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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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방등은 남조 양나라의 인물로, 원제 소역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어머니 서소패가 소역의 총애를 받지 못해 소방등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후경의 난 당시 건강으로 파견되었다가 반란군과 싸웠으며, 이후 하동왕 소예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마계에서 소예에게 패하여 22세의 나이로 익사했다. 사후 무열세자로 추시되었으며, 시중, 중군장군, 양주자사 등의 관직이 추증되었다. 저서로 『삼십국춘추』와 『정주자』가 있다.
528년 소역의 맏아들로 태어나 왕세자가 되었으나, 어머니 서비가 소역의 총애를 받지 못해 소방등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후경의 난 이후 소역은 소방등의 군사 통솔 능력을 인정했지만, 서소패의 불미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소방등은 더욱 불안한 처지에 놓였다.
《삼십국춘추(三十國春秋)》와 《정주자(靜住子)》를 저술했다. 소익이 즉위하자 편저와 함께 당시에 통용되었다.
소방등은 소동왕 원제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다. 정밀한 사고를 할 줄 알았으며, 숲과 샘을 사랑하고 산책을 즐겼다. 그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흰 망아지가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라는 글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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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소역은 후경 토벌에 앞서 조카 소예에게 군량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소방등에게 소예를 먼저 치도록 명했다. 소방등은 2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출정했지만, 마계(麻溪)에서 소예의 기습을 받고 패사했다. 소역은 아들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무열세자'(武烈世子)로 추시했다가 552년 황제 즉위 후 '충장세자'(忠壯世子)로 고쳐 추시했다.
2. 1. 어린 시절과 성장
528년 소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서비이다. 소방등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기마와 활쏘기를 잘했으며, 정밀한 사고에 뛰어났다. 숲과 샘을 사랑했으며 특히 산책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흰 망아지가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한 호리병의 술이 성품을 기르기에 충분하고, 한 덩이의 밥이 몸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논했다.
소방등의 어머니 서소패는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고 소역의 후궁들에게 질투를 느꼈으며, 실수하는 행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소역에게 총애를 받지 못했고, 소방등 역시 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서비가 질투로 인해 소역의 총애를 잃자, 소방등은 불안감을 느꼈다. 소역이 이를 알고 소방등을 미워하게 되자, 소방등은 더욱 두려워하며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했다.
2. 2. 후경의 난과 활약
후경의 난이 일어나고 무제가 죽은 뒤, 소역은 건강에서 봉지인 강릉으로 돌아갔다. 소방등이 군사를 통제하는데 화목하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비로소 그 능력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서소패가 소역이 자신을 총애하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행동을 올바르게 하지 않자 소역이 화가 나서 큰 쪽문에다 서소패의 행실을 대강 써서 방을 붙였고, 소방등은 이를 보고 더욱 두려워했다.
태청 2년(548년), 무제가 여러 왕의 장남들과 면회를 원했으므로 소익은 방등을 건강으로 파견했다. 방등은 배로 장강을 내려가 요수에 도착했다. 마침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소익은 방등에게 돌아갈 것을 명했지만 방등은 "옛날 진의 태자 신생이 그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았는데, 방등이 어찌 그 삶을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소익은 답서를 보고 방등이 돌아갈 의사가 없음을 알고 병사 1만 명을 건강의 원군으로 보냈다. 반란군의 공세에 맞서 방등은 스스로를 화살과 돌에 노출시켜 싸웠다.
태청 3년(549년), 태성이 함락되자 방등은 형주로 돌아가 병마를 모았다. 방등은 사람들의 일체감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므로 소익은 처음으로 그 능력에 감탄했다. 방등은 성책 수축을 권하며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책이 완성되자 성의 누각과 여장이 서로 보이고, 주위는 약 112.65km 정도에 이르렀다. 소익은 이것을 보고 기뻐하며 "만약 자식이 한 명 더 있어서 이런 인물이라면 나는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라고 서비에게 말했다. 서비는 대답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물러났다.
소역이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서 조카이며 상주자사 소예에게 사자를 보내 그 양식과 무리들을 감독하려고 했으나 소예가 세 번이나 거부했다. 그러자 소방등이 소예를 먼저 토벌하기를 요청했고, 소역은 넷째 아들인 안남후 소방구를 상주자사로 삼고 이어서 소방등에게 명령해 정예군 2만 명을 거느리고 소방구를 상주로 호송한 뒤, 소예를 격파하고 소방구로 하여금 상주자사를 대신하도록 하게 했다. 소방등이 곧 출정하려고 할 즈음에 친한 사람에게 "이번에 가서 난 반드시 죽을 것인데 죽더라도 그에 적당한 곳을 얻는다면 내 어찌 다시 한스러워 하겠는가?" 라고 말했다.
