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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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르수스는 튀르키예 남부의 도시로, 히타이트 문명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지중해 무역을 통해 발전했다. 로마 시대에는 킬리키아 속주의 수도였으며, 스토아 학파의 중심지로서 문화적으로 번성했다. 사도 바울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만남의 장소로도 유명하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연결하는 무역로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 다양한 제국과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비잔틴 제국, 이슬람 세력, 십자군, 아르메니아 왕국 등의 지배를 거쳤다. 현재는 농업, 상업,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며, 클레오파트라의 문, 로마 다리 등 다양한 유적과 사도 바울 교회와 같은 종교 유적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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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수스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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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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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광역시 자치구 |
위치 | 튀르키예 메르신 주 |
면적 | 2,029 km² |
인구 (2022년) | 350,732명 |
시간대 | 극동 유럽 표준시 (UTC+3) |
우편 번호 | 해당 없음 |
지역 번호 | 0324 |
웹사이트 | http://www.tarsus.bel.tr/ 타르수스 공식 웹사이트 |
옛 이름 | (고대 그리스어) (아랍어) |
정치 | |
시장 | 알리 볼타츠 (Ali Boltaç) |
소속 정당 | CHP |
지리 | |
위치 | 추쿠로바 지역 내 |
거리 | 메르신에서 약 떨어져 있음 |
기타 | |
번호판 코드 | 33 |
2. 역사
타르수스는 히타이트의 영향으로 건설된 도시로, 기원전 3000~4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지중해 교역과 교통의 요지로 빠르게 발전했으며, 기원전 7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된 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하에 그리스화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킬리키아 속주의 행정 수도였으며, 사도 바울로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630년대 레반트의 이슬람 정복 이후 라시둔 칼리파 세력권에 들어왔으며, 이후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세력 사이에서 분쟁 지역이 되었다. 압바스 왕조 시대에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원정대 집결지로 기능하였다. 965년 비잔티움 황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가 도시를 함락하여 이슬람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후 십자군, 비잔티움 제국, 셀주크 투르크,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사이에서 분쟁이 있었으며, 1359년경 맘루크 왕조가 점령하였다.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에는 알레포의 일부였다가 키프로스를 거쳐 아다나의 산자크로 변경되었다. 19세기에는 이집트(무함마드 알리 왕조) 이브라힘 파샤에게 잠시 점령되기도 했다.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목화 재배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19세기 말에는 늪지대로 인해 쇠퇴하였다.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이후 댐 건설과 관개 시설 확충으로 경제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2. 1. 고대
타르수스는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으로 건설된 도시로, 기원전 3000-4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지중해의 교역과 교통의 요지로서 빠르게 발전했으며, 기원전 7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된 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하에 더욱 그리스화되었다.로마 제국 시대에는 킬리키아 속주의 행정 수도였으며, 문화적 수준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필적했다. 스트라본은 그의 저서 지리서(14. 673)에서 타르수스의 문화적 우수성을 언급했다.[4] 이 도시는 스토아 학파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디오게네스의 후계자인 아르케데무스, 제논(제논의 역설의 제논과는 다른 인물), 안티파테르 등 여러 철학자를 배출했다. 키케로가 총독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가 키드누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로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사도행전에서 바울로 자신이 타르수스 출신임을 밝힌다.
고대 도시 이름 '타르수스(Tarsos)'는 히타이트인들이 정착민에게 붙인 이름인 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폭풍의 신 타르훈(Tarḫunz)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4] 헬레니즘 시대에는 ''키드누스 강변의 안티오크(Antiochia on the Cydnus)'' (, )로 불렸다. 로마인들은 로 불렀으며, 서아르메니아어(Western Armenian)로는 , 동아르메니아어(Eastern Armenian)로는 이라고 불렀다.
수다(Suda)에 따르면, 페르세우스(Perseus)가 이사우리아인(Isaurians)과 킬리키아인(Cilicians)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신탁을 받아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5]
괴즐뤼쿨레 유적 발굴 결과, 타르수스는 신석기 시대부터 찰콜리틱 시대와 초기 청동기 시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연결하는 무역로의 교차점에 위치했으며, 고대부터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신아시리아 기록에는 에사르하돈의 원정 기록에서 '''타르시시(Tarsisi)'''로 처음 언급되며, 살마네셀 1세와 센나케리브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센나케리브는 이 도시를 재건축했다. 그리스 전설은 산다라파루스와 연결하며, '산다라파루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두눅-타크(Dunuk-Tach)가 남아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신비주의 전통의 중심지였다.
