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 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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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다 히토시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으로, 1887년 교토부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입성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러시아 혁명과 파리 강화 회의를 경험했으며, 터키 대사관 참사관을 거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외무성을 퇴관하고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자유주의적 정치 자세로 알려졌다. 전후에는 민주당을 결성하여 총재를 역임하고, 가타야마 데쓰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다. 1948년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으나 쇼와 전공 사건으로 인해 내각이 붕괴되었다. 그는 헌법 개정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일본 헌법 제9조에 대한 수정안을 제시하여 자위대 창설의 길을 열었으며, 저술 활동을 통해 외교 및 정치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1959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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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 히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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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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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芦田 均 (아시다 히토시) |
직책 | |
통치 기간 | |
재임 시작 | 1948년 3월 10일 |
재임 종료 | 1948년 10월 15일 |
국왕 | 쇼와 |
총독 | 더글러스 맥아더 |
부총리 | 니시오 스에히로 |
이전 총리 | 가타야마 데쓰 |
다음 총리 | 요시다 시게루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87년 11월 15일 |
출생지 | 후쿠치야마, 일본 |
사망일 | 1959년 6월 20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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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1955–1959) |
기타 정당 | 입헌정우회 (1945년 이전) |
모교 | 도쿄 제국대학교 |
경력 | |
이전 직업 | 주벨기에 일본 대사관 참사관 |
칭호 및 훈장 | |
칭호 | 종2위 |
훈장 | [[File:JPN Toka-sho BAR.svg|38px]]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학위 | 법학 박사 (도쿄 제국대학교, 1912년) |
가족 | |
배우자 | 아시다 스미 |
자녀 | 장녀 - 시모코베 미요 |
친족 (정치가) | 아버지 - 아시다 시카노스케 |
주요 경력 | |
내각 | 아시다 내각 |
취임일 | 1948년 3월 10일 |
퇴임일 | 1948년 10월 15일 |
원수 | 천황 |
원수 이름 | 쇼와 천황 |
부총리 | 가타야마 내각 |
취임일 | 1947년 6월 1일 |
퇴임일 | 1948년 3월 10일 |
외무대신 | 제67-68대 외무대신 |
내각 | 가타야마 내각, 아시다 내각 |
취임일 | 1947년 6월 1일 |
퇴임일 | 1948년 10월 15일 (1948년 3월 10일부터 총리 겸임) |
후생대신 | 제13대 후생대신 |
내각 | 시데하라 내각 |
취임일 | 1945년 10월 9일 |
퇴임일 | 1946년 5월 22일 |
중의원 의원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교토부 제3구) |
당선 횟수 | 11회 |
취임일 | 1932년 2월 21일 |
퇴임일 | 1959년 6월 20일 |
2. 초기 생애 및 외교관 경력
교토부 후쿠치야마시 출신인 아시다 히토시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2년에 외무성에 입성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11]
첫 근무지인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접했고, 1918년에 부임한 프랑스에서는 파리 강화 회의를 목격했다.[12] 1925년에는 1등 서기관으로서, 일토 간의 국교 수립에 따라 터키 이스탄불에 개설된 일본 대사관에 부임했다.[13] 1928년 10월부터 1929년 11월까지 초대 주 터키 대사인 오바타 요키치의 귀국에 따라 임시 대리 대사를 역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참사관으로 승진했다.[13] 터키에서 아시다는 "해협 문제"(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의 통항 제도) 및 발칸 제국 등에 대해 연구했으며, 두 해협의 통항 제도사와 당시 통항 제도였던 로잔 조약의 문제점을 정리한 학위 청구 논문 "국제법 및 국제정치에서 본 흑해 및 군부 해협의 지위"를 집필하여, 모교인 도쿄 제국대학에 제출하여 1929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14] 또한, 이 논문은 이듬해 '군부 해협 통항 제도사론'으로 출판되었다. 1930년부터는 주 벨기에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1932년 외무성에서 퇴관하고 귀국 후 정계로 전향했다.
