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고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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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고만 해전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02년 10월 23일, 스페인 비고만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프랑스-스페인 함대가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에 기습당해 패배했다. 이 해전은 스페인 아메리카 제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은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한 것으로, 연합군은 프랑스 함선과 스페인 상선들을 파괴하거나 나포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해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포르투갈은 영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 비고만 해전의 승리는 영국의 해상 지배력을 강화하고, 18세기 영국의 번영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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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만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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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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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비고 만 해전 |
글(갈리시아어) | Batalla de Rande |
글(에스파냐어) | Batalla de Rande |
일부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날짜 | 1702년 10월 23일 |
장소 | 갈리시아 비고 리아 |
결과 | 그랜드 얼라이언스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
교전국 2 | 프랑스 왕국 부르봉 스페인 |
지휘관 및 지도자 | |
사령관 1 | 조지 루크 필립스 반 알몬데 오먼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 |
사령관 2 | 샤토르노 후작 프랑수아 루이 드 루스레 마누엘 데 벨라스코 |
병력 규모 | |
병력 1 | 전열함 25척 + 프리깃함 및 화공선 |
병력 2 | 프랑스 전열함 15척, 스페인 갤리온 3척 + 프리깃함, 화공선 및 수송선 |
피해 규모 | |
사상자 1 | 약 800명 사망 |
사상자 2 | 모든 함선 소각 또는 나포, 약 2,000명 사망 |
캠페인 |
2. 배경
1700년 부르봉의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아메리카 제국의 관리들과 식민지인들은 프랑스의 무역 장악 시도에 저항했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었지만,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은 스페인과의 무역에서 이점을 얻고 있었다. 반면 카리브해에서 스페인 은을 유럽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은 프랑스 제독들은 강한 의심을 받았다.[7]
1702년의 해상 작전은 아메리카와 스페인이라는 두 개의 전장에서 벌어졌으며,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스페인 보물선들의 항적이 이를 연결했다. 영국 해군의 주요 노력은 유럽의 스페인 해안에서 이루어졌다.[9]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은 윌리엄 3세의 지도 하에 지중해 전략을 결정했으며, 이는 윌리엄 3세 사후에도 지속되었다. 이 전략은 포르투갈을 연합군에 참여시키고, 지브롤터 해협을 확보하여 지중해에서 영국의 해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9]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내 스페인 영토 점령을 위해 연합 함대의 지중해 주둔을 요구했다.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함대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작전을 수행할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남부의 카디스 항구를 점령하고자 했다.[7]
2. 1. 아메리카로부터의 은 수송선단
