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샤시굽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샤시굽타는 고대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용병단의 지도자로서, 처음에는 페르시아를 도왔으나 알렉산드로스에게 협력하여 소그디아나와 쿠나르, 스와트 계곡 정벌에 기여했다. 아슈바카족을 제압하는 데 공을 세워 아오르노스 요새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히다스페스 전투 이후 포로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그러나 아슈바카족이 그리스 사트라프를 암살한 후, 알렉산드로스 진영을 떠나 저항 세력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샤시굽타는 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를 마우리아 제국의 창시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동일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도인 전사 - 나와브 카푸르 싱
    나와브 카푸르 싱은 1697년 자트족 출신으로, 시크교 지도자이자 군사 지도자였으며, 분열된 시크교도들을 통합하여 달 칼사를 결성하고 무굴 제국으로부터 나와브 칭호를 받았다.
  • 인도인 전사 - 소파가세노스
    소파가세노스는 고대 인도의 통치자로, 기원전 206년경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코끼리를 제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다른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 기원전 4세기 인도의 군주 -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기원전 4세기 말 북인도를 통일하고 마우리아 제국을 건국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혼란한 시기를 틈타 세력을 확장하고,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한 인도의 군주이다.
  • 기원전 4세기 인도의 군주 - 마하난딘
    마하난딘은 시슈나가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으며, 사생아인 마하파드마 난다에게 살해되었다.
샤시굽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파로파미사다이의 통치자
재위기원전 4세기
국적파로파미사다이
로마자 표기Śaśigupta

2. 생애

샤시굽타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아마도 군사 모험가였으며, 경제와 군사적 추구를 주요 목표로 삼은 직업 군인(용병단)의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

아마도 샤시굽타는 전문 군인이었고 페르시아인, 특히 박트리아의 이란인 사트라프 베수스를 돕기 위해 용병단을 이끌었지만, 그가 패배하자 샤시굽타는 (분명히 용병인) 전사들과 함께 침략자들과 함께 제비를 던졌고 이후 소그디아나와 쿠나르 및 스와트 계곡의 원정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큰 도움을 제공했다.

기원전 327년 5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강 서쪽의 알리상/쿠나르, 마사가, 아오르노스 공화국 영토를 침공했을 때, 샤시굽타는 알리상/쿠나르와 스와트 계곡의 아슈바카족의 크샤트리야 족장 여러 명을 감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마케도니아 침략자에게 충성을 바쳤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이 영토를 축소한 후, 자신이 이 나라의 영주가 될 것이라고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아슈바카족이 저항했던 스와트의 아오르노스 요새를 축소한 후 매우 전략적인 아오르노스 요새의 지휘권을 샤시굽타에게 맡기고 그를 동부 아슈바카 주변 국가의 사트라프로 삼았다는 사실을 확증했다.[1]

히다스페스 전투가 끝날 무렵, 아리아노스는 메로에스라는 어느 인물을 언급하며 그가 인도인이자 포로스의 오랜 친구임을 증명한다. 아리아노스는 또한 그가 마케도니아 침략자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도망친 포루스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마침내 알렉산드로스의 선택을 받았다고 증언한다.[2] 포로스가 알렉산드로스와 전쟁을 벌일 당시 동부 아슈바카 사트라프인 샤시굽타가 포로스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그는 포로스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탁샤실라의 통치자 암비가 평화 협상에 실패했을 때 알렉산드로스의 선택을 받아 알렉산드로스와 포로스 사이의 평화 협상을 이끌기도 했다. 여러 학자들이 추측했듯이 샤시굽타는 그의 고향인 메로스(산스크리트어로 메르 또는 메르, 아마도 메루산릏 의미)의 이름을 따서 메로에스(산스크리트어로 마우리아와 동일)라고도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3][4] 또 다른 가능성은 시시코토스 또는 샤시굽타가 언덕이나 산악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메로스'(Maurya?)라는 이름이 '메르'(언덕 또는 산) 또는 '메라'(언덕인)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직 펀자브에 있고 라비/체나브의 글라우사이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몇 달 후, 아슈바카족은 카불 계곡 하부의 그리스 사트라프인 니카노르를 암살했고, 샤시굽타가 침략자들과 계속 협력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필리포스가 니카노르의 자리에 임명되었지만, 고전 문헌에는 이 이름으로 샤시굽타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빈틈없는 정치인이자 정치인이자 군 장성으로서, 샤시굽타는 시간의 맥박을 감지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의 진영을 떠난 후, 새롭게 등장하는 강력한 저항 세력과 함께 그의 운명을 던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샤시굽타는 다른 이름인----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는 고전 연대기 작가들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주목할 점은 모에레스, 모에리스, 메리스, 메로스가 모두 같은 용어라는 점이다.[5] 아리아노스는 모에레스라고 고,[6] 쿠르티우스는 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고 표기했다.[7] 쿠르티우스가 언급한 인더스강 하류 삼각주(파탈라)의 족장 모에리스는 아리아노스가 포로스의 오랜 친구라고 주장하는 북서쪽의 메로스와 정확히 동일한 사람으로 보인다.[6] 알렉산드로스는 분명히 이 상황에 짜증이 나서,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인더스강 하류로 도망친 것으로 보이는 샤시굽타를 추격했다. 그는 아마도 파탈라의 족장인 쿠르티우스의 모에레스로 그곳에 나타났을 것이다.[7] 반란 세력에 합류한 후, 샤시굽타의 가명인 메로스 또는 모에레스가 반란 세력의 지도자가 되고 더 큰 지방 권력을 위한 그의 더 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투쟁을 시작한 것은 당연하다.