2. 1. 출생과 가계
아시다 히토시는 교토부 후쿠치야마시에서 정치인이자 은행가인 아시다 시카노스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일본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노코 은행의 이사를 역임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주이자 촌장('''''나누시''')이었던 아시다 지자에몬이었다.[2]
그는 도쿄 제국대학에서 프랑스 민법을 공부했다. 졸업 후, 그는 20년 동안 일본 외무성에서 근무했다.
2. 2. 교육 과정
아시다 히토시는 정치인이자 은행가인 아시다 시카노스케의 둘째 아들로 교토부 후쿠치야마시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일본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노코 은행의 이사를 역임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지주이자 촌장(''나누시'')이었던 아시다 지자에몬이었다.[2]
도쿄 제국대학에서 프랑스 민법을 공부하고 졸업 후, 20년 동안 일본 외무성에서 근무했다.
2. 3. 외교관 활동
교토부 후쿠치야마시 출신인 아시다 히토시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2년에 외무성에 입성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11] 1931년 외교관 시절의 사진은 다음과 같다.첫 근무지인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접했고, 1918년에 부임한 프랑스에서는 파리 강화 회의를 목격했다.[12] 1925년에는 1등 서기관으로서, 일토 간의 국교 수립에 따라 터키 이스탄불에 개설된 일본 대사관에 부임했다.[13] 1928년 10월부터 1929년 11월까지 초대 주 터키 대사인 오바타 요키치의 귀국에 따라 임시 대리 대사를 역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참사관으로 승진했다.[13] 터키에서 아시다는 "해협 문제"(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의 통항 제도) 및 발칸 제국 등에 대해 연구했으며, 두 해협의 통항 제도사와 당시 통항 제도였던 로잔 조약의 문제점을 정리한 학위 청구 논문 "국제법 및 국제정치에서 본 흑해 및 군부 해협의 지위"를 집필하여, 모교인 도쿄 제국대학에 제출하여 1929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14] 또한, 이 논문은 이듬해 '군부 해협 통항 제도사론'으로 출판되었다. 1930년부터는 주 벨기에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1932년 외무성에서 퇴관하고 귀국 후 정계로 전향했다.
3. 정계 입문과 전전 활동
아시다 히토시는 1887년11월 15일 교토부아타다군 미야촌(후에 나카로쿠닌베촌을 거쳐 현재의 후쿠치야마시)에서 태어났다. 생가는 부유한 농가였다. 사회·민주·국민협동 3당 연립 내각의 파트너이자, 대학 시절 동급생이었던 가타야마 데쓰는 아시다의 사망 직후 중의원 본회의에서 행한 추도 연설에서 아시다가 정계에 입문하기까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아시다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2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이 되었다. 첫 근무지인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접했고, 1918년에 부임한 프랑스에서는 파리 강화 회의를 목격했다. 1925년에는 1등 서기관으로서, 일토 간의 국교 수립에 따라 터키 이스탄불에 개설된 일본 대사관[12]에 부임했다. 1928년 10월부터 1929년 11월까지 초대 주 터키 대사인 오바타 요키치의 귀국에 따라 임시 대리 대사를 역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참사관으로 승진했다[13]. 터키에서 아시다는 "해협 문제"(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의 통항 제도) 및 발칸 제국 등에 대해 연구했으며, 두 해협의 통항 제도사와 당시 통항 제도였던 로잔 조약의 문제점을 정리한 학위 청구 논문 "국제법 및 국제정치에서 본 흑해 및 군부 해협의 지위"를 집필하여, 모교인 도쿄 제국대학에 제출하여 1929년에 법학 박사[14]를 수여받았다. 또한, 이 논문은 이듬해 '군부 해협 통항 제도사론'으로 출판되었다. 1930년부터는 주 벨기에 대사관 근무를 했으며, 1932년에 퇴관하여 귀국 후 정계로 전향했다.
1932년 입헌정우회 공인으로 중의원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전전·전중을 통해 자유주의적인 정치 자세로 알려져 있으며, 사이토 다카오의 반군 연설 당시, 마키노 료조나 미야와키 초키치 등과 함께 제명에 반대 표를 던졌다. 정우회 해산 후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동교회에 입당했고, 1942년의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소위 "익찬 선거")에서는 비추천으로 당선되었다.