소방등의 군대가 마계(麻溪)에 도착했는데, 소예가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소방등을 기습 공격하니, 소방등의 군대는 패배하고 소방등은 물에 빠져 익사했다. 소방구가 패군을 거두어서 강릉으로 되돌아갔고, 소역은 소방등이 죽었는데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소역은 소방등을 '''무열세자'''(武烈世子)로 추시했고, 552년에 황제로 즉위한 뒤 이어서 시중, 중군장군(中軍將軍)과 양주자사(揚州刺史) 등의 관위를 추증했으며 이어서 '''충장세자'''(忠壯世子)로 다시 추시했다.
2. 3. 소예와의 전투와 죽음
후경의 난이 일어나고 무제가 죽은 뒤 소역은 건강에서 봉지인 강릉으로 돌아갔다. 소방등이 군사를 통제하는데 화목하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비로소 그 능력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소방등의 어머니 서비가 소역이 자신을 총애하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행동을 올바르게 하지 않자 소역이 화가 나서 큰 쪽문에다 서비의 행실을 대강 써서 방을 붙였고, 소방등은 이를 보고 더욱 두려워했다.
소역은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 조카이며 상주자사인 소예에게 사자를 보내 양식과 무리들을 감독하려 했으나 소예는 세 번이나 거부했다. 그러자 소방등이 소예를 먼저 토벌하기를 요청했고, 소역은 넷째 아들인 안남후 소방구를 상주자사로 삼고 소방등에게 정예군 2만 명을 거느리고 소방구를 상주로 호송한 뒤, 소예를 격파하고 소방구로 하여금 상주자사를 대신하도록 했다. 소방등은 곧 출정하려고 할 즈음에 친한 사람에게 "이번에 가서 난 반드시 죽을 것인데 죽더라도 그에 적당한 곳을 얻는다면 내 어찌 다시 한스러워 하겠는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방등의 군대가 마계(麻溪)에 도착했는데, 소예가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소방등을 기습 공격하니, 소방등의 군대는 패배하고 소방등은 물에 빠져 익사했다. 소방구가 패군을 거두어서 강릉으로 되돌아갔고, 소역은 소방등이 죽었는데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소역은 소방등을 '''무열세자'''(武烈世子)로 추시했고, 552년에 황제로 즉위한 뒤 이어서 시중, 중군장군(中軍將軍)과 양주자사(揚州刺史) 등의 관위를 추증했으며 이어서 '''충장세자'''(忠壯世子)로 다시 추시했다.
2. 4. 사후
528년 소역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역은 소방등을 왕세자로 삼았다. 소방등의 어머니 서비는 소역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소방등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경의 난이 일어나고 무제가 죽은 뒤, 소역은 건강에서 강릉으로 돌아갔다. 소방등이 군사를 통제하는 능력을 보고 소역은 비로소 탄복했다. 그러나 서소패가 소역에게 원망을 품고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자, 소역은 크게 화를 내며 서소패의 행실을 대문에 써 붙였다. 소방등은 이를 보고 더욱 두려워했다.
소역은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 조카 소예에게 양식을 감독하게 했으나, 소예는 세 번이나 거부했다. 소방등은 소예를 먼저 토벌할 것을 요청했다. 소역은 넷째 아들 소방구를 상주자사로 삼고, 소방등에게 정예군 2만 명을 주어 소방구를 상주로 호송하고 소예를 격파하게 했다. 출정 직전, 소방등은 친한 사람에게 "이번에 가서 난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방등의 군대가 마계(麻溪)에 도착했을 때, 소예가 군사 7천 명으로 기습했다. 소방등의 군대는 패배했고, 소방등은 물에 빠져 익사했다. 소방구가 패잔병을 수습해 강릉으로 돌아갔지만, 소역은 슬퍼하지 않았다. 소역은 소방등을 '무열세자'(武烈世子)로 추시했고, 552년 황제 즉위 후 시중, 중군장군, 양주자사 등의 관위를 추증하고 '충장세자'(忠壯世子)로 다시 추시했다.
3. 저술 활동
4. 가족 관계
5. 평가
후경의 난 당시 소방등은 아버지 소익의 명에도 "옛 진의 태자 신생이 그 죽음을 아까워하지 않았는데, 방등이 어찌 그 삶을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라며 건강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이러한 용맹함과 결단력은 훗날 소익이 방등의 능력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방등은 성책 수축을 건의하여 방비를 강화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완성된 성책은 주위가 70리에 달했고, 이를 본 소익은 "만약 자식이 한 명 더 있어서 이런 인물이라면 나는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라며 감탄했다.
그러나 소방등은 하동왕 소예 토벌 중 전투에서 패하여 22세의 젊은 나이로 익사했다. 사후 시중・중군장군・양주 자사에 추증되었고, 충장세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원제 즉위 후에는 무렬세자로 시호가 바뀌었다. 그의 편저로는 『삼십국춘추』와 『정주자』가 전해진다.
6.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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