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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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탁실라는 고대 도시로, 현재 파키스탄에 위치해 있으며, 산스크리트어로는 탁샤실라, 팔리어로는 탁카실라로 불렸다.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아케메네스 제국, 헬레니즘 시대, 마우리아 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쿠샨 제국 등의 지배를 받으며 번성했다. 탁실라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법학, 의학, 군사학 등 다양한 학문을 가르치는 학문의 중심지였다. 현재 탁실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유적과 박물관을 통해 관광지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국방 및 군수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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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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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이름 | 탁실라 |
원어 이름 | 펀자브어 및 우르두어: |rtl=yes}}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 아쇼카 프라크리트어: , 고대 그리스어: |
별칭 | 없음 |
국가 | 파키스탄 |
행정 구역 | 펀자브 주 |
구역 | 라왈핀디 구역 |
군 | 라왈핀디 군 |
테실 | 탁실라 테실 |
설립 | 기원전 1000년경 |
우편 번호 | 47080 |
지역 번호 | 596 |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번호 | 139 |
유네스코 등재 연도 | 1980년 |
유네스코 기준 | iii, vi |
시간대 | PKT (UTC+5:00) |
![]() | |
지리 | |
고도 | 549m |
면적 | 알 수 없음 |
인구 통계 | |
총 인구 (2023년) | 136900명 (탁실라 칸톤 포함) |
추가 정보 | |
언어 | 펀자브어 우르두어 |
2. 어원
고대에 탁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탁샤실라/Takṣaśilāsa(IAST) 이었고, 팔리어로는 탁카실라/Takkhasilāpi로 알려져 있었다.[11]
샤타파타 브라흐마나와 같은 베다 경전에서는 베다 철학자 우달라카 아루니(기원전 7세기경)가 간다라 지역을 여행했다고 언급하며, 기원전 4세기-3세기의 불교 경전인 자타카에서는 아루니와 그의 아들 슈베타케투가 모두 탁실라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15] 기원전 4세기의 산스크리트 문법 논문인 파니니의 아슈타디야이에서도 탁실라에 대한 초기 언급이 나타난다.
그러나 도시의 현대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표기[11][12]에서 유래하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기록되어 있다.[13] 시간이 지나면서 "탁실라"라는 그리스어 표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이름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법현은 이 도시 이름의 의미를 "잘린 머리"라고 했다.[14] 자타카의 도움을 받아, 그는 이곳이 가우타마 붓다가 이전 생애에서 "푸사" 또는 "찬다프라바"로서 배고픈 사자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잘랐던 곳이라고 해석했다.[14] 이러한 전통은 19세기에 '바부르 카나'('호랑이 집')로 알려졌던 시르캅(역시 "잘린 머리"를 의미함) 앞 지역에 남아 있다.[14] 이는 가우타마 붓다가 자신의 머리를 바쳤던 곳을 암시한다.[14] 게다가 탁실라 계곡 남쪽의 산맥은 "마르갈라"()라고 불린다.[14]
3. 역사적 배경
힌두교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상당 부분은 바이샴파야나(현자 비야사의 제자)와 자나메자야 왕 사이의 대화로, 전통적으로 이 이야기는 비야사의 지시에 따라 바이샴파야나가 탁샤실라에서 자나메자야가 거행한 뱀 제사에서 처음으로 낭송했다고 믿어진다.[11] 쿠루 왕국의 상속자인 파리크시트(아르주나의 손자)는 탁샤실라에서 즉위했다고 한다.
라마야나에서는 탁샤실라를 라마의 동생인 바라타가 건설한 부유함으로 유명한 웅장한 도시로 묘사한다. 바라타는 두 아들 탁샤와 푸슈칼라를 두 도시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불교 자타카에서는 탁실라를 간다라 왕국의 수도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사들이 있는 위대한 학문의 중심지로 묘사한다.[11] 자타카는 탁실라의 비불교 기관과 교사들을 언급하며, 법, 의학, 군사 과학을 포함한 베다와 기술 분야의 우세를 보여준다. 탁카실라 자타카(텔라파타 자타카)는 바라나시 왕자가 탁실라의 왕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디파팜사에 따르면 탁실라의 초기 왕들 중 한 명은 디판카라라는 크샤트리아였으며, 아바다나칼팔라타에 언급된 쿤자카르나/Kuñjakarṇasa는 도시와 관련된 또 다른 왕이다.
자이나교 전통에서는 수백만 년 전에 티르탄카라 중 첫 번째인 리샤바가 탁실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의 발자취는 나중에 바후발리에 의해 성별되었으며, 그 위에 옥좌와 다르마차크라('법의 수레')를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탁실라(Taxila) 왕국이 탁실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했다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탁실라(Takṣaśilā)는 탁샤(Takṣa) 왕의 땅을 의미하며, 탁샤는 바라타의 아들이라고 한다.[55]
다모다르 달마난드 코산비(Damodar Dharmanand Kosambi)의 설에 따르면, 탁실라(Takṣaśilā)는 "목수"를 의미하는 "탁샤카(Takṣaka)"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으며, 이 "탁샤카"는 나가족(Nāga)의 다른 명칭이었다.[55]
3. 1. 전통적 기록
샤타파타 브라흐마나와 같은 베다 경전에서는 베다 철학자 우달라카 아루니(기원전 7세기경)가 간다라 지역을 여행했다고 언급하며, 기원전 4세기-3세기의 불교 경전인 자타카에서는 아루니와 그의 아들 슈베타케투가 모두 탁실라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15] 기원전 4세기의 산스크리트 문법 논문인 파니니의 아슈타디야이에서도 탁실라에 대한 초기 언급이 나타난다.
