부 수립 제1통령 (나폴레옹)에게 가장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 채택 |
![]() | |
사건 상세 | |
목표 | 총재정부 타도 |
방법 | 쿠데타 |
추가 정보 | |
원인 | (정보 없음) |
무기 | (정보 없음) |
공격 인원 | (정보 없음) |
표적 | 폴 바라스, 루이제롬 고이예 등 총재정부 |
사망자 | (정보 없음) |
부상자 | (정보 없음) |
실종자 | (정보 없음) |
피해자 | (정보 없음) |
손해 | (정보 없음) |
범인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외 |
혐의 | (정보 없음) |
동기 | (정보 없음) |
관여 | (정보 없음) |
방어 | (정보 없음) |
대처 | 통령정부 수립 |
사죄 | (정보 없음) |
배상 | (정보 없음) |
2. 배경
프레리알 30일 쿠데타로 총재 정부의 실권을 잡은 시에예스는 정국 안정을 위해 강력한 정부를 원했고,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1] 헌법 개정은 원로원에서는 통과될 수 있었지만, 헌법 옹호파가 많은 500인회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집트 원정에서 막 돌아온 나폴레옹을 이용해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
1799년 3월 12일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 후,[1] 비상 조치가 채택되었고, 친전쟁 자코뱅 파벌인 몽테뉴파가 4월에 열린 1799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승리했다. 나폴레옹과 공화국의 최정예 군대가 프랑스의 이집트 및 시리아 침공에 참여하면서, 프랑스는 1799년 봄과 여름에 일련의 전장에서 패배를 겪었다. 제2차 취리히 전투 이후 프랑스의 군사 상황은 개선되었지만, 침략 가능성이 줄어들자 자코뱅은 친평화 왕당파의 부활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중동에서의 활약에 감탄한 대중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고,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쿠데타 계획에 없어서는 안 될 장군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귀국한 순간부터 쿠데타 내의 쿠데타를 계획했고, 결국 시에예스가 아닌 자신을 위해 권력을 잡았다. 쿠데타에 가장 큰 장애물은 군대에 있었다. 장바티스트 조르당과 같은 일부 장군은 프랑스 공화주의를 믿었고,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같은 다른 장군은 자신이 프랑스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폴레옹은 모든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숨겼다.
쿠데타 전에 병력이 편리하게 파리 주변에 배치되었다. 계획은 먼저 총재들에게 사임을 설득한 다음, 원로원과 500인회가 음모자들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헌법을 작성할 유연한 위원회를 임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2. 1. 정치적 혼란
프레리알 30일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총재 정부의 시에예스는 정국 안정을 위해 강력한 정부를 원했고,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1] 헌법 개정은 원로원에서는 통과될 수 있었지만, 헌법 옹호파가 많은 500인회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집트 원정에서 막 돌아온 나폴레옹을 이용해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원래 나폴레옹은 쿠데타에서 칼 역할만 할 예정이었다. 나폴레옹 자신도 "시에예스가 배후였고, 나는 손 끝에 지나지 않았으며 주역은 아니었다. 단지 열매만은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서 적전 도주 범죄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시에예스 등이 집권하여 직무를 시작할 때, 민중의 인기와 무력을 가진 나폴레옹이 가장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시에예스 세력을 억누르고, 5년 뒤인 1804년 제정을 통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나폴레옹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2. 2. 총재정부의 무능
프레리알 30일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총재 정부는 잦은 정쟁과 부패로 민심을 잃었다. 1799년 3월 12일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1] 프랑스는 프랑스의 이집트 및 시리아 침공에 주력 부대가 참여한 상황에서 전쟁 초반에 연패를 겪었다.1799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는 친전쟁 자코뱅 파벌인 몽테뉴파가 승리했지만, 이들은 친평화 왕당파의 부활을 우려했다. 프레리알 30일 쿠데타 (6월 18일)로 자코뱅이 축출되었고, 5인 집정부 멤버였던 엠마누엘 조제프 시에예스가 정부 내에서 지배적인 인물이 되었다. 제2차 취리히 전투 이후 프랑스의 군사 상황은 개선되었지만, 침략 가능성이 줄어들자 자코뱅은 왕당파의 부활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2. 3. 나폴레옹의 등장