비잔티움의 스테파누스는 이아페투스의 딸 안키알레가 도시를 건설했다는 전설을 인용한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 나타난 타르수스 건설에 대한 전설은 신뢰하기 어렵다. 스트라보는 아르고스 사람들이 타르수스를 건설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전설은 벨레로폰이 페가수스에서 떨어져 발을 다쳐 도시 이름이 '타르-소스'(발바닥)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데메테르의 아들 트립톨레무스도 창시자 후보로 거론된다. 타르수스 동전에는 헤라클레스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그가 현지 신 산돈에게 잡혔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타르수스는 타르시시의 가능한 위치로 제시되기도 한다.
역사 시대에 이 도시는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킬리키아의 주요 도시였던 타르수스는 기원전 400년부터 페르시아 사트라프의 중심지였다. 크세노폰은 기원전 401년 쿠루스 2세가 바빌론을 공격했을 때, 시에네시스가 이 도시를 통치했다고 기록했다.
이 시기에 도시의 신은 산돈이었으며, 그의 기념물은 서기 3세기까지 존재했다. 주화에는 날개 달린 뿔이 있는 사자 위에 서 있는 산돈이 새겨져 있으며, 산 마르코 광장의 산 마르코의 사자가 타르수스의 기념물에서 복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7]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3년 이곳을 지나갔고, 키드누스 강에서 목욕한 후 거의 죽을 뻔했다. 이때 타르수스는 그리스어와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로서 헬레니즘화되었다. 스트라본은 타르수스의 철학자, 시인, 언어학자들을 언급하며 그 문화를 칭찬했다. 타르수스의 학교들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학교들과 경쟁했다. 마카베오기하 4장 (4:30)은 기원전 171년경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대한 도시의 반란을 기록한다. 왕은 도시 이름을 '''키드누스 강가의 안티오키아'''로 개명했지만, 그 이름은 굳어지지 않았다. 이때 타르수스의 도서관에는 20만 권의 책이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킬리키아 해적들을 진압한 후 기원전 67년 타르수스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킬리키아 로마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8]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아첨하기 위해 잠시 '''율리오폴리스(Juliopolis)'''로 이름이 바뀌었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기원전 47년에 그를 여기서 죽일 계획을 세웠고,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만난 곳이기도 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는 키드누스 강으로 가서 안토니우스를 만날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 시대에 이 도시는 중요한 지적 중심지였으며, 자체 아카데미를 자랑했다. 철학자 아테노도루스 카나니테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스승이었고, 이는 도시에 대한 황제의 후원을 확보했다.[8]
킬리키아 속주가 분할되었을 때, 타르수스는 킬리키아 프리마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궁전, 시장, 도로와 다리, 목욕탕, 분수, 체육관, 경기장을 갖춘 대도시였다. 타르수스는 아다나에 의해 그 영향력이 쇠퇴했지만 항구와 조선소로서 중요성을 유지했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막시미누스 2세, 율리아누스 등 여러 로마 황제들이 이곳에 매장되었다.[9]
사도행전에 따르면 타르수스는 사도 바울[10]이 태어난 곳이지만, 그는 예루살렘에서 자랐다.[11] 그는 로마 시민이었으며[12] "킬리키아의 도시 타르수스 출신으로, 보잘것없는 도시의 시민이 아니었다".[12] 사도 바울은 개종 후 이곳으로 돌아왔다(
최초로 기록된 주교인 헬레누스는 3세기 사람이다. 타르수스의 중요성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율리아누스 폐위제 시대까지 이 도시는 대부분 이교도로 남아 있었는데, 그는 이 도시를 수도로 삼을 계획이었다고 한다.[13]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 중 사망한 후[14] 그는 도시 성벽 옆에 묻혔다.[14]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도시에서 토목 공사를 진행했다.[14]
타르수스 근처의 동굴은 칠성인의 전설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2. 2. 중세