힌두교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상당 부분은 바이샴파야나(현자 비야사의 제자)와 자나메자야 왕 사이의 대화로, 전통적으로 이 이야기는 비야사의 지시에 따라 바이샴파야나가 탁샤실라에서 자나메자야가 거행한 뱀 제사에서 처음으로 낭송했다고 믿어진다.[11] 쿠루 왕국의 상속자인 파리크시트(아르주나의 손자)는 탁샤실라에서 즉위했다고 한다.
라마야나에서는 탁샤실라를 라마의 동생인 바라타가 건설한 부유함으로 유명한 웅장한 도시로 묘사한다. 바라타는 두 아들 탁샤와 푸슈칼라를 두 도시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불교 자타카에서는 탁실라를 간다라 왕국의 수도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사들이 있는 위대한 학문의 중심지로 묘사한다.[11] 자타카는 탁실라의 비불교 기관과 교사들을 언급하며, 법, 의학, 군사 과학을 포함한 베다와 기술 분야의 우세를 보여준다. 탁카실라 자타카(텔라파타 자타카)는 바라나시 왕자가 탁실라의 왕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디파팜사에 따르면 탁실라의 초기 왕들 중 한 명은 디판카라라는 크샤트리아였으며, 아바다나칼팔라타에 언급된 쿤자카르나/Kuñjakarṇasa는 도시와 관련된 또 다른 왕이다.
자이나교 전통에서는 수백만 년 전에 티르탄카라 중 첫 번째인 리샤바가 탁실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의 발자취는 나중에 바후발리에 의해 성별되었으며, 그 위에 옥좌와 다르마차크라('법의 수레')를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탁실라(Taxila) 왕국이 탁실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했다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탁실라(Takṣaśilā)는 탁샤(Takṣa) 왕의 땅을 의미하며, 탁샤는 바라타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마하바라타에서는 쿠루 왕국의 즉위식이 탁실라에서 거행되었다고 전해진다.[55]
다모다르 달마난드 코산비(Damodar Dharmanand Kosambi)의 설에 따르면, 탁실라(Takṣaśilā)는 "목수"를 의미하는 "탁샤카(Takṣaka)"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으며, 이 "탁샤카"는 나가족(Nāga)의 다른 명칭이었다.[55]
3. 2. 초기 정착
탁실라 주변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정착이 이루어졌으며, 탁실라의 일부 유적은 기원전 1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6] 기원전 1300년경 초기 하라파 시대의 유적도 발견되었지만,[16] 인더스 문명의 붕괴 후 이 지역은 버려졌다.[16]
탁실라 박물관 남서쪽 2km 지점에 위치한 사라이 콜라에서 가장 초기의 정착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4천년기 후반부터 3천년기 초반 사이에 거주했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연마된 돌 도끼, 쳐트 석재 조각, 독특한 고광택 토기 등이 발견되었다.[17] 사라이 콜라의 제1A기와 제2기에서는 적색 고광택 토기가 등장하고, 콧 디지 양식의 토기가 더 많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물레를 사용한 제작 흔적을 보여주어 기술적 변화를 나타낸다. 제2기/콧 디지 시대는 기원전 3천년기 중후반부터 2천년기 초반까지로 추정된다.[17]
전설에 따르면, 탁실라(Taxila) 왕국은 탁샤(Takṣa) 왕의 땅을 의미하며, 탁샤는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바라타(Bharata)의 아들이라고 한다. 『마하바라타』에서는 쿠루(Kuru) 왕국의 즉위식이 탁실라에서 거행되었다고 전해진다.[55] 다모다르 달마난드 코산비(Damodar Dharmanand Kosambi)는 탁실라(Takṣaśilā)가 "목수"를 의미하는 "탁샤카(Takṣaka)"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나가족(Nāga)의 다른 명칭이라고 주장했다.[55]
탁실라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한 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518년에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57] 그러나 펀자브 주에는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고고학적 유적이 남아있지 않아[56] 그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에 진입했을 때, 탁실라를 지배하고 있던 탁실레스(암비, Ambhihi Taxilesgrc)는 알렉산드로스를 도와 포로스를 물리쳤다.[57]
기원전 321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북서 인도를 정복하고 마우리아 제국을 건국하면서 탁실라는 마우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아소카왕 시대에는 탁실라가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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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데메트리오스 1세가 간다라를 정복하고 인더스강 유역을 정복했다.[59] 데메트리오스 1세는 탁실라 맞은편에 실카프()를 건설했다. 인도-그리스 왕조 시대에는 여러 차례 왕조 교체가 있었지만, 탁실라는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고, 이 시대에 주조된 화폐가 출토되었다.
기원전 90년, 스키타이인이 인도-그리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25년에는 곤도파르네스가 탁실라를 지배하고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건국하여 탁실라는 수도로서 기능했다.[57] 76년에는 쿠샤나 제국이 건국되었고,[59] 간다라 미술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5세기에 에프탈의 침입으로 탁실라의 불교 사원과 스투파가 파괴되었다.
