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레주는 에스토니아의 지방 자치체로, 3개의 군과 3개의 교구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큰 섬은 사레마이며,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고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으며, 바이킹 시대에는 에스토니아 해적의 근거지였다. 13세기부터 덴마크, 스웨덴,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았으며, 기독교화 과정을 거쳤다. 2021년 조사에 따르면 무교가 가장 많은 종교이며, 루터교, 정교회 순으로 신자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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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레주 - 사레마섬 발트해에 있는 에스토니아 최대의 섬인 사레마섬은 석회암 지형과 숲, 칼리 크레이터, 팡가 절벽 같은 독특한 자연환경과 바이킹 시대 흔적, 쿠레사레 성과 같은 역사 유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에스토니아 독립 후 관광지로 발전했다.
사레주 - 무후섬 무후섬은 에스토니아 서부 사레마 제도에 속한 섬으로, 본토 및 사레마 섬과 해협으로 분리되어 페리 및 방조제로 연결되며, 역사적 전투지이자 풍차, 뜨개질 양말, 와인 농장 등으로 알려져 있고, 요새, 교회, 영지, 절벽 등의 관광 명소가 있다.
에스토니아의 주 - 이다비루주 이다비루 주는 에스토니아 북동부에 위치했던 주로, 러시아인 비율이 높았으며 2017년 행정 개혁으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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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구역 - 팔라우 팔라우는 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로, 스페인, 독일, 일본의 지배를 거쳐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았으며 1994년 독립하여 대통령 중심의 민주 공화국 체제를 갖추고 관광 산업, 특히 스쿠버 다이빙과 스노클링이 발달했으며 팔라우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모계 사회의 전통이 강하다.
행정 구역 - 마셜 제도 마셜 제도는 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로, 1986년 미국 신탁통치령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영어와 마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코프라, 수산물, 미국의 지원에 경제를 의존하며, 미국과 자유 연합 조약을 체결하여 국방을 미국에 의존한다.
사레 주의 가장 큰 섬은 사레마, 무후, 루흐누, 아브루카, 빌산디이다. 경작지는 570km2이며,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연평균 기온은 6°C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509mm이다.
4. 역사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사레마에는 적어도 5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초 몇 세기에 걸쳐 에스토니아에서 정치적, 행정적 구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3세기까지, 에스토니아에는 사레마를 포함한 주요 군(maakond)이 발달했다.[5]
고대 스칸디나비아 사가에서 사레마는 "Eysysla"라고 불렸으며, 이는 에스토니아어로 섬의 이름과 정확히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사레마는 고대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군이었으며, 에스토니아 해적의 본거지였다.[6][7][8][9] 1206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는 섬에 요새를 건설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227년, 리보니아 십자군에 의해 사레마가 정복되었지만, 리보니아 검 형제 기사단에 대항하는 에스토니아 저항의 중심지로 남았다. 기사단은 그곳에 외젤-비크 주교령을 설립했다. 1236년 솔레 전투에서 기사단이 패배했을 때, 오젤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 분쟁은 오젤인과 기사단장이 서명한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튜턴 기사단 리보니아 지부, 외젤-비크 주교령 및 오젤인들 간의 1241년 조약 스웨덴 국립 문서 보관소
오젤인들은 1241년 튜턴 기사단 리보니아 지부와 외젤-비크 주교령과의 조약을 체결하여 다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255년 조약에는 토지 소유 및 상속, 사회 제도, 특정 종교 규칙으로부터의 자율성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오젤인들에게 특정한 권리를 부여했다.[14]
1261년, 오젤인들이 다시 기독교를 부인하고 섬의 모든 독일인을 살해하면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1343년, 오젤인들은 다시 섬의 모든 독일인을 살해하고 모든 성직자를 익사시켰다. 1344년, 부르차르트 폰 드라이레벤은 사레마로 원정을 이끌었고, 오젤인들의 요새를 정복하고 그들의 왕 베세를 교수형에 처했다. 1345년, 헤르만 폰 바르트베르그의 연대기와 노브고로드 제1연대기에 언급된 조약으로 원정이 끝났다. 이후 사레마는 리보니아 튜턴 기사단 단장과 외젤-비크 주교령의 봉신으로 남았다.
