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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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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제3대 왕으로,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구려의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동부여를 병합하고 낙랑국을 정복했다. 또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대무신왕은 40세에 사망하여 대수촌원에 묻혔으며, 드라마, 만화,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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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신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무휼(無恤), 미류(味留)
묘호북국신왕(北國神王)
시호대무신(大武神)
능묘대수촌원(大獸村原)
이칭대주류왕(大朱留王),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신상 정보
출생4년
사망44년 10월 (음력, 40세)
부친유리명왕
모친왕후 송씨
배우자원비, 왕후 해씨
자녀호동, 모본왕
왕위 정보
즉위18년 10월 (음력)
퇴위44년 10월 (음력)
전임자유리명왕
후임자민중왕
태자 정보
임명14년 1월 (음력)
해임18년 10월 (음력)
전임자태자 해명
후임자태자 해우 (모본왕)
기타 정보
지휘고구려군
참전부여 정벌

2. 생애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해서는 호걸의 풍모와 큰 지략을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9년 부여대소왕이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왕자였던 무휼은 부여 사신에게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고 충고했다. 13년 부여가 침공하자 군사를 이끌고 매복 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했고, 14년 태자로 책봉되어 국정을 맡았다. 18년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26년 음력 10월, 개마국을 공격하여 복속시켰고, 음력 12월에는 구다국이 항복하였다. 또한 을두지, 송옥구 등을 등용하여 내치를 다졌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대무신왕의 동생 고추대가 재사의 아들 궁이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을 대신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한다. 그러나 후한서의 기록대로 한다면 태조대왕은 대무신왕의 후손이 된다. 광개토대왕릉비에도 광개토대왕이 주몽-유류왕-대주류왕을 이어 17대손이라 하여 광개토대왕의 직계 조상이라 기록했다. 역사가 신채호태조대왕을 대무신왕의 3대손으로 보았다.

대무신왕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조부동명성왕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조모예씨 부인
부왕유리명왕재위: 기원전 19년 ~ 서기 18년
모후왕비 송씨? ~ 서기 17년
도절? ~ 서기 1년, 태자
해명기원전 12년 ~ 서기 9년, 태자
동생여진? ~ 서기 18년
동생해색주? ~ 서기 48년, 민중왕 즉위
동생재사[20]태조대왕의 아버지
조카태조대왕재위: 53년 ~ 146년
왕비원비
아들모본왕? ~ 53년, 재위: 48년 ~ 53년
손자고익
왕비해씨 부인갈사부여 갈사왕의 손녀
아들호동? ~ 32년, 낙랑공주와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짐, 원비의 모함으로 자살
맏며느리낙랑공주? ~ 32년
처남도두왕



다음은 대무신왕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2. 1. 즉위 이전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다물후 송양의 딸인 송씨이다. 9년부여대소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당시 왕자였던 무휼은 부여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고 충고하였다. 13년 부여가 침공하자 무휼은 군사를 이끌고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공로로 14년 11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어 국정을 맡아 보았다.[10]

2. 2. 즉위 초기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무휼은 13년 고구려가 부여로부터 공격받았을 때, 왕명에 따라 기책을 사용하여 부여군을 막아 격퇴시켰다. 이 공으로 14년 11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으며, 고구려의 군사 권한을 부여받았다. 18년 10월, 유리명왕이 사망함에 따라 왕위를 계승했다.[6]

22년 2월, 부여를 침공하여 대소왕의 목을 베었으나, 대소의 동생 (금와왕의 막내 아들)이 부여의 잔당을 수습하여 압록곡에서 갈사왕을 칭하며 부여의 세력은 잠시나마 존속했다. 대무신왕은 이 전투에서의 전사자를 조문하고 부상자를 위문하는 등 민심을 어루만졌으며, 백성들은 대무신왕의 덕에 감동하여 나라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같은 해 7월, 부여 대소왕의 종형제가 족인 1만여 명을 이끌고 투항해 왔다.[6]

2. 3. [[동부여]]와의 전쟁

서기 20년 음력 10월, 부여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사신을 통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전하며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대소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4] 서기 21년 음력 12월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을 감행하여, 22년 음력 2월 고구려 장수 괴유가 대소왕을 죽였으나 부여군에게 포위 당한 끝에 후퇴하였다.[4] 대소왕을 잃은 부여는 분열되어 대소의 동생은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으며, 음력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부여 백성 1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4]

2. 4. [[한나라]]와의 전쟁

28년 음력 7월,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에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4] 한나라 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는 계책을 내었다. 위나암성이 암석 지형이라 물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4]

32년에는 낙랑국[10]을 침공하여 항복시켰고, 37년에는 낙랑국을 멸망시켜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44년 9월, 후한의 광무제가 해로를 통해 출병하여 낙랑군을 회복하고, 살수(현재의 청천강) 이남이 후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11]

2. 5. 낙랑 정벌과 논란

32년 낙랑국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낙랑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이 옥저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崔理)와 만나 사위가 되었다. 호동은 귀국한 후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이후 낙랑국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0]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6]

이 낙랑 정벌 기록은 현재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한 기록이 없으며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찾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한편으로는 낙랑국과 낙랑군이 병존하였던 정치체로서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16],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17]도 있다.