탁실라의 발굴은 1872년 알렉산더 커닝엄에 의해 시작되었다. 1913년부터 1934년 사이에는 존 마셜 경()에 의한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고, 출토품은 탁실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 3. 간다라 왕국
간다라는 남아시아 서부의 고대 인도 아리아 왕국으로, 철기 시대부터 존재가 확인된다.[18][19] 왕국의 수도는 탁실라였으며, 탁실라의 최초 주요 정착지는 하티알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기원전 10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20] 기원전 900년경 탁실라는 푸샬라바티(Puṣkalāvatī)와의 무역을 통해 지역 상업에 참여했다.[21]
전설에 따르면, 탁실라는 탁샤 왕의 땅을 의미하며, 탁샤는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바라타의 아들이다. 『마하바라타』에서는 쿠루 왕국의 즉위식이 탁실라에서 거행되었다고 전해진다.[55]
탁실라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한 주로 시작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 시대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고 펀자브 주에는 관련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56] 기원전 518년에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57] 다모다르 달마난드 코산비에 따르면, 탁실라는 "목수"를 의미하는 "탁샤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으며, 이는 나가족의 다른 명칭이었다.[55]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에 진입했을 때, 탁실라를 지배하던 탁실레스(암비)는 알렉산드로스를 도와 포로스를 물리쳤다.[57]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에우다모스 장군을 파견하여 페이트론을 인도에서 철수시켰다.[58]
기원전 321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펀자브 지방을 포함한 북서 인도를 정복하고 마우리아 제국을 건국하면서 탁실라는 마우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아쇼카왕 시대에는 탁실라가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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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제국의 멸망 후, 기원전 185년경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데메트리오스 1세가 간다라와 펀자브 지방을 정복하고 탁실라 맞은편에 실카프를 건설했다. 인도-그리스 왕조 시대에 탁실라는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고, 이 시대에 주조된 화폐가 출토되었다.
기원전 90년, 스키타이인이 탁실라에서 마지막 그리스계 왕을 몰아냈다. 기원전 25년에는 곤도파르네스가 탁실라를 지배하고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건국하여 탁실라를 수도로 삼았다.[57] 76년에는 쿠샤나 제국이 건국되었고,[59] 간다라 미술이 꽃을 피웠다. 그러나 5세기에 에프탈의 침입으로 탁실라의 불교 사원과 스투파가 파괴되었다.
탁실라 발굴은 1872년 알렉산더 커닝엄에 의해 시작되었고, 1913년부터 1934년 사이에는 존 마셜에 의해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탁실라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3. 4. 아케메네스 제국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통치 기간 동안 탁실라는 크게 성장했다.[22] 기원전 516년, 다리우스 1세는 중앙아시아, ''아리아나'' 및 ''박트리아'' 정복 원정을 시작하여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로 진군했다.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516~515년 겨울을 탁실라 주변 간다라 지역에서 보냈고, 기원전 515년에 인더스 계곡 정복을 준비했다.[22] 이후 그는 카리아의 스퀼락스를 임명하여 인더스 강 어귀에서 수에즈까지 인도양을 탐험하게 했다. 다리우스는 그 후 볼란 고개를 통해 페르시아로 돌아갔다.[22] 이 지역은 크세르크세스 1세 통치 기간 동안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세기 이상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22]
탁실라는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 이후, 특히 간다라 왕국의 일부로 통치되었지만, 때때로 독립적인 지역이나 도시 국가를 형성하기도 했다.[23] 전설에 따르면 탁실라 왕국은 탁실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했고, 산스크리트어로 탁실라(Takṣaśilā)는 탁샤(Takṣa) 왕의 땅을 의미한다고 한다. 탁샤는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바라타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인도를 대표하는 또 다른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는 쿠루 왕국의 즉위식이 탁실라에서 거행되었다고 전해진다.[55]
탁실라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한 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 시대라고 여겨지지만, 아케메네스 제국에 의한 탁실라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또한, 펀자브 주에는 고고학적으로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56] 기원전 518년에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57] 다모다르 달마난드 코산비의 설에 따르면, 탁실라(Takṣaśilā)는 "목수"를 의미하는 "탁샤카(Takṣaka)"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으며, 이 "탁샤카"는 나가족의 다른 명칭이었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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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 계곡을 침략하는 동안 기원전 326년 도시 통치자 옴피스(Āmbhi) 왕이 항복함으로써 탁실라()[24]를 전투 없이 장악할 수 있었다.[24] 그리스 역사가들은 탁실라를 "부유하고 번영하며 잘 통치되는" 도시로 묘사했다.[24] 아리아누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시민들에게 환영받았고, 제사를 드리고 체육 및 기마 경기를 거행했다고 기록한다.[25]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이 지역은 그의 장군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에게 넘어갔고,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설했다. 전설에 따르면 탁실라 왕국은 탁실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했으며, 산스크리트어로 탁실라(Takṣaśilā)는 탁샤(Takṣa) 왕의 땅을 의미한다. 탁샤는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에 등장하는 바라타(Bharata)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인도를 대표하는 또 다른 서사시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에서는 쿠루(Kuru) 왕국의 즉위식이 탁실라에서 거행되었다고 전해진다.[55]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에 진입했다. 당시 탁실라를 지배하고 있던 탁실레스(Taxiles)(암비(Ambhi), Taxiles)는 알렉산드로스를 도왔고, 알렉산드로스는 파우라바(Paurava) 왕 포로스(Porus)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57]
