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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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왕국은 9세기에서 10세기 초에 존재했던 서유럽의 국가로, 현재의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에 위치했다. 4세기 말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켈트 브리튼인들이 이주하여 켈트 문화를 부활시킨 아르모리카 지역에서 소왕국들이 형성된 것이 기원이다. 프랑크 왕국의 간섭을 받다, 브르타뉴 귀족 노미노에가 자치권을 확대하며 독립의 기반을 다졌다. 851년 에리스포에가 브르타뉴의 초대 왕이 되었으나, 내분과 바이킹의 침입으로 혼란을 겪었다. 937년 앨런 2세가 브르타뉴를 재건했지만, 942년 프랑스 왕에게 조공을 바치며 브르타뉴 공국으로 전환되어 프랑스 왕국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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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어는 브리튼 제도에서 유래한 켈트어로서 콘월어, 웨일스어와 관련이 깊으며, 프랑스어 억압으로 화자가 감소했으나 부활을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인 하부 브르타뉴 서부 지역의 언어이다. - 브르타뉴의 역사 - 브르타뉴 공국
브르타뉴 공국은 936년 알랭 바르베토르트가 노르망인을 몰아내고 브르타뉴 공작이 된 이후 1532년 프랑스에 병합될 때까지 독립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며 발전했고 독자적인 정치 제도를 갖춘 역사적 공국이다. - 옛 왕국 - 하와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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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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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
일반적인 긴 이름 | 브르타뉴 왕국 |
일반 이름 | 브르타뉴 |
시작 연도 | 851년 |
종료 연도 | 939년 |
시작 날짜 | 8월 22일 |
종료 날짜 | 8월 1일 |
시작 사건 | 젠글랑 전투 |
종료 사건 | 트랑-라-포레 전투 |
이전 국가 1 | 코르누아이 |
이전 국가 2 | 돔노네아 |
이전 국가 3 | 브로에레크 |
이전 국가 4 | 네우스트리아 변경령 |
후계 국가 1 | 브르타뉴 공국 |
후계 국가 2 | 바이킹 브르타뉴#노르드 점령바이킹 상부 브르타뉴 |
후계 국가 3 | 노르망디 공국 |
후계 국가 4 | 네우스트리아프랑크 네우스트리아 |
공통 언어 | 브르타뉴어, 갈로어, 라틴어, 프랑스어, 노르만어, 푸아투어 |
지도자 칭호 | 브르타뉴 공작 |
2. 역사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브리타니아에서 군인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후 갈리아를 침공하여 황제 그라티아누스를 폐위시켰다. 이 과정에서 막시무스는 자신의 군인들에게 아르모리카 반도 서쪽을 점령하고 그라티아누스에게 충성하는 군인들을 몰아내도록 지시했다. 후기 고대 시대 말,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정착 (5-7세기)으로 인해 켈트 브리튼인들이 같은 지역에 정착하면서 이 지역은 "브르타뉴" (작은 브리타니아)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켈트 문화가 갈로-로마 아르모리카에서 부활했고, 코르누아이유, 돔노네, 브로에레크 등의 독립적인 소왕국들이 생겨났다.
801년부터 837년까지 프랑크 제국은 브르타뉴를 정복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루이 1세는 브르타뉴를 제국의 세력권 안에 두기 위해 브르타뉴 귀족인 노미노에를 해당 지역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missus imperatoris|황제의 특사la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루도비쿠스 1세 경건왕 사후, 바이킹의 침략으로 프랑크 왕국이 불안정해진 틈을 타 노미노에는 발롱 전투(845년)에서 프랑크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평화 조약으로 노미노에는 루도비쿠스 1세의 아들 대머리왕 카를로부터 자치권을 확대받았다. 850년 브르타뉴인들은 잠시 프랑크의 브르타뉴 변경백령을 점령했으나, 노미노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역사적인 영토로 물러났다.
