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1. 개요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는 기원전 187년부터 기원전 175년까지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이었다. 그는 로마와의 전쟁 패배로 인한 막대한 배상금 지불에 시달렸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재보 약탈을 시도했다. 결국 재무 장관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는 로마의 인질로 있다가 왕위를 탈취했다. 유대교 문헌인 2 마카베오기에서는 헬리오도로스의 성전 약탈 시도가 천사에 의해 저지되는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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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
|---|---|
| 로마자 표기 | Seleukoseu 4se Pillopatoreu |
| 그리스어 | Σέλευκος Δ' Φιλοπάτωρ (셀레우코스 데우테로스 필로파토르) |
| 칭호 | 바실레우스 |
|---|---|
| 통치 국가 | 셀레우코스 제국 |
| 재위 기간 | 기원전 187년 7월 3일 – 기원전 175년 9월 3일 |
| 이전 통치자 | 안티오코스 3세 대왕 |
| 후임 통치자 | 안티오코스 |
| 출생 | 기원전 218년경 |
|---|---|
| 사망 | 기원전 175년 9월 3일 (42–43세) |
| 배우자 | 라오디케 4세 |
| 자녀 | 안티오코스 데메트리오스 1세 라오디케 5세 |
| 왕가 | 셀레우코스 왕조 |
| 아버지 | 안티오코스 3세 대왕 |
| 어머니 | 라오디케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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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75년 사망 -
여승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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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75년 사망 -
주설
가계는 생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자 경제 활동의 기본 단위로, 전통적인 가족 구성원 간 협력과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왔으나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변화를 겪고 있으며, 최근 저출산 고령화로 규모 축소 및 경제적 부담 가중, 문화 전달 기능 약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
기원전 2세기 통치자 -
나비스
나비스는 쇠퇴하는 스파르타의 국력 회복을 위해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내부 반발과 대외 갈등을 야기하여 암살당하고 스파르타는 독립을 잃었다. -
기원전 2세기 통치자 -
필리포스 5세
필리포스 5세는 기원전 221년부터 기원전 179년까지 마케도니아 왕국을 통치한 왕으로, 즉위 후 그리스 내 입지를 다지고 로마와 충돌했으며 말년에는 국가 재건에 힘썼다. -
암살된 사람 -
제임스 쿡
제임스 쿡은 18세기 영국의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로서, 세 차례의 태평양 탐험을 통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등 지리적 발견에 기여했으며 남극권에 진입하고 하와이 제도를 기록했으나, 하와이에서 원주민과의 충돌로 사망했다. -
암살된 사람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2. 생애
아버지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로마에 패하고, 아파메이아 조약(기원전 188년)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아, 즉위한 셀레우코스 4세는 배상금 지불에 시달렸다. 국력 약화가 진행되면서 로마,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과는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셀레우코스 4세는 배상금 지불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재보 약탈을 꾀하여, 재무 장관 헬리오도로스를 파견했다. 헬리오도로스는 왕위를 노리고 기원전 175년 왕을 암살했다. 이후 헬리오도로스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패배했고,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는 로마의 인질로 잡혀 있었으며, 이후 귀환하여 왕위를 탈취했다(기원전 161년).
2.1. 초기 생애와 가족
그는 안티오코스 3세와 라오디케 3세의 차남이자 계승자였다. 그는 기원전 193년에 형인 어린 왕 안티오코스가 죽은 후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4세는 누이인 라오디케 4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 안티오코스와 딸 라오디케 5세를 두었다.
2.2. 로마와의 갈등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전조 과정에서 셀레우코스는 아버지에 의해 재건된 리시마케이아 식민지를 책임지게 되었다. 전쟁 발발 시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군대를 지휘하여 페르가몬을 성공적으로 포위하지 못했고, 포카이아 도시를 점령한 후 아버지와 함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싸웠다. 마그네시아에서 패배한 후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189년에 공동 섭정이 되었고, 셀레우코스 왕조는 기원전 188년에 로마와 아파메이아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일환으로 셀레우코스는 갈라티아인과의 전쟁 동안 로마군과 페르가몬 군에 곡물과 정찰병을 공급하는 것을 감독했다.
2.3. 통치와 재정 문제
기원전 187년, 안티오코스 3세가 엘리마이스의 벨 신전을 약탈한 후 사망하자, 셀레우코스 4세가 바실레우스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아카이아 동맹과의 동맹을 갱신했으며, 폰토스의 파르나케스 1세의 갈라티아 침공에 거의 참여할 뻔했지만, 재고하여 돌아섰다. 또한 그는 로마에 인질로 있던 그의 형제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대신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보냈다.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로마에게 패배하고, 아파메이아 조약(기원전 188년)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았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4세는 즉위 후 배상금 지불에 시달리게 되었다. 국력 약화가 진행되면서 로마,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등과는 양호한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셀레우코스 4세는 배상금 지불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재보 약탈을 꾀하여, 재무 장관 헬리오도로스를 파견했다. 헬리오도로스는 왕위를 노리고 왕을 암살했다. 헬리오도로스는 곧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패배했고,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기원전 175년).
2.4. 암살
기원전 175년 9월 3일(셀레우코스 시대 137년), 셀레우코스 4세는 그의 주요 관료 중 한 명인 헬리오도루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고대 자료에는 이 행위에 대한 동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단순한 권력욕이었거나, 이 죽음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사람에게 잘못 귀속되었을 수도 있다. 헬리오도루스는 섭정으로 권력을 잡고 셀레우코스 4세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를 대신하여 통치했다. 그러나 헬리오도루스의 섭정 기간은 짧았고, 몇 달 후 페르가몬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교체되었다.
셀레우코스 4세는 배상금 지불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재보 약탈을 꾀하여, 재무 장관 헬리오도로스를 파견했다. 헬리오도로스는 왕위를 노리고 왕을 암살했다. 헬리오도로스는 곧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쓰러졌고, 안티오코스 4세가 계승자가 되었다(기원전 175년).
3. 유대-기독교 전통에서의 묘사
2 마카베오기는 유대교 텍스트로, 나중에 기독교에서 성경으로 포함된 셀레우코스 4세에 대해 논하고 있다. 2 마카베오기 3장에서 셀레우코스 4세는 성전의 재산이 과장되어 보고된 것을 듣고 헬리오도르를 세금 징수 임무로 보낸다. 헬리오도르는 예루살렘의 제2성전의 보물을 약탈하려 하지만 기적적으로 천사들에 의해 저지당한다. 이 사건은 셀레우코스가 "왕의 영화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 징수인을 보낼 것"이라고 언급된 다니엘서에도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징수인은 또한 "착취자" (예루살렘 성경) 또는 "조공 징수자" (개정 표준역)로 언급된다.
4. 평가
일반적으로 많은 (비종교적) 고대 자료들은 셀레우코스 4세를 다소 무능한 통치자로 묘사한다. 레스터 L. 그라브는 숙련된 왕은 전쟁을 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역사가들로부터 이러한 적대감이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셀레우코스 4세는 재건의 비교적 조용한 시기를 보낸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이 처한 열세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와의 관계를 현명하게 관리했다. 10년간의 평화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