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렌스크 전투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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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몰렌스크 전투 (1941년)는 1941년 7월부터 9월까지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환이었다. 독일군은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기 위해 드네프르 강을 건너 소련군을 포위하려 했고, 소련군은 이에 맞서 반격 작전을 펼쳤다. 전투 결과 독일군은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소련군을 대규모로 포위했지만, 기갑 전력의 소모가 컸다. 이 전투는 독일군 최고 사령부 내의 전략적 갈등을 심화시켰고, 모스크바 공세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소련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 독일군의 전격전을 늦추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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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투 (194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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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명칭 | 스몰렌스크 전투 (1941년) |
별칭 | 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
독일어 명칭 | Kesselschlacht bei Smolensk (스몰렌스크 포위전) |
러시아어 명칭 | Смолен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оборони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스몰렌스크 전략 방어 작전) |
일본어 명칭 | スモレンスクの戦い (1941年) (스모렌스쿠노 타타카이 (1941넨)) |
한국어 명칭 | 스몰렌스크 전투 (1941년) |
시기 | 1941년 7월 8일 – 7월 31일 (독일사 기준) |
장소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스몰렌스크 인근, 소비에트 연방 |
좌표 | 54°46′58″N 32°02′43″E |
결과 | 독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독일군 지휘관 | 페도르 폰 보크 헤르만 호트 하인츠 구데리안 아돌프 슈트라우스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 |
소련군 지휘관 | 세묜 티모셴코 표도르 쿠즈네초프 안드레이 예료멘코 이반 고르바초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병력 규모 | |
독일군 병력 | 430,000명 |
독일군 장비 | 전차 1,000대 항공기 1,500기 총포 및 박격포 6,600문 |
소련군 초기 병력 (7월 10일 기준) | 581,600명 또는 883,000명 |
소련군 장비 | 전차 1,545대 총 6,000문 |
소련군 총 병력 | 1,991,000명 |
사상자 규모 | |
독일군 사상자 (7월 10일 – 9월 10일) | ~115,500명 (전사, 부상, 실종) |
독일군 사상자 (7월 21일 – 9월 10일) | 전사: 29,650명 부상: 100,327명 실종: 5,682명 |
독일군 장비 손실 | 전차 214대 파괴 |
소련군 사상자 (서방 추정) | 724,000명 전사 및 부상 (포로 565,000명 포함), 274,000명 부상, 총 998,000명 |
소련군 사상자 (공식 소련 자료) | 759,974명 부상 또는 사망 |
소련군 피해 | 복구 불가능한 손실: 486,171명 (전사, 실종, 포로) 부상: 273,803명 |
소련군 장비 손실 | 전차 및 자주포 1,348대 파괴 항공기 903기 파괴 총 3,120문 파괴 |
관련 정보 | |
관련 전투 | Axis-Soviet War 캠페인 상자 Barbarossa 캠페인 상자 |
2. 배경과 계획
1941년 6월 22일, 추축국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다. 작전 초기 단계에서 독일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소련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많은 이점을 얻었다. 전쟁 시작 3주 후, 독일군은 다우가바강과 드네프르강까지 전진했다.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주요 전선군인 중앙 집단군은 페도르 폰 보크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스몰렌스크는 수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독일군의 계획은 2 기갑 군단(나중에 2 기갑군)이 드네프르 강을 건너 스몰렌스크 남쪽으로 전진하는 동안 3 기갑 군단(나중에 3 기갑군)이 북쪽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것이었다.[21]
1941년 7월 3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조국 전쟁이라 칭한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한 반격이 시작된 날, 독일군 보병 부대가 기갑 부대와 합류하여 동쪽으로 진격을 재개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길이 진창이 되어 진격에 어려움을 겪었고, 붉은 군대는 방어를 강화하며 다리를 폭파하고 지뢰를 매설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늦췄다. 이 지연은 소련군에게 대규모 반격을 조직할 시간을 주었다.