샤를 2세는 복수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브르타뉴를 침공했으나, 노미노에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리스포에는 851년 쟁글랑 전투에서 샤를 2세를 저지했다. 같은 해 앙제 조약으로 레츠 지방이 에리스포에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브르타뉴인들이 프랑크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브르타뉴는 사실상 프랑크 제국에서 독립했고, 에리스포에는 브르타뉴의 초대 왕이 되었다. 856년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은 노르만족의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에리스포에는 같은 해 사촌 브르타뉴의 살로몬 왕에게 살해당했으며, 살로몬은 브르타뉴 왕위를 차지하고 노르만족과 동맹하여 프랑크 도시 르망을 점령했다.[1]
대머리 샤를은 코탕탱(863년)과 메인(867년) 지방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브르타뉴인들과 평화를 맺었다. 874년 살로몽은 파스크웨텐과 구르반이 연루된 음모로 살해당했지만,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두 경쟁자는 모두 876년에 사망했지만, 그들의 후계자인 알랭(파스크웨텐의 형제)과 쥐디엘(구르반의 아들) 사이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1]
임시 휴전 상태에서 알랭과 유디카엘은 노르만족의 공격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888년 퀘스탕베르 전투에서 유디카엘이 사망하고, 알랭이 브르타뉴의 왕 알랭 1세가 되었다.[1]
알랭 1세가 907년에 사망한 후, 왕위 계승 분쟁 끝에 고르마엘롱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1] 노르드족의 공격이 극심해지면서 이 지역이 더욱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그의 치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 고르마엘롱은 아마도 이러한 공격 중 하나였던 913년에 사망했다.[1]
919년부터 브르타뉴는 노르만족에게 완전히 점령당했으며, 수도원과 도시가 약탈당하고 많은 브르타뉴인들이 인접 국가로 도망갔다.[1]
935년, 노르만족에 대한 반란에 실패한 후 잉글랜드로 도망쳤던 알랭 1세의 손자 알랭 2세는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브르타뉴 해안에 상륙했다. 937년까지 브르타뉴의 대부분을 회복했고, 노르만족은 트랑 라 포레로 후퇴했다. 939년, 프랑크족과 브르타뉴 군대는 트랑 라 포레 요새를 공격하여 브르타뉴의 노르만족 위협을 제거했다.[2][3]
앨런 2세는 수십 년간의 점령과 전쟁으로 영지가 황폐해져 브르타뉴 왕국을 재건할 수 없었고, 942년에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 루이 4세에게 조공을 바쳤다.[2][3]
2. 1. 배경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에서 군인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즉시 갈리아를 침공하여 황제 그라티아누스를 폐위시켰다. 침공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군인들에게 아르모리카 반도의 서쪽 부분을 점령하고 그라티아누스에게 충성하는 군인들을 몰아내라고 지시했다. 앵제르 가문은 그들의 기원 이야기에서 이 사건을 확인한다.후기 고대 시대 말,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정착(5-7세기)으로부터 도망쳐 온 켈트 브리튼인들이 같은 지역에 정착했다. 어느 시점에서 이 지역은 "브르타뉴" (작은 브리타니아)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정착의 결과로, 켈트 문화가 갈로-로마 아르모리카에서 부활했고, 이 지역에서 코르누아이유, 돔노네, 브로에레크 등의 독립적인 소왕국들이 일어났다.
2. 2. 프랑크 왕국의 간섭과 노미노에
801년부터 837년까지 인접한 프랑크 제국은 브르타뉴 부족을 정복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실패했다. 브르타뉴를 제국의 세력권 안에 두기 위해, 루이 1세는 브르타뉴 귀족인 노미노에를 해당 지역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황제에 의해 missus imperatoris|황제의 특사la라는 칭호를 받은 그는 황제를 대신하여 이 지역의 행정을 담당했다.2. 3. 브르타뉴 왕국의 성립과 발전
루도비쿠스 1세 경건왕 사후, 프랑크 왕국을 불안정하게 만든 바이킹의 침략을 틈타 노미노에는 발롱 전투(845년)에서 프랑크 군대를 격파했다. 이어진 평화 조약으로 노미노에는 루도비쿠스 1세의 아들 대머리왕 카를로부터 자치권을 확대받았다. 850년 브르타뉴인들은 잠시 프랑크의 브르타뉴 변경백령을 점령했으나, 노미노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역사적인 영토로 물러났다.