630년대 레반트의 이슬람 정복 이후 타르수스는 라시둔 칼리파의 세력권에 들어왔다. 아랍인들이 타르수스를 처음 점령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8세기 초까지 키리키아 지역 전체를 포함한 타르수스는 비잔티움 제국과 새로운 칼리파 사이에서 수십 년간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슬람 문헌에 따르면, 비잔티움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후퇴하면서 안티오크와 타르수스 사이의 지역 주민들을 고의적으로 철수시키고 황폐화하여 두 제국 사이에 무인지대를 만들었다.[15]타르수스는 폐허가 된 상태로 압바스 시대 초기에 재점령되어 재건축되었는데, 이때 타르수스에서 북동쪽 말라티야까지 뻗어 있는 요새 지역인 ''알 아와심'' 내의 전초 기지이자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원정대의 집결지로 기능하였다.[16] 최초의 시도는 778/9년 알 하산 이븐 카타바 알 타이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787/8년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의 명령으로 아부 술라임 파라지에 의해 도시가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3,000명의 호라사니인과 2,000명의 시리아인 (안티오크과 알 마시사에서 각각 1,000명)이 새로운 요새 도시에서 집과 토지를 받았다.[17] 타르수스는 8세기 말 무렵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다시 점령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는 제4차 피트나의 압바스 내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손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830년 칼리프 알 마문이 이 도시를 거점으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면서 다시 이슬람의 통치하에 들어왔다.[18]
그 이후 10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재정복까지 타르수스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성전 (''지하드'')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산의 눈이 녹고 통행이 가능해지면 키리키아 문을 통해 비잔티움 영토로 매년 급습 (''ṣawāʿif'')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급습은 국경 지역인 ''알 아와심''의 세금뿐 아니라 칼리파 정부의 풍부한 보조금으로 유지되는 현지 수비대와 다수의 종교적 자원병 (''mujahidun'' 또는 ''가지'')에 의해 수행되었다.[19] 타르수스는 878/9년 이집트의 자치 통치자 아흐마드 이븐 툴룬에게 키리키아 국경 지대와 함께 할양될 때까지 직접적인 압바스 통치하에 있었다. 현지 총독 야자만 알 카딤은 882년부터 타르수스를 바그다드의 직접적인 충성으로 되돌렸지만, 890년에는 다시 툴루니드를 인정해야 했다. 툴루니드의 국경 지대 지배는 이븐 툴룬의 상속자 쿠마라와이가 896년 사망한 후 끝났고, 칼리프 알 무타디드가 직접 통제권을 되찾았다.[20] 이 지역은 그 후 40년 동안 압바스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국경 지역이 잠시 이크시디드의 지배하에 있던 후, 946/7년 타르수스는 북부 시리아와 비잔티움 국경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알레포의 함다니드 아미르 사이프 알 다울라의 지배를 인정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부흥에 직면하여 그는 한동안 그 추세를 막을 수 있었지만, 965년 비잔티움 황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가 이 도시를 함락시켜 이슬람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21] 이 기간 동안 타르수스의 총독들은 도시에서 활발하게 주화를 발행했다.[22][23]
도시의 항복 조건은 원하는 무슬림이 소지품을 가지고 떠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알 무카다시에 따르면, 떠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결국 바니야스에 정착했다. 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주요 모스크는 철거되거나 마구간으로 바뀌었다.[16] 타르수스는 1085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14] 그 후 라틴 십자군, 비잔티움 제국 (1137–1172),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소아르메니아 왕국)의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 분쟁이 있었다.[14] 타르수스는 1080년부터 1198년까지 키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1359년경 라마단 왕조와 맘루크 왕조가 이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확실한 지배자였다.
중세 시대 타르수스는 중동 전역에서 유명했으며, 많은 아랍 작가들은 이 도시를 아름답고 방어가 잘 된 도시로 칭찬했는데, 두 겹의 성벽과 다섯 개의 성문, 그리고 외부의 방어시설, 풍부한 농지, 강과 호수로 관개되는 풍부한 농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2. 3. 근현대
오스만 제국 통치하에 타르수스는 처음에 알레포 에얄레트의 일부였다. 1571년 키프로스 정복 이후 키프로스 에얄레트 내 산자크(소주)의 중심지가 되었고, 1608년에 아다나의 산자크로 이전되어 카자(지구)가 되었다.[16]
1671년 타르수스를 방문한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바다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평야 위의 도시로, 높이 2층짜리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이 해자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 안에는 세 개의 구역이 있다"고 기록했다.