초기 패배 이후, 소련군은 재정비하고 더 많은 보완을 위해 자체적으로 노력했다. 소련군의 새로운 방어선은 스몰렌스크 주변에 구축되었다. 스탈린은 세묜 티모셴코에게 이 군들의 지휘를 맡겼고, 예비 군대 5개 군을 티모셴코에게 지휘 가능하게 했다. 이 군들은 독일의 공세를 무디게 하는 일련의 반격 공세 작전을 실시했다. 독일 최고 사령부는 소련군이 전장에서 발견될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21]
독일군은 다우가바강-드네프르강의 스탈린 선 요새를 따라 뻗어 있었다. 소련 방어군은 서부 전선의 13 군, 소련 최고 사령부(스탑스카) 예비군인 20 군, 21 군, 22 군이 있었다. 또 다른 병력인 19 군은 비쳅스크에 있었으며, 16 군이 스몰렌스크에 도착할 때까지 지연시키는 역할을 했다.[23]
1941년 7월 3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전투를 나치 독일의 침입에 대한 반격, 즉 대조국 전쟁이라고 부른 날, 독일군 보병 부대가 기갑 부대와 합류하여 동쪽으로 진격을 재개했다. 주력 기갑 부대는 1주일간 정지했으며, 공격이 재개된 7월 초에는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인해 길이 진창이 되어 군대를 진격시키는 데 어려움이 따랐고, 몇 시간씩 정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사이에 붉은 군대는 방어를 강화했고, 많은 다리가 폭파되었다. 또한, 붉은 군대는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많은 지뢰를 매설했고, 그 때문에 독일군은 극히 제한된 길을 진격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연은 소련 붉은 군 기갑 부대에 의한 대규모 반격을 조직할 시간을 제공하게 되었다.
3. 작전
독일 중앙집단군의 목적은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인 스몰렌스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향하는 드네프르강과 서드비나강 부근은 소련 붉은 군대의 방어선인 스탈린 선의 방어 범위 내에 있었다. 민스크 패배 후, 파블로프가 해임되고 안드레이 예료멘코 중장이 서부 전선군 사령관이 되었다. 7월 4일, 국방인민위원 티모셴코 원수가 서부 전선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스타프카는 독일군의 드네프르강 도하를 막기 위해 레펠 ~ 보리소프 ~ 보브루이스크 간의 반격을 명령했다. 7월 6일, 소련 붉은 군 제20군 소속 제7, 제5기계화군단은 전차 2000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독일 공군의 항공 지원을 받아 반격하여, 3일간의 전투에서 2개 소련 붉은 군 기계화군단은 사실상 괴멸했다.[22]
7월 10일,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이 드네프르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시작했고, 제3기갑집단은 비테브스크를 점령하고 벨리키예 루키 공략을 목표로 북상했다. 7월 11일, 제3기갑집단 제7기갑사단이 비테브스크 방어선을 돌파하자, 스몰렌스크 북방을 동진했다. 제2기갑집단은 7월 13일에 모길료프를 포위하고, 7월 27일 모길료프는 함락되었다.
7월 13일, 구데리안은 스몰렌스크 공략을 명령했다. 7월 15일부터 스몰렌스크에서 처절한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7월 16일 밤에 시의 거의 전역이 점령되었다.
제3기갑집단 제39기갑군단은 스몰렌스크 북방의 야르체보를 점령하고, 스몰렌스크-모스크바 간의 자동차 도로와 철도를 단절시켰다. 스몰렌스크 서방의 3개 군(제16군·제19군·제20군)은 포위 위기에 직면했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로의 진격로 확보를 위해 옐냐와 도로고부지 공략을 명령했다. 스몰렌스크와 야르체보 사이에는 폭 50km의 "회랑"이 열렸고, 티모셴코 원수는 이 "회랑"을 통해 포위된 3개 군을 구출하려 했다. 7월 17일, 소련군은 총반격을 시작했고, 7월 20일 로코소프스키 기동집단이 야르체보를 탈환했다. 7월 24일, 고로도비코프 기동집단이 제2기갑집단에 대해 반격을 가하여 제2기갑집단과 제2군의 후방 보급선을 위협했다. 서부 전선군의 반격으로 10만 명의 장병이 탈출했다.
7월 29일, 제3기갑집단과 제2기갑집단이 스몰렌스크와 도로고부지의 중간 지점에서 연결되어 10개 사단의 붉은 군이 포위되었다. 티모셴코 원수는 탈출을 명령했지만 8월 4일까지 제16군과 제20군의 대부분의 장병이 섬멸되었다. 붉은 군 제21군도 제24기갑군단에 의해 괴멸되고 8월 5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스몰렌스크 회전의 종결과 승리를 선언했다.
