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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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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찰은 남조 양나라의 황족으로, 양 무제로부터 곡아현공에 봉해졌고, 아버지 소통이 죽은 후 악양군왕에 책봉되었다. 549년 후경의 난을 겪으며 서위(西魏)에 투항하여 양왕에 봉해졌고, 554년 서위가 강릉을 공격하여 소역을 살해한 후, 555년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후량을 건국했다. 그는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지만, 562년 사망했으며, 셋째 아들 소규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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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9년 출생 - 소예
    양나라 황족 소예는 소명태자의 아들로, 지강현개국공에 봉해진 후 하동군왕, 영원장군, 낭야태수, 팽성태수를 역임했으나, 후경의 난 중 소역과의 갈등으로 왕승변에게 참수되었고, 사후 동생 소찰에 의해 승상으로 추증되고 무환왕으로 시호를 받았다.
  • 6세기 중국 사람 - 당 태종
    당 태종은 당나라의 제2대 황제로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관의 치로 불리는 치세를 통해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균전제 등 제도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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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소찰 (蕭詧)
묘호중종 (中宗)
시호선황제 (宣皇帝)
존호황제
추존 연도불명
소찰 (蕭詧)
이손 (理孫)
생년519년
몰년562년
재위기간555년 - 562년
능묘평릉 (平陵)
신상 정보
부친소통
모친공황태후 공씨
배우자선정황후 왕씨
귀빈 효황태비 조씨
자녀소료
소규
소암
소급
소잠
정치
정치 체제후량 황제
섭정민제
경제
후량
연호대정
참고 정보
다른 이름소예 (蕭誉)

2. 생애

양나라 소명태자 소통의 셋째 아들로, 할아버지 양 무제로부터 처음 곡아현공(曲阿縣公)에 봉해졌다.[5] 531년 아버지 사후 악양군왕(岳陽郡王)이 되었고, 이후 동양주 자사와 옹주 자사를 역임했다.

549년 후경의 난이 발발한 혼란기에 숙부인 상동왕 소역과의 갈등 끝에 형 소예가 살해되자, 소역에게 원한을 품고 서위에 투항하였다.[1] 550년 서위로부터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고, 554년 서위가 강릉을 함락시킨 후에는 원제가 된 숙부 소역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1][2]

555년 서위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강릉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후량을 건국하고 연호를 대정(大定)이라 하였다.[1][3] 그러나 후량의 영토는 강릉 주변으로 크게 제한되었고, 양양 등 주요 지역은 서위에 귀속되었으며 서위 군대가 강릉에 주둔하는 등 강력한 통제 하에 놓였다.[1][3]

소찰은 검소하고 술과 여색을 멀리했으며, 장수와 군사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었으나 시기심이 많았다는 평가가 있다.[1] 좁은 영토와 끊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해했다고 전해진다.[1] 역사가 이연수는 그가 큰 야망을 품었으나 여자와 사람의 머리카락을 극도로 혐오하는 기이한 면모도 있었다고 기록했다.[4]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있어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4]

562년 1월, 등에 난 종기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1][3] 그의 사후 왕위는 아들 소규가 계승했다.[2]

2. 1. 초기 생애와 관직

519년 양나라의 소명태자 소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5] 어머니는 소통의 후궁인 공 황태후이며, 할아버지는 양나라의 건국자인 양 무제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특히 불교 경전 연구에 몰두했다고 전해진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양 무제는 손자가 경전을 공부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겼다.[6] 처음에는 할아버지 양 무제로부터 곡아현공(曲阿縣公)으로 봉해졌다.

531년 아버지 소명태자가 사망하자, 양 무제는 유교의 종법 원칙과는 달리 소통의 아들이 아닌 동생 소강(훗날 양 간문제)을 태자로 책봉했다. 대신 양 무제는 소통의 아들들을 왕으로 봉했는데, 소찰은 악양군왕(岳陽郡王)이 되었고,[6] 이어 동양주(현재의 저장성 중동부) 자사(刺史)로 임명되어 회계 (현재 사오싱시)를 진수(鎭守)하게 되었다.[7] 당시 동양주는 양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소찰은 자신과 형제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었다.