의회 밖에서는 언론인으로서도 활약했으며, 외교관 시절의 '군부 해협 통항 제도사론' 외에도, 정치가로 전향한 후에도 집필 활동을 계속하여 시국 및 외교에 관한 저서를 많이 발표했다. 정계 입문 후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재팬 타임스의 사장을 역임했으며, 다이아몬드사의 이시야마 켄키치 등과도 친교를 가졌다.
3. 1. 중의원 의원 당선
아시다 히토시는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세이유카이 소속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다.[3][4] 1939년 세이유카이가 분열된 후 하토야마 이치로의 "정통" 계열에 속했다.전후, 아시다는 새 자유당 소속으로 새 의회에서 당선되었으며, 이후 시데하라 기주로의 진보당과 합쳐 민주당을 결성하기 위해 탈당했다. 아시다는 신당의 총재로 선출되었고, 1947년 사회당 총리 가타야마 데쓰 하에서 외무대신이 되었다.
그는 또한 제국 헌법 개정안 위원회를 이끌었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개정된 일본국 헌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헌법보급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계획된 일본 헌법 제9조에 핵심적인 수정안을 만들어 자위대 창설을 가능하게 했다.[5]
3. 2. 언론 활동
아시다 히토시는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세이유카이 소속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다.[3] 1939년 세이유카이가 분열된 후에는 하토야마 이치로의 "정통" 계열에 속했다.[3]전후, 아시다는 자유당 소속으로 새 의회에서 당선되었으며, 이후 시데하라 기주로의 진보당과 합쳐 민주당을 결성하기 위해 탈당했다.[3] 아시다는 신당의 총재로 선출되었고, 1947년 사회당 총리 가타야마 데쓰 하에서 외무대신이 되었다.[3]
또한 제국 헌법 개정안 위원회를 이끌었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개정된 일본국 헌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헌법보급회의 회장을 역임했다.[3][4]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계획된 일본 헌법 제9조에 핵심적인 수정안을 만들어 자위대 창설을 가능하게 했다.[5]
4. 전후 정치 활동
교토부 후쿠치야마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2년에 외무성에 입성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2년 입헌정우회 공인으로 중의원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46년 헌법개정 특별 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패전 직후 일본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자유당의 결성에 참여했지만, 1948년 이누카이 다케루와 협력해 민주당을 결성하고 스스로 총재가 되었다. 가타야마 연립 내각에선 부총리 격의 외무 대신으로 지냈고, 가타야마 내각의 붕괴 후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1948년 3월, 아시다 내각이 발족했다. 아시다 내각에서는 전후 일본의 기초가 되는 많은 법률이 성립되었다. 새 헌법에 따른 형사소송법의 전면 개정이나 경찰 조직의 근본 개혁 (구 경찰법의 제정), 국가행정조직법과 그에 따른 중소기업청, 석탄청, 건설성, 해상보안청, 수산청, 경제조사청 등 각 행정청의 설치법, 교육위원회법, 일본학술회의법, 경찰관 직무집행법, 행정대집행법, 지방재정법, 검찰심사회법, 경범죄법, 풍영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시다 본인이 총리대신으로서 대응한 것은 인플레이션 대책과 노동 공세에 대한 대처였다. GHQ는 중도적인 아시다 정권에 호의적이었고, 이러한 과제를 지원했지만, 정권은 취약한 정권 기반과 야당 자유당으로부터의 공격에 고심을 계속했고, 독자적인 정책을 내놓을 여유는 부족했다. 아시다는 당시, 누가 담당하더라도 연합국의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일면의 진리이지만,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마찬가지로 점령 정책의 틀 안에 있으면서, 맥아더나, 종종 미국 정부와도 직접 대립하여 자신의 정책 실현에 노력했던 것과 같은 지도력을 갖지 못했다는 사정도 컸다.
