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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마사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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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니 마사스케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무장이자, 규슈 단다이, 오우치 씨와 대립한 쇼니 씨의 당주였다. 오닌의 난을 겪으며 가독을 잇고 지쿠젠, 부젠을 회복하며 번영을 이뤘으나, 오우치 씨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오우치 요시오키의 공격으로 히젠으로 물러났고, 다쿠 씨의 배신으로 센쇼지에서 자결했다. 그의 아들들은 흩어졌지만 쇼니 씨는 명맥을 유지했다. 마사스케는 죽기 전 남긴 시조와 센쇼지의 매화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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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니 마사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쇼니 씨(少弐氏)
이름쇼니 마사스케(少弐政資)
시대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출생가키쓰(嘉吉) 원년(1441년)
사망메이오(明応) 6년 4월 19일(1497년 5월 21일)
개명지로(次郎) → 요리타다(頼忠) → 마사히사(政尚) → 마사스케(政資)
계명안요인덴묘테쓰혼코다이젠조몬(安養院殿明哲本光大禅定門)
묘소센쇼지(専称寺) (다쿠시(多久市) 다쿠초)
관위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
아버지쇼니 노리요리(少弐教頼)
어머니소 사다모리(宗貞盛)의 딸
형제마사스케、지바 다네스케(千葉胤資)、나베시마 쓰네후사(鍋島経房)
자녀요리타카(頼隆)、다카스케(高経)、스케모토(資元)、미나미 도노(南殿, 마쓰라 마사시松浦政의 아내)

2. 생애

무로마치 막부와 그 기관인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시부카와 씨(渋川氏), 그리고 이들을 배경으로 스오국(周防国)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 오우치 씨(大内氏)와 오랫동안 대립하던 쇼니 씨(ショニ氏)는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거치며 복잡한 관계 변화를 겪었다. 쇼니 노리요리 사후 가독을 이은 쇼니 마사스케는 한때 쇼니 가문을 부흥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오우치 가문에 패배하여 센쇼지(専称寺)에서 자결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8][9]

2. 1. 가독 상속과 쇼니 가문 부흥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년)에서 오우치 씨(大内氏)가 서군에 서고 쇼니 노리요리・마사스케 부자는 동군의 호소카와 씨(細川氏)에 접근, 막부로 복귀하였다. 이듬해(1468년) 규슈에서 봉기한 아버지가 오우치 씨에게 패하고 전사하자, 마사스케가 가독을 이었다.[8]

마사스케는 오우치 씨에게 빼앗긴 지쿠젠(筑前), 부젠국(豊前国)을 회복하고, 조선이나 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또한 히젠국(肥前国)의 규슈 지바 씨(九州千葉氏) 내분을 틈타 자신의 동생을 당주로 보내 지바 다네스케(千葉胤資)라 칭하게 했다. 이로써 쇼니 씨를 일시적으로 중흥시켰다.[8]

그러나 쓰시마국(対馬国)의 소 사다쿠니(宗貞国)가 쇼니 씨를 배반하였고, 오닌의 난이 끝난 뒤 오우치 마사히로(大内政弘)가 다시 기타큐슈를 침공해 열세에 몰렸다. 마사히로의 아들 요시오키(義興) 대에는 규슈 단다이 시부카와 다다시게(渋川尹繁)와 함께 막부로부터 마사스케 추토 명령을 받은 오우치 씨・시부카와 씨 연합군의 공격으로 지쿠젠을 버리고 히젠으로 물러났다.[8]

2. 2. 오우치 가문과의 대립 심화

오닌의 난(応仁の乱) 이후, 오우치 마사히로(大内政弘)가 다시 기타큐슈(北九州)를 침공하면서 쇼니 마사스케는 열세에 몰렸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기간 쇼니 가문의 맹우였던 쓰시마국(対馬国)의 소 사다쿠니(宗貞国)마저 등을 돌렸다.[8]

마사히로의 아들 오우치 요시오키(義興) 대에 이르러서는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시부카와 다다시게(渋川尹繁)와 함께 막부로부터 마사스케 추토 명령을 받아 오우치-시부카와 연합군의 전면 공격을 받았다. 마사스케는 지쿠젠(筑前)을 버리고 히젠(肥前)으로 물러났으나, 집요한 추격 끝에 산하 고쿠진(国人) 다쿠 씨(多久氏)의 거성(居城)인 가지미네 성(梶峰城)까지 쫓겼다. 결국 다쿠 무네토키(多久宗時)의 배신으로 센쇼지(専称寺)에서 자결하였다.[8]

외아들 쇼니 다카스케(高経)는 마사스케와 함께 공격당해 죽었고, 셋째 아들 쇼니 스케모토(資元)가 히젠의 쇼니 씨 서류(庶流)인 요코타케 스케사다(横岳資貞)에게 의지하여 달아나면서 쇼니 가문은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8]

마사스케는 죽기 직전 "꽃잎이 지고 기다렸던 바람도 불지 않으니 호시절 오지 않는 봄날의 저녁"(花ぞ散る 思へば風の 科ならず 時至りぬる 春の夕暮)이라는 사세(辞世)의 노래를 읊었다고 한다.[9]

2. 3. 최후

무로마치 막부와 그 기관인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시부카와 씨(渋川氏), 그리고 이들을 배경으로 삼은 스오국(周防国)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 오우치 씨(大内氏)와 오랫동안 대립하던 쇼니 씨였으나, 오닌 원년(1467년)부터 시작된 오닌의 난(応仁の乱)에서 오우치가 서군에 서고 쇼니 노리요리 ・ 마사스케 부자는 동군의 호소카와 씨(細川氏)에 접근, 막부로 복귀하였다. 이듬해인 오닌 2년(1468년) 규슈에서 봉기한 아버지가 오우치 씨에게 패하고 전사, 마사스케가 가독을 이었다.