3. 1. 독일군의 포위 작전과 소련군의 초기 반격 (1941년 7월 10일 - 8월 10일)
1941년 6월 22일, 추축국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초기 3주간 독일군은 드비나 강과 드네프르 강에 도달했고, 모스크바를 목표로 하는 중앙 집단군(페도르 폰 보크)은 스몰렌스크를 포위하려 했다. 제2 기갑 집단은 남쪽에서, 제3 기갑 집단은 북쪽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계획이었다.
초기 패배 이후, 붉은 군대는 세묜 티모셴코 원수 지휘 하에 스몰렌스크 주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독일 최고 사령부(OKW)는 소련군의 증강을 알지 못했다.
드네프르 강과 드비나 강을 따라 스탈린 선 요새가 있었고, 제13군, 제20군, 제21군, 제22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제19군은 비텝스크에서, 제16군은 스몰렌스크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소련 역사에서 스몰렌스크 전투(1941년 7월 10일 – 9월 10일)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OKH)는 스몰렌스크 주변의 다음 작전을 나열한다.
독일의 공격 전에, 소련군은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7월 6일, 제7 및 제5기계화군은 레펠 근처에서 약 1,500대의 전차로 공격했으나, 독일 제7기갑사단의 대전차 방어선에 의해 사실상 전멸했다.[1]
7월 10일,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은 드네프르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시작, 제13군을 휩쓸었다. 7월 13일, 구데리안은 모길레프를 지나 소련군을 포위했고, 제29자동차화사단은 스몰렌스크에서 18km 거리에 있었다. 제3기갑군은 비텝스크를 위협하며, 제16군, 제19군, 제20군은 포위될 위기에 놓였다. 7월 11일부터 소련군은 반격을 시도했다. 제19군과 제20군은 비텝스크를, 제21군과 제3군은 보브루이스크 근처에서 제2기갑군의 남쪽 측면을 공격했다.[2]
다른 소련군도 독일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전선에서 반격했다. 소련군의 공격은 독일군의 속도를 늦췄지만, 독일군은 공세를 계속했다.[3]
호트의 제3기갑군은 폴로츠크와 비텝스크를 점령했다. 제20기갑사단은 7월 15일 야르체보에 도달했다. 제29자동차화사단은 스몰렌스크로 진격, 시가전을 벌였다. 구데리안은 제10기갑사단을 데스나 강으로 보내 옐냐에 교두보를 구축했고, 이곳은 옐냐 공세의 중심지가 되었다.[4]
7월 14일 총통 지령 33에 따라, Wehrmacht의 주된 노력은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변경되었다.[5]
7월 27일, 보크는 노비 보리소프에서 회담을 열었고, 발터 폰 브라우히치 사령관은 총통 지령 33을 엄격히 준수하라고 지시했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의 계획에 반대했고, 호트, 보크와 공모하여 지령 33의 "실행을 지연"시켰다. 구데리안은 8월 1일에 로슬라블-노보지브코프 공세 작전 계획을 세웠다.[6]
북쪽에서 제3기갑군은 느리게 이동했다. 7월 18일, 두 기갑군이 16km 이내로 접근했다.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는 제7기갑사단의 공격을 막고 상황을 안정시켰다. 열린 틈새는 소련군이 탈출하는 데 사용되었다.[7]
소련군은 제29군, 제30군, 제28군, 제24군을 스몰렌스크 주변 지역으로 이전했다. 이 부대는 7월 21일부터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소련군의 형편없는 조정과 군수 지원으로 인해 독일군은 포위를 계속 좁힐 수 있었다. 소련군의 공격은 7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8]
7월 27일,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동쪽의 포켓을 연결, 제16군, 제19군, 제20군을 포위했다. 제20군은 며칠 후 포위망을 탈출하려 노력했다. 8월 5일, 폰 보크는 309,0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보고했다. 이 숫자는 나중에 350,000명으로 증가했다. 포위된 제16군과 제20군에서 50,000명 정도만 8월 7일까지 탈출했다.[9]
독일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인 스몰렌스크를 점령하려 했지만, 드네프르강과 서드비나강 부근은 소련 붉은 군대의 방어선, 스탈린 선의 방어 범위 내에 있었다. 이를 방어하는 소련 붉은 군대는 서부 방면군 소속 제13군과 소련 붉은 군대 최고 사령부 예비 전력의 제16군, 제19군, 제20군, 제21군, 제22군이었다. 민스크의 패배로 파블로프가 해임된 후, 안드레이 예료멘코 중장이 서부 전선군 사령관이 되었다. 예료멘코 중장은 7월 2일에 제4군과 제13군에게 베레지나강 서안에서의 퇴각을 명령하고 보브루이스크 탈환 준비를 제17기계화군단에 명령했다. 7월 4일, 국방인민위원 티모셴코 원수가 서부 전선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자신이 서부 전선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이미 제2기갑집단이 보브루이스크와 스비스로치, 보리소프를 점령하고 베레지나강의 교량을 확보했기 때문에, 티모셴코는 예료멘코의 방침을 지속하여 보브루이스크 탈환 준비를 갖추었다.