37년에도 낙랑을 정벌하여 병합한 기사가 있는데,[4][5] 이를 32년 낙랑 정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독립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44년 후한광무제가 다시 낙랑을 정복하여 살수(薩水) 이남을 한나라 영토로 하였다고 한다.[11] 그러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광무제가 낙랑을 회복하였던 것은 30년의 일로, 이 시기에는 군사 활동이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오기(誤記)이며 살수가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확정되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18] 멸망한 낙랑의 유민 5000명은 신라로 투항하였다.[19]

2. 6. 재위 후반

32년 낙랑국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낙랑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이 옥저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崔理)와 만나 사위가 되었다. 호동은 귀국한 후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이후 낙랑국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16]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 낙랑 정벌 기록은 현재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사군(漢四郡)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한 기록이 없으며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찾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한편으로는 낙랑국과 낙랑군이 병존하였던 정치체로서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16],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17]도 있다.

37년에도 낙랑을 정벌하여 병합한 기사가 있는데, 이를 32년 낙랑 정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독립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44년후한광무제가 다시 낙랑을 정복하여 살수(薩水) 이남을 한나라 영토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광무제가 낙랑을 회복하였던 것은 30년의 일로, 이 시기에는 군사 활동이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오기(誤記)이며 살수가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확정되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18] 멸망한 낙랑의 유민 5000명은 신라로 투항하였다.[19]

32년 음력 11월, 왕자 호동이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의 모략에 빠져 어머니를 간통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며,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해우(解憂)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이해에 후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 광무제로부터 왕호를 인정받았다.

44년 음력 10월, 대무신왕은 향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가계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다물후 송양의 딸인 왕후 송씨이다. 아버지는 유리명왕이며, 할아버지는 동명성왕, 할머니는 예씨 부인이다.



관계이름비고
도절태자
해명태자
동생여진
동생해색주민중왕으로 즉위
동생재사[20]태조대왕의 아버지
조카태조대왕



왕비와 아들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비아들비고
원비모본왕
해씨 부인 (갈사부여 갈사왕의 손녀)호동낙랑공주와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며, 원비의 모함으로 자살
맏며느리낙랑공주
처남도두왕


4. 대중 문화 속 대무신왕

2008년 KBS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 송일국이 연기했다.[1] 2009년 SBS 드라마 《자명고》에서는 문성근이 연기했다.[2] 또한, 만화이자 게임으로도 만들어진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이다.[3]

참조

[1] 서적 삼국유사
[2] 비문 광개토왕릉비
[3] 서적 삼국사기
[4] 서적 New History of Korea Jimundang 2005
[5] 논문 Reinterpreting Traditional History in North Korea
[6] 서적 삼국사기
[7] 웹사이트 유리왕(琉璃王) http://encykorea.aks[...]
[8] 웹사이트 동명왕신화 http://encykorea.aks[...]
[9] 웹사이트 고구려의 건국 시조, 동명왕 https://ncms.ncultur[...]
[10] 문서 일반적으로 이른바 낙랑군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11] 문서 고구려가 이러한 초기 단계에서 낙랑군을 일시적으로라도 병합했다는 기록은 중국 측에는 없다. 또한 청천강 이북은 요동군이었고, 어느 경우든 당시에는 후한의 영토였다.
[12] 웹사이트 삼국사기 https://db.history.g[...]
[13] 서적 삼국유사
[14] 비문 광개토왕릉비
[15] 서적 삼국사기
[16] 서적 낙랑군연구 일조각 1992
[17] 논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낙랑·말갈사료에 관한 검토 1997
[18] 논문 고구려의 낙랑·대방지역 진출과 그 지배형태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
[19] 서적 한국 7대 불가사의 위즈덤하우스 2007
[20] 문서 재사의 막내아들로 알려진 신대왕의 출생년도가 89년이다. 그러나 재사에 대해서는 주몽과 함께 온 개국공신 재사와 동일인이라는 설 혹은 후손이라는 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대무신왕의 후손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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