2. 1. 군사 지도자로서의 활동

샤시굽타는 군사 모험가이자 용병단의 지도자로 추정된다. 그는 페르시아인, 특히 박트리아의 이란인 사트라프 베수스를 돕기 위해 용병단을 이끌었지만, 베수스가 패배하자 샤시굽타는 전사들과 함께 침략자들과 협력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소그디아나와 쿠나르 및 스와트 계곡 원정에 큰 도움을 제공했다.[1]

기원전 327년 5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강 서쪽의 알리상/쿠나르, 마사가, 아오르노스 공화국 영토를 침공했을 때, 샤시굽타는 알리상/쿠나르와 스와트 계곡의 아슈바카족 크샤트리야 족장 여러 명을 굴복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슈바카족이 저항했던 스와트의 아오르노스 요새를 점령한 후, 매우 전략적인 아오르노스 요새의 지휘권을 샤시굽타에게 맡기고 그를 동부 아슈바카 주변 국가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다.[1]

히다스페스 전투가 끝날 무렵, 아리아노스는 인도인이자 포로스의 오랜 친구인 메로에스라는 인물을 언급한다. 아리아노스는 그가 마케도니아 침략자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도망친 포루스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선택을 받았다고 증언한다.[2] 샤시굽타는 포로스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탁샤실라의 통치자 암비가 평화 협상에 실패했을 때 알렉산드로스의 선택을 받아 알렉산드로스와 포로스 사이의 평화 협상을 이끌기도 했다. 여러 학자들은 샤시굽타가 그의 고향인 메로스(산스크리트어로 메르 또는 메르, 아마도 메루산을 의미)의 이름을 따서 메로에스(산스크리트어로 마우리아와 동일)라고도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한다.[3][4]

알렉산드로스가 펀자브에 있을 때, 아슈바카족은 카불 계곡 하부의 그리스 사트라프인 니카노르를 암살했고, 샤시굽타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이후 샤시굽타는 알렉산드로스의 진영을 떠나 새롭게 등장하는 강력한 저항 세력과 함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샤시굽타는 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아리아노스는 모에레스,[6] 쿠르티우스는 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고 표기했다.[7] 쿠르티우스가 언급한 인더스강 하류 삼각주(파탈라)의 족장 모에리스는 아리아노스가 포로스의 오랜 친구라고 주장하는 북서쪽의 메로스와 동일한 인물로 보인다.[6] 알렉산드로스는 샤시굽타를 추격했고, 그는 파탈라의 족장인 쿠르티우스의 모에레스로 그곳에 나타났을 것이다.[7]

2. 2. 알렉산드로스와의 관계

샤시굽타는 군사 모험가이자 용병단의 지도자로 추정된다.[1] 그는 박트리아의 베수스를 돕기 위해 용병단을 이끌었으나, 베수스가 패배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편에 서서 소그디아나와 쿠나르 및 스와트 계곡 원정에 참여했다.[1]

기원전 327년 5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강 서쪽을 침공했을 때, 샤시굽타는 아슈바카족을 제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마케도니아에 충성을 바쳤다.[1] 알렉산드로스는 아오르노스 요새의 지휘권을 샤시굽타에게 맡기고 그를 동부 아슈바카 주변 국가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다.[1]