기원전 321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현재의 펀자브 지방을 포함한 북서 인도 정복을 시작하여 마우리아 제국을 건국했고, 탁실라를 포함한 펀자브 지방은 마우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소카왕 시대에는 탁실라가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탁실라 자체가 마우리아 제국에 완전히 복종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마우리아 제국에 대한 반란이 여러 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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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는 마우리아 제국의 멸망 현장이기도 했다. 기원전 185년, 마지막 왕인 브리하드라타 마우리아(Brihadratha Maurya)가 신하에 의해 암살되었다.[59] 이 무렵, 데메트리오스 1세가 이끄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 간다라를 정복하고 펀자브 지방을 거쳐 인더스강 유역을 정복했다.[59] 데메트리오스 1세는 탁실라 맞은편에 실카프(Sirkap)를 건설했다. 인도-그리스 왕조 시대에는 여러 차례 왕조 교체가 있었지만, 탁실라는 왕조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인도-그리스 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스키타이인이었다. 기원전 90년, 스키타이인 부족장이 마지막 그리스계 왕을 탁실라에서 몰아냈다. 기원전 25년에는 곤도파르네스가 탁실라를 지배하고,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건국하여 파르티아로부터 독립했다. 그때에도 탁실라는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수도로서 기능했다.[57]
3. 6. 마우리아 제국
기원전 303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남아시아 총독들을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 이후 공식적으로 합병한 마우리아 제국은 주도이자 고등 교육의 중심지였던 탁실라를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통치하에 두었다. 그의 조언자 카우틸리아/차나키아는 탁실라 대학에서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소카 대왕 통치 시기에 탁실라는 불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소규모 반란도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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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는 "왕립 고속도로"를 따라 파탈리푸트라, 고대 페샤와르, 푸샬라바티, 카슈미르, 박트리아, 카피샤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기원전 321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현재의 펀자브 지방을 포함한 북서 인도 정복을 시작하여 마우리아 제국을 건국했고, 탁실라를 포함한 펀자브 지방은 마우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아쇼카왕 시대에 탁실라는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마우리아 제국에 대한 반란이 여러 번 일어났다.
마우리아 제국은 기원전 185년, 마지막 왕인 브리하드라타 마우리아가 신하에 의해 암살되면서 멸망했다.[59]
3. 7. 인도-그리스, 인도-스키타이, 인도-파르티아 왕국
기원전 2세기, 탁실라는 인도-그리스 왕국의 박트리아에 병합되었다. 인도-그리스인들은 탁실라 맞은편 강둑에 새로운 수도인 시르캅을 건설했다. 이 시기 안티알키다스와 같은 여러 왕조가 탁실라를 수도로 삼아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 통치 침체기에도 도시는 자체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여러 지역 상인 조합을 독자적으로 통제했고, 도시의 자치화폐 대부분을 주조하기도 했다. 기원전 1세기 또는 기원후 1세기경, 인도-스키타이 왕 아질리세스는 세 개의 주화 주조소 중 하나를 탁실라에 두고, 그리스어와 카로슈티 문자로 된 주화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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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90년경 인도-스키타이 지도자 마우에스가 탁실라의 마지막 그리스 왕을 폐위시켰다.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창시자 곤도파레스는 기원전 20년경 탁실라를 정복하고 수도로 삼았다. 초기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사도 도마는 기원후 46년경 곤도파레스 4세를 방문했는데, 그 도시가 곤도파레스의 수도였던 점을 고려하면 탁실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25년에는 곤도파르네스(Gondophares)가 탁실라를 지배하고, 그 후 인도-파르티아 왕국(Indo-Parthian Kingdom)을 건국하여 파르티아(Parthia)로부터 독립했다. 그때에도 탁실라는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수도로서 기능했다.
3. 8. 쿠샨 제국
50년경, 그리스 신피타고라스 학파 철학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가 탁실라를 방문했다. 약 200년 후 그의 전기를 쓴 필로스트라투스는 탁실라를 니네베와 비슷한 크기의 대칭적인 계획으로 건설된 요새 도시로 묘사했다. 현대 고고학은 이러한 묘사를 확인해 준다. 76년에 작성된 비문들은 쿠샨 제국 창시자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파르티아 제국으로부터 탁실라를 점령한 후, 그 도시가 그때까지 쿠샨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위대한 쿠샨 제국의 통치자 카니시카는 나중에 탁실라의 가장 최근 고대 정착지인 시르수크를 건설했다.
3. 9. 굽타 제국
4세기 중반, 굽타 제국(Gupta Empire)은 동부 간다라(Gandhara) 지역을 점령하고 탁실라(Taxila)에 쿠마라탸(Kumaratya)의 주둔지를 설치했다. 이 도시는 비단, 샌달우드, 말, 목화, 은제품, 진주, 향신료 등을 포함한 무역 연결망으로 유명해졌다. 이 시기에 탁실라는 고전 인도 문학에서 문화 중심지이자 군사적 경계 도시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26][27]
3. 10. 쇠퇴
키다라인들은 450년경 탁실라를 침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구프타 제국의 황제 스칸다굽타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도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이는 훈족의 존재, 무역 붕괴, 그리고 페르시아, 키다라 국가, 서부 간다라의 훈족 간의 3자 전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470년경 흰 훈족과 알콘 훈족이 간다라와 펀자브를 휩쓸며 탁실라의 불교 사찰과 스투파들을 파괴했고, 도시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500년부터 540년까지 도시는 미히라쿨라가 통치하는 훈족 제국의 지배하에 쇠퇴했다.[29][30] 미히라쿨라는 인도 아대륙 북서부 지역의 불교 유적, 사찰, 힌두교 사원들을 파괴했다.