546년에는 옹주(현재 후베이성 북서부) 자사로 임명되어 양양 (현재 샹양시)으로 부임했다.[8] 소찰은 당시 양 무제의 오랜 통치 말기 제국 운영의 비효율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옹주 부임을 자신의 세력을 키울 기회로 여겼다. 이에 신중하게 통치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2. 2. 후경의 난과 서위 투항

546년 옹주(雍州) 자사(刺史)로 임명되어 양양(襄陽)을 진수하게 되었다.

548년, 장군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建康, 현재의 난징)을 공격하면서 후경의 난이 시작되었다. 이때 양 무제는 소찰의 형인 하동왕 소예(蕭譽zho)를 형주 자사로 임명했는데, 이전 형주 자사이자 숙부 소역(蕭繹, 당시 상동왕)의 측근이었던 장조()와의 갈등으로 소예는 장조를 억류했다. 소역이 후경 토벌을 위해 각 지역 자사들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했을 때, 소예는 이를 거부했고 소찰은 군대를 보냈으나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다. 이후 장조가 탈출하여 소역에게 가서는 소예, 소찰 등이 소역에게 반역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 이에 소역은 소예를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다.

549년 후경이 건강을 함락시키고, 소역은 마침내 소예를 공격했다. 소예는 초기에는 소역의 공격을 막아내고 소역의 태자인 소방등(蕭方等zho)을 전사시키기도 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본거지인 장사(長沙)가 포위되었다. 소예는 소찰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소찰은 군대를 이끌고 소역의 본거지인 강릉현을 공격했다. 그러나 폭우와 왕승변(王僧辯) 등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부하 장수 두택(杜崱zho)이 소역에게 항복하며 그의 동생 두안(杜岸zho)이 소찰의 본거지인 양양을 기습하자 소찰은 양양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형을 구원하지 못한 데다 자신이 소역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을 두려워한 소찰은 결국 550년 서위에 양양을 바치며 투항하고, 아내 왕씨와 아들 소료(蕭嶚zho)를 인질로 보냈다.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宇文泰)는 소찰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장군 양충()을 보내 소찰을 지원하게 했다. 양충은 소역의 군대를 격파하고, 소찰은 서위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다. 같은 해, 서위는 소찰을 양왕(梁王)으로 봉했다. 한편, 소역은 장사를 함락시키고 소예를 처형했다. 소찰은 서위의 수도 장안을 방문하여 서위 문제와 우문태에게 예를 표했다.

552년 소역은 후경을 격파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원제가 되었으며, 강릉을 수도로 삼았다. 원제는 강성해진 국력을 믿고 서위와의 관계에서 오만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우문태가 양나라 침공을 고려하게 만들었다. 소찰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서위에 계속 조공하며 원제에 대한 불만을 부추겼다. 553년 원제가 서위 사신을 모욕하고 과거 서위가 점령했던 양나라 영토 반환을 요구하자, 우문태는 마침내 양나라 침공을 결정했다.

554년 겨울, 우진(于謹zho)이 이끄는 서위 군대가 양양에 도착하자 소찰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여 함께 강릉으로 진격했다. 원제는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외부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위 군대에 항복했다. 소찰은 사로잡힌 원제를 심문하며 심하게 모욕했다. 555년 서위의 승인 아래 소찰은 원제를 흙 포대로 눌러 살해하고, 강릉 함락 시 사로잡힌 원제의 아들들도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소찰은 숙부에 대한 원한을 갚았으나, 외세를 끌어들여 황족을 살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2. 3. 후량 건국과 통치

549년 후경의 난 이후 숙부인 상동왕 소역과의 갈등 끝에 서위에 투항했다. 550년 서위는 소찰을 양왕(梁王)으로 봉했다. 554년 서위가 강릉을 함락시킨 후, 소찰은 당시 양나라 황제였던 숙부 소역을 흙주머니로 눌러 살해했다.