프레리알 30일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총재 정부의 시에예스는 정국 안정을 위해 강력한 정부를 원했고,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원로원 통과는 가능했지만, 헌법 옹호파가 많은 500인회 설득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이집트 원정에서 막 돌아온 나폴레옹을 이용해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1]나폴레옹은 원래 쿠데타 성공을 위한 '칼' 역할에 불과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시에예스가 배후였고, 나는 손 끝에 지나지 않았으며 주역은 아니었다. 단지 열매만은 받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초기 역할은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이집트 원정에서 적전 도주 혐의를 받고 있었기에 쿠데타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시에예스 등이 집권 후 의장 선출을 논의할 때, 민중의 인기와 무력을 가진 나폴레옹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제1통령이 되어 시에예스 세력을 억누른 나폴레옹은 5년 뒤인 1804년 제정을 통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이른바 나폴레옹 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3. 쿠데타의 전개
브뤼메르 18일 아침,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파리에 자코뱅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의회에 퍼뜨려 의원들을 교외 생클루 성으로 피신하도록 설득했다.[1] 나폴레옹은 두 의회의 안전을 책임지고 가용한 모든 지역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2] 같은 날 아침 늦게, 시에예스와 로제 뒤코는 총재직에서 사임했다.[3] 당시 외무 장관이었고 나폴레옹의 측근이었던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총재 폴 바라스에게도 사임을 압박했다.
쿠데타 첫날 다섯 명의 총재 중 세 명이 사임하면서 정족수 미달로 다섯 명의 총재가 다스리는 총재 정부는 사실상 폐지되었지만, 자코뱅 성향의 두 총재 루이 제롬 고이에와 장 프랑수아 오귀스트 물랭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 두 사람은 쿠데타 이튿날 나폴레옹의 동맹인 장군 장 빅토르 마리 모로에 의해 체포되었고, 다음 날 항복을 강요받았다. 총재 정부와는 대조적으로, 두 의회는 아직 위협을 느끼지 않고 계속 회의를 열었다.
이후 시에예스 등은 통령 직무를 시작했고, 민중의 인기와 무력을 배경으로 가진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되어 시에예스 등을 억눌렀다. 나폴레옹은 5년 뒤인 1804년에 제정을 수립하고, '''나폴레옹 1세'''로서 황제에 즉위했다.
3. 1. 시에예스의 계획
테르미도르 9일 쿠데타로 총재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강력한 정부를 원하며 헌법 개정을 생각했다. 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원로원을 통과시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헌법 옹호파가 많은 500인회를 설득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여, 이집트 원정에서 막 귀환한 나폴레옹을 이용한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3]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칼의 역할에 불과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시에예스 등이 주모했을 뿐, 나는 하수인에 불과했고, 주역은 아니었다. 다만 열매만 얻었다"고 회고했다. 나폴레옹의 역할은 처음에는 수동적이었으며, 주모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 자신에게는 이집트 원정에서의 적전 도주 혐의가 걸려 있었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3. 2. 나폴레옹의 역할 변화
뤼시앵 보나파르트가 파리에 자코뱅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려 의회를 교외 생클루 성으로 피신시킨 후, 나폴레옹은 두 의회의 안전을 책임지고 가용한 모든 지역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1] 그날 아침 늦게,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와 로제 뒤코가 총재직에서 사임했고,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폴 바라에게도 사임을 압박했다.[1]애초에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칼' 역할에 불과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시에예스 등이 주모했을 뿐, 나는 하수인에 불과했고, 주역은 아니었다. 다만 열매만 얻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민중의 인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나폴레옹은 가장 먼저 제1통령이 될 것을 자청했고, 5년 뒤인 1804년에는 제정을 수립하고 '''나폴레옹 1세'''로서 황제에 즉위했다.