뛰어난 방어 시설에도 불구하고 타르수스는 1832년 이집트(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이브라힘 파샤(무함마드 알리의 아들)의 맘루크에게 함락되어 8년 동안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 이집트인들은 주변 평야에서 목화 재배를 시작했다. 미국 남북 전쟁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목화 수요가 증가하면서, 오스만 통치가 회복된 후 이 목화는 지역 경제의 상당한 성장을 이끌었다. 메르신 항구로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었고 타르수스는 성장하고 번영했다. 오늘날에도 도시에는 이 기간에 창출된 부를 보여주는 많은 대저택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3,000년 동안 번영하는 항구였던 타르수스는 19세기 말에 방치되어 삼각주가 늪지가 되면서 바다로의 접근을 잃었다. 이 시점에서 타르수스는 무슬림 튀르크인, 그리스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있는 전형적인 오스만 도시였다. 1920년대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늪지는 배수되었고 베르단 강에 댐을 건설하여 튀르키예 최초의 수력 발전소를 건설했다. 관개 시설, 도로 공사, 철도 건설로 타르수스의 경제가 다시 활기를 띠었으며, 특히 섬유 제품을 생산하는 새로운 공장들이 들어섰다.
3. 지리
베르단 강(고대에는 키드누스 강) 하구에 위치한 타르수스는 칠리키아 평야(오늘날 츠쿠로바)와 중앙 아나톨리아, 지중해를 잇는 육로와 해로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기후는 지중해 지역의 전형적인 기후로, 매우 덥고 습한 여름과 쌀쌀하고 습한 겨울이 특징이다.
타르수스는 오랜 상업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비옥한 츠쿠로바 평야의 농산물을 거래하는 상업 중심지이자, 수출을 위한 정제 및 가공을 담당하는 번영하는 산업 중심지이다. 산업에는 농업 기계, 예비 부품, 섬유, 과일 가공, 벽돌 제조 및 세라믹이 포함된다.
농업은 중요한 소득원이며, 지역 토지 면적의 절반(1050km2)이 농지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산림 또는 과수원이다. 농지는 대부분 잘 관개되고 비옥하며 최신 장비를 사용하여 관리된다.
4. 경제
타르수스는 칠리키아 평야(오늘날 츠쿠로바)와 중앙 아나톨리아, 지중해를 잇는 육로와 해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오랜 상업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에도 비옥한 츠쿠로바 평야의 농산물을 거래하는 상업 중심지이자, 수출을 위한 정제 및 가공 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농업 기계, 예비 부품, 섬유, 과일 가공, 벽돌 제조, 세라믹 등의 산업이 발달해 있다.
농업은 중요한 소득원으로, 지역 토지의 절반(1050km2)이 농지이며, 대부분 관개가 잘 되고 비옥하여 최신 장비를 사용하여 관리되고 있다.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가 1832년 타르수스를 점령하여 8년간 맘루크 통치 하에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목화 재배를 시작했고, 오스만 통치 복귀 후 미국 남북 전쟁으로 인한 목화 부족 현상으로 세계적인 수요가 증가하면서 지역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 메르신 항구로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면서 타르수스는 더욱 성장, 번영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타르수스는 방치되어 삼각주가 늪지가 되면서 바다로의 접근을 잃었다. 1920년대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 이후 늪지 배수, 베르단 강 댐 건설 및 튀르키예 최초의 수력 발전소 건설, 관개 시설, 도로 및 철도 건설로 경제가 다시 활기를 띠었으며, 섬유 제품을 생산하는 새로운 공장들이 들어섰다.
5. 문화
타르수스는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으로 건설되었으며, 기원전 3000~4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지중해의 교역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고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스화가 진행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킬리키아 속주의 행정 수도였으며, 아테네,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문화적 수준을 자랑했다. 스토아 학파의 중심지 중 하나로, 디오게네스의 후계자인 아르케데무스, 제논, 안티파테르 등 여러 철학자를 배출했다. 키케로가 총독으로 있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가 키드누스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사도 바울로의 고향으로, 사도행전에서 바울로 자신이 타르수스 출신임을 밝힌 기록이 있다.[25][26]
5. 1. 음식
타르수스의 독특한 향토 음식으로는 숯불에 구운 닭고기, 후무스(때로는 데워서 파스티르마와 함께 제공됨), 샬감, 탄투니, ''"픈드크 라흐마준"''이라고 불리는 미니어처 라흐마준, 당근으로 만든 디저트인 체제르예가 있다.5. 2. 유적지


타르수스 시 중심부에는 부유한 상인들의 웅장한 저택들이 있으며, 일부는 복원되었고 일부는 여전히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여러 역사 유적지가 있지만, 일부는 복원과 연구가 필요하다.