555년 봄, 소찰은 서위의 군사적 보호 아래 강릉을 수도로 삼아 양나라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대정(大定)으로 정했다. 역사에서는 소찰이 세운 이 양나라를 후량(後梁) 또는 서량(西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서위는 소찰을 황제로 세우는 대가로 강릉 인근 8백 리 땅과 양양 등 주요 지역의 통제권을 확보했으며, 강릉에 군대를 주둔시켜 소찰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또한 서위 군대는 강릉을 약탈하여 대부분의 주민과 양나라 황실의 보물을 장안으로 가져갔다. 이러한 서위의 강력한 통제와 보호 아래 있었기에, 부하 윤덕의(尹德毅)가 서위 주둔군을 기습하여 독립을 되찾자고 제안했을 때 소찰은 이를 거절했다. 이는 서위에 대한 의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양나라 장군들이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위 후 소찰은 아버지 소명태자 소통(蕭統)과 그의 부인 채씨(蔡氏)를 황제와 황후로 추존하고, 생모 공씨(恭妃)를 황태후로 모셨다. 부인 왕씨(王氏)를 황후로 책봉하고, 이미 사망한 장남 소료(蕭僚) 대신 차남 소규(蕭巋)를 태자로 삼았다. 국정 운영에서는 채대보(蔡大寶)와 왕조(王操) 등 충성스러운 신하들에게 많이 의존했다.

그러나 왕승변, 왕림 등 다른 양나라의 실력자들은 소찰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후난성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왕림은 실제로 그의 장군 후평(侯平)을 보내 소찰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남조는 진패선진나라를 세우고(진 무제), 왕림이 원제의 손자 소장(蕭莊)을 황제로 내세워 대립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558년 왕림이 진나라를 공격하는 틈을 타 왕조를 보내 소장의 영토였던 현재의 후난성 지역 일부를 점령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560년 진 문제의 장군 후전(侯瑱)이 왕림을 격파하자, 소찰은 북주(서위의 후신) 군대와 연합하여 소장의 영토 서쪽 절반을 점령하고 일시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같은 해 가을, 후전이 다시 공격해오자 북주 장군 하약돈(賀若敦)과 독고성(獨孤盛)이 이끄는 북주 군대는 보급 문제와 질병으로 고전하다 561년 결국 철수했다. 이로써 어렵게 얻었던 영토는 다시 진나라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후량의 영토는 다시 강릉 주변으로 축소되었다.

소찰은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으며 술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많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장수와 군사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있어 15권의 문집과 36권의 불경 주석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이연수의 《북사》(北史)에는 소찰이 여자를 극도로 싫어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 몇 걸음 떨어져 있어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말했고, 성관계를 가진 후에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버렸다는 특이한 기록도 남아 있다. 또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보는 것을 싫어하여 시종들은 터번이나 모자로 머리카락을 가려야 했다고 한다.

좁은 영토와 끊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해하던 소찰은 562년 봄, 등에 난 종기(등창)가 악화되어 병사했다. 그의 뒤는 태자 소규(명제)가 이었다.

2. 4. 진나라와의 대립과 북주의 개입

555년 가을, 왕승변이 부하 진패선에게 살해된 후, 진패선은 원제의 아들 소방지를 황제로 옹립했다. 558년 진패선이 소방지로부터 선위받아 진(陳)나라를 건국하고 무제(武帝)로 즉위하자, 왕림은 원제의 손자 소장을 황제로 내세워 양나라 황제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진나라와 대립했다.