전임자인 가타야마가 사회당 위원장이자 열렬한 크리스천이면서, 쇼와 천황의 호위에 마음을 썼던 것에 반해, 아시다는 "새 헌법 이후, 별로 폐하께서 내정 외교에 관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황실을 위해서도,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헌법에 기재된 대로, 천황을 국가 원수로가 아닌 어디까지나 상징으로 취급하는 것을 유념했다. 총리 취임 직후 아시다는, 이 이후 각료의 내주를 중단할 뜻을 상주했다. 아시다 자신은 외상 시절, 천황에게 상주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즈키 하지메 시종차장는 "폐하는 외교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계신다(중략) 외무대신이 내주에 보이지 않는가(중략) 보인다면 토요일이라도 좋다"라고, 당시 외무 사무차관이었던 오카자키 가쓰오에게 전했고, 아시다는 "임금님의 뜻"이라면 가야 한다고 판단하여 궁중에 참내했다.
그러나 아시다 내각은 쇼와전공 사건에 연루돼 불과 7개월 남짓의 단명 내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내각 장관 두 명이 쇼와 전력 스캔들로 부패 혐의를 받아 내각이 사퇴해야 했다. 그중 한 명은 무임소 국무대신 쿠루스 다케오였다.
아시다 내각은 약 반년 만에 니시오 헌금 문제와 쇼와 전공 사건으로 참담한 결말을 맞이했다. 니시오 헌금 문제에서는 파생되어 정당 창설 문제가 부상했고, 아시다 본인도 증인 소환을 받았다. 쇼와 전공 사건으로 1948년 10월에 아시다 내각이 총사퇴했으며, 아시다 본인도 수뢰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판결은 "돈을 받고 쇼와 전공에 편의를 봐주도록 구리스 오쿠라 대신에게 청탁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외무대신 아시다에게는 직무 권한이 없다"며 무죄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58년 형법 개정으로 알선수뢰죄가 신설되었다. 쇼와 전공 사건으로 사정 청취를 받은 사람은 약 2,000명, 체포자는 64명(현직 국회의원 10명 포함)이었다. 재판 결과는 유죄 2명뿐이었다.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세이유카이 소속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된 아시다 히토시는, 1939년 세이유카이가 분열된 후 하토야마 이치로의 "정통" 계열에 속했다. 전후, 아시다는 자유당 소속으로 새 의회에서 당선되었으며, 이후 시데하라 기주로의 진보당과 합쳐 민주당을 결성하기 위해 탈당했다. 아시다는 신당의 총재로 선출되었고, 1947년 가타야마 데쓰 사회당 총리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는 제국 헌법 개정안 위원회를 이끌었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개정된 일본국 헌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헌법보급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일본국 헌법 제9조에 핵심적인 수정, 이른바 "아시다 수정"을 가하여 자위대 창설의 길을 열었다. 중의원 제국헌법개정소위원회의 헌법 개정 초안 심의에서 이루어진 이 수정은 아시다의 시안 등이 중요한 초안이 되었으며, 이후 헌법 논의에서 중요한 논점이 되고 있다.
내각총리대신 임기를 마친 후, 아시다는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위상과 재무장에 집중했다. 그는 한국 전쟁 발발 후 일본에서 유사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국군 창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아시다는 또한 유엔군과 함께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자원 봉사자 그룹을 결성하는 아이디어를 장려했다. 1951년, 그는 헌법 9조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옹호하며 일본 전역에서 강연 투어를 진행했고, 이는 방어 목적으로 군대를 준비하는 것에 대한 제한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58년, 아시다는 부패 혐의와 관련된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다. 그는 1년 뒤 1959년에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4. 1. 일본 자유당 창당과 탈당
아시다 히토시는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세이유카이 소속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다.[3][4] 1939년 세이유카이가 분열된 후 하토야마 이치로의 "정통" 계열에 속했다.전후, 아시다는 1945년 10월 1일 아베 이소오 등과 함께 자유간화회를 결성하였고,[15] 새 자유당 소속으로 새 의회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시데하라 기주로의 진보당과 합쳐 민주당을 결성하기 위해 탈당했다.