629년부터 645년까지 인도를 방문한 현장은 630년에 탁실라를 방문했을 때 대부분의 산가라마가 여전히 폐허가 되어 있고, 몇몇 승려들만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왕국이 카슈미르의 속국이 되었고, 지역 지도자들이 권력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탁실라가 이전에 고대 카피사의 지배를 받았었다고 언급했다. 9세기까지 탁실라는 카불 샤히의 속국이 되었다. 카불의 튀르크 샤히 왕조는 힌두 샤히 왕조로 대체되었고, 가즈니의 마흐무드에 의해 트릴로찬팔라가 패배하면서 멸망했다.[31][32]
알-무타심 시대의 알-우사이판의 왕은 알-빌라두리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옛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 카슈미르, 멀탄, 카불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알-우사이판은 일부 저자들에 의해 탁실라 왕국과 동일시된다.[33][34]
4. 학문의 중심지
일부 기록에 따르면 탁실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 여겨졌다.[35] 그러나 다른 견해는 현대적 의미의 대학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탁실라의 교사들은 특정 대학의 공식 회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인도 동부의 후대 날란다 대학과 달리 특별히 건설된 강의실이나 기숙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36][37][38][39][11]
탁실라는 기원전 수세기 전부터 역사적 베다 종교와 불교를 포함한 유명한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5세기에 도시가 파괴될 때까지 전 세계에서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탁실라는 전성기에 인도의 다른 학문 중심지에 일종의 "지적 종주권"을 행사했으며, 초등 교육이 아닌 고등 교육에 주력했다.[40]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16세에 탁실라에 입학했다. 고대의 가장 존경받는 경전과 18가지의 ''실파스''(Silpas) 또는 예술(궁술, 사냥, 코끼리 지식 등의 기술 포함)이 법학과, 의학과, 군사학과 함께 가르쳐졌다. 학생들은 멀리 카시, 코살라 및 마가다에서 힘든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뛰어난 학자들이 각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탁실라로 왔다.[40] 탁샤실라(Takshashila) 입학은 엘리트 계층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왕족, 귀족, 상인, 재봉사, 심지어 어부의 아들들도 탁샤실라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다.[41]
탁실라는 힌두교 문화와 산스크리트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우틸리아로도 알려진 차나키아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를 지도하고 마우리아 제국의 건설을 도왔던 전략가이다. 아유르베다 의사 차라카 또한 탁실라에서 공부했다.[42] 그는 후대에 탁실라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고전 산스크리트어를 정의하는 규칙을 체계화한 문법학자 파니니도 탁실라 공동체의 일원이었다.[43]
지바카는 마가다의 임금 빔비사라의 궁정 의사로 한때 붓다를 치료했으며, 코살라의 불교를 지지하는 통치자 프라세나짓은 팔리어 경전에 언급된 탁실라에서 공부한 중요 인물들 중 일부이다.[44]
왕이나 지역 지도자와 같은 외부 권력은 탁실라의 학문 활동을 통제하지 않았다. 각 교사는 자신의 기관을 설립하여 업무에 대한 완전한 자율성을 누렸고, 원하는 만큼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중앙 집중식 교육과정을 따르지 않고 원하는 과목을 가르쳤다. 학습은 교사가 학생의 성취 수준에 만족할 때 종료되었다. 일반적으로 특정 과목의 전문화에는 약 8년이 걸렸지만, 학생의 지적 능력과 헌신에 따라 기간이 연장되거나 단축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학교"는 교사의 개인 주택 내에 위치했으며, 때때로 학생들이 사회적, 지적, 도덕적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다면 학업을 중단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지식은 돈과 거래하기에는 너무 신성시 여겨졌으며, 따라서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어떤 규정도 강력하게 비난받았다. 재정적 지원은 사회 전체뿐만 아니라 부유한 상인과 부유한 부모로부터 나왔다. 한 구루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 수가 때때로 수백 명에 달했지만, 교사들은 학생이 가난하더라도 교육을 거부하지 않았다. 무료 숙식이 제공되었고, 학생들은 가정에서 육체 노동을 해야 했다. 왕족과 같은 유료 학생들은 낮에 가르침을 받았고, 무료 학생들은 밤에 가르침을 받았다. 학업이 끝나면 구루닥시나가 일반적으로 기대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존경과 감사의 표시에 불과했으며, 많은 경우 터번, 샌들 한 켤레 또는 우산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학생들이 그것조차 감당할 수 없는 경우, 그들은 왕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왕은 개입하여 무언가를 제공했다. 가난한 학생에게 구루의 닥시나를 제공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왕의 명성에 가장 큰 오명으로 여겨졌다.
시험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학업을 완료하기 위한 요구 사항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교육 과정은 중요하고 철저했으며, 한 단원을 완전히 마스터하지 않으면 학생은 다음 단원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졸업식은 열리지 않았고, 서면 "학위"는 수여되지 않았는데, 지식은 그 자체로 보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식을 생계를 위해 또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탁실라에 온 학생들은 대개 집에서 초등 교육(8세까지)과 아쉬람에서 중등 교육(8세에서 12세 사이)을 마쳤으므로, 주로 특정 분야에서 지식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탁실라에 왔다.