1702년 6월 11일,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출항한 스페인 은 수송선단은 샤토르노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베라크루스를 출발했다. 스페인 함선은 무장 갤리온인 ''예수 마리아 이 호세''를 지휘하는 마누엘 데 벨라스코가 지휘했으며, 이 함선은 함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바를로벤토 함대''를 구성하는 3척의 배 중 하나였다.[10] 전체 호송대는 7월 7일 아바나에 도착했으며, 24일 대서양을 횡단했다.[11] 함대는 56척의 선박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22척은 스페인 선박이었고 나머지는 프랑스 선박이었으며, 항해 말에는 대서양 횡단 안전이 확보되자마자 프랑스로 향한 다수의 상선도 포함되었다.[11]샤토르노가 1701년 카리브해로 출항했을 때 프랑스와 해양 강대국 간의 전쟁은 아직 선포되지 않았지만, 그 후 호송대는 적대 행위 발발 소식과 룩의 카디스 봉쇄 소식을 들었다. 카디스는 아메리카에서 출발하는 은 수송선의 통상적인 목적지였다.[11] 따라서 새로운 항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했다. 벨라스코는 로스 파사헤스의 작은 항구를 고려했지만, 샤토르노는 브레스트, 라 로셸 또는 심지어 리스본을 선호했다.[11] 타협안이 제시되어 9월 23일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갈리시아의 비고 만에 들어섰다. 그러나 화물을 하역하는 데 상당한 지연이 발생했다. 하역 시 통상적으로 존재하는 전체 행정 장치(검사관, 감정인, 왕실 관리 등)가 세비야와 카디스에 있었고, 물건을 육지에 내리기 전에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하역이 시작되었을 때, 물품을 운송할 수단이 부족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결과, 은이 우선시되어 먼저 하역되어 루고 내륙으로 보내졌다.[12]
2. 2. 연합군의 추격
10월 중순, 영국 정부는 비고 만에 스페인 함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13] 이에 즉시 조지 루크 제독과 클라우즐리 쇼벌에게 함대를 이끌고 추격하도록 지시했다.[13] 루크는 카디스 원정 실패 후 귀환하던 중이었다.[13]''펨브로크''의 토머스 하디 함장은 라고스에서 스페인 호송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추격하여 루크 함대와 합류했다.[14] ''펨브로크''의 군목은 프랑스 영사의 자랑 섞인 말에서 보물선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이는 리스본의 제국 대사관 메신저를 통해 확인되었다.[14]
루크 제독은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펨브로크''의 하디 함장에게 전달된 정보를 고려하여... 비고 항구로 가는 최적의 방법을 찾고, 시도가 가장 효과적이 되도록 분리하지 않으면, 우리의 전체 전열로 즉시 그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5]
루크는 비고 만 입구를 탐사하기 위해 함선을 보냈다. 상륙 부대는 포획된 수도사로부터 펠리페 5세의 보물 일부는 이미 상륙했지만, 많은 재산이 여전히 스페인 선박에 남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14]
3. 해전
1702년 10월 22일 저녁,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함대는 리아 데 비고에 진입하여 샤토르노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샤토르노는 랑데 해협을 부(boom)로 막는 등 방어 조치를 취했다. 연합군은 붐을 파괴하고 해안 방어를 제압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 토머스 홉슨 부제독의 HMS 토베이가 붐을 파괴하고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오몬드 공작의 상륙 부대는 랑데 요새를 점령했다. 연합군 함선들은 붐을 통과하여 프랑스-스페인 함대와 교전했고,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큰 저항 없이 궤멸되었다.[18]
3. 1. 피해와 이득
비고 만 해전은 프랑스 해군에게 큰 재앙이었다. 전열함 15척, 프리깃함 2척, 화공선 1척이 모두 파괴되거나 나포되었다.[19][20] 스페인 또한 큰 피해를 입었는데, 갤리온선 3척과 무역선 13척이 모두 파괴되었다.[20]연합군은 많은 은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아이작 뉴턴은 1703년 6월까지 넘겨받은 금속이 은 4504파운드 2온스(약 2,043kg), 금 7파운드 8온스 13드라흐마(약 3.4kg)로, 가치는 14,000파운드에 불과하다고 밝혔다.[24] 이후 이 금속으로 주조된 동전에는 앤 여왕의 흉상 아래에 'VIGO'라는 단어가 새겨졌다.
1703년 2월, 펠리페 5세는 보복으로 영국과 네덜란드 소유의 보물 함대에서 가져온 은 4백만 페소를 몰수했다. 또한 스페인 상인 등에게서 2백만 페소를 빌려, 총 7백만 페소에 가까운 은을 확보했는데, 이는 함대에서 나온 은의 절반 이상이었다.[25]
4. 해전의 영향
비고만 해전의 해상에서의 성공은 대동맹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2세는 1701년 6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1703년 5월 영국과 메투엔 조약을 체결하면서 동맹을 바꾸었다. 포르투갈에게는 해외 제국의 안전, 특히 남아메리카 무역로의 보호가 중요했기 때문에, 대서양에서 지배적인 해군 강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조지 루크 제독의 비고만 해전 승리 이후, 해상력은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26]