가장 잘 알려진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 클레오파트라의 문 – 도시 서쪽에 있는 유일한 고대 도시 문으로, 기원전 4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이 문을 통해 도시에 입성했다.
- 로마 다리(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건설) - 베르단 강 위에 있으며 현재까지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타르수스 박물관 - 많은 고대 동전과 절단된 미라 손이 있다.
- 로마 도로 - 타르수스 북쪽에 있다.
- 고대 도로 - 타르수스 시 중심부에 있는 또 다른 로마 도로이다.
- 크즐라르 칼레시 - 중세 성채 유적
- 괴즐뤼쿨레 - 원래 정착지 언덕의 잔해
종교적 관심과 순례지로는 다음과 같은 곳이 있다.
- 성 바울 교회와 우물 (박물관이지만, 때때로 기독교 예배가 열린다).
- 다니엘 예언자의 매장지로 알려진 모스크
터키 시대의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 타르수스 대 모스크(울루 자미) - 16세기 모스크
- 크르크카식 베데스텐 - 1579년에 건설된 덮개 시장
- 빌랄 하베시 마스지드
- 옛 목욕탕 - 흰 대리석 벽에 있는 짙은 갈색 얼룩은 목욕탕에서 매복 공격으로 살해된 전설적인 뱀왕 샤흐마란의 피흔이라고 한다. (''참조'' 샤흐마란 하맘)
- 갈리폴리 전투 전 해협을 방어하는 데 사용되었던 기뢰부설함 누스렛 (누스라트)
자연미가 뛰어난 장소는 다음과 같다.
- 타르수스 폭포
- 카라부작 숲 - 시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인기 있는 피크닉 장소
6. 스포츠
타르수스에는 타르수스 시립 경기장, 부라하네틴 코차마즈 경기장(Burhanettin Kocamaz Stadium), 타르수스 아레나(Tarsus Arena)라는 경기장이 있다. 지역 축구 클럽은 타르수스 이드만 유르두(Tarsus Idman Yurdu)이다.
7. 타르수스 출신 인물
- 사도 바울: 그리스도교 사도이자 선교사, 순교자, 성인으로, 이곳에서 태어나 삶의 후반기에 잠시 돌아왔다.[27]
- 안티파테르: 스토아 학파 철학자[27]
- 아르케데무스: 스토아 철학자[27]
- 크리시포스: 스토아 철학자[27]
- 하그논: 웅변가이자 철학자[27]
- 헤르모게네스: 웅변가[27]
- 제논: 철학자[27]
- 키리쿠스와 율리타: 성인[27]
- 네르세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타르수스의 대주교[27]
- 테오도르: 캔터베리 대주교[27]
- 오랄 찰리쉬라르: 언론인[27]
- 위미트 야샤르 오구즈칸: 시인이자 작가[27]
- 무흐타르 켄트: 코카콜라 회사의 전 CEO, 타르수스 아메리칸 칼리지 출신[27]
- 에미네 윌케르 타르한: 전 판사이자 정치인[27]
- 메흐메트 에민 카라메흐메트: 추쿠로바 홀딩 회장[27]
- 마누쉬 바바: 가수[27]
- 투바 세노글루: 배구 선수[27]
- 데르야 제베시오글루: 배구 선수[27]
- 안티파트로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 안토니우스: 고대 로마의 정치가, 군인
-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와 타르수스에서 만남을 가졌다. 클레오파트라의 문이 있다.
- 바울: 신약 성서의 저자이자, 기독교의 성인.
8. 국제 관계
국가 | 도시 |
---|---|
독일 | 랑겐 |
튀르키예 | 무을라 |
튀르키예 | 안탈리아 |
북키프로스 | 아칸투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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