4. 2. 민주당 창당과 총재 취임
아시다는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세이유카이 소속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다. 1939년 세이유카이가 분열된 후 하토야마 이치로의 "정통" 계열에 속했다.[3]전후, 아시다는 자유당 소속으로 새 의회에서 당선되었으며, 이후 시데하라 기주로의 진보당과 합쳐 민주당을 결성하기 위해 탈당했다. 아시다는 신당의 총재로 선출되었고, 1947년 사회당 총리 가타야마 데쓰 하에서 외무대신이 되었다.[3][4]
그는 또한 제국 헌법 개정안 위원회를 이끌었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개정된 일본국 헌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헌법보급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계획된 일본 헌법 제9조에 핵심적인 수정안을 만들어 자위대 창설을 가능하게 했다.[5]
4. 3. 아시다 내각 출범과 붕괴
교토부 후쿠치야마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2년에 외무성에 입성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2년 입헌정우회 공인으로 중의원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46년 헌법개정 특별 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패전 직후 일본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자유당의 결성에 참여했지만, 1948년 이누카이 다케루와 협력해 민주당을 결성하고 스스로 총재가 되었다. 가타야마 연립 내각에선 부총리 격의 외무 대신으로 지냈고, 가탸아마 내각의 붕괴 후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1948년 3월, 아시다 내각이 발족했다. 아시다 내각에서는 전후 일본의 기초가 되는 많은 법률이 성립되었다. 새 헌법에 따른 형사소송법의 전면 개정이나 경찰 조직의 근본 개혁 (구 경찰법의 제정), 국가행정조직법과 그에 따른 중소기업청, 석탄청, 건설성, 해상보안청, 수산청, 경제조사청 등 각 행정청의 설치법, 교육위원회법, 일본학술회의법, 경찰관 직무집행법, 행정대집행법, 지방재정법, 검찰심사회법, 경범죄법, 풍영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시다 본인이 총리대신으로서 대응한 것은 인플레이션 대책과 노동 공세에 대한 대처였다. GHQ는 중도적인 아시다 정권에 호의적이었고, 이러한 과제를 지원했지만, 정권은 취약한 정권 기반과 야당 자유당으로부터의 공격에 고심을 계속했고, 독자적인 정책을 내놓을 여유는 부족했다. 아시다는 당시, 누가 담당하더라도 연합국의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일면의 진리이지만,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가 마찬가지로 점령 정책의 틀 안에 있으면서, 맥아더나, 종종 미국 정부와도 직접 대립하여 자신의 정책 실현에 노력했던 것과 같은 지도력을 갖지 못했다는 사정도 컸다.
전임자인 가타야마가 사회당 위원장이자 열렬한 크리스천이면서, 쇼와 천황의 호위에 마음을 썼던 것에 반해, 아시다는 "새 헌법 이후, 별로 폐하께서 내정 외교에 관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황실을 위해서도,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헌법에 기재된 대로, 천황을 국가 원수로가 아닌 어디까지나 상징으로 취급하는 것을 유념했다. 총리 취임 직후 아시다는, 이 이후 각료의 내주를 중단할 뜻을 상주했다. 아시다 자신은 외상 시절, 천황에게 상주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즈키 하지메시종차장는 "폐하는 외교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계신다(중략) 외무대신이 내주에 보이지 않는가(중략) 보인다면 토요일이라도 좋다"라고, 당시 외무 사무차관이었던 오카자키 가쓰오에게 전했고, 아시다는 "임금님의 뜻"이라면 가야 한다고 판단하여 궁중에 참내했다.
그러나 아시다 내각은 쇼와전공 사건에 연루돼 불과 7개월 남짓의 단명 내각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그의 내각 장관 두 명이 쇼와 전력 스캔들로 부패 혐의를 받아 내각이 사퇴해야 했다.[6] 그중 한 명은 무임소 국무대신 쿠루스 다케오였다.[7] 1959년에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아시다 내각은 약 반년 만에 니시오 헌금 문제와 쇼와 전공 사건으로 참담한 결말을 맞이했다. 니시오 헌금 문제에서는 파생되어 정당 창설 문제가 부상했고, 아시다 본인도 증인 소환을 받았다. 쇼와 전공 사건으로 1948년 10월에 아시다 내각이 총사퇴했으며, 아시다 본인도 수뢰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판결은 "돈을 받고 쇼와 전공에 편의를 봐주도록 구리스 오쿠라 대신에게 청탁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외무대신 아시다에게는 직무 권한이 없다"며 무죄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58년 형법 개정으로 알선수뢰죄가 신설되었다. 쇼와 전공 사건으로 사정 청취를 받은 사람은 약 2,000명, 체포자는 64명(현직 국회의원 10명 포함)이었다. 재판 결과는 유죄 2명뿐이었다.
