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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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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으로, 안티오코스 8세 그리푸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 트리파이나의 장남이다. 기원전 96/95년에 부왕이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하여 킬리키아를 중심으로 통치했으며, 삼촌 안티오코스 9세와 왕위 쟁탈전을 벌여 승리하고 수도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그는 킬리키아의 도시들을 통치하며 세금을 징수하고,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전을 주조했다. 안티오코스 10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몹수에스티아에서 사망했으며, 세 가지 다른 사후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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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셀레우코스 6세의 초상이 새겨진 주화
안티오크에서 주조된 테트라드라크마의 앞면에 있는 셀레우코스 6세의 초상
이름셀레우코스 에피파네스 니카토르
로마자 표기Séleukos Epiphanís Nikátor
통치셀레우코스 제국의 바실레우스
재위 기간기원전 96년 – 기원전 94년
이전 통치자안티오코스 8세, 안티오코스 9세
다음 통치자데메트리오스 3세, 안티오코스 10세, 안티오코스 11세, 필리포스 1세
경쟁자안티오코스 9세 (기원전 96–95년), 데메트리오스 3세 (기원전 96–94년), 안티오코스 10세 (기원전 95–94년)
왕조셀레우코스 왕조
출생과 사망
사망 연도기원전 94년
사망 장소킬리키아의 몹수에스티아 (현재의 튀르키예 아다나 주 유레기르 야카프나르)
가족 관계
아버지안티오코스 8세
어머니트뤼파이나

2. 이름, 가족, 그리고 초기 생애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의 이름 "셀레우코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조 이름이었다.[1] 이 이름은 그리스어 Ζάλευκος|zaleucusgrc의 고대 마케도니아어 변형으로 '빛나는 하얀색'을 의미한다.[2] 안티오코스 8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인 기원전 124년경에[3]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공주 트리파이나와 결혼했다. 셀레우코스 6세는 이 부부의 장남이었다.[4]

안티오코스 8세의 동전, 셀레우코스 6세의 아버지


기원전 113년부터 안티오코스 8세는 이복 형제 안티오코스 9세와 왕위를 놓고 다투어야 했다. 내전은 1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5] 기원전 109년 트리파이나가 사망했고,[6] 기원전 96년 안티오코스 8세가 암살되면서 종결되었다.[7] 안티오코스 9세는 안티오코스 8세의 암살 이후 수도 안티오크로 진격하여 점령했고, 안티오코스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미망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했다.[8] 비문에 따르면 프리에네시는 "왕 안티오코스의 아들 셀레우코스, 왕 데메트리오스의 아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 사절단은 셀레우코스 6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비문에는 그를 왕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리에네의 사절단은 아마도 킬리키아에서 셀레우코스 6세를 만났을 것이다. 안티오코스 8세는 아들을 스트라테고스로 그 지역에 보냈을 수도 있다.

3. 통치

셀레우코스 6세는 부왕 안티오코스 8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으며, 서부 킬리키아의 칼리카드누스 강가의 셀레우키아를 근거지로 삼았다.[1][2] 그는 삼촌인 안티오코스 9세와 왕위를 두고 내전을 벌였다. 전쟁 준비를 위해 엘라이우사를 건설하고, 몹수에스티아를 비롯한 킬리키아 도시에 세금을 부과했으며, 1만 명의 병사에게 2년간 급여를 지급할 수 있는 1200탈렌트의 동전을 주조했다.[3][4]

기원전 95년,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9세를 격파하고 수도 안티오크에 입성했다.[7][8]

3. 1. 왕위 계승과 내전

셀레우코스 6세가 현대 실리프케인 칼리카드누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에서 주조한 동전. 앞면에는 왕의 초상이 있고, 뒷면에는 아테나 여신이 묘사되어 있으며 왕의 이름과 칭호가 새겨져 있다.
셀레우코스 6세의 테트라드라크마, 그의 첫 번째 수도였던 칼리카드누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에서 주조됨


셀레우코스 6세의 동전. 앞면에는 뿔이 있는 왕이 묘사되어 있다. 뒷면에는 제우스 신이 묘사되어 있다.
안티오크에서 주조된 뿔이 있는 셀레우코스 6세가 묘사된 테트라드라크마


셀레우코스 6세의 동전. 앞면에는 수염이 있는 왕이 묘사되어 있다. 뒷면에는 제우스 신이 묘사되어 있다.
수염이 있는 셀레우코스 6세가 묘사된 테트라드라크마