7월 1일 구데리안은 제47기갑군단을 보리소프로 파견했지만 제4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가 반대하여 구데리안은 명령을 철회했다. 그러나 제17기갑사단의 일부가 명령을 무시하고 보리소프로 향했기 때문에 클루게는 구데리안을 제4군 사령부로 불러 질책했다. 히틀러는 기갑 부대를 통솔하기 위해 7월 3일에 제2·제3기갑집단을 제4군 사령부의 지휘하에 두고, 제4군 사령부를 제4기갑군 사령부로 개편하여 제4군의 전력은 제2군에 편입되었다.
스타프카는 독일군의 드네프르강 도하를 막기 위해 서부 전선군 사령부에 레펠 ~ 보리소프 ~ 보브루이스크 간의 반격을 명령했다. 7월 6일, 소련 붉은 군 제20군 소속 제7, 제5기계화군단은 전차 2000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독일 공군의 항공 지원을 받아 반격하여, 3일간의 전투에서 2개 소련 붉은 군 기계화군단은 사실상 괴멸했다. 7월 10일, 제3기갑집단 제39기갑군단의 제20기갑사단이 서드비나강을 건너, 교통의 요충지 비테브스크를 점령하고, 서드비나강 서안에 있는 제57기갑군단은 폴로츠크에서 북방집단군과 대치하는 제22군과 제27군의 배후를 치기 위해, 벨리키예 루키 공략을 목표로 북상을 시작했다. 제57기갑군단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제3기갑집단은 실질적으로 1개 기갑군단의 전력으로 동진을 시작, 스몰렌스크의 배후로 돌아 제2기갑집단과의 합류를 목표로 했다. 7월 11일, 제3기갑집단 제39기갑군단의 제7기갑사단이 붉은 군 제19군의 제25저격군단이 지키는 비테브스크 방어선을 돌파하자, 스몰렌스크 북방을 동진했다. 제2기갑집단은 7월 10일에 드네프르강 도하를 시작하여 7월 13일에 제46기갑군단이 드네프르강변의 모길료프 북쪽, 제24기갑군단이 스타리 부이호프에서 드네프르강을 건너 붉은 군 제13군의 제61저격군단(바쿠닌 소장)과 제20기계화군단(니키틴 소장)을 포위했다. 모길료프에서 포위된 제61저격군단과 제20기계화군단은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2주에 걸쳐 저항을 계속했지만, 전멸하고 7월 27일에 모길료프는 함락되었다.
7월 13일, 구데리안은 제29자동차화보병사단에 제18기갑사단의 지원을 시켜 스몰렌스크 공략을 명령했다. 스몰렌스크 시내는 붉은 군 제16군이 노동자 의용군과 NKVD 직원, 민병과 함께 방어를 굳히고 서부 전선군 사령부는 제16군 사령부에 사수를 명령했다. 7월 15일부터 스몰렌스크에서 처절한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7월 16일 밤에 시의 거의 전역이 점령되었다.