내각총리대신 임기를 마친 후, 아시다는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위상과 재무장에 집중했다.[8] 그는 한국 전쟁 발발 후 일본에서 유사한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국군 창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8] 아시다는 또한 유엔군과 함께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자원 봉사자 그룹을 결성하는 아이디어를 장려했다.[8] 1951년, 그는 헌법 9조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옹호하며 일본 전역에서 강연 투어를 진행했고, 이는 방어 목적으로 군대를 준비하는 것에 대한 제한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8]
1958년, 아시다는 부패 혐의와 관련된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다.[8] 그는 1년 뒤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
4. 4. 헌법 9조 수정 (아시다 수정)
1932년 중의원 선거에서 세이유카이 소속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된 아시다 히토시는, 1939년 세이유카이가 분열된 후 하토야마 이치로의 "정통" 계열에 속했다.[3][4] 전후, 아시다는 자유당 소속으로 새 의회에서 당선되었으며, 이후 시데하라 기주로의 진보당과 합쳐 민주당을 결성하기 위해 탈당했다. 아시다는 신당의 총재로 선출되었고, 1947년 가타야마 데쓰 사회당 총리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다.그는 제국 헌법 개정안 위원회를 이끌었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개정된 일본국 헌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헌법보급회의 회장을 역임했다.[3][4]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일본국 헌법 제9조에 핵심적인 수정, 이른바 "아시다 수정"을 가하여 자위대 창설의 길을 열었다.[5] 중의원 제국헌법개정소위원회의 헌법 개정 초안 심의에서 이루어진 이 수정은 아시다의 시안 등이 중요한 초안이 되었으며, 이후 헌법 논의에서 중요한 논점이 되고 있다.
5. 대한민국과의 관계 **(한국의 관점)**
5. 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
5. 2. 이승만과의 갈등
6. 만년과 사망
아시다 히토시는 쇼와전공 사건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한국 전쟁 발발 후 일본의 재무장과 국군 창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8] 또한 유엔군과 함께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자원 봉사자 그룹을 결성하는 아이디어를 장려했다.[8] 1951년에는 헌법 9조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옹호하며 일본 전역에서 강연 투어를 진행했고, 이는 방어 목적으로 군대를 준비하는 것에 대한 제한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8]
1955년 보수 합동에 참가하여 자유민주당 외교조사회장에 취임했다. 헝가리 봉기 당시에는 소련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일본 헝가리 구원회"를 조직했다. 만년의 약 10년은 사서를 저술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아시다 일기』는 점령기의 역사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쓰기 위한 비망록이었다. 1959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외교사』를 병상에서 구술 필기하여 완성했다.
1958년, 아시다는 부패 혐의와 관련된 모든 혐의에서 벗어났다.[8] 같은 해 6월 20일, 도쿄도 미나토구 시로카네 자택에서 향년 71세로 사망했다.[6] 중의원 의원 재임 중이었으며, 4일 후인 6월 24일에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가타야마 데쓰에 의해 추도 연설이 행해졌다. 지반은 야가키 센이치가 계승했다. 묘소는 요코하마시 총지사에 있다.
저서 『혁명 전야의 러시아』는 대화문을 구사하여 거의 소설과 같은 회고록으로, 일본 현역 정치인의 저작으로서는 매우 이색적이다. 가모시타 신이치는 『잊혀진 명문들』(분게이슌주, 1998)에서 2페이지 반이나 되는 인용 후에 "아, 이것은 꼭 안톤 체호프다. 일본에는 이런 문장을 쓰는 정치인도 있었다"고 평했다.