히다스페스 전투 이후, 샤시굽타는 포로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2] 그는 포로스, 알렉산드로스와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탁샤실라의 통치자 암비가 평화 협상에 실패한 후 알렉산드로스의 선택을 받았다.[3][4]

몇 달 후, 아슈바카족이 카불 계곡 하부의 그리스 사트라프 니카노르를 암살하고 샤시굽타를 위협했다.[5] 샤시굽타는 알렉산드로스 진영을 떠나 저항 세력에 합류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5] 아리아노스는 모에레스,[6] 쿠르티우스는 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고 표기했다.[7] 알렉산드로스는 샤시굽타를 추격했고, 그는 파탈라의 족장 모에레스로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7]

2. 3. 독자적인 세력 구축

샤시굽타의 초기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군사 모험가이자 경제적, 군사적 목표를 추구하는 용병단의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

샤시굽타는 페르시아인, 특히 박트리아의 이란인 사트라프 베수스를 돕기 위해 용병단을 이끌었지만, 베수스가 패배하자 전사들과 함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협력하여 소그디아나와 쿠나르 및 스와트 계곡 원정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1]

기원전 327년 5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강 서쪽의 알리상/쿠나르, 마사가, 아오르노스 공화국 영토를 침공했을 때, 샤시굽타는 알리상/쿠나르와 스와트 계곡의 아슈바카족 크샤트리야 족장 여러 명을 감축하는 데 공을 세워 마케도니아 침략자에게 충성을 바쳤다.[1] 알렉산드로스는 아슈바카족이 저항했던 스와트의 아오르노스 요새를 점령한 후, 매우 전략적인 아오르노스 요새의 지휘권을 샤시굽타에게 맡기고 그를 동부 아슈바카 주변 국가의 사트라프로 임명했다.[1]

히다스페스 전투가 끝날 무렵, 아리아노스는 인도인이자 포로스의 오랜 친구인 메로에스라는 인물을 언급하며, 그가 알렉산드로스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도망친 포루스를 다시 데려오는 임무를 맡았다고 증언한다.[2] 샤시굽타는 포로스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탁샤실라의 통치자 암비가 평화 협상에 실패했을 때 알렉산드로스의 선택을 받아 알렉산드로스와 포로스 사이의 평화 협상을 이끌기도 했다.[3][4]

샤시굽타는 그의 고향인 메로스(산스크리트어로 메르 또는 메르, 아마도 메루산을 의미)의 이름을 따서 메로에스(산스크리트어로 마우리아와 동일)라고도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3][4] 또는 샤시굽타가 언덕이나 산악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메로스'(Maurya?)라는 이름이 '메르'(언덕 또는 산) 또는 '메라'(언덕인)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펀자브에 있을 때, 아슈바카족은 카불 계곡 하부의 그리스 사트라프인 니카노르를 암살했고, 샤시굽타를 위협했다. 필리포스가 니카노르의 자리에 임명되었지만, 고전 문헌에는 샤시굽타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샤시굽타는 알렉산드로스의 진영을 떠난 후, 새롭게 등장하는 강력한 저항 세력과 함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샤시굽타는 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아리아노스는 모에레스,[6] 쿠르티우스는 모에레스 또는 모에리스라고 표기했다.[7] 쿠르티우스가 언급한 인더스강 하류 삼각주(파탈라)의 족장 모에리스는 아리아노스가 포로스의 오랜 친구라고 주장하는 북서쪽의 메로스와 동일한 사람으로 보인다.[6] 알렉산드로스는 샤시굽타를 추격했고, 그는 파탈라의 족장인 쿠르티우스의 모에레스로 그곳에 나타났을 것이다.[7] 반란 세력에 합류한 후, 샤시굽타의 가명인 메로스 또는 모에레스가 반란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3. 정체

시시코토스/시소코스투스는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원정기/Ἀλεξάνδρου Ἀνάβασιςgrc에 두 번 등장하고, 쿠르티우스에 의해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Historiae Alexandri Magnila에 한 번 등장한다.[8] 많은 학자들은 샤시굽타가 힌두쿠시 남쪽의 어떤 변경지역 언덕 국가의 통치자였다고 제안하지만,[8] 그를 마사가나 아오르노스(피르-시르) 출신의 아슈바카계 가문의 치열한 크샤트리야 씨족 또는 다른 인접 영토의 전쟁 같은 배경에서 온 군사적 모험가 또는 기업의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샤시굽타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아오르노스 국가의 아슈바카족 통치자로 임명되기 전의 왕가 배경을 증명하는 고대 증거는 없다.