4. 1. 고대 ~ 중세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사레마에는 적어도 5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초 몇 세기 동안 에스토니아에는 정치적, 행정적 구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구(kihelkond)와 군(maakond)이라는 두 가지 큰 구분이 나타났는데, 교구는 여러 마을로 구성되었고 거의 모든 교구에는 최소한 하나의 요새가 있었다. 지역 방어는 최고 관리자인 교구 장로가 지휘했다. 군은 여러 교구로 구성되었으며, 역시 장로가 이끌었다. 13세기까지 에스토니아에는 사레마, 래네마, 하르유마, 래발라, 비루마, 얘르바마, 사칼라, 우간디와 같은 주요 군이 발달했다.[5]
9세기 유럽
고대 스칸디나비아 사가에서 사레마는 "Eysysla"라고 불렸는데, 이는 에스토니아어로 섬의 이름과 같은 '섬의 구역(땅)'이라는 의미이다. 독일어와 스웨덴어로 섬의 이름인 "Ösel", 덴마크어 "Øsel", 라틴어 "Oesel"은 여기서 유래했다. "Eysysla"는 때때로 에스토니아 본토를 가리키는 'Suuremaa' 또는 'Suur Maa'일 수 있는 "Adalsysla"와 함께 나타난다. 사가는 섬 주민과 바이킹 간의 수많은 전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레마는 고대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군이었으며, 때로는 동부 바이킹이라고 불리던 에스토니아 해적의 본거지였다. 리보니아의 헨리 연대기는 16척의 선단과 500명의 오젤인(사레마 주민)이 당시 덴마크에 속했던 현재의 남부 스웨덴 지역을 약탈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오젤인들은 쿠로니아인과 함께 고대 노르드어아이슬란드 사가와 헤임스크링글라에서 "Víkingr frá Esthland"(에스토니아 바이킹)으로 알려졌다.[6][7][8][9] 13세기 초 리보니아의 헨리는 라틴어 연대기에서 이들의 항해선을 해적선이라고 불렀다.[10]
"Eistland" 또는 "Esthland"는 발트해 동쪽 해안의 국가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역사적인 게르만어 이름이며, 에스토니아 현대 국가명의 기원이다. 8세기의 현대 에스토니아 본토는 잉글링가 사가에서 "Eysyssel" 또는 "Ösyssla"와 대조적으로 "Adalsyssla"라고 불렸는데, 이는 오젤인(Saarlasedet)의 고향인 섬(스웨덴어): Ösel 또는 (에스토니아어): 사레마)의 이름이었다. 11세기에는 아담 폰 브레멘에 의해 쿠를란트와 에스틀란트(에스토니아)가 모두 별도로 명시되었다.[11]
북방 십자군 직전에 오젤인들은 리보니아 운문 연대기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되었다.
> "쿠르스인(쿠로니아인)의 이웃인 오젤인들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들의 힘이 배에 있기 때문에 강한 군대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름에 바다를 건너 여행할 수 있을 때, 그들은 기독교인과 이교도를 모두 약탈하여 주변 땅을 압제한다."[12]
1206년, 발데마르 2세 국왕과 룬드 주교 안드레아스가 이끄는 덴마크 군대는 사레마에 상륙하여 요새를 건설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216년에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과 테오도리히 주교가 연합하여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사레마를 침공했다. 이듬해 봄에는 오젤인들이 복수하기 위해 독일의 지배를 받던 라트비아 지역을 습격했다. 1220년, 스웨덴 국왕 요한 1세와 링쾨핑의 칼 주교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는 서부 에스토니아의 로탈리아에 있는 리훌라를 정복했다. 오젤인들은 같은 해에 스웨덴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링쾨핑 주교를 포함한 스웨덴 수비대를 전멸시켰다.
1222년, 발데마르 2세는 다시 사레마를 정복하려 했고, 이번에는 강력한 수비대가 주둔하는 석조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덴마크 요새는 포위되었고 5일 안에 항복했으며, 덴마크 수비대는 레발로 돌아갔고, 알베르트 폰 리가 주교의 형제 테오도리히와 소수의 인질을 평화를 위한 담보로 남겨두었다. 요새는 오젤인들에 의해 무너졌다.[13]
122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리가 시, 리가 주교는 사레마에 대한 합동 공격을 조직했다. 무후와 발잘라의 두 주요 오젤인 요새가 항복한 후, 오젤인들은 형식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236년, 사울레 전투에서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 패배한 후, 사레마에서 다시 군사 행동이 시작되었다.
오젤인들은 1241년 튜턴 기사단 리보니아 지부의 안드레아스 데 벨벤 단장과 외젤-비크 주교령과의 조약을 체결하여 다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다음 조약은 1255년 안노 상거하우젠 기사단장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오젤인들을 대표하여 일레, 쿨레, 에누, 문텔레네, 태페테, 야르데, 멜레테, 케이크 등 라틴 필경사에 의해 "이름" (또는 선언)이 기록된 사람들이 서명했다.[14] 이 조약은 오젤인들에게 몇 가지 특정한 권리를 부여했다. 1255년 조약에는 토지 소유 및 상속, 사회 제도 및 특정 종교 규칙으로부터의 자율성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었다.
1261년, 오젤인들이 다시 기독교를 부인하고 섬의 모든 독일인을 살해하면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리보니아 튜턴 기사단 지부, 외젤-비크 주교령, 그리고 본토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을 포함한 덴마크 에스토니아의 연합군은 카르마 요새를 정복함으로써 오젤인들을 격파한 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곧 튜턴 기사단은 페이데에 석조 요새를 건설했다.
1343년 7월 24일, 오젤인들은 다시 섬의 모든 독일인을 살해하고 모든 성직자를 익사시키고 페이데 요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항복 후 오젤인들은 성을 파괴하고 모든 수비대를 살해했다. 1344년 2월, 부르차르트 폰 드라이레벤은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사레마로 원정을 이끌었다. 오젤인들의 요새는 정복되었고 그들의 왕 베세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1345년 초 봄, 리보니아 튜턴 기사단 지부의 다음 원정이 있었으며, 이는 헤르만 폰 바르트베르그의 연대기와 노브고로드 제1연대기에 언급된 조약으로 끝났다. 사레마는 리보니아 튜턴 기사단 단장과 외젤-비크 주교령의 봉신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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