이 조약으로 연합 함대는 리스본을 기지로 삼아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고 지중해에서 프랑스의 활동을 견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의 동맹은 연합국의 전략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해양 열강은 스페인에서 대규모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스페인 정부는 재정적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민간 상인들은 배에 실린 막대한 상품(후추, 코치닐, 코코아, 코담배, 인디고, 가죽 등)의 손실로 큰 피해를 입었다. 네덜란드 상인들 역시 피해를 보았는데, 노획하거나 파괴한 부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에게도 속했기 때문이다.[22] 스페인 정부가 소유한 은화는 대부분 연합군의 공격 전에 이미 배에서 하역되어 세고비아 성에 보관되었다.[23]
아이작 뉴턴이 1703년 6월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넘겨받은 금속의 총량은 은 4504 파운드 2온스(~2043kg), 금 7 파운드 8온스 13드라흐마(~3.4kg)였으며, 그 가치는 14,000파운드에 불과했다.[24] 이후 이 금속으로 주조된 동전에는 앤 여왕의 흉상 아래에 ''VIGO''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1703년 2월, 펠리페 5세는 보복으로 영국과 네덜란드 소유의 보물 함대에서 가져온 모든 은(총 4백만 페소)을 몰수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또한, 국왕은 스페인 상인과 세비야 영사관에서 2백만 페소를 빌려 총 7백만 페소를 확보했는데, 이는 함대에서 나온 은의 절반 이상이며, 스페인 국왕이 아메리카 무역에서 얻은 역사상 가장 큰 액수였다.[25]
4. 1. 메투엔 조약 (1703)
비고 만 해전에서의 승리는 대동맹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기,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2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포르투갈은 내륙 국경보다 해외 식민지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26] 특히 남아메리카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대서양에서 강력한 해군을 가진 국가와 동맹을 맺는 것이 중요했는데, 조지 루크 제독이 이끄는 연합 함대의 비고 만 해전 승리 이후 해상에서의 우위는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 함대에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26]1703년 5월, 포르투갈은 영국과 메투엔 조약을 체결했다. 런던 주재 포르투갈 장관 호세 다 쿠냐 브로차도는 "해외 식민지 보존을 위해서는 현재 해상 지휘권을 가진 강대국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필수적이다. 비용은 크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협력이 필수적이다."라고 언급했다.[26] 포르투갈을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떼어놓은 것은 연합군의 큰 승리였다. 연합 함대는 리스본을 기지로 삼아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고 지중해에서 프랑스의 활동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27]
4. 2. 침몰된 보물
침몰된 보물을 인양하려는 노력은 거의 즉시 시작되어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초기 시도가 실패한 후, 스페인 정부는 민간 계약업체를 고용하여 보물을 인양하려 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28] 1728년, 알렉상드르 구베르라는 프랑스인이 배를 거의 해안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보물이 없는 프랑스 전함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노력을 포기했다. 1825년 윌리엄 에반스가 이끄는 영국 원정대는 잠수종을 이용하여 1년 동안 소량의 은, 포탄 및 기타 물품을 인양했다. 같은 시기에 아메리카 비고 만 보물 회사(The American Vigo Bay Treasure Company)라는 단체가 배를 인양하려다 실패하여 배를 파괴했다. 수십 년 후, 카발리에 피노는 자신의 발명품인 수중경을 사용하여 위치를 스캔하고 여러 척의 배를 지도화했으며, 일련의 신중한 실험을 통해 여러 개의 대포와 보존된 나무를 인양했다.[28]1990년 8월 10일, ''5º Centenario''(스페인 정부의 아메리카 발견 500주년 기념)를 위해 소나 측면 주사로 조사를 실시한 후, R.O.V. 잠수함을 이용하여 79미터 깊이의 시에스 제도 인근에서 난파선 ''산토 크리스토 데 마라카이보''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계약자는 히드로그라픽 S.A.(Hidrografic S.A.), 타라고나였으며, 측량사 겸 R.O.V. 조종사는 올라프 힝스트(Olaf Hingst)였고, 선박은 '포텔라 세이스'(Potela Seis), 비고였다.
5. 대중 문화 속 비고 만 해전
쥘 베른의 1870년 소설 ''해저 2만 리''에서 이 해전이 언급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네모 선장은 해전에서 연합군 함대에 의해 침몰한 배들의 화물에서 부와 잠수함 ''노틸러스''의 자금을 얻는다. 이 배들은 보물을 하역하지 않았고 잠수부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30]
6. 양측 함대 목록
선장 앤드루 리크
선장 스타렌버그
선장 존 허버드
선장 토마스 딜크스
선장 제임스 그리너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