한편 동진을 계속하는 제3기갑집단 제39기갑군단은 스몰렌스크 북방의 야르체보를 점령하고, 스몰렌스크-모스크바 간의 자동차 도로와 철도를 단절시켰다. 스몰렌스크 서방에서 방어전을 계속하고 있던 3개 군(제16군·제19군·제20군)은 새로운 포위망에 갇히는 위기에 직면했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로의 진격로 확보를 위해 제46기갑군단에게 동쪽의 옐냐와 도로고부지 공략을 명령했다. 제46기갑군단의 동진으로 스몰렌스크와 야르체보 사이에는 폭 50킬로미터의 "회랑"이 열렸다. 서부 전선군 사령관 티모셴코 원수는 이 "회랑"을 사용하여 포위되고 있는 3개 군을 구출하려고 생각했다. 7월 17일 서부 전선군의 후방에 전개하는 6개 군(제24군·제28군·제29군·제30군·제31군·제32군)으로 임시 편성된 기동집단 그룹이 투입되어 중앙집단군에 대한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7월 20일 "회랑" 확보를 위해 로코소프스키 기동집단(제38저격사단과 제101전차사단)이 야르체보의 제3기갑집단을 후퇴시키고, 야르체보를 탈환했다. 7월 24일, 고로도비코프 기동집단이 제2기갑집단에 대해 로가체프 남쪽에서 보브루이스크를 향해 반격을 가하여 제2기갑집단과 제2군의 후방 보급선을 위협했다. 서부 전선군의 반격은 공세를 위해 넓어져 있던 중앙집단군의 포위망을 뚫고, 확보한 "회랑"에서 3개 군(제16군·제19군·제20군) 중 제19군을 중심으로 하는 10만 명의 장병이 탈출했다.
7월 29일, 제3기갑집단(제39기갑군단의 제20자동차화보병사단)과 제2기갑집단(제47기갑군단의 제17기갑사단)이, 스몰렌스크와 도로고부지의 중간 지점에서 마침내 연결되어 10개 사단의 붉은 군이 포위되었다. 티모셴코 원수는 탈출을 명령했지만 8월 4일까지 제16군과 제20군의 대부분의 장병이 섬멸되었다. 반격하고 있던 붉은 군 제21군도 제24기갑군단에 의해 괴멸되고 8월 5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스몰렌스크 회전의 종결과 승리를 선언했다.
붉은 군에서의 스몰렌스크 전투는 독일군의 공격과 협격 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몇 단계로 나뉘어 있었다.3. 2. 독일군의 측면 공세와 소련군의 추가 반격 (1941년 8월 11일 - 9월 10일)
소련군은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의 전선을 복구하고 포위된 군대의 일부를 구출한 것에 만족했다.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여, 8월에는 두 번의 주요 공세(1941년 8월 6일~24일, 8월 29일~9월 12일)가 있었다.
8월 6일부터 24일까지의 첫 번째 소련 공세는 독일의 진격을 방해하고 포위된 소련군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붉은 군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기세를 늦추는 데 성공했다.
8월 29일부터 9월 12일까지의 두 번째 공세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한 소련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소련 최고사령부(스타프카)는 독일의 약점을 이용하고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로 결심했다. 소련의 지속적인 저항과 반격은 독일군이 병력과 자원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강요했으며, 이는 그들의 작전 능력을 더욱 압박했다.
소련은 진전을 이루어 독일군을 밀어냈지만, 전진 속도는 다소 느렸다. 주된 이유는 독일 방어의 질이었다. 소련 소규모 부대 전술은 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병력이 줄어든 중대에서 시행되었다. 야간 작전으로 전환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고, 소련군은 적의 위치에 접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근접 전투에서 독일군을 밀어낼 수 있었다. 독일군 위치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기 위한 은밀한 이동, 위치로의 조용한 질주, 그리고 소총 사격과 총검 공격을 포함한 교전이 이루어졌다.
독일군 측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폰 보크는 전투가 끝났다고 믿었고, 휴식과 보충 후 중앙 집단군의 병력은 모스크바를 향한 성공적인 공세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키예프 근처의 소련 남서부 전선의 완강한 방어와 모스크바 방향에서 게오르기 주코프와 세묜 티모셴코의 소련군의 증가하는 저항에 몰두했다. 반면에 하인츠 구데리안이 로슬라블에서 중앙 집단군의 우익에서 승리하면서 남쪽으로 공격하여 키예프 근처의 소련군 포위를 할 가능성이 열렸다.
스몰렌스크 근처의 "가마솥"이 제거된 다음 달에 폰 보크의 군대는 중앙에서 방어하고 측면에서 제한된 병력으로 공격했다. 남쪽에서는 구데리안이 고멜과 크리체프 근처에서 승리했고, 북쪽에서는 게오르크 슈투메 집단이 벨리키예 루키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안드레아폴까지 진격했다. 대부분의 소련군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격퇴되었지만, 독일군은 옐냐 근처의 돌출부에서 철수해야 했다.