부왕이 사망하자 셀레우코스 6세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서부 킬리키아의 칼리카드누스 강가의 셀레우키아를 근거지로 삼았다.[1][2] 그의 형제 데메트리우스 3세는 다마스쿠스를 차지했다.[3] 칼리카드누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에서 새로운 왕이 주조한 동전의 양은 후기 셀레우코스 시대에 알려진 다른 어떤 주조소보다 많았으며, 대부분의 동전은 안티오코스 9세와의 전쟁 준비 과정에서 생산되었다.[2][4] 이 전쟁은 기원전 96/95년(셀레우코스력 217년)에 끝날 것이다.[6][7] 칼리카드누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에서 주조된 동전의 무게는 안티오크에서 안티오코스 8세와 안티오코스 9세의 통치 기간에 주조된 동전에 비해 0.5g 감소했다.[5]

3. 2. 정책과 킬리키아 통치

셀레우코스 6세는 삼촌 안티오코스 9세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칼리카드누스 강가의 셀레우키아를 근거지로 삼았다. 안티오코스 9세의 군대는 킬리키아 중부를 점령하고 셀레우코스 6세를 서부에 고립시킨 것으로 보인다.[1] 셀레우코스 6세는 항구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엘라이우사 도시를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셀레우코스 6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킬리키아의 도시들, 특히 몹수에스티아에 여러 차례 세금을 부과했다.[3] 그는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약 1,200 탈렌트에 달하는 동전을 생산했는데, 이는 1만 명의 병사에게 2년 동안 급여를 지급할 수 있는 양이었다.[4]

'불확실 주조소 125'에서 생산된 청동 동전에는 마케도니아 방패 모양의 키리스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마케도니아 식민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5] 이 동전들은 아마도 시리아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며, 타르수스와 안티오크 사이의 중간 지점에서 주조되어 셀레우코스 6세의 군사 작전 중에 사용되었을 것이다.[6]

기원전 95년 시리아.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크를 수도로, 데메트리우스 3세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안티오코스 10세는 아르와드를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기원전 95년, 셀레우코스 6세가 안티오크로 진군하자 안티오코스 9세는 수도를 떠나 그를 맞이했다.[7] 셀레우코스 6세는 승리했고 안티오코스 9세는 사망했다. 유세비우스는 안티오코스 9세가 자살했다고 기록했고, 요세푸스는 처형되었다고 기록했다.[8] 이후 셀레우코스 6세는 수도에 입성했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도망친 것으로 보인다.

안티오코스 4세는 19개 도시에 자체 주화를 주조하도록 허락하며 도시와 군주제의 상호 의존성을 인정한 바 있다. 주화 주조는 그리스 폴레이스 (도시 국가)의 자치를 상징했다. 셀레우코스 도시의 자치는 강력한 왕권 하에서는 제한적이었지만, 안티오코스 8세와 안티오코스 9세 시대에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서 도시들은 더 큰 자율성을 추구했다. 도시들은 주화에 "신성하고 자율적인"이라는 문구를 추가하며 독립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6세는 선조들의 정책과 달리 킬리키아에서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셀레우코스 6세는 킬리키아와 시리아 셀레우키스(북부 시리아)를 통치했다.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10세는 아라두스로 도망쳐 왕을 선포했다. 셀레우코스 6세는 안티오코스 10세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안티오코스 10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하여 지위를 강화했다. 알프레드 벨린저는 셀레우코스 6세가 엘라이우사에서 안티오코스 10세와의 전쟁을 준비했다고 추정했다. 기원전 94년, 안티오코스 10세는 안티오크를 공격하여 셀레우코스 6세를 킬리키아로 몰아냈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마지막 전투는 몹수에스티아 근처에서 벌어졌고 셀레우코스 6세는 패배했다.

3. 3. 죽음

셀레우코스 6세는 몹수에스티아에서 피신 생활을 하던 중, 주민들에게 다시 세금을 부과하려다 폭동으로 사망했다.[1] 그의 사망 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기원전 94년으로 추정한다.[2] 셀레우코스 6세에게는 배우자나 자녀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3] 그러나 1세기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루쿨루스는 티그라네스 2세가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포로로 잡았다"고 언급하여, 셀레우코스 6세에게 아내나 딸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4]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가 주조한 동전. 앞면에는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가 함께 묘사되어 있으며, 안티오코스 11세가 필리포스보다 앞에 나타나 있다. 뒷면에는 왕의 이름과 칭호가 오른쪽에 새겨져 있고, 그 중간에는 제우스가 왕좌에 앉아 홀을 들고 있고, 손에는 칭호가 새겨진 니케를 들고 있다.