샤를 2세는 복수를 위해 프랑크 제국 서부와 동부 지역에서 징집한 군대를 이끌고 브르타뉴를 침공했다. 노미노에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리스포에는 851년 쟁글랑 전투에서 샤를 2세를 저지했다. 같은 해 앙제 조약으로 레츠 지방이 에리스포에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브르타뉴인들이 프랑크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브르타뉴는 사실상 프랑크 제국에서 독립했고, 에리스포에는 브르타뉴의 초대 왕이 되었다. 856년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은 노르만족의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에리스포에는 같은 해 사촌 브르타뉴의 살로몬 왕에게 살해당했으며, 살로몬은 브르타뉴 왕위를 차지하고 노르만족과 동맹하여 프랑크 도시 르망을 점령했다.[1]
대머리 샤를은 코탕탱(863년)과 메인(867년) 지방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브르타뉴인들과 평화를 맺었다. 874년 살로몽은 파스크웨텐과 구르반이 연루된 음모로 살해당했지만,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두 경쟁자는 모두 876년에 사망했지만, 그들의 후계자인 알랭(파스크웨텐의 형제)과 쥐디엘(구르반의 아들) 사이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1]
임시 휴전 상태에서 알랭과 유디카엘은 노르만족의 공격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888년 퀘스탕베르 전투에서 유디카엘이 사망하고, 알랭이 브르타뉴의 왕 알랭 1세가 되었다.[1]
2. 4. 내분과 바이킹의 침입
대머리 샤를은 코탕탱(863년)과 메인(867년) 지방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브르타뉴인들과 평화를 샀다.[1] 874년, 살로몽은 파스크위텐과 구르방이 연루된 음모로 살해당했지만,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1] 두 경쟁자는 모두 876년에 사망했지만, 그들의 후계자인 알랭(파스크위텐의 형제)과 쥐디엘(구르방의 아들) 사이에서 전쟁이 계속되었다.[1]임시 휴전 상태에서, 알랭과 쥐디엘은 노르만족의 공격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1] 888년 퀘스탕베르에서 일어난 공격에서 쥐디엘이 사망하고, 알랭이 브르타뉴의 왕 알랭 1세가 되었다.[1]
알랭 1세가 907년에 사망한 후, 왕위 계승 분쟁 끝에 고르마엘롱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1] 노르드족의 공격이 극심해지면서 이 지역이 더욱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그의 치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 고르마엘롱은 아마도 이러한 공격 중 하나였던 913년에 사망했다.[1]
919년부터 브르타뉴는 노르만족에게 완전히 점령당했으며, 수도원과 도시가 약탈당하고 많은 브르타뉴인들이 인접 국가로 도망갔다.[1]
2. 5. 브르타뉴의 재건과 프랑스 왕국으로의 통합
935년, 노르만족에 대한 반란에 실패한 후 잉글랜드로 도망쳤던 앨런 1세의 손자 앨런 2세는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브르타뉴 해안에 상륙했다. 937년까지 브르타뉴의 대부분을 회복했고, 노르만족은 트랑 라 포레로 후퇴했다. 939년, 프랑크족과 브르타뉴 군대는 트랑 라 포레 요새를 공격하여 브르타뉴의 노르만족 위협을 제거했다.[2][3]앨런 2세는 수십 년간의 점령과 전쟁으로 영지가 황폐해져 브르타뉴 왕국을 재건할 수 없었고, 942년에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 루이 4세에게 조공을 바쳤다.[2][3]
3. 브르타뉴의 군주
유디카엘부터 알랑 1세까지는 왕, 이후에는 공작 칭호를 사용했다. 907년부터 937년까지는 노르드인의 침략과 점령으로 인해 브르타뉴 왕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한 시기였다.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유디카엘 | ? - 657 | 돔노네와 브로에렉의 브르타뉴 왕국 통일. |