마사스케는 오우치 씨에게 빼앗긴 지쿠젠(筑前), 부젠국(豊前国)을 회복하고 경제적으로는 조선이나 과의 교역을 빈번하게 실시함으로써 이익을 얻었으며, 또한 훗날에는 히젠국(肥前国)의 규슈 지바 씨(九州千葉氏)의 내분을 틈타서 자신의 동생을 당주로 보내어 지바 다네스케(千葉胤資)라는 이름을 쓰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쇼니 씨를 일시적으로 중흥시켰다.

그러나 오랜 기간 쇼니 씨의 맹우였던 쓰시마국(対馬国)의 소 사다쿠니(宗貞国)의 이반을 허용해버렸고 또한 오닌의 난이 끝난 뒤에 오우치 마사히로(大内政弘)가 다시금 기타큐슈로의 침공을 시작해 열세에 몰렸으며, 마사히로의 아들 요시오키(義興)의 대에는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시부카와 다다시게(渋川尹繁)와 함께 막부로부터 마사스케 추토 명령을 얻은 오우치 씨 ・ 시부카와 씨 연합군의 전면 공격으로 지쿠젠을 버리고 히젠으로 물러났고, 집요한 추격 끝에 산하 고쿠진(国人) 다쿠 씨(多久氏)의 거성(居城)인 가지미네 성(梶峰城)에 거점을 두었으나, 다쿠 무네토키(多久宗時)의 배신으로 이곳에서도 쫓겨났으며 센쇼지(専称寺)에서 자해하였다.[8]

외아들 다카스케(高経)는 마사스케와 함께 공격당해 죽었고 셋째 아들 스케모토(資元)가 히젠의 쇼니 씨 서류(庶流)인 요코타케 스케사다(横岳資貞)를 의지해 달아났고 쇼니 씨는 겨우 존속할 수 있었다.

죽기 직전에 쇼니 마사스케는 사세(辞世)의 노래로 "꽃잎이 지고 기다렸던 바람도 불지 않으니 호시절 오지 않는 봄날의 저녁"(花ぞ散る 思へば風の 科ならず 時至りぬる 春の夕暮)라고 읊었다고 한다.[9]

3. 센쇼지의 쇼니 마사스케와 매화꽃 전설

쇼니 마사스케가 할복 자결한 센쇼지는 사가현 다쿠시에 있으며, 마사스케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사스케는 히젠(肥前)・지쿠젠(筑前)・부젠(豊前)과 이키(壱岐)・쓰시마(対馬)를 지배한 3전 2도의 태수(三前二島の太守)로 불렸고, 렌카(連歌)에 재능이 있어 '아침새의 쇼니 도노'(朝鳥の少弐どの)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졌다.

메이오 6년(1497년), 오우치 요시오키의 대군에 패하고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쫓겨난 마사스케는 히젠 하루키 성(晴気城)의 성주인 동생 치바 다네스케를 의지했다. 그러나 그곳도 위태로워 다네스케의 권유로 가지미네 성(梶峰城)으로 향했다.

가지미네 성주 다쿠 무네토키는 마사스케의 장인이었고, 마사스케는 아내 기쿄(桔梗)를 무네토키에게 맡기고 출정했었다. 그러나 무네토키는 이미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마사스케를 넘기라는 최후 통첩을 받은 상태였다. 마사스케는 기쿄와의 재회를 간청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인근 센쇼지(센소지)로 향했다.

센쇼지에서 마사스케는 사세구(사세의 노래)를 남기고, 우메보시(매실 장아찌) 씨앗을 땅에 던지며 "너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내 몸을 대신해서 싹을 틔우고 봄마다 꽃을 피워라"라고 중얼거린 뒤 자결했다. 향년 57세였다.

마사스케가 죽은 이듬해, 그 매화 씨앗에서 싹이 터 자랐고, 열매를 맺었는데 그 씨앗이 갈라져 있었다고 한다. 이를 '사네와레우메(核割れ梅, 씨앗 나뉜 매화)'라고 불렀으며, 현지에서는 '다네와레우메(たね割れ梅)'라고 부른다.

사세의 노래는 "꽃이 지네, 생각하면 바람의 탓이 아니고, 때가 이르렀네, 봄의 저녁"이다.

참조

[1] 서적 別本少弐系図
[2] 서적 富士町史 上巻 <中世>二 南北朝時代から室町時代前半 https://dl.ndl.go.jp[...]
[3] 웹사이트 歴史-専称寺ご案内|千年寺院 専称寺 https://senshoji.jp/[...] 2024-12-01
[4] 서적 『史料綜覧』第8編之909
[5] 서적 『北肥戦誌』
[6] 서적 『別本少弐系図』
[7] 기사 조선왕조실록 성종 1년(1470년) 기사
[8] 서적 『史料綜覧』第8編之909
[9] 서적 『北肥戦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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