7. 평가와 유산
교토부 후쿠치야마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2년에 외무성에 입성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2년 입헌정우회 공인으로 중의원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46년 헌법개정 특별 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패전 직후 일본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자유당의 결성에 참여했지만, 1948년 이누카이 다케루와 협력해 민주당을 결성하고 스스로 총재가 되었다. 가타야마 연립 내각에선 부총리 격의 외무 대신으로 지냈고, 가탸아마 내각의 붕괴 후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아시다 내각은 쇼와전공 사건에 연루돼 불과 7개월 남짓의 단명 내각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1959년에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 미야노 스미 『마지막 리버럴리스트 아시다 히토시』 분게이슌주, 1987년
- 우에다 미와 『자유주의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가 아시다 히토시·기요자와 키요시·이시바시 탄잔』 요시카와코분칸〈역사문화 라이브러리〉, 2016년
- 야지마 히카루 『아시다 히토시와 일본 외교 동맹 외교에서 미일 동맹으로』 요시카와코분칸, 2019년
아시다 히토시는 쇼와전공 사건에 연루되어 내각이 7개월 만에 붕괴된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7. 1. 긍정적 평가
교토부 후쿠치야마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2년에 외무성에 입성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32년 입헌정우회 공인으로 중의원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46년 헌법개정 특별 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패전 직후 일본 정계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자유당의 결성에 참여했지만, 1948년 이누카이 다케루와 협력해 민주당을 결성하고 스스로 총재가 되었다. 가타야마 연립 내각에선 부총리 격의 외무 대신으로 지냈고, 가탸아마 내각의 붕괴 후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미야노 스미 『마지막 리버럴리스트 아시다 히토시』 분게이슌주, 1987년
- 우에다 미와 『자유주의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가 아시다 히토시·기요자와 키요시·이시바시 탄잔』 요시카와코분칸〈역사문화 라이브러리〉, 2016년
- 야지마 히카루 『아시다 히토시와 일본 외교 동맹 외교에서 미일 동맹으로』 요시카와코분칸, 2019년
7. 2. 부정적 평가
아시다 히토시는 쇼와전공 사건에 연루되어 내각이 7개월 만에 붕괴된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8. 저서
아시다 히토시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1923년에는 《파리 회의 후의 유럽 외교》를 통해 유럽 외교 정세를 분석했고, 1924년에는 《열강의 정전》과 《러시아 인상기》를 출간했다. 1930년대에는 《근대 세계 외교 문제 해설》, 《외교에 관한 질문》, 《태평양 문제》, 《국제 외교의 지식》 등 외교 문제에 대한 저술 활동을 활발히 했다. 또한 《세계 대전부터 전후의 유럽까지》, 《미국 참전부터 연맹 탈퇴까지》와 같은 최근 세계 외교사 시리즈를 통해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국제 정세를 분석했다.
1930년대 후반, 아시다 히토시는 《신흥 일본의 장래》, 《동아의 현세와 외교 국책》, 《위기는 유럽인가 극동인가》, 《전쟁은 언제 시작될까》 등의 저서를 통해 당시의 긴박한 국제 정세와 일본의 나아갈 길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1939년에는 《발칸》을 출간하여 발칸 반도의 정세를 분석했고, 1942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전사》를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개 과정을 다루었다.
전후에는 《신 헌법 해석》, 《혁명 전야의 러시아》, 《헌법 조사회의 발족에 즈음하여》, 《헌법 초안이 나오기까지 아울러 전쟁 포기의 의미》 등의 저서를 통해 일본 헌법과 관련된 논의에 참여했다. 1959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외교사》를 출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외교사를 정리했다.
그의 사후, 이와나미 서점에서 《아시다 히토시 일기》(전 7권)가 간행되었고, 하쿠쇼보에서 《아시다 히토시 일기 1905-1945》(전 5권)가 간행되었다. 또한, 그의 저서들은 서사 심수에서 개제 신편으로 재출간되었다.
9. 연보
- 1887년(메이지 20년): 교토부 아마다군 미야촌(현 후쿠치야마시 미야)에서 출생.
- 1904년(메이지 37년): 구제 효고현립 가시와바라 중학교(현 효고현립 가시와바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제 제1고등학교에 입학.