고대 기록에는 셀레우코스 6세의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세푸스는 군중이 왕과 신하들을 왕궁에서 불태워 죽였다고 기록했다. 아피아노스는 비슷한 방화 사건을 언급했지만, 장소를 도시의 체육관으로 묘사했다. 유세비우스는 셀레우코스 6세가 주민들의 방화 의도를 알고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벨린저는 요세푸스의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보았으며, 유세비우스가 다른 셀레우코스 왕들에 대해서도 자살설을 제시한 점을 지적했다.[5]

아테네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델로스 섬에는 아테네 시민들이 세운 시리아 군주들의 조각상이 이를 증명한다.[6] 디오니시우스라는 시민은 기원전 96년부터 94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6세를 위해 조각상을 헌납했다.[7] 그의 형제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라델푸스''(형제를 사랑하는)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그를 기렸다.[8] 안티오코스 11세는 쌍둥이 필리포스 1세와 함께 셀레우코스 6세의 복수를 위해 몹수에스티아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4. 유산

고대 그리스어로 된 비문 그림.
264px


아피아노스는 셀레우코스 6세를 "폭력적이고 극도로 폭군적"이라고 묘사했다.[2] 셀레우코스 6세는 몹수에스티아에서 피신했으나, 주민들에게 다시 세금을 부과하려다 폭동으로 사망했다.[3][4] 사망 연도는 불분명하다. 유세비우스는 기원전 97/96년으로 기록했지만, 안티오크에서 발견된 셀레우코스 6세의 시장 무게가 기원전 95/94년으로 기록되어 불가능하다. 제롬은 기원전 94/93년으로 기록했는데, 이쪽이 더 설득력 있다.[5] 학계에서는 기원전 94년을 사망 연도로 본다.[6] 배우자나 자녀는 기록되지 않았다.[7]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루쿨루스는 티그라네스 2세가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아내와 딸을 포로로 잡았다"고 했다. 고대 기록이 단편적이라, 셀레우코스 6세의 아내나 딸 존재 가능성은 열려 있다.[8]

고대 전통은 셀레우코스 6세의 죽음에 대해 세 가지 설명을 보존한다. 요세푸스는 군중들이 왕과 신하들을 왕궁에서 불태웠다고 한다. 아피아노스는 불태워지는 사건을 공유하지만, 장소를 도시 체육관으로 묘사했다. 유세비우스는 셀레우코스 6세가 주민들이 자신을 불태우려는 의도를 알고 자살했다고 한다. 벨린저는 요세푸스의 설명을 가장 그럴듯하다고 보았다. 유세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와 안티오코스 9세 등 다른 역사가들이 살해했다고 기록한 왕들에 대해서도 자살 설명을 제시했다. 벨린저는 포르피리오스가 유세비우스 이야기의 출처이며 "셀레우코스 왕가의 공포를 다소 완화"하려 했다고 믿었다.

아테네는 셀레우코스 왕들과 밀접한 관계였으며, 아테네 시민들이 델로스 섬에 세운 시리아 군주들의 조각상이 이를 증명한다. 디오니시우스는 기원전 96년부터 94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6세를 위해 조각상을 헌납했다. 형제를 존경하여, 안티오코스 11세는 ''필라델푸스''(형제를 사랑하는)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안티오코스 11세는 쌍둥이 필리포스 1세와 함께 셀레우코스 6세의 복수를 진행, 몹수에스티아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안티오코스 11세는 기원전 93년에 안티오크로 향하여 안티오코스 10세를 추방했다.

5. 주화와 왕의 이미지

고대 헬레니즘 시대 왕들은 재위 번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비슷한 이름을 가진 다른 왕들과 구별하기 위해 별칭을 사용했는데, 왕의 번호는 현대에 붙여진 것이다.[1][2] 셀레우코스 6세는 그의 주화에 '에피파네스'(신현)와 '니카토르'(승리자)라는 별칭을 새겨 넣었다.[3]

셀레우코스 6세는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버지 안티오코스 8세의 모습을 본떠 과장된 매부리코를 주화에 묘사하여 자신의 혈통을 강조하였다.[4]

셀레우코스 6세 주화의 또 다른 특징은 관자놀이 위에 있는 짧고 뭉툭한 뿔이다. 이 뿔의 의미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데, 할아버지 데메트리오스 2세의 혈통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5] 뿔의 구체적인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왕이 신의 현현임을 나타내는 표시였을 수도 있다.[6]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내전 중에 주조된 통화는 수염을 가진 왕을 묘사했다.[7] 셀레우코스 6세는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주화에서 제거되었으며,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한 서약을 이행했음을 나타낸다.[8]

6. 가계도



셀레우코스 6세 가계도
셀레우코스 4세[1]라오디케 4세[1][3]프톨레마이오스 5세[2]클레오파트라 1세[2]
colspan="3" rowspan="2" |colspan="1" |colspan="2" rowspan="2" |colspan="3" rowspan="2" |colspan="2" |colspan="2" rowspan="2" |
colspan="2" |
데메트리우스 1세[3]라오디케 5세[3]프톨레마이오스 6세[4]클레오파트라 2세[4]
colspan="7" |!colspan="5" |
데메트리우스 2세[5]클레오파트라 테아[6]colspan="1" rowspan="2" |!클레오파트라 3세[7]프톨레마이오스 8세[7]
!
안티오코스 8세[8]트리파이나[8]
!
셀레우코스 6세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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