4. 결과 및 영향
스몰렌스크 전투는 바르바로사 작전 중 붉은 군대가 대패한 전투 중 하나이지만, 추축국의 승리는 전략적 의미가 없는 승리였다. 처음으로 소련군은 전선군에 형성된 대형 병력을 반격함으로써 방어선을 구현하려 노력했고, 주요 전투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저항 증가는 전격전이 모스크바를 향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전투는 독일 최고 사령부와 정치인들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28][29][30]
독일 최고 사령관인 프란츠 할더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전선 사령관 폰 보크, 호트, 하인츠 구데리안은 독일 군사력의 모스크바 집중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모스크바의 전략적 중요성 부족을 지적하며 우크라이나, 도네츠 분지, 코카서스 등 경제적 목표를 점령하여 소련군의 전술적 효과를 약화시키자는 의견을 지지했다. 이 결과 독일군의 공세는 분열되어 키예프 전투와 우만 전투 등 남부에 전투가 집중되었다. 비록 이 전투는 독일군이 승리했지만, 소련군이 모스크바로 집중할 인력, 자재를 집중하여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게 되었다.[28][29][30]
스몰렌스크 포위전이 8월 5일에 종료된 후, 양측은 다른 결론을 내렸다. 소련군은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의 전선을 복구하고 포위된 군대의 일부를 구출한 것에 만족했다.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 달에는 두 번의 주요 소련 공세 (1941년 8월 6일~24일, 8월 29일~9월 12일)가 있었다.
스몰렌스크 전투는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명 바르바로사 초기 단계에서 결정적인 교전이었다. 이 전투는 국방군의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붉은 군대의 격렬한 저항을 강조했다. 양측 모두에게 상당한 사상자를 냈지만, 소련군은 재편성하여 반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을 전략적 성공으로 보았다. 독일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전투는 대규모 포위 작전을 수행하여 상당수의 소련군과 물자를 포획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소련의 완강한 방어로 인해 발생한 지연은 전략적 의미를 지녔다. 스몰렌스크에서 소모된 시간과 자원은 모스크바를 향한 독일의 진격을 지연시켰고, 이는 겨울이 오기 전에 소련 수도를 점령하는 데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스몰렌스크 전투와 그 이후의 소련 공세는 붉은 군대의 회복력과 결의를 강조했다. 독일은 상당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략적 결과는 독일의 시간표를 지연시키고 결국 소련의 반격을 위한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독일군 측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폰 보크는 전투가 끝났다고 믿었고, 휴식과 보충 후 중앙 집단군의 병력은 모스크바를 향한 성공적인 공세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키예프 근처의 소련 남서부 전선의 완강한 방어와 모스크바 방향에서 게오르기 주코프와 세묜 티모셴코의 소련군의 증가하는 저항에 몰두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이 로슬라블에서 중앙 집단군의 우익에서 승리하면서 남쪽으로 공격하여 키예프 근처의 소련군 포위를 할 가능성이 열렸다. 점차적으로 OKH는 히틀러의 의견에 기울었다. 그러나 보크도 히틀러도 모스크바에 대한 즉각적인 공세를 계획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소련의 공격을 격퇴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병력이 지쳐갔다.
1941년 스몰렌스크 전투(1941년 7월 10일 - 9월 10일)의 공식적인 소련군 손실 데이터는 1993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리 F. 크리보셰예프가 이끄는 저자팀의 연구에 따르면,[9] 4개의 "전선"과 소련 Пинская военная флотилия|핀스크 해군 소함대ru의 손실은 총 759,947명으로, 세부 내역은 다음과 같다.
- 486,171명 (사망, 실종 및 포로)
- 273,803명 부상
독일군은 이 기간 동안 일부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수의 포로를 보고했다.
- 스몰렌스크 근처의 포위망 최종 정리 후 350,000명 (로가체프 전투 및 모길레프 전투 포함)
- 로슬라블 근처에서 카찰로프 부대 격멸 후 38,561명
- 크리체프와 고멜 전투에서 제2군에 의해 78,000명 포로
- 크리체프와 고멜 사이에서 제2기갑집단의 제24 기갑군단에 의해 16,000명 포로
- 벨리키예 루키 근처의 슈투메 부대에 의해 34,000명 포로
따라서, 총 500,000명 이상의 포로가 보고되었다.