3. 3. 브뤼메르 18일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아침,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파리에 자코뱅 쿠데타가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의회에 퍼뜨려 의회를 교외 생클루 성으로 피신하도록 설득했다.[1] 나폴레옹은 두 의회의 안전을 책임지고 가용한 모든 지역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2] 같은 날 아침 늦게, 시에예스와 로제 뒤코는 총재직에서 사임했다.[3] 당시 외무 장관이었고 나폴레옹의 측근이었던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총재 폴 바라스에게도 사임을 압박했다.
쿠데타 첫날 다섯 명의 총재 중 세 명이 사임하면서 정족수 미달로 다섯 명의 총재가 다스리는 총재 정부는 사실상 폐지되었지만, 자코뱅 성향의 두 총재 루이 제롬 고이에와 장 프랑수아 오귀스트 물랭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두 사람은 쿠데타 이튿날 나폴레옹의 동맹인 장군 장 빅토르 마리 모로에 의해 체포되었고, 다음 날 항복을 강요받았다.
3. 4. 브뤼메르 19일 (11월 10일)
다음 날, 대의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자코뱅파의 반란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쿠데타를 시도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굴복하기를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소수의 근위병 부대를 이끌고 회의장으로 들이닥쳤다. 비록 계획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쿠데타 내의 쿠데타로 드러났다. 이 시점부터 이것은 군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엄청난 군사력 과시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서 저항을 만났다.[1]나폴레옹은 "공화국에는 정부가 없다"와 "혁명은 끝났다"와 같은 "진실"을 그들에게 말하면서 야유를 받았다. 한 대의원은 "헌법은 어떠한가?"라고 외쳤다. 나폴레옹은 이전의 의회 쿠데타를 언급하며 "헌법이라니! 당신들 스스로가 그것을 파괴했다. 당신들은 프뤼크티도르 18일에 그것을 위반했고, 플로레알 22일에 위반했으며, 프레리알 30일에 위반했다. 그것은 더 이상 아무에게도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답했다. 나폴레옹은 오백인회에서도 더욱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다.[1] 그의 근위병들은 바라스의 사임의 적법성이 자코뱅 세력에 의해 회의에서 문제 제기되자마자 입장했다. 나폴레옹은 들어서자마자 밀려났고, 곧바로 공격을 받았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그는 기절할 뻔했다. 지도자를 옹호하기 위해 근위병을 부른 사람은 나폴레옹 자신이 아니라 의회 의장인 그의 동생 뤼시앵이었다. 나폴레옹은 군사력을 사용하여 간신히 탈출했다.[2]
오백인회에서는 나폴레옹을 무법자로 선포하는 안건이 제기되었다. 이 시점에서 뤼시앵은 챔버에서 빠져나와 의회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오백인회의 다수가 단검을 든 대의원들에 의해 공포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마이클 라포르트에 따르면, "그는 증거로 나폴레옹의 피투성이 창백한 얼굴을 가리켰다." 적어도 한 가지 설명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좌절감과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얼굴을 긁어 피가 났다고 한다.[3] 뤼시앵은 연극적인 제스처로 칼을 잡고 만약 자신의 형이 배신자라면 자신의 가슴에 꽂겠다고 약속했다. 뤼시앵은 군대에게 폭력적인 대의원들을 챔버에서 내쫓으라고 명령했다.[1] 조아생 뮈라 장군이 지휘하는 근위병들은 오랑제리로 진격하여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것은 사실상 총재정부의 종말이었다.[1] 원로원은 의회를 3개월간 정회하고 나폴레옹, 시에예스, 뒤코를 임시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입법원''을 명명하는 포고령을 통과시켰다. 이후에 소집된 오백인회의 몇몇 유순한 의원들이 이러한 조치에 대한 승인을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총재정부와 의회는 종말을 맞이했다.[2]
4. 쿠데타의 결과
공의회가 해산되자 음모자들은 두 공의회에서 온 25명의 의원들로 구성된 두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들은 위원회를 협박하여 나폴레옹, 시에예스, 뒤코를 집정관으로 하는 임시 통령 정부를 선포하게 했다. 거리의 무반응은 혁명이 사실상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18 브뤼메르 쿠데타는 야만적인 힘과 사기의 초라한 조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민들은 이를 묵인하고 심지어 환호했다. 혁명에 지친 사람들은 현명하고 굳건하게 통치되기만을 바랐다."[2]