모르만 | 814–818 | 샤를마뉴 사후 브르타뉴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명명됨. |
위호마르크 | 822–825 | 프랑크 통치에 성공적으로 반란 주도. |
노미노에 | 841–851 | 반느 백작, 브르타뉴 최초의 공작. 국가의 아버지. |
에리스포에 | 851–857 | 노미노에의 아들; 공작, 이후 왕으로 통치. 살로몽에게 암살당함. |
살로몽 | 857–874 | 렌 백작, 낭트 백작. 에리스포에 반란 주도. 알랑 1세까지 통일 브르타뉴의 마지막 통치자. |
파스퀘텐 | 874–877 | 반느 백작, 남부 브르타뉴 통치. |
알랑 대왕 | 877–888 | 파스퀘텐의 형제, 남부 브르타뉴 통치. |
구르반드 | 874–877 | 북부 브르타뉴 통치. |
유디카엘 | 877–888 | 구르반드의 뒤를 이음, 북부 브르타뉴 통치. |
알랑 1세 | 888–907 | 유디카엘 사후 단독 통치, 브르타뉴의 마지막 왕. |
노르드인 침략과 점령 (907–937) | ||
알랑 1세의 아들 포에르 백작 마튀도아와 그의 아들(알랑 2세)은 잉글랜드로 망명. |
3. 1. 소왕국 시대
후기 고대 시대 말,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정착(5-7세기)으로부터 도망친 켈트 브리튼인들이 아르모리카 반도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브르타뉴"(작은 브리타니아)로 불리게 되었다.이러한 정착의 결과로, 켈트 문화가 갈로-로마 아르모리카에서 부활했고, 이 지역에서 코르누아이유, 돔노네, 브로에레크 등의 독립적인 소왕국들이 일어났다.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유디카엘 | ? - 657 | 브르타뉴 대왕, 돔노네의 왕; 돔노네와 브로에렉의 브르타뉴 왕국을 통일했다. |
모르만 | 814–818 |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한 후 브르타뉴 귀족들에 의해 브르타뉴의 왕으로 명명된 최초의 통치자. |
위호마르크 | 822–825 | 브르타뉴 통치를 재건하기 위해 프랑크 통치에 성공적으로 반란을 주도했다. |
노미노에 | 841–851 | 반느 백작, 브르타뉴 최초의 공작이자 전통적으로 국가의 아버지로 불린다. |
에리스포에 | 851–857 | 반느 백작, 노미노에의 아들; 공작으로 통치한 후 왕으로 통치했으며, 교회 제단에서 사촌 살로몽에게 암살당했다. |
살로몽 | 857–874 | 렌 백작이자 낭트 백작. 에리스포에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으며, 공작으로 통치한 후 왕으로 통치했다. 알랑 1세까지 통일된 브르타뉴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
파스퀘텐 | 874–877 | 반느 백작, 구르반드와 동시대에 남부 브르타뉴를 통치했다. (내전과 1차 바이킹 침략 동안의 분할 통치 시대) |
알랑 대왕 | 877–888 | 파스퀘텐의 형제. (내전과 1차 바이킹 침략 동안의 분할 통치 시대) |
구르반드 | 874–877 | 파스퀘텐과 동시대에 북부 브르타뉴를 통치했다. (내전과 1차 바이킹 침략 동안의 분할 통치 시대) |
유디카엘 | 877–888 | 구르반드의 뒤를 이었다. (내전과 1차 바이킹 침략 동안의 분할 통치 시대) |
알랑 1세 | 877–888 | 파스퀘텐의 뒤를 이었고 유디카엘과 함께 통치했다. |
2차 바이킹 침략과 점령(907–937) | ||
알랑 1세의 아들 포에르 백작 마튀도아와 그의 아들(알랑 2세가 됨)은 브르타뉴에서 도망쳐 잉글랜드 왕과 함께 망명 생활을 했다. |
3. 2. 브르타뉴 왕국 시대
유디카엘(~657)은 브르타뉴 대왕이자 돔노네의 왕이었다. 그는 돔노네와 브로에렉의 브르타뉴 왕국을 통일했으며, 다고베르 1세와 엘리지우스를 인정했다.[1]모르만(814–818 재위)은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한 후 브르타뉴 귀족들에 의해 브르타뉴의 왕으로 명명된 최초의 통치자였으며, 봉신으로 섬겼다.[2]
경건왕 루이 치하의 프랑크 통치 시대(819–822)에 모르만은 프랑크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경건왕 루이에게 패배했다.[3] 이 기간 동안 브르타뉴는 브르타뉴 변경백령의 위협도 받았다.[3]
위호마르크(822–825 재위)는 브르타뉴 통치를 재건하기 위해 프랑크 통치에 성공적으로 반란을 주도했으나, 브르타뉴 변경백령의 낭트 백작인 람베르 1세에게 살해되었다.