558년 말, 왕림이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자, 소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왕조(王操)를 파견하여 왕림의 세력권이던 현재의 후난성 지역을 점령하려 시도했다. 이 작전의 성공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이후 560년 봄, 진패선의 조카인 진 문제(文帝)의 장군 후전이 왕림을 격파하자, 소찰은 서위의 뒤를 이은 북주 군대와 연합하여 소장이 통치하던 영토의 서쪽 절반을 점령했다. 이로써 소찰은 북주의 지원 하에 일시적으로나마 해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560년 가을, 진나라 장군 후전은 왕림 격파의 기세를 몰아 소찰이 점령한 상주(湘州)를 공격했다. 이에 북주 장군 하약돈과 독고성(獨孤盛)이 군대를 이끌고 후전을 막아섰다. 양측 군대는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식량 부족과 질병 문제로 북주 군대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561년 초, 독고성은 결국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고, 하약돈은 더욱 거센 압박에 직면했다. 561년 봄에는 장사를 방어하던 은량(殷亮)이 진나라에 항복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후전은 하약돈에게 평화롭게 철수할 것을 제안했고, 하약돈은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물렸다. 이로써 소찰이 소장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는 모두 진나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고, 소찰의 세력권은 다시 강릉 일대로 축소되었다.

소찰은 자신의 영토가 좁고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다.

2. 5. 말년과 죽음

554년 서위가 강릉을 함락시킨 뒤, 소찰은 당시 양나라 황제였던 숙부 소역을 흙주머니로 눌러 살해했다.[1][2]

555년 봄, 서위는 소찰을 양나라 황제로 세웠고[3], 소찰은 스스로 황제(선황제(宣皇帝))를 칭하며 강릉을 수도로 삼았다.[1][3] 소찰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역사가들은 그의 나라를 일반적으로 후량(後梁) 또는 서량(西梁)이라고 부른다.[3] 서위는 강릉과 주변 지역을 소찰에게 넘겨주는 대신, 양양 지역과 강릉 부근 8백 리 땅의 통제권을 가져갔다.[1][3] 또한 서위는 소찰을 감시하고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강릉에 군대를 주둔시키고[3], 도시를 약탈하여 대부분의 주민과 양나라 황실의 보물을 장안으로 옮겼다.[1][3] 소찰의 부하 윤덕의(尹德毅)는 서위 군대를 기습하여 양나라의 독립을 선언하자고 제안했으나, 소찰은 서위의 보호를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나중에 이 결정을 후회했지만, 다른 양나라 장군들이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서위의 지원 없이 독립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3]

황제가 된 소찰은 아버지 소통과 그의 부인 채황후(蔡皇后)를 황제와 황후로 추존하고, 어머니 공비(恭妃)를 황태후로 높였다. 부인 왕씨(王氏)를 황후로 책봉했으며, 원래 후계자였던 아들 소료(蕭僚)가 이미 사망했으므로 그의 동생인 소규를 태자로 삼았다.[3] 그는 정무의 상당 부분을 채대보(蔡大寶)와 왕조(王操)에게 맡겼으며, 이들은 충실히 그를 보좌했다.[3]

소찰은 양나라의 다른 영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왕승변이나 왕림과 같은 양나라 장군들은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3] 특히 당시 현대의 후난성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왕림은 장군 후평(侯平)을 보내 소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3] 555년 왕승변이 부하 진패선에게 살해되고, 진패선이 558년 소방지로부터 선양받아 진나라를 세우자(진 무제), 왕림은 원제의 손자 소장(蕭莊)을 황제로 내세워 진나라와 대립했다.[3]

558년 말, 왕림이 진나라를 공격하러 동쪽으로 진격하자, 소찰은 왕조를 보내 왕림의 세력권이었던 현재의 후난성 지역 일부를 점령하려 시도했지만, 그 성과는 명확하지 않다.[3] 560년 봄, 진나라 장군 후전(侯瑱)이 왕림을 격파하자, 소찰은 당시 서위의 뒤를 이은 북주 군대와 연합하여 소장 영토의 서쪽 절반을 점령하고 통제권을 확보했다.[3]