찬드라굽타들 중 하나와 관련하여 최소한 4개의 학설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동일시하는 반면,[9] 다른 학자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동인도에 기원을 둔 별개의 인물이라고 말하고,[10] 제3의 학파는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를 둘 다 아슈바카족 분파와 관련이 있는 별개의 파로파미사다인 인물로 보고 있다.[11]

===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의 동일인물설 ===

H. C. 세스 박사와 H. R. 굽타 박사 같은 학자들은 샤시굽타가 마우리아 제국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17] 이들에 따르면 샤시굽타(시시코토스)와 찬드라굽타(산드로코토스)는 모두 문자 그대로 "달을 보호한다"는 뜻이다.[12] 샤시굽타의 '샤시'는 산스크리트어로 찬드라굽타의 '찬드라'와 같은 의미로, 둘 다 '달'을 의미하며, 두 이름은 동의어이다.[12] 인도에서 주어진 이름을 동의어로 대체하는 것은 드문 관행이 아니기에,[13] 찬드라굽타가 샤시굽타의 대체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4]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의 초기 생애를 비교하면, 두 사람 모두 군사적 모험가, 반항적이고 기회주의자, 야심 있고 약삭빠른 정치인이며, 같은 시기 인도 북서부의 같은 장소에서 역사에 등장한다.[14] 안드라코토스가 젊은 시절 알렉산드로스를 만났다는 플루타르코스의 진술은 시시코토스가 기원전 329년 박트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하여 이란인들을 도우러 갔던 것을 암시한다.[14] J. W. 맥크린들은 플루타르코스의 진술로부터 찬드라굽타가 마가다가 아닌 펀자브 출신이었다고 결론짓는다.[15] 아피아노스는 "인더스를 건넜고, 셀레우코스는 그 강 (인더스)에 거주했던 인도인의 왕 안드로코토스와 전쟁을 했다"고 진술하여,[16] 찬드라굽타가 처음에는 인더스 국가의 통치자였음을 보여준다.[17] 기원전 305년에 일어난 찬드라굽타의 셀레우코스와의 전쟁[18] 이후에야 찬드라굽타는 수도와 거주지를 파탈리푸트라로 이동했다.

세스 박사는 찬드라굽타가 샤시굽타와 동일하다면, 그가 힌두쿠시에서 동부 펀자브까지 영향력을 뻗친 아슈바카족 크샤트리야 씨족에 속한다고 가정한다.[19] 마우리아가 인도의 다른 지역을 정복하면서, 이 아슈바카족들은 인도의 다른 지역에도 정착했고, 불교 문헌에서 남부 아슈바카족(아슈마카)에 대해 알 수 있다. 아슈바카족은 달 왕조에 속했다고 전해지며, 알렉산드로스는 힌두쿠시와 인더스 사이 지역에서 아슈바카족에게 끔찍한 저항을 받았다.[19]

일부 학자들은 북서쪽의 그리스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인더스강 하류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20] 파탈라의 모에리스가 이 혁명의 선구자였을 수 있고, 그는 북서쪽의 메로스, 즉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동일인물로 추정될 수 있다.[21][22] B. M. 바로아 박사, H. C. 세스 박사 등도 샤시굽타를 찬드라굽타와 동일시한다.[23] J. W. 맥크린들 박사는 찬드라굽타를 펀자브 출신이라고 부른다.[23] 데이비드 B. 스푼러는 찬드라굽타가 마가다에 왕조를 세운 이란인이라고 생각한다.[24] H. R. 굽타 박사는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 모두 북서쪽 국경에 속했고, 아슈바카 크샤트리아의 두 지역에 속했다고 생각한다.[25][26][27] 찬드라 차크라바르티 박사는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를 북서쪽 국경과 연관시키고, 샤시굽타는 말칸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아슈바카의 우자나카 또는 우디야나(스와트) 지역의 통치자였다고 진술한다.[28]

=== 기타 학설 ===

샤시굽타(시시코토스/시소코스투스)는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원정기/Ἀλεξάνδρου Ἀνάβασιςgrc에 두 번, 쿠르티우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Historiae Alexandri Magnila에 한 번 등장한다.[8] 학자들은 샤시굽타가 힌두쿠시 남쪽 변경 지역 언덕 국가의 통치자였다고 보지만,[8] 마사가나 아오르노스(피르-시르) 출신의 아슈바카계 가문의 크샤트리야 씨족이거나, 인접 영토 출신의 군사 모험가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샤시굽타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아오르노스 국가의 아슈바카족 통치자로 임명되기 전의 왕가 배경을 증명하는 고대 증거는 없다.

