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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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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수는 5세기 고구려의 인물로, 북연의 군주 풍홍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 438년, 고구려 장수왕은 북연 망명객 풍홍이 남송과 내통하려 하자 손수와 고구에게 그를 암살하도록 지시했다. 손수는 풍홍을 죽였으나, 남송 장수 왕백구의 기습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손수는 313년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군의 중국계 호족 출신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초기 사회의 다양한 인적 구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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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고구려) - [인물]에 관한 문서
손수 (孫漱)
한글손수
한자孫漱
일본어손 소
인물 정보
국적고구려
주군장수왕
군사 정보
복무고구려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미상

2. 생애

438년, 고구려에 망명해 있던 북연의 군주 풍홍(馮弘)이 송나라로 망명을 시도하자,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高仇)에게 풍홍 제거를 명했다. 손수는 고구와 함께 풍홍과 그의 자손 1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후 풍홍을 데려가기 위해 파견된 송나라 장수 왕백구(王白驅)의 군대에게 사로잡혔다. 이 사건 이후 손수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2. 1. 출신 배경

손수의 출신은 313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붕괴된 낙랑군중국계 호족인 낙랑 손씨의 유민으로 추정된다[1]

손수라는 이름은 한자식 이름을 사용하는 중국인명 방식이다. 하지만 고구려인의 인명이 중국식으로 표기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의 현상으로 알려져 있어 손수의 사례는 이례적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시조 전설 속 중국식 성씨는 후대에 덧붙여진 신화적인 요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2]。 또한, 『일본서기』 등 일본 측 기록에서도 7세기 이전 한반도 인물에게서 한자 성씨 사용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손수의 존재는 초기 고구려 사회의 복합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2. 2. 풍홍 암살 사건

436년 북위의 공격으로 북연이 멸망하자, 북연의 마지막 군주 풍홍(馮弘)은 고구려로 망명했다.[3] 그러나 고구려의 대우에 불만을 품은 풍홍은 남송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고구려를 떠나 남송으로 가려 하였다.

438년, 이러한 움직임을 알아챈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高仇)에게 풍홍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손수와 고구는 풍홍이 머무르던 북풍(北豊)으로 가서 풍홍과 그의 자손 10여 명을 살해했다.

같은 시기, 남송은 풍홍을 데려오기 위해 장수 왕백구(王白驅)에게 군사 7천 명을 주어 파견하였다. 왕백구는 손수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기습 공격하여 고구를 전사시키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장수왕이 즉시 군사를 다시 보내 남송군을 격파하고 왕백구를 사로잡았다. 이후 고구려는 사로잡은 왕백구를 남송으로 돌려보냈다. 손수에 대한 기록은 이 사건 이후로 남아있지 않으나, 왕백구 송환 과정에서 교환 조건으로 석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조

[1] 논문 한국 고대사회 外來人의 존재양태와 사회적 역할 檀國大學校東洋學硏究院
[2] 서적 カラー新版 人名の世界地図 文藝春秋 2021-11-18
[3] 서적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岩波書店 199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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