동부 전선 전쟁의 유명한 서방 연구자인 나이젤 아스키는 1941-1945년 소련군 손실에 대한 연구에서 소련 문서와 기록 보관소를 분석하여 스몰렌스크 1차 전투에서의 공식적인 소련군 손실 데이터가 크게 과소평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 사상자는 100만 명에 달하며, 여기에는 565,000명의 포로가 포함된다.[10]
러시아 기록 보관소의 한 문서에 따르면 독일 측의 손실은 101,000명에 불과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글란츠는 이 문서에서 제9군의 사망자 수가 분명히 너무 적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의견으로는 이 숫자가 7천 명 더 높아야 한다. 알려진 독일 문서를 기반으로 그가 추정한 7월 10일 - 9월 10일 기간의 중앙집단군의 인적 손실은 약 115,500명 사망 및 부상이다.
전투 동안 독일군은 스몰렌스크주 위원회 문서고의 소련 공산당을 점령했으며, 1917년부터 1941년까지의 지역 역사에 대한 방대한 양의 문서를 확보했다.[11] 독일군은 이 문서를 소련의 탄압에 대한 선전에 사용했고 독일로 가져갔다.
스몰렌스크 점령 직후, 독일군은 모든 유대인 주민들을 체포하여 지역 및 지역 게토에 가두었고, 이후에는 학살했다. 그리고 소련군이 2년 후에 도시를 해방할 때까지 무조건적이고 지속적인 계엄령이 내려졌다.[7]
모스크바 공략을 우선시하려는 구데리안과, 적군 야전군의 섬멸을 우선시하려는 호트의 대립으로 인해, 소련 적군 병사 20만 명이 회랑에서 탈출했다. 그 결과, 독일 국방군은 포위 섬멸 작전에 실패하여 적군 야전 부대의 동방 탈출을 허용하게 되었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 공략을 희망했지만, 히틀러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혀 소련을 격파하려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첫 번째 목표인 우크라이나와 레닌그라드의 탈취에 희망을 걸고, 중앙군 집단의 기갑 부대를 북방군 집단과 남방군 집단으로 각각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북쪽에서 레닌그라드를 신속하게 포위하는 것, 남쪽에서 곡창 지대와 유전 지대를 점령하는 것을 의미했다. 스몰렌스크 시 전체는 이 전투로 인해 거의 파괴되었다.
1985년, 스몰렌스크는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다.
독일군은 대전과를 거두었지만, 포위전의 주역인 기갑 전력은 격심한 소모를 겪었다. 1941년 7월 말 시점에서 제2기갑집단의 전차 가동률은 29%로, 제3기갑집단의 가동률은 42%까지 저하되었다.[14]
독소전 연구가 스토엘은 "소련군을 함정에 빠뜨려 격파하고, 공장과 군사 섹터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갑 부대가 필수였다.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기갑 부대가 허용치를 넘는 손해를 입은 시점에서 독일은 승기를 잃었다."라고 말했다.[15]
5. 평가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주력 부대인 기갑 전력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941년 7월 말, 제2기갑집단의 전차 가동률은 29%였고, 제3기갑집단의 전차 가동률은 42%로 떨어졌다.[14]
독소전 연구가 스토엘은 "소련군을 함정에 빠뜨려 격파하고, 공장과 군사 시설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갑 부대가 필수적이었다.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기갑 부대가 큰 손실을 입으면서 독일은 승기를 잃었다. 독일군의 패배 원인은 겨울 추위나 전투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소련을 격파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독일이 믿었던 날카로운 칼(기갑 부대)은 러시아의 도끼와 싸우면서 무뎌졌고, 결정적인 공격을 가할 힘을 잃었다.[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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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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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2sta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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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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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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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Case 67. Brief chronicle of battles on the Soviet-German and Western fro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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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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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ennoe izdatelst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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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oviet Casualties and Losses During Operation Barbarossa, and from 1942 to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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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
서적
Smolensk Under the Nazis: Everyday Life in Occupied Russia
Boydell & Brewer
2013
[12]
간행물
[1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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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nwa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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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ドイツ軍事史――その虚像と実像
作品社
[15]
서적
ドイツ軍事史――その虚像と実像
作品社
[16]
간행물
[17]
간행물
Chapter V – Battle of Smolensk: 10 July – 10 September
[18]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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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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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21]
간행물
[2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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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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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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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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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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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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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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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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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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