4. 1. 통령정부 수립
음모자들은 위원회를 협박하여 임시 정부를 선포하게 했고, 이는 나폴레옹, 시에예스, 뒤코가 집정관으로 있는 통령 정부의 첫 형태였다.[2] 혁명에 지친 사람들은 현명하고 굳건하게 통치되기만을 바랐다. 지방의 자코뱅 관료들의 저항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20명의 자코뱅 의원들이 추방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체포되었다. 이어서 위원회는 권리 선언이 없는 혁명 이후 첫 번째 헌법인 "간결하고 모호한 공화력 8년 헌법"을 작성했다.[2]나폴레옹은 제1집정관이 다른 두 집정관보다 더 큰 권한을 갖는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쿠데타 내의 쿠데타를 완성했다. 그는 원로원을 임명했고, 원로원은 헌법을 해석했다. 보존 원로원(Sénat conservateur)은 그가 칙령으로 통치하도록 허용했고, 국무원(Conseil d'État)과 호민원(Tribunat)은 중요하지 않은 역할로 격하되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프랑스 제1 제국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테르미도르 9일 쿠데타로 총재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강력한 정부를 원하며 헌법 개정을 생각했다. 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원로원을 통과시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헌법 옹호파가 많은 500인회를 설득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여, 이집트 원정에서 막 귀환한 나폴레옹을 이용한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칼의 역할에 불과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시에예스 등이 주모했을 뿐, 나는 하수인에 불과했고, 주역은 아니었다. 다만 열매만 얻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에게는 이집트 원정에서의 적전 도주 혐의가 걸려 있었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시에예스 등이 통령으로 직무를 시작할 때, 의장을 누구로 할지 논의할 때, 민중의 인기와 무력을 배경으로 가진 나폴레옹이 가장 먼저 자청했다. 이렇게 제1통령이 되어 시에예스 등을 억누른 나폴레옹은 5년 뒤인 1804년에 제정을 수립하고, '''나폴레옹 1세'''로서 황제에 즉위했다.
4. 2.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
나폴레옹은 자신이 확실히 차지할 제1집정관이 다른 두 집정관보다 더 큰 권한을 갖는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쿠데타 내의 쿠데타를 완성했다. 특히 그는 원로원을 임명했고, 원로원은 헌법을 해석했다. 보존 원로원은 그가 칙령으로 통치하도록 허용했고, 더 독립적인 국무원과 호민원은 중요하지 않은 역할로 격하되었다.[2]시에예스 등이 통령으로 직무를 시작할 때, 민중의 인기와 무력을 배경으로 가진 나폴레옹이 가장 먼저 의장직을 자청했다. 이렇게 제1통령이 되어 시에예스 등을 억누른 나폴레옹은 5년 뒤인 1804년에 제정을 수립하고, '''나폴레옹 1세'''로서 황제에 즉위했다.
5. 쿠데타에 대한 평가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는 프랑스 혁명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으로 평가받지만,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6. 유산
카를 마르크스는 1852년에 나폴레옹 3세가 일으킨 1851년 프랑스 쿠데타에 대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썼다. 마르크스는 나폴레옹 3세를 그의 삼촌인 나폴레옹에 비해 하찮은 정치인으로 여겼다. 그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며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3]
참조
[1]
웹사이트
French Revolution Timeline: 1795 to 1799 (The Directory)
https://thoughtco.co[...]
2020-01-10
[2]
웹사이트
The Myth of the 18 Brumaire
http://www.acs.ucalg[...]
H-France Napoleon Forum
2007-12-12
[3]
위키소스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
Die Revolution
185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