5. 유적
19세기 초, 학자들은 고대 인도 문서에 기록된 여러 중요 도시의 유적지를 확인했지만, 탁실라는 1863~1864년이 되어서야 확인되었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는 탁실라가 인더스 강에서 이틀 거리인 하로 강 어딘가에 있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부정확했다. 인도고고학조사국의 창립자 알렉산더 커닝햄은 이 위치가 중국 순례자들, 특히 7세기 불교 승려 현장의 기록과 불일치함을 발견했다. 현장은 탁실라까지의 여정이 사흘 걸린다고 기록했고, 커닝햄은 1863~1864년 샤-데리 유적지 탐사를 통해 자신의 가설을 확인했다.[11]
커닝햄의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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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의 고고학 유적지는 현대 탁실라에서 북서쪽으로 약 35km 지점에 있다. 이 유적지는 존 마셜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45]
광대한 고고학 유적지에는 기원전 3360년의 신석기 시대 유적과 사라이 칼라의 기원전 2900~2600년의 초기 하라파 문명 유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탁실라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시작되는 여러 정착지의 유적과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자울리안 수도원, 모흐라 무라두 수도원을 포함한 불교 유적으로 유명하다.
탁실라의 주요 유적에는 네 개의 주요 도시가 포함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정착지는 하티알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2천년 후반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의 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비르 마운드 유적은 기원전 6세기의 것이며 하티알에 인접해 있다. 시르캅 유적은 기원전 2세기의 것이며, 그레코-박트리아 왕들이 건설했다. 시르수크는 쿠샨 제국의 통치자들이 건설했다.
탁실라는 198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특히 "5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인도 아대륙의 도시 진화 양상을 보여주는" 네 개의 정착지 유적 때문에 지정되었다.[46] 18곳의 유적이 있다.[47]
{{columns-list|colwidth=22em|
# 칸푸르 동굴
# 사라이칼라(Saraikala), 선사 시대 유적
# 비르 언덕(Bhir Mound)
# 시르캅(Sirkap)(요새 도시)
# 시르수크(Sirsukh)(요새 폐허 도시)
# 다르마라지카 탑(Dharmarajika stupa)과 사원
# 카데르 모흐라(아쿠리)
# 칼라완(Kalawan) 건물 군
# 기리 기념물 단지
# 쿠날라 탑(Kunala stupa)과 사원
# 잔디알(Jandial) 단지
# 랄착(Lalchak)과 바달푸르(Badalpur, Pakistan) 불교 탑
# 모흐라 무라두(Mohra Muradu) 탑과 사원
# 핍팔라 탑(Pippala stupa)과 사원
# 자울리안(Jaulian) 탑과 사원
# 랄착 언덕
# 발라르 탑(Bhallar stupa) 주변 불교 유적
# 기리 모스크와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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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글로벌 헤리티지 펀드는 탁실라를 돌이킬 수 없는 손실과 피해의 위기에 처한 유적 중 하나로 지정했다.[7] 2017년에는 태국이 탁실라와 스와트 계곡의 불교 유적지 보존 노력을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48]
탁실라 유적은 서로 다른 세 곳에 위치하며, 각각 다른 시대에 속하는 네 개의 주요 도시 유적을 포함한다. 탁실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은 '''하티알'''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2천년 후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의 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의 '''브히르 언덕''' 유적은 기원전 6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하티알''과 인접해 있다. '''시르캅''' 유적은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침략 이후 이 지역을 지배한 그리스-박트리아 왕들이 건설하였다. 세 번째이자 가장 최근의 유적은 '''시르숙'''으로, 근처 ''푸루샤푸라''(현대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통치했던 쿠샨 제국의 통치자들이 건설하였다.
탁실라 고고학 유적지는 기원전 6세기부터 5세기까지 약 1000년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5. 1. 다르마라지카
탁실라 유적은 서로 다른 세 곳에 위치하며, 각각 다른 시대에 속하는 네 개의 주요 도시 유적을 포함한다. 다르마라지카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유적 중 하나이며, 건설은 아쇼카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에 귀의했던 아쇼카왕은 붓다의 사리를 모아 8개의 스투파에 나누어 보관했는데, 다르마라지카는 그러한 스투파 중 하나이며, 높이 15m, 지름 50m의 주 스투파 주변에는 작은 스투파들이 건설되었다. 작은 스투파의 건설은 4세기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사원과 승원이 건설되었다.다르마라지카는 서기 30년경의 대지진을 겪었지만, 카니슈카왕 시대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쳤다. 주 스투파의 돔 부분에는 불교의 우주관을 표현한 7개의 우산이 겹쳐 쌓여 있다. 또한, 조각상을 모시는 기둥의 기단에는 코린트식이 사용되었다.
다르마라지카에서는 인도-그리스 왕조의 왕 조일로스 2세를 새긴 동전도 발굴되었다.
5. 2. 잔디알
잔디알은 기원전 2세기경에 건설되었다. 박트리아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그리스 신전 양식을 지니고 있다. 정면 현관은 4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에 의해 지탱되었다고 여겨진다. 잔디알의 신전은 존 마셜에 의해 발굴되었고, 마셜은 이 신전을 조로아스터교 신전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기원전 75년경 사카족의 공격으로 신전은 버려졌고, 30년경의 대지진으로 붕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5. 3. 시르캅
시르캅은 탁실라 맞은편에 위치하며, 박트리아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쿠샨 왕조가 2세기에 시르숙을 건설할 때까지 수도 기능을 하였다. 도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메인 스트리트가 존재하며, 격자 모양의 도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주택은 석회암 벽돌을 쌓은 위에 진흙이나 벽토로 도장하였다.
북쪽 메인 게이트에서 남쪽으로 100m 지점에는 불교 사찰이 설치되었고, 더 남쪽에는 쌍두 독수리 부조를 새긴 스투파가 건설되었다. 이는 인도, 그리스, 이란의 세 문화가 융합된 것을 상징한다. 도시 남쪽은 왕궁이며, 접견실과 궁녀들의 거처(하렘)가 설치되었다.