노미노에(841–851 재위)는 반느 백작이자 브르타뉴 최초의 공작이었다. 그는 전통적으로 국가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경건왕 루이의 ''미수스 도미니쿠스''였다.
에리스포에(851–857 재위)는 반느 백작이자 노미노에의 아들이었다. 그는 공작으로 통치한 후 왕으로 통치했으며, 교회 제단에서 당시 망명지였던 사촌 살로몽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딸은 구르반드와 결혼했다.
살로몽(857–874 재위)은 렌 백작이자 낭트 백작이었다. 그는 에리스포에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으며, 황제가 그에게 수여한 왕관과 자주색 옷을 바탕으로 공작으로 통치한 후 왕으로 통치했다. 그는 알랑 1세까지 통일된 브르타뉴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그는 교황에게 돌 주교구에 팔리움을 수여하여 투르 대주교구로부터의 독립을 획득하려 시도했다. 그는 반느 백작이자 사위인 파스퀘텐과 에리스포에의 사위인 구르반드가 부분적으로 주도한 반란에서 암살되었으며,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874년부터 888년까지는 내전과 1차 바이킹 침략 동안 분할 통치 시대였다.
남부 브르타뉴
- 파스퀘텐(874–877 재위)은 반느 백작이었으며, 구르반드와 동시대에 남부 브르타뉴를 통치했다.
- 알랑 대왕(877–888 재위)은 형제 파스퀘텐의 뒤를 이었으며, 유디카엘과 동시대에 남부 브르타뉴를 통치했다.
북부 브르타뉴
- 구르반드(874–877 재위)는 파스퀘텐과 동시대에 북부 브르타뉴를 통치했다.
- 유디카엘(877–888 재위)은 구르반드의 뒤를 이었으며, 알랑 대왕과 동시대에 북부 브르타뉴를 통치했다.
알랑 1세(알랑 대왕)은 877년부터 888년까지 파스퀘텐의 뒤를 이어 유디카엘과 함께 통치했으며, 888년부터 907년까지는 유디카엘의 사망 후 공작으로 단독 통치했다. 그는 황제 비만왕 샤를로부터 왕(rex Brittaniæ) 칭호를 받았으며, 브르타뉴의 마지막 왕이었다.
907년부터 937년까지는 2차 바이킹 침략과 점령 시기였다. 알랑 1세의 아들 포에르 백작 마튀도아와 그의 아들(알랑 2세)은 브르타뉴에서 도망쳐 잉글랜드 왕과 함께 망명 생활을 했다. 마튀도아는 '망명 중인 왕'이었지만 결코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
3. 3. 바이킹 점령기 (907년 ~ 937년)
알랭 1세가 907년에 사망한 후,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고르마엘롱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노르드족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브르타뉴 지역은 더욱 불안정해졌고, 고르마엘롱의 치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고르마엘롱은 913년 노르드족의 공격 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919년부터 브르타뉴는 노르만족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 수도원과 도시들은 약탈당했고, 많은 브르타뉴인들이 인접 국가로 도망쳤다.[1]
참조
[1]
서적
Les rois de Bretagne IVe-Xe siècle
[2]
서적
Celtic culture : a historical encyclopedia
ABC Clio Eds
2006
[3]
서적
La Cornouaille du IXe au XIIe siècle : Mémoire, pouvoirs, noblesse
Société archéologique du Finistère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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