560년 가을, 후전은 군대를 이끌고 소찰로부터 상주(湘州, 현재의 후난성 창사시 일대)를 탈환하려 했다.[3] 북주 장군 하약돈(賀若敦)과 독고성(獨孤盛)이 소찰을 지원하며 후전의 군대를 막아섰으나,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곧 보급 문제와 질병으로 북주 군대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3] 결국 561년 초 독고성이 철수해야 했고, 봄에는 장사를 방어하던 은량(殷亮)마저 진나라에 항복했다. 고립된 하약돈은 후전과 평화롭게 철수하기로 합의했고, 이전에 소장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는 모두 진나라의 차지가 되어 소찰의 영토는 다시 강릉 일대로 크게 줄어들었다.[3]

소찰은 자신의 영토가 좁고 전쟁으로 심하게 파괴된 것에 실망하고 우울해했으며, 결국 큰 뜻을 이루지 못했다.[1][3] 그는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으며 술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지만, 장수와 군사들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다독였다.[1][4] 역사가 이연수는 그의 저서 《북사》에서 소찰에 대해 "젊어서부터 큰 뜻을 품었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을 잘 의심했지만 병사들에게는 관대하여 충성을 얻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검소한 생활에 만족했으며 어머니에게 지극히 효도했다."라고 평가하면서도, "여자를 특히 싫어하여 몇 걸음 떨어져 있어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말했으며, 여자와 관계를 가질 때 입었던 옷은 모두 버렸다. 후궁과 관계를 가진 후에는 하루를 쉬어야 했다. 또한 사람의 머리카락 보는 것을 싫어하여 하인들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터번이나 모자를 써야 했다."라는 특이한 점을 기록했다.[4]

562년 봄(음력 1월[1]), 등에 악성 종기(피부 병변[3])가 심해져 결국 사망했다.[1][3] 아들인 태자 소규가 황위를 계승했다(명제(明帝)).[2][3] 소찰은 15권의 문학 작품과 36권의 불교 경전 주석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4]

3. 가족 관계


  • '''아버지''': 양 소명태자 소통(昭明太子 蕭統)
  • '''적모''': 소덕황후(昭德皇后) 채씨(蔡氏)
  • '''생모''': 원황태후(元皇太后) 공씨(龔氏)

  • '''배우자'''
  • * 경황후 왕씨(靜皇后 王氏, ? ~ 563년)
  • * 효황태비 조씨(孝皇太妃 曹氏, ? ~ 562년) - 귀빈(貴嬪)

  • '''자녀'''
  • * '''아들'''
  • ** 효혜태자 소료(孝惠太子 蕭嶚, ? ~ 550년) - 경황후 왕씨 소생, 장남.
  • ** 명제 소괴(明帝 蕭巋, 542년 ~ 585년) - 효황태비 조씨 소생, 차남. 후량의 2대 황제.
  • ** 안평왕(安平王) 소암(蕭巖, ? ~ 588년) - 3남.
  • ** 동평효왕(東平孝王) 소급(蕭岌, ? ~ 566년) - 4남.
  • ** 오군왕(吳郡王) 소잠(蕭岑) - 5남.
  • * '''딸'''
  • ** 선성공주(宣成公主) - 장녀. 채대보(蔡大宝)의 차남 채연수(蔡延寿)에게 시집감.

4. 평가

5. 기타


  • 연호: 대정(大定|다딩중국어) (555년 ~ 562년)
  • 양서』 권55 열전 제49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Book of Zhou
[3] 서적 Ancient and Early Medieval Chinese Literature (vol.3 & 4): A Reference Guide, Part Three & Four BRILL
[4] 서적 Twenty-Four Histories
[5] 서적 Zhou Shu
[6] 서적 Book of Zhou
[7] 서적 Book of Liang
[8] 서적 Book of Li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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