5. 4. 시르수크
탁실라 유적은 서로 다른 세 곳에 위치하며, 각각 다른 시대에 속하는 네 개의 주요 도시 유적을 포함한다. 탁실라에서 가장 최근의 유적인 '''시르수크'''는 근처 푸루샤푸라(현대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통치했던 쿠샨 제국의 통치자들이 건설하였다.5. 5. 조울리안
'''조울리안'''(Jaulian)은 탁실라 고고학 유적지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탁실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있다. 2세기 쿠샨 왕조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스투파와 사찰이 건설되었다. 메인 스투파 주변에는 작은 스투파들이 펼쳐져 있으며, 다양한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다. 메인 스투파 동쪽에 사찰이 있었는데, 중정을 승방이 둘러싼 형태로 건설되었다. 조울리안에서 발견된 명상하는 부처의 좌상은 그레코-인도 양식에서 굽타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5. 6. 피플란
탁실라 유적은 서로 다른 세 곳에 위치하며, 각각 다른 시대에 속하는 네 개의 주요 도시 유적을 포함한다. 탁실라의 서쪽에 위치한 '''피플란'''의 승원은 동서로 건설 시기가 다르다. 동쪽 승원은 1세기에 건설된 것이다. 중정의 스투파를 중심으로 승방들이 늘어서 있다. 서쪽 승원은 4세기경에 건설된 것으로 여겨진다.6. 현대의 탁실라
탁실라는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북서쪽 약 3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는 해발 약 549m에 위치해 있다.
현대 탁실라는 비교적 부유한 도시 지역과 가난한 농촌 지역이 혼합되어 있다. 도시 주거 지역은 일반적으로 중공업 단지 및 중공업, 교육 기관, 병원이 위치한 지역의 근로자들이 거주하는 계획된 주택 단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경제탁실라 중공업(Heavy Industries Taxila)은 파키스탄의 주요 국방 및 군수 계약업체이자 엔지니어링 대기업이다. 도시 경제는 인근 와 칸트(Wah Cantt)에 있는 대규모 파키스탄 병기 공장(Pakistan Ordnance Factories)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 공장에는 2만 7천 명이 고용되어 있다. 소규모 및 가내 산업으로는 도자기, 도기 및 신발류가 있다. 중기계 복합단지(Heavy Mechanical Complex) 또한 탁실라 시에 위치해 있다.
관광탁실라는 파키스탄 북부의 중요한 관광지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대 유적과 탁실라 박물관이 주요 볼거리이다.[50]
201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탁실라를 불교 성지 순례지로 개발할 계획을 발표했다.[51] 태국에서 불교 유산 전시회를 개최하고 태국 정부가 유적지 보존에 협력하기로 했으며,[52] 스리랑카에 탁실라 유물을 보내 ''베삭'' 축제 기간 동안 선보이기도 했다.[53] 파키스탄 관광 개발 공사는 탁실라 박물관과 이슬라마바드를 오가는 관광 버스 노선을 개설했다.[54]
고대 탁실라 유적 외에도 무굴 제국 정원과 그랜드 트렁크 로드의 흔적, 1857년 세포이 항쟁 중 사망한 존 니콜슨 준장을 기리는 니콜슨의 오벨리스크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탁실라 박물관에는 1세기부터 7세기까지의 간다라 미술(Greco-Buddhist art/Gandharan art) 석조 불상이 소장되어 있다.
탁실라의 인도-그리스(Indo-Greek) 지층에서 발굴된 고고학 유물 (존 마셜(John Marshall (archaeologist)) "탁실라, 고고학 발굴").
교통탁실라 캔톤먼트 역 (Taxila Cantonment Junction railway station)은 카라치-페샤와르 철도(Karachi–Peshawar Railway Line)를 이용하여, 탁실라를 하벨리안 역(Havelian railway station)과 연결하는 쿤제랍 철도(Khunjerab Railway)의 남쪽 종착역이다. 철도의 계획된 연장은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의 일환으로 탁실라를 카슈가르(Kashgar)의 중국 신장 남부 철도(Southern Xinjiang Railway)와 연결할 것이다.
고대 그랜드 트렁크 로드는 N-5 국도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도시를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북부 펀자브와 연결한다. 카라코람 고속도로의 남쪽 종착역은 인근 하산 아브달에 있으며, 탁실라를 훈자 계곡 근처 중국 국경과 연결한다.
이 도시는 M-1 고속도로를 통해 페샤와르와 이슬라마바드와 연결되며, 이는 다시 M-2 고속도로를 통해 라호르로, M-4 고속도로를 통해 파이살라바드로 연결되는 더 넓은 고속도로 접근을 제공한다.
탁실라에 가장 가까운 공항은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Islamabad International Airport)으로 36.5km 떨어져 있다. 페샤와르의 바차 칸 국제공항(Bacha Khan International Airport)은 155km 떨어져 있다.
교육탁실라는 CIIT 와 캠퍼스와 HITEC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중등 교육 기관의 본거지이다. 탁실라 공과대학교는 1975년 라호르 공과대학교의 분교로 설립되었으며, 공학 분야에서 학사,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제공한다.