찬드라굽타와 관련하여 최소한 4개의 학설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동일인물로 보지만,[9] 다른 학자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동인도에 기원을 둔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10] 제3의 학파는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를 모두 아슈바카족 분파와 관련 있는 별개의 파로파미사다인 인물로 간주한다.[11]

3. 1.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의 동일인물설

H. C. 세스 박사와 H. R. 굽타 박사 같은 학자들은 샤시굽타가 마우리아 제국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17] 이들에 따르면 샤시굽타(시시코토스)와 찬드라굽타(산드로코토스)는 모두 문자 그대로 "달을 보호한다"는 뜻이다.[12] 샤시굽타의 '샤시'는 산스크리트어로 찬드라굽타의 '찬드라'와 같은 의미로, 둘 다 '달'을 의미하며, 두 이름은 동의어이다.[12] 인도에서 주어진 이름을 동의어로 대체하는 것은 드문 관행이 아니기에,[13] 찬드라굽타가 샤시굽타의 대체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4]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의 초기 생애를 비교하면, 두 사람 모두 군사적 모험가, 반항적이고 기회주의자, 야심 있고 약삭빠른 정치인이며, 같은 시기 인도 북서부의 같은 장소에서 역사에 등장한다.[14] 안드라코토스가 젊은 시절 알렉산드로스를 만났다는 플루타르코스의 진술은 시시코토스가 기원전 329년 박트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하여 이란인들을 도우러 갔던 것을 암시한다.[14] J. W. 맥크린들은 플루타르코스의 진술로부터 찬드라굽타가 마가다가 아닌 펀자브 출신이었다고 결론짓는다.[15] 아피아노스는 "인더스를 건넜고, 셀레우코스는 그 강 (인더스)에 거주했던 인도인의 왕 안드로코토스와 전쟁을 했다"고 진술하여,[16] 찬드라굽타가 처음에는 인더스 국가의 통치자였음을 보여준다.[17] 기원전 305년에 일어난 찬드라굽타의 셀레우코스와의 전쟁[18] 이후에야 찬드라굽타는 수도와 거주지를 파탈리푸트라로 이동했다.

세스 박사는 찬드라굽타가 샤시굽타와 동일하다면, 그가 힌두쿠시에서 동부 펀자브까지 영향력을 뻗친 아슈바카족 크샤트리야 씨족에 속한다고 가정한다.[19] 마우리아가 인도의 다른 지역을 정복하면서, 이 아슈바카족들은 인도의 다른 지역에도 정착했고, 불교 문헌에서 남부 아슈바카족(아슈마카)에 대해 알 수 있다. 아슈바카족은 달 왕조에 속했다고 전해지며, 알렉산드로스는 힌두쿠시와 인더스 사이 지역에서 아슈바카족에게 끔찍한 저항을 받았다.[19]

일부 학자들은 북서쪽의 그리스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인더스강 하류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20] 파탈라의 모에리스가 이 혁명의 선구자였을 수 있고, 그는 북서쪽의 메로스, 즉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동일인물로 추정될 수 있다.[21][22] B. M. 바로아 박사, H. C. 세스 박사 등도 샤시굽타를 찬드라굽타와 동일시한다.[23] J. W. 맥크린들 박사는 찬드라굽타를 펀자브 출신이라고 부른다.[23] 데이비드 B. 스푼러는 찬드라굽타가 마가다에 왕조를 세운 이란인이라고 생각한다.[24] H. R. 굽타 박사는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 모두 북서쪽 국경에 속했고, 아슈바카 크샤트리아의 두 지역에 속했다고 생각한다.[25][26][27] 찬드라 차크라바르티 박사는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를 북서쪽 국경과 연관시키고, 샤시굽타는 말칸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아슈바카의 우자나카 또는 우디야나(스와트) 지역의 통치자였다고 진술한다.[28]

3. 2. 기타 학설

샤시굽타(시시코토스/시소코스투스)는 아리아노스의 아나바시스에 두 번, 쿠르티우스의 히스토리아에 알렉센드리 마그니에 한 번 등장한다.[8] 학자들은 샤시굽타가 힌두쿠시 남쪽 변경 지역 언덕 국가의 통치자였다고 보지만,[8] 마사가나 아오르노스(피르-시르) 출신의 아슈바카계 가문의 크샤트리야 씨족이거나, 인접 영토 출신의 군사 모험가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샤시굽타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아오르노스 국가의 아슈바카족 통치자로 임명되기 전의 왕가 배경을 증명하는 고대 증거는 없다.