- 1907년(메이지 40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 불법학과에 입학.
- 1910년(메이지 43년): 제2차 『신사조』에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 소설 번역을 기고[16]
- 1912년 (다이쇼 원년):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입성.
- 1914년(다이쇼 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부임하여 1918년(다이쇼 7년) 1월까지 체류하며 러시아 혁명을 목격.
- 1932년 (쇼와 7년): 퇴관하여 입헌정우회 공인으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 1933년(쇼와 8년): 재팬 타임스 사장 취임 (1939년 사임)[17]
- 1939년(쇼와 14년): 정우회의 분열에 즈음하여 쿠하라 후사노스케와 하토야마 이치로 등과 함께 정통파에 속한다.
- 1941년(쇼와 16년): 동교회 결성에 참가.
- 1946년(쇼와 21년): 자유당에서 출마하여 당선. 제국 헌법 개정 소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아시다 수정 조항을 넣다.
- 1947년(쇼와 22년): 자유당에서 한 파를 이끌고 탈당, 일본 진보당과 함께 민주당을 결당하고 당 총재에 취임. 카타야마 테츠 내각의 외무 대신 취임.
- 1948년(쇼와 23년): 3월 10일에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지만, 쇼와 덴코 사건으로 인해 10월 5일에 총사직, 12월 7일 아시다 본인도 체포. 이후 민주당 야당파, 국민민주당, 개진당, 일본 민주당 (최고 위원)과 보수 방류 정당에 속한다.
- 1955년(쇼와 30년): 자유민주당 결성에 참가.
- 1957년(쇼와 32년): 중의원 의원 근속 25년의 표창을 받음.
- 1958년(쇼와 33년): 쇼와 덴코 사건의 무죄 판결이 확정.
- 1959년(쇼와 34년): 71세로 사망. 타니가키 센이치 (타니가키 사다카즈의 아버지)가 선거 지반을 계승하여 대의원이 되었다.
- 2002년 (헤이세이 14년) 5월 18일: 후쿠치야마시의 생가에 자료를 소장 전시하는 아시다 히토시 기념관이 개관.
10. 가족 관계
아시다 히토시는 요시다 시게루의 귀족 취미와 명문가 선호에 대항했지만[20], 농가 출신이라 해도 호농(아야베번의 대지주) 집안이었고, 아버지 시카노스케도 중의원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아시다는 스미 부인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21] 장녀 미요(1919년생)[22]는 시모카와베 겐지의 차남 시모카와베 미후미에게[21][23][24], 차녀 루리(1925년생)[22]는 대장성 관료 엔도 유타카에게 시집가[23] 사치, 치사, 삼로를 낳았다.[25] 장남 지타로(1922년생)[22]는 9세에 요절했고[21], 차남 토미(1924년생)[22]는 해상자위대에 들어갔다.[21] 딸로 야스코가 있다.[25]
토미의 아내는 외교관 동료 요시자와 세이지로의 차녀였으며, 요시자와 가문의 인맥을 통해 노무라 재벌 창업가와 친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아시다의 사위인 시모카와베 미후미의 형 시모카와베 마고이치는 시모카와베 목장 창업자이며[23][24], 그의 차녀 마키코는 독일 문학자 오자와 토시오와 결혼했다.[23][24][26] 오자와 켄지는 오자와 토시오, 마키코 부부의 차남이다.[26] 오자와 켄지를 통해 여러 명문가와 연결된다.
오자와 세이지는 오자와 토시오의 동생으로, 유명한 지휘자이다. 그의 전 부인 에도 쿄코를 통해 미쓰이 부동산과 연관이 있다. 시모카와베 미후미·미요 부부의 장남 시모카와베 모토하루는 신도 에이이치와 함께 『아시다 히토시 일기』 편찬에 참여했다.[21] 시모카와베 모토하루의 동생 시모카와베 세이조는 음악 프로듀서가 되었고[24], 다른 형제로는 시로가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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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系図」と「お屋敷」で読み解く歴代総理大臣 昭和・平成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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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集は金森徳次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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