6. 1. 경제
탁실라 중공업(Heavy Industries Taxila)은 파키스탄의 주요 국방 및 군수 계약업체이자 엔지니어링 대기업이다. 도시 경제는 인근 와 칸트(Wah Cantt)에 있는 대규모 파키스탄 병기 공장(Pakistan Ordnance Factories)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 공장에는 2만 7천 명이 고용되어 있다. 소규모 및 가내 산업으로는 도자기, 도기 및 신발류가 있다. 중기계 복합단지(Heavy Mechanical Complex) 또한 탁실라 시에 위치해 있다.6. 2. 관광
탁실라는 파키스탄 북부의 중요한 관광지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대 유적과 탁실라 박물관이 주요 볼거리이다.[50] 2007년 이후 이슬람 무장 세력의 폭동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감소했으나,[50] 2014년 파키스탄군의 ''자르브-에-아즈브'' 작전 이후 치안이 개선되어 2017년부터 방문객 수가 증가하고 있다.201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탁실라를 불교 성지 순례지로 개발할 계획을 발표했다.[51] 태국에서 불교 유산 전시회를 개최하고 태국 정부가 유적지 보존에 협력하기로 했으며,[52] 스리랑카에 탁실라 유물을 보내 ''베삭'' 축제 기간 동안 선보이기도 했다.[53] 파키스탄 관광 개발 공사는 탁실라 박물관과 이슬라마바드를 오가는 관광 버스 노선을 개설했다.[54]
고대 탁실라 유적 외에도 무굴 제국 정원과 그랜드 트렁크 로드의 흔적, 1857년 세포이 항쟁 중 사망한 존 니콜슨 준장을 기리는 니콜슨의 오벨리스크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탁실라 박물관에는 1세기부터 7세기까지의 간다라 미술(Greco-Buddhist art/Gandharan art) 석조 불상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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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 교통
탁실라 캔톤먼트 역 (Taxila Cantonment Junction railway station)은 카라치-페샤와르 철도(Karachi–Peshawar Railway Line)를 이용하여, 탁실라를 하벨리안 역(Havelian railway station)과 연결하는 쿤제랍 철도(Khunjerab Railway)의 남쪽 종착역이다. 철도의 계획된 연장은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의 일환으로 탁실라를 카슈가르(Kashgar)의 중국 신장 남부 철도(Southern Xinjiang Railway)와 연결할 것이다.고대 그랜드 트렁크 로드는 N-5 국도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도시를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북부 펀자브와 연결한다. 카라코람 고속도로의 남쪽 종착역은 인근 하산 아브달에 있으며, 탁실라를 훈자 계곡 근처 중국 국경과 연결한다.
이 도시는 M-1 고속도로를 통해 페샤와르와 이슬라마바드와 연결되며, 이는 다시 M-2 고속도로를 통해 라호르로, M-4 고속도로를 통해 파이살라바드로 연결되는 더 넓은 고속도로 접근을 제공한다.
탁실라에 가장 가까운 공항은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Islamabad International Airport)으로 36.5km 떨어져 있다. 페샤와르의 바차 칸 국제공항(Bacha Khan International Airport)은 155km 떨어져 있다.
6. 4. 교육
탁실라는 CIIT 와 캠퍼스와 HITEC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중등 교육 기관의 본거지이다. 탁실라 공과대학교는 1975년 라호르 공과대학교의 분교로 설립되었으며, 공학 분야에서 학사,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제공한다.7. 기후
탁실라는 쾨펜 기후 구분에서 습윤 아열대 기후(Cwa)를 특징으로 한다.[49] 탁실라의 기후 정보는 다음과 같다.[61]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
평균 최고 기온 (°C) | 17 | 19.5 | 24.2 | 29.9 | 35.4 | 39.5 | 35.8 | 33.7 | 33.6 | 30.9 | 25 | 19.3 |
평균 기온 (°C) | 9.8 | 12.5 | 17.3 | 22.6 | 27.6 | 32 | 30.3 | 28.6 | 27.6 | 22.7 | 16.2 | 11.3 |
평균 최저 기온 (°C) | 2.7 | 5.5 | 10.4 | 15.3 | 19.9 | 24.5 | 24.8 | 23.6 | 21.6 | 14.5 | 7.5 | 3.3 |
월 강수량 (mm) | 58 | 56 | 68 | 44 | 38 | 37 | 237 | 236 | 92 | 23 | 16 | 36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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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ulation of Taxila including Taxila Canto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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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xila did not possess any colleges or university in the modern sense of the te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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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come across several Jātaka stories about the students and teachers of Takshaśilā, but not a single episode even remotely suggests that the different 'world renowned' teachers living in that city belonged to a particular college or university of the modern type.
Mars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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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ents from Magadha traversed the vast distances of northern India in order to join the schools and colleges of Taxila. We learn from Pali texts that Brahmana youths, Khattiya princes and sons of setthis from Rajagriha, Kashi, Kosala and other places went to Taxila for learning the Vedas and eighteen sciences and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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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āṇini and Kautilya, two masterminds of ancient times, were also brought up in the academic traditions of Tax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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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wise, Jivaka, the famous physician of Bimbisara who cured the Buddha, learnt the science of medicine under a far-famed teacher at Taxila and on his return was appointed court-physician at Magadha. Another illustrious product of Taxila was the enlightened ruler of Kosala, Prasenajit, who is intimately associated with the events of the time of the Bud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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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China Pushes for a 'Buddhist' Globalisation, India Isn't Making the Most of Its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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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트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킨도 지방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그 후, 기원전 320년에 체결된 트리파라디스의 조약(Partition of Triparadasus)에 의해, 간다라 지방의 사트라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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