찬드라굽타와 관련하여 최소한 4개의 학설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동일인물로 보지만,[9] 다른 학자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동인도에 기원을 둔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10] 제3의 학파는 샤시굽타와 찬드라굽타를 모두 아슈바카족 분파와 관련 있는 별개의 파로파미사다인 인물로 간주한다.[11]

4. 평가

참조

[1] 서적 Arrian's Anabasis, Book 4b, Ch xxx, and Book 5b, ch xx 1893
[2] 서적 The Invasion of India by Alexander the Great 1896
[3] 서적 The History and Culture of the Indian People Bharatiya Vidya Bhavan, Bhāratīya Itihāsa Samiti 1969
[4] 서적 Historiae Alexandri Magni, Book 8, Ch XI
[5] 서적 Arrian Anabasis, Book 5b, Ch xviii 1893
[6] 서적 The Invasion of India by Alexander the Great 1896
[7] 서적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in Ancient Panjab 1964
[8] 간행물 Annals of the Bhandarkar Oriental Research Institute, Poona Bhandarkar Oriental Research Institute - Indo-Aryan philology 1936
[9] 간행물 The Indian Historical Quarterly India 1963
[10] 간행물 Punjab History Conference, Second Session, 28–30 October 1966 Punjabi University Patiala 1966-10-28
[11] 간행물 The Indian Review India 1937
[12] 기타
[13] 서적 Age of Nandas, and Mauryas 1967
[14] 서적 Maurajya Samarajya Samsakrik Itihasa 1972
[15] 서적 Alexander's Campaigns in Sind and Baluchistan and the Siege of the Brahminabad 1975
[16] 서적 Indological Studies University of Sindh, Institute of Sindhology 1977
[17] 서적 Arrian's Anabasis, Book 5b, Ch xx
[18] 서적 Historiae Alexandri Magni, ix,8,29
[19] 서적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India
[20] 간행물 Proceedings, Volume 1 Punjabi University. Dept. of Punjab Historical Studies 1968
[21] 서적 Punjab past and present: essays in honour of Dr. Ganda Singh 1976
[22] 서적 Punjab revisited: an anthology of 70 research documents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undivided Punjab 1995
[23] 서적 Chandragupta Maurya 1969
[24] 간행물 The Indian Historical Quarterly 1937
[25] 간행물 The Indian Review 1937
[26] 간행물 Did Candragupta Maurya belong to North-Western India?, Annals of the Bhandarkar Oriental Research Institute, Poona 1936
[27] 간행물 Was Chandragupta Maurya a Punjabi?, Punjab History Conference, Second Session, 28-30 October 1966, Punjabi University Patiala 1966-10-28
[28] 서적 Plutarch's Life of Alexander, Chapter LXII
[29] 서적 The Invasion of India by Alexander the Great 1896
[30] 서적 The Invasion of India by Alexander the Great 1896
[31] 서적 Appian's Roman History, XI.55
[32] 간행물 Annals of the Bhandarkar Oriental Research Institute, Poona Bhandarkar Oriental Research Institute 1936
[3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ndia 1962
[34] 서적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1910
[35] 서적 A History of Asia 1964
[36] 서적 Chronology of World History 1975
[37] 간행물 Did Candragupta Maurya belong to North-Western India?, Annals of the Bhandarkar Oriental Research Institute, Poona 1936
[38] 서적 Political History of Ancient India 1996
[39] 서적 Studies in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1962
[40] 서적 Studies in Alexander's Campaigns 1973
[41] 뉴스 Poisoning of Alexander ( part 2 )
[42] 서적 The Invasion of India by Alexander the Great 1896
[43] 간행물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915
[44] 간행물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915
[45] 간행물 Was Chandragupta Maurya a Punjabi?, Punjab History Conference, Second Session, October 28-30, 1966, Punjabi University Patiala 1966-10-28
[46] 서적 Punjab revisited: an anthology of 70 research documents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undivided Punjab 1995
[47] 서적 Punjab past and present: essays in honour of Dr. Ganda Singh 1976
[48] 서적 The